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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들의 생각법 - 대세를 따르지 않는
우치다 타츠루 지음, 김경원 옮김 / 바다출판사 / 2019년 7월
평점 :
감정 전염(emotional contagion)이라는 심리학 용어가 있다. 남들과 같은 행동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의미한다. 우리는 집단에 소속되려고 하는 본성을 지니고 있어서 무리 지어 살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인간은 철저하게 사회적 존재로 살아가고 있으며 타인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인간의 모방 본능은 사회적인 상호작용에서 호흡처럼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만약 상대방의 표정, 행동, 자세, 말투를 모방하지 않는다면 소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남들같이 행동하고 생각하는 본능은 큰 재앙을 불러오기도 한다. 조직이론에서 종종 사용되는 용어 중 집단사고(group-think)라는 말이 있다. 이는 집단의 의사 결정 상황에서 집단 구성원들이 집단의 응집력과 획일성을 강조하고, 반대 의견을 억압하여 비합리적인 결정을 내리는 왜곡된 의사결정 방식을 말한다. 폐쇄적인 집단이나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새로운 정보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못하게 되고, 다수의 결정에 대한 반대 의견은 설 자리를 잃는다. ‘우리가 옳다’는 ‘그들만의 신념’은 거대한 오류를 일어나게 하는 원인이다.
이를 막으려면 ‘악마의 변호사(devil’s advocate)’가 있어야 한다. 가톨릭에서 성인(聖人)을 추대할 때 해당 인물의 행적과 품성을 검증하기 위해 비판을 하도록 한 인물을 가리킨다. 선의와 확신, 만장일치가 결과의 성공이나 정의로움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만큼 건전한 공적 논의를 담보하기 위해 이런 의도적이고 의무적인 ‘악역’이 필요하다.
하지만 반대 의견은 다수 의견에 동조하는 군중에게는 성가시고 ‘이상한 이야기’로 들릴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정의와 양심을 지키기 위해 ‘악마의 변호사’로 자처하여 나서게 된다면 군중으로부터 ‘트집쟁이’, ‘악마의 선동꾼’ 소리를 듣게 된다. 그렇다면 타인에게 비난을 덜 받으면서 ‘이상한 이야기’를 잘 설명하는 방법이 있을까?
일본 사회 내에 확산되고 있는 반지성주의를 경계하고 비판해온 우치다 타츠루(內田樹)는 ‘대시민’이 되자고 제안한다. 이번에 나온 그의 책 《대세를 따르지 않는 시민들의 생각법》은 2008년부터 6년간 연재한 900자 칼럼을 모은 책이다. 이 책의 원제는 ‘우치다 타츠루의 대시민 강좌’이다. ‘대시민’은 1966년 NHK 방송국에서 방영한 텔레비전 드라마의 제목이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은 평소 정치나 사회 문제에 무관심한 샐러리맨인데 어떤 사건을 계기로 사회에 비판적인 시선을 가지게 된다. 사회 문제에 무관심하고 안정적인 삶을 선호하는 사람을 소시민이라고 한다면, 대시민은 사회 문제의 옳고 그름을 냉철하게 인식하고 판단하는 사람이다. 대시민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양한 시사 쟁점에 대해 자기 생각을 자신의 언어로 말할 수 있다. 그/그녀는 다수 의견에 휩쓸리지 않으면서 사회의 위기 징후를 감지하고 군중의 각성을 촉구한다.
‘악마의 변호사’와 ‘대시민’ 모두 사회나 집단에 향해 비판적인 의견을 내는 인물이지만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 ‘악마의 변호사’는 논의의 활성화를 위해서 고의적으로 반대 입장을 취하는 사람이라면, ‘대시민’은 타인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와 표현력을 동원하여 자신의 의견을 밝히는 사람이다. 우치다는 대시민을 ‘설명을 잘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비록 나와 다른 생각을 드러내는 말이어도 그 말의 내용이 알차고 이해하기 쉽다면 경청하는 시간이 아깝지 않다.
혹자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저는 다른 사람을 설득시킬 수 있을 정도로 말을 잘하는 편이 아니에요. 대시민이 되려면 말을 잘해야 되는군요.” 자기 생각을 말로 표현하고 상대에게 전달하는 의사소통 능력이 중요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우치다는 그것을 의사소통 능력의 부차적인 일부로 보고 있다. 그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의사소통의 자리를 마련하는 능력’이다. 우치다는 『진정한 ‘의사소통 능력’』이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우리가 알면서도 자꾸 잊는 ‘경청하는 자세’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의사소통 능력이란 무엇보다도 ‘의사소통의 자리를 마련하는 능력’이다. 그것은 자신과 타자를 맺어주는 통신의 회선이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몇몇 방법을 알고 있다는 말이다.
“저, 내 목소리가 들립니까?” 이런 발화가 바로 그것이다. 또는 상대방이 이야기하는 동안 ‘귀를 기울일 만한 대목’에 은근히 힘을 준 순간을 알아채고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는’ 반응을 보여주는 것이 그것이다.
(『진정한 ‘의사소통 능력’』 중에서, 172쪽)
성숙한 발신자는 상대의 말을 듣기만 하지 않는다. 상대방이 전달하고자 하는 말의 내용은 물론이며, 그 말속에 들어있는 동기(動機)나 정서까지 귀 기울여 듣고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대부분 사람은 ‘의사소통의 자리를 마련’하는 것을 상당히 어려워한다. 또는 가장 기본적인 의사소통 능력을 간과하기도 한다. 말을 잘하든 못하든 간에 사람들은 언제든지 자기 생각을 말로 표현하려고 한다. 지금도 익명의 수신자들은 자기 생각을 밝히면서 인터넷 공간 이곳저곳을 떠돌고 있다. 인터넷 공간에 남겨진 수많은 말들은 익명의 발신자를 기다리고 있다. 그 수많은 수신자가 발신자가 되지 않는 한 인터넷 공간에 남겨진 말들은 공적 논의를 위한 자원으로 사용해보지 못한 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침전물로 남게 된다.
설명을 잘하는 대시민은 듣는 사람을 배려할 줄 안다. 우치다는 ‘듣기 좋은 말’을 하는 능력을 대시민이 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자질로 보고 있지만, 나는 듣는 사람이 허심탄회하게 말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상대방을 위한 배려라는 것은 남들이 듣기 싫어하는 ‘이상한 이야기’에 귀담아 들어주는 자세를 의미한다. 그런 사람은 상대방과 대화를 나눌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대시민’이다.[주]
[주] 한국어판 서문의 8쪽에 있는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대시민’입니다.”라는 문장을 빌려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