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조는 유학을 국가통치의 기본 이념으로 삼았다. 당시 유학의 주류를 이뤘던 성리학은 인간 심성에서부터 우주 운행에 이르기까지 태극, 음양, 이기(理氣) 등의 이치로 사물의 현상과 원리를 해명하는 학문이다. 성리학자들은 이를 바탕으로 개인의 인격 수양과 인간관계의 의리는 물론, 사회와 국가의 운영에까지 도덕에 기초한 이상을 구현하려 했다.
천자문을 익힌 아이들은 서당에 가서 《소학(小學)》을 읽고 배운다. 유교 사회에서는 본래 바른 생활습관과 품성을 배양하기 위한 인격 수양을 중시했다. 《소학》은 충효 · 예절 · 윤리 등을 알려주는 인격 수양의 지침서이다. 조선 시대의 사대부 여성들은 결혼하기 전에 《소학》과 같은 기초적인 유교 경전을 읽었다. 그러나 그녀들은 사대부 남성들과 함께 공부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소학》에 있는 유교윤리를 그대로 실천하고 산다면 그 사람은 바로 성인이요 군자인 것이다. 유교 경전을 읽으면서 배운 것을 실천으로 옮기는 여성도 군자가 될 수 있다.
* 정옥자 《사임당전》 (민음사, 2016)
5만 원 지폐에 등장하는 신사임당을 얘기하면 우선 ‘현모양처’가 떠오르고 ‘율곡 이이의 어머니’로 기억된다. 하지만 이것은 16세기 노론(老論: 조선 시대 붕당의 한 정파)의 수장이었던 송시열이 주도한 ‘노론의 대모(大母) 만들기’ 프로젝트에 의해 형성된 이미지다. 이이의 제자들은 노론에 속했고, 사임당은 ‘스승을 낳은 위대한 어머니’로 알려지게 됐다. 사임당은 탁월한 그림 실력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몇몇 사대부들은 신사임당의 그림 실력을 칭송하면서도 자녀 교육과 정숙한 행실에 더 초점을 맞추어 평가했다. 《사임당전》(민음사)의 저자인 정옥자 교수는 사임당에 대한 노론의 평가가 그녀의 예술가적 면모를 의도적으로 은폐했다고 보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노론은 사임당의 행실에서 확인할 수 있는 유교적 가치를 예술가적 면모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어쨌든 ‘화가 사임당’은 잊히고 ‘훌륭한 어머니 사임당’만 남게 되어 지금까지 알려졌다.
이이는 사임당의 셋째 아들이다. 그는 어머니를 기리기 위해 <선비행장>이라는 제목의 글을 썼다. 선비는 세상을 떠난 사임당을, 행장(行狀)은 고인의 행실을 적은 글이다. 이 글에서 이이는 어머니의 그림 실력을 높이 평가했으며 그녀의 학식과 인격을 언급했다. 그렇다면 이이가 고인이 된 사임당을 가리켜 ‘선비’라는 호칭을 사용한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선비는 학식과 인품을 갖춘 사람에 대한 호칭이다. 공자(孔子)와 그의 제자들부터 시작해서 조선시대에 이어져 온 유학자들은 유교 이념을 실현하는 인격을 선비로 확립하였다. 이이는 유교 이념을 철저히 수련하고 실천한 사임당의 행실에 주목하여 ‘선비’라는 호칭을 썼다. 따라서 <선비행장>은 ‘화가 사임당’과 ‘선비 사임당’이라는 뛰어난 면모를 동시에 보여주는 중요한 글이다.
사임당과 이이의 명성에 완전히 가려지는 바람에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사임당의 맏딸이자 이이의 손위 누이인 이매창은 ‘작은 사임당’이라고 불렸을 정도로 학식과 예술 실력을 두루 갖춘 여성이다. 사임당의 막내아들 이우의 8대손인 이서는 <집안에 내려오는 서화첩 발문>에 이매창을 ‘부녀자 중의 군자’라고 언급했다.
* 김경희 《임윤지당 평전》 (한겨레출판, 2019)
임윤지당은 ‘군자’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훌륭한 성리학자이다. 사대부 여성이 학문에 정진할 수 없는 불리한 시대 속에 윤지당은 공부와 연구에 매진한다. 성리학을 공부한 그녀는 성인과 범인(凡人)이 본래 같은 성품을 타고났다고 보며 이를 전제로 하여 남성과 여성의 본성에 하등의 차이가 없다는 결론을 도출한다. 그러면서 윤지당은 여성도 군자가 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녀는 일평생 유교 경전과 성리학을 연구하여 군자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노력했다.
윤지당은 앞서 언급한 사임당과 비교되기도 한다. 사임당이 시와 그림을 중심으로 한 교양과 예술에 몰두했다면, 윤지당은 사상과 역사, 문장, 교양을 두루 겸비한 학자였다. 현재까지 윤지당이 쓴 것으로 알려진 시는 단 한 편도 남아 있지 않다. 사임당이 이이라는 대학자를 아들로 두어 유복했다면, 윤지당은 남편과 아들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나 박복했다는 점이 대비된다. 두 사람이 각각 예술과 학문에 탐닉할 수 있었던 공통적인 배경에는 개방적인 집안 분위기가 있었다. 두 사람의 어머니는 자녀 교육에 관심이 많았고, 딸에게도 인격 수양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 [절판] 이영춘 《강정일당》 (가람기획, 2002)
윤지당의 영향을 받은 여성 성리학자는 강정일당이다. 그녀는 사임당과 윤지당보다 경제적 형편이 어려운 집안에서 태어나 자랐고, 남편의 집안도 가세가 완전히 기울어진 명문가 출신이었다. 정일당은 길쌈과 바느질로 생계를 책임졌다. 시댁의 가계를 책임지던 정일당은 나이 서른이 되어서야 비로소 학문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것도 바느질하면서 틈틈이 경전을 읽고 공부한 것이 전부다. 정일당의 공부는 확고한 생각과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녀는 천성을 기준으로 한 남녀의 차별이 없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믿음은 정일당보다 조금 먼저 태어나서 활동한 윤지당으로부터 이어받은 것이다.
성인이 되고자 하는 ‘삼당군자(신사임당, 임윤지당, 강정일당)’의 노력은 오랫동안 계속해 왔지만, 학문적으로 이론화되고 또 그 생각이 공유된 적은 별로 없다. ‘성품에 남녀의 차이가 없다’는 말은 남녀가 역할은 달라도 인간 자체로는 같다는 뜻이다. 우리가 아는 보통 조선 시대의 여성의 삶은 남성 중심의 역사 서술이 놓친 ‘반쪽짜리 삶’이다. 역사의 기록 밖으로 밀려나 있던 조선 시대 여성들의 모습이 학계를 넘어서 일반 대중에게도 많이 알려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