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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지금 고전인가 - 서양고전 입문자를 위한 안내서
네빌 몰리 지음, 박홍경 옮김 / 프롬북스 / 2019년 10월
평점 :
불멸의 책. 장구한 세월 속에서도 오래도록 많은 사람에게 좋게 평가받아 읽히는 책. 우리는 그런 책을 ‘고전(古典)’이라고 부른다. 고전은 시대를 넘어 필독 도서 목록에 자주 이름이 올라가는 책이기도 하다. 그러나 실생활 속에서 고전의 의미는 ‘어른들조차 잘 읽지 않고 그저 이름만 아는 책’이다. 이런 실정인데도 고전과 친하지 않은 어른들은 학생들에게 고전을 꼭 읽으라는 ‘지시’를 내린다. 문제는 학생들이 읽고 싶어도 고전을 읽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서양 고전 번역본들이 대부분 성인에게도 만만찮은 분량과 내용이다. 학생의 눈높이에 맞춰 펴낸 축약본이나 개론서가 많이 나오고 있지만, 논술 시험 문제로 출제할 가능성이 높은 고전에 대한 중요 정보만 요약하여 알려준다. 결국, 학생들은 단 몇 줄로 요약된 고전의 심오한 내용을 외우기만 한다. 단기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암기한 내용은 머릿속에 오래 남지 못한다.
《왜 지금 고전인가》는 서양 고전을 읽고 싶으나 어떻게 읽어야 할지 모르는(또는 ‘왜 읽어야 하는지 모르는’) 독자들에게 단비가 되는 책이다. 이 책은 적어도 기존의 서양 고전 독서 입문서와는 다른 두 가지 특징을 지닌다.
첫째, 이 책은 서양 고전이 어떻게 상류층을 위한 정전으로써 특권적 지위를 얻게 됐고, 그 후로 시간이 흐르면서 대중의 교양서로 지금까지 살아남게 되었는지 살핀다. 이 책에서 언급된 고전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생산된 지식이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는 서양 문명의 정점으로 평가받았고, 고대 고전은 유럽 엘리트라면 반드시 배워야 할 교육으로 인식되었다. 고전학자들은 지중해 문명이 남긴 문화적 유산에 감탄했고, 일부분만 알려진 고대 문헌들까지 번역하면서 널리 전파하는 일에 힘썼다. 그러나 고전 지식은 서양 문명의 우월함을 돋보이게 하는 장신구로 전락했으며 특정 계급(상류층과 식자층), 특정 인종(백인), 특정한 성별(남성)만 소유하고 공유할 수 있었다. 저자는 과거에 고전이 지배계층의 권위 유지를 정당화시키는 이념적 도구로 활용되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둘째, 이 책은 서양 고전의 가치와 고전 읽기의 중요성을 과대평가하지 않는다. 유독 고전 읽기를 강조하는 사람들은 고전 속에 현재를 사는 인류에게 도움이 되는 지혜가 담겨 있다고 말한다. 또 고전을 읽으면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그들은 고전 속에 있는 과거를 탐색하면 만 리 길을 내다볼 수 있다고 믿는다. 현재와 미래를 위해서 과거의 고전을 공부한다? 얼핏 이런 말을 들으면 고전을 읽고 싶어지고, 제대로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리라. 하지만 저자는 고전이 우리에게 미래를 예언하는 지혜나 현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조언을 제공해주지 않는다고 말한다. 고전에서 세상을 읽을 수 있는 통찰력을 얻기를 바라지 마시라. 정말로 고전을 읽으면서 통찰력을 얻고 싶다면 고전 속 지식을 그저 흡입하기만 하는 기존의 독서 방식을 버려야 한다.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지만, 고전은 새롭게 해석되어야 한다. 고전은 다음 세대의 독자들에게 지혜를 전달하기 위해서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독자들의 새로운 해석을 기다리면서 살아남았다. 과거 사람들이 고전을 읽으면서 알게 된 지혜와 교훈은 다음 세대에게 공유되더라도 끊임없이 변하고 혁신이 일어나는 세상의 흐름에 따라가지 못하면 쓸모없어진다. 고전의 가치는 시대가 변하면서 달라진다. 우리는 전문가가 강조하는 고전의 가치를 객관적이며 보편적인 진리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
저자는 서양 고전의 한계를 극복하면서 고전에서 긍정적인 영감을 이끌어내도록 길을 모색할 누군가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 사람이 정확히 누구인지 언급되지 않았지만, 나는 그런 중대한 역할을 하는 사람이 반드시 고전학자 같은 전문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고전을 읽으면서 끊임없이 질문하고, 비판적인 해석을 시도하는 독자들도 할 수 있는 일이다. 고전을 잘 활용하는 것은 그것에 적극적으로 접근하는 독자들의 태도에 달려 있다. 고전은 고전학자들의 보호를 받는 고귀한 정전(正典)이 아니라 우리 독자들의 거센 도전을 받아야 할 책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전을 읽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