-
-
나를 돌보지 않는 나에게 - 정여울의 심리테라피
정여울 지음 / 김영사 / 2019년 10월
평점 :
나에게 물어보자. 나는 어떤 사람이냐고. 나는 심리적으로 부정적인 반응에 빠져드는 경향이 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을 시작할 때도 그렇다. 나는 시작하기도 전에 내 문제점을 생각한다. 그리고 어떻게든 그것을 고치려는 노력부터 먼저 한다. 마치 옷에 묻은 얼룩을 지우기 위해 물을 묻힌 손수건으로 벅벅 문지르듯이 나는 내 문제점을 얼른 찾아내서 고치려고 애쓴다. 손수건으로 세게 문지를수록 얼룩은 점점 더 번진다. 안 그래도 보기 싫은데 점점 뚜렷해지는 문제점을 보면 더 싫어진다. 여기서부터 내 일은 꼬이기 시작한다. 생각이 너무 많아지니까 일에 진척이 없다.
내 속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비판하는 제2의 자아가 살고 있다. “넌 왜 이렇게 못해?” “그렇게 열심히 노력했는데 결과가 왜 이러냐?” “좀 더 잘할 수 없었니?” 주변에서 “괜찮아”, “잘했어”라고 말해줘도 나는 여전히 만족스럽지 않다. 내가 ‘검열관’으로 임명한 제2의 자아의 지적을 피하려고 애쓴다. 아무래도 나는 자아비판이 지나쳐서 내 장점보다는 문제점을 더 보려는 습관이 몸에 뱄다. 그래서 피곤하고 지친다. 무엇보다 자존감이 떨어져 있다.
《나를 돌보지 않는 나에게》. 책 제목이 마치 나를 부르는 것 같아서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오랜만에 에세이를 읽었다. 작가는 심리학과 정신분석 이론을 공부하면서 왜 그렇게 자신을 가혹하게 대하면서 살아왔는지 살핀다. 그러면서 독학과 글쓰기를 토대로 자기혐오의 원인과 과정을 찾아내어 더는 자신을 비난하지 않고 나를 돌보는 방식을 발견한다. 작가는 심리학을 ‘내 문제를 비춰보는 유용한 프리즘’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내면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심리학자의 분석에 의존한다. 그러나 심리학은 내면의 문제를 명쾌하게 해결해주는 학문이 아니다. 작가는 심리학을 통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힌트를 얻어야 한다고 말한다.
작가가 본인의 내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발견한 힌트는 융(Carl Gustav Jung)의 그림자 이론이다. 모든 인간의 내면에 그림자가 있다. 그림자는 자아, 즉 인간의 어두운 면이다. 이 그림자는 자신의 일부이면서도 스스로 거부해온 콤플렉스와 정신적 외상(trauma)이다. 나를 돌보려면 내면의 그림자를 외면하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나’로 인정하면서 만나야 한다. 작가는 글쓰기를 통해 그림자를 대면했다. 처음에 쓴 글의 주제는 ‘내가 나를 싫어하는 이유’를 썼고, 다음 주제는 ‘그래도 나를 사랑하고 아껴야 하는 이유’였다. 작가는 이런 방식으로 글을 쓰면서 그림자를 돌보면서 어루만져준다. 이것이 작가가 강조하는 ‘마음 챙김’이다. 그러면 그림자도 자신을 가치 있는 존재라고 여기며 긍정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 내 안에 있는 검열관 이 녀석의 정체는 그림자다. 나는 그림자를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 이 책의 1장 제목은 ‘제대로 사랑하는 법을 몰랐기 때문에’다. 나는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 그림자를 사랑하지 않았다.[주1] 그림자를 제대로 사랑하는 법을 몰랐기 때문에.
앞서 언급했듯이 심리학은 우리의 내면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는다. 그림자를 따뜻하게 안아줘도 언젠가는 다시 내 포옹을 거부할 것이다. 그러면서 또다시 나를 괴롭힐 것이다. 작가는 ‘상처 입은 치유자(wounded healer)’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내 안의 그림자와 상처 둘 다 없이 산다면 정말 행복한 삶일까. 그리고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의 내면은 건강할 것일까. 나는 그림자와 내면의 상처 없이 산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본다. 내면의 상처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생기기 때문이다. 정말로 내면의 상처를 받지 않으면서 살려면 세상과 단절된 채 살아가야 한다. 그러나 세상과 타인을 내면을 위협하는 적으로 간주하면서 극단적인 고독을 선택하는 삶은 고통스럽다.[주2] 오히려 그런 삶이 내면을 병들게 한다. 결국 인간은 죽을 때까지 그림자를 안으면서 내면에 상처를 달고 살아야 한다. ‘상처 입은 치유자’는 그림자의 괴롭힘에 무기력한 피해자가 아니다. ‘상처 입은 치유자’는 나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진다. 내면에 상처 입은 사람도 다른 사람의 내면 상처를 치유하는 능력이 있다. 상처 입은 치유자들은 서로의 상처를 보듬으면서 차츰차츰 각자의 아픔을 치유해간다.
나로 살아간다는 건 결국 나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살아야 할 시간이 아직 남았는데 벌써 남에게 인정받지 못해, 남에게 사랑받지 못해, 남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다고 자책만 할 수 없다. 그냥 그럭저럭 그런 삶이어도 괜찮다. 나를 사랑하자. 젊은 나를 위하여.[주3] 나 자신을 사랑하면서 살다 보면 언젠가는 나를 인정해주고,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리라. ‘마음 챙김’은 내 삶의 밝음을 확장하는 즐거운 놀이다. 이 즐거움으로부터 긍정적인 기운을 받는다면 내 안의 그림자까지 챙길 수 있다. 일본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영화 <신문기자>로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받은 배우 심은경은 인터뷰에서 앞으로 연기 활동에 대해 소박하면서도 당찬 포부를 밝혔다.
“그저 지금처럼 즐겁게, 저 자신이 더 높은 곳을 바라보려 하지 않았으면 싶다. 묵묵히 내 길을 가고 싶다.”
나도 그녀의 말처럼 어떤 신경도 쓰지 말고, 즐거운 마음으로 나 자신을 사랑하면서 살아가고 싶다.
[주1] 기형도의 시 『질투는 나의 힘』 마지막에 있는 시구를 차용했다.
[주2] 라르스 스벤젠 《외로움의 철학》, 청미, 2019.
[주3] 잼(ZAM)의 노래 <우리 모두 사랑하자>에 나오는 노랫말(“우리 모두 사랑하자. 우리의 젊은 날을 위하여”)을 변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