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수집은 현재진행형이다. 책 수집을 중단하게 만든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책 모으는 버릇은 죽을 때까지 지속된다. 집에서 생활하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여태까지 사놓고 한 번도 펼쳐보지 않은 책들에 눈길이 간다.

    

 

 

 

 

 

 

 

 

 

 

 

 

 

 

 

* [절판] 반 고흐 명작 400(마로니에북스, 2008)

* [절판] 마그리트 명작 400(마로니에북스, 2008)

* 달리 명작 400(마로니에북스, 2008)

    

 

 

온종일 글자로 채워진 책을 보면 지루하다. 그럴 땐 도판이 많은 책을 읽는다. 특히 명작 400시리즈는 가끔 생각날 때마다 보는 도판집이다. 이 시리즈는 유명 예술가가 그린 작품 400선을 어떠한 한 줄의 설명 없이 도판으로 보여주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물론 이 책에 아예 도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서문, 예술가 연보, 색인은 있다. ‘명작 400시리즈로 나온 모든 책의 서문을 쓴 사람은 호주의 미술비평가 로버트 휴즈(Robert Hughes). 국내에 출간된 명작 400선 시리즈는 총 다섯 권이다. 반 고흐(Vincent van Gogh), 마티스(Henri Matisse), 마그리트(René Magritte), 달리(Salvador Dali), 피카소(Pablo Picasso).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은 반 고흐, 마그리트, 달리. 나머지 두 권을 구매하면 시리즈 전체를 소장하게 되는데, 책 한 권 모으는 일이 쉽지 않다. 현재 달리를 제외한 나머지 네 권은 품절 또는 절판 상태다. 이 책들이 알라딘 온라인 중고 샵이나 알라딘 오프라인 서점에 나올 확률은 낮다. 그러나 정가의 50% 정도 할인된 가격으로 판매되므로 오매불망 기다릴 수밖에 없다. 품절 또는 절판된 책들이 판매자 중고 샵에 등록되어 있지만, 중고가 금액이 책의 정가보다 높다.

 

반 고흐와 달리는 국적, 성장 과정, 활동 시기가 완전히 다른 예술가이다. 예나 지금이나 고흐를 평가하면 광기에 사로잡힌 미치광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달리도 생전에 눈에 띄는 기이한 행동과 발언을 일삼은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달리의 특이한 행동은 병적인 증세라기보다는 세상 사람들의 존경과 관심을 받고 싶어서 하는 과장된 퍼포먼스(performance)에 가깝다. 반 고흐와 달리의 공통점은 광기가 아니다. 이 두 사람의 진짜 공통점은 농민 화가에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이다.

    

 

 

 

        

 

 

 

농민 화가의 정체는 바로 장 프랑수아 밀레(Jean-Fracois Millet). 그는 농촌의 풍경을 그리는 화가가 아니라 농민들의 생활상을 있는 그대로 묘사함으로써 미술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기에 이른다. 반 고흐는 밀레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그러나 그는 밀레의 작품 몇 점을 모사했을 정도로 밀레를 존경했다. 반 고흐는 동생 테오(Theo van Gogh)에게 보낸 편지에서 밀레를 젊은 화가들의 아버지라고 언급했다(18854). 반 고흐가 가장 좋아한 밀레의 그림은 너무나도 유명한 밀레의 대표작 만종이다. 반 고흐는 밀레의 그림에서 어떤 매력을 발견한 것일까. 반 고흐는 밀레의 그림에서 평범한 미학의 매력을 발견한다. 밀레는 농촌에 생활하면서 농민들에게서 화려하고 소란스러운 도시에 볼 수 없는 생명력을 발견한다. 도시인들은 농민의 삶을 그저 평범한 일로 치부한다. 당연히 도시 생활에 익숙한 예술가와 비평가들은 농촌 생활에 대해 잘 모르거나 낯설어한다. 그들은 밀레의 그림을 이해하지 못한다. 오히려 불평등 문제에 관심 없거나 혁명을 두려워하는 보수적인 비평가들은 밀레가 정치적인 의도를 보여주기 위해 가난한 농민들을 그린다고 비난한다. 하지만 밀레는 자신의 정치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농민의 모습을 그리려고 하지 않았다. 밀레는 농민들의 엄숙한 모습에 매료되었고, 잔잔하게 흘러나오는 고귀한 아름다움을 재현했다. 그래서 밀레의 그림은 종교화 같은 느낌이 든다. 반 고흐는 밀레처럼 평범한 농민을 소재로 삼아 종교화 같은 숭고한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밀레와 반 고흐의 관계는 그림으로 이어진 스승과 제자에 가깝다.

 

 

 

 

 

 

    

 

달리는 고흐 못지않게 밀레의 그림에 상당히 애착을 느낀 예술가이지만, 그는 밀레의 그림에 과도한 상상을 덧붙여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만종을 자세히 들여다본 달리는 감자를 담은 바구니가 있는 자리에 원래 농민 부부의 죽은 아기를 안치한 관이 그려져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의 발언은 만종의 무서운 진실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지게 만든 원인이 된다. 실제로 만종에 자외선을 투사하여 분석해 본 결과, 그림 속 바구니의 위치에 작은 관과 비슷한 형체를 발견했다. 그러나 그 형체가 정말로 죽은 아기의 관인지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만종에 대한 달리의 해석을 믿는 호사가들(항간에 떠도는 무서운 이야기를 주로 소개하는 블로거들도 포함된다)은 처음에 밀레가 죽은 아기의 관이 그려진 만종을 그렸다가 친구의 충고(‘그림이 너무 무섭다’)를 듣고 난 후 바구니로 고쳤다고 주장한다. 말도 안 되는 주장이다. 그런 주장은 밀레의 친구 알프레드 상시에(Alfred Sensier)가 쓴 밀레 전기 자연을 사랑한 화가 밀레()에 나오지 않는다.

 

 

 

 

 

 

    

 

아무튼 달리는 만종을 보면서 불길한 기운을 느꼈고, 만종에 자신의 심리 상태를 반영한 그림들을 그렸다. 달리는 만종에 나오는 인물들과 대상(괭이, 바구니, 외바퀴 수레)을 다양한 방식으로 그렸.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만종의 저녁놀 풍경은 달리의 그림에서는 황량한 사막이 된다. 달리는 적막한 기운이 감도는 환상적인 풍경을 표현하여 초자연적인 숭고함을 전달하려고 했다. 거대한 사막으로 표현된 상상의 공간 한가운데에 서 있는 인간의 이성은 나약하고 초라하다. 만종을 패러디한 달리의 그림은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가 그린 풍경화의 초현실주의적 버전이라 할 수 있다.

 

 

 

 

 

 

 

 

 

 

 

 

 

 

 

 

 

 

 

 

 

 

 

 

 

 

 

 

 

 

 

 

 

 

 

* [절판] 즈느비에브 라캉브르 외 밀레(창해, 2000)

* 박서보 엮음 밀레(재원, 2003)

* [절판] 노성두 외 자연을 사랑한 화가들(아트북스, 2005)

* [절판] 박홍규 빈센트가 사랑한 밀레(아트북스, 2005)

 

 

 

 

반 고흐와 달리의 생애와 예술을 소개한 책들은 많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밀레에 관한 책은 생각보다 적다. 게다가 그 책들 대부분은 절판되었다. 창해 ABC’ 시리즈로 나온 밀레백과사전 형식으로 편집된 문고본이다. 재원 출판사의 밀레는 도판집이다. 아무래도 도판집의 특성상 작품에 대한 해설이 많지 않다. 미술사학자 노성두 외에 여러 명의 필자가 참여한 자연을 사랑한 화가들(아트북스)은 밀레와 그의 절친한 동료 화가들이 속한 바르비종파(École de Barbizon)에 관한 책이다. 다작으로 유명한 박홍규 교수의 빈센트가 사랑한 밀레(아트북스)는 밀레와 반 고흐의 연관성에 초점을 맞춘 책이다. 밀레의 그림이 반 고흐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알고 싶으면 이 책을 참고하면 된다. 앞서 언급한 상시에의 밀레 전기는 가난한 무명 화가 밀레를 일약 스타 화가로 올려놓게 한 책이다. 그러나 상시에는 밀레의 그림을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일을 했다. 그림이 잘 팔리려면 고객에게 화가와 그의 작품을 대대적으로 홍보해야 한다. 결국 상시에의 밀레 전기는 밀레의 그림을 상품으로 알리려고 만들어진 전기로 위장한 광고인 셈이다. 따라서 후대의 연구자들은 상시에를 밀레에 부와 명예를 가져다준 은인으로 평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밀레의 그림을 팔기 위해 화가의 독창성을 막은 상업주의자라고 비판한다. 자연을 사랑한 화가들도 상시에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데, 이 책에 따르면 상시에는 밀레의 작품을 팔기 위해 밀레 신화를 꾸며 낸 장본인이다. 상시에는 밀레를 착하고 신앙심 깊은 인물로 묘사했는데 실제 밀레의 성격은 전기에서 묘사된 모습과 다르다고 한다. 그러므로 상시에의 밀레 전기는 100% 신뢰하면서 읽지 않는 것이 좋다.

 

 

 

 

 

Trivia

      

* 달리 명작 400134쪽에 황혼의 자폐증이라는 제목의 그림 도판이 있다. 밀레의 만종을 패러디한 그림인데, 황혼의 자폐증은 오역이다. 원제는 ‘Atavism at Twilight’이다. ‘Atavism’격세유전을 뜻하는 단어다. 따라서 올바른 작품명은 황혼의 격세유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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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0-03-04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저게 다 절판됐구나. 다시 나오지도 않네.ㅠ
대단하고 부럽다.

cyrus 2020-03-04 22:57   좋아요 0 | URL
세 권 모두 알라딘 서점, 알라딘 온라인 중고샵에서 구매했어요. ^^

2020-03-04 17: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20-03-04 23:01   좋아요 0 | URL
‘해설 없는 그림 감상’에 장단점이 있어요. 장점은 그림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해줘요. 하지만 해설에 익숙한 사람들은 그림을 감상하는 데 불편함을 느낄 거예요.

저도 신경숙의 소설을 읽지 않았어요. 그래서 저 소설 표지에 있는 그림이 달리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최근에 알았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