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학술대회에 참석한 미국의 시인 오드르 로드(Audre Lorde)는 청중들 앞에 자신이 유방암 진단을 받을 수 있다고 고백한다. 그녀의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이듬해 그녀는 한쪽 가슴을 절제하는 수술을 받았으나 암세포는 이미 다른 장기에 퍼진 상태였다. 1982년에 로드는 간암 진단을 받았지만, 1992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글쓰기와 사회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 오드르 로드 《The Cancer Journals》 (Aunt Lute Books, 2016)

 

 

 

1980년에 발표된 《The Cancer Journals》(암 일지)는 로드가 유방암 투병 생활을 하면서 쓴 책이다. <암 일지>는 유방암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제고하게 만든 책으로 알려졌지만, 질병을 개인적 문제로 여기는 인식을 비판적으로 고찰한 ‘페미니즘 고전’이다.

 

‘페미니즘 스쿨’ 교육 일정이 최종적으로 확정되기 전에는 로드의 <암 일지>에 대한 강연을 진행할 계획이 있었다. 전혜은 선생님이 ‘암 일지’에 대한 강연을 해야 한다고 레드스타킹에게 먼저 제안을 했다. 그분은 <암 일지>를 ‘교차성을 사유하는 데 있어서, 아픈 사람의 위치에서 어떤 중요한 통찰과 정치를 발굴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지 놀랍도록 멋지게 보여주는 페미니즘 고전’이라고 소개했다. 필자는 이 책의 내용이 너무 궁금해서 <암 일지> 강연을 교육 일정에 포함하는 것에 찬성했다. 나 말고도 <암 일지>에 호기심을 느낀 레드스타킹 멤버들이 많았다. 그러나 공부해야 할 주제가 너무 많은 데다가 <암 일지> 강연을 하기에 시간상 어려울 것 같아서 결정을 유보했다. 하지만 교육 일정이 진행되는 상황이나 분위기에 따라 <암 일지> 강연을 하는 것으로 변경될 수 있다.

 

 

 

 

 

 

 

 

 

 

 

 

 

 

 

 

 

 

* 말린 쉬위 《일기 여행》 (산지니, 2019)

 

 

 

최근에 일기 쓰기가 여성에게 주는 긍정적 효과를 설파한 《일기 여행》(산지니)을 읽다가 로드의 <암 일지>를 언급한 내용을 보게 됐다. 어찌나 반갑던지. <암 일지>에서 인용한 문장도 있다. 《일기 여행》의 저자는 로드가 유방암 투병 중에 일기를 쓰는 행위를 ‘카타르시스(catharsis)에 가까운 글쓰기’로 본다. 로드가 암을 받아들이면서 투병 경험을 공개하는 글쓰기는 안정과 치유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카타르시스’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카타르시스는 “예술로 감정을 순화하거나 정화하는 것”이었다. 정신분석적으로 카타르시스는 “과거의 사건들, 특히 억제된 것을 정서적으로 해소하여 장애의 원인과 정직하게 마주함으로써 긴장과 불안을 해소하는 것”을 지칭한다.

 

  가끔 카타르시스적 글쓰기를 통하여 치유된 상처들은 편견과 차별에서 나온 것이다. 일기에서 글쓰기는 역시 카타르시스적인데, 그것은 내가 견디면서, 삶에 존재하는 많은 상처를 치유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오더 로드(Audre Lorde)는 “흑인 여성 동성애자 투사 시인”으로 자신의 유방암 경험을 일기로 쓰면서, 자신의 말이 “자기 치유의 가능성과 모든 여성을 위한 생활의 풍요로움을 강조하는 것”이기를 원했다. 그 일기는 로드의 분노와 절망, 그리고 자신의 질병은 “침묵을 언어와 행동으로 전환하는” 힘으로 만드는 결심을 증언한다. 1979년 11월 19일에 그녀는 적었다. “분노를 쓰고 싶지만 결국 남는 것은 슬픔이다…. 죽음을 삶으로, 죽음을 무시하지 않으면서 그것에 굴복하지 않는 어떤 길을 찾아야 한다.”

 

 로드는 회고한다. 『암 일기(The Cancer Journals)』의 출판 준비는 “그 시점의 나와 그 시간을 지나면서 변화하는 나 자신을 정돈하고, 추후의 검토뿐만 아니라 해소를 위해서, 가공의 나를 내려놓기 위한” 글쓰기 과정이었다. 이것 또한 카타르시스다.

 

 

(《일기 여행》 169, 171~172쪽, cyrus가 임의로 발췌 편집했으며 밑줄 친 문장은 cyrus가 내용을 강조하기 위해 표시한 것임)

 

 

 

<암 일지>의 서문 일부도 인용되어 있다. 《일기 여행》의 저자도 <암 일지>를 극찬한다.

 

 

 암에 대한 나의 분노와 고통과 공포가 여전히 다른 침묵 속으로 화석화하거나, 공공연히 인정되고 검진된, 이 경험의 중심부에 놓인 어떤 정신력도 나에게서 강탈하기를 원치 않는다. 삶의 어떤 영역에서건 강요된 침묵은 분리와 탈권력을 위한 도구라는 것을 인식하고, 모든 연령, 피부색, 성적 정체성에서 다른 여성과 나 자신을 위하여, 내 감정과 생각들을 표명하려고 노력했다…. 이것은 모든 여성들에게 자연 치유의 가능성과 삶의 풍요를 강조하는 표현이 되기 바란다. (<암 일지>의 서문 중에서)

 

 유방암이 자신의 개인적 삶에 미치는 영향의 양상에 대한 혹독한 서술로, 오더 로드는 우리 자신의 높은 위치를 다시 생각하게 유인한다. 이 일기는 모든 여성들에게 정말 좋은 선물이다.

 

 

(380쪽, 밑줄 친 문장은 cyrus가 내용을 강조하기 위해 표시한 것임)

 

 

 

이 ‘좋은 선물’ 안에 무엇이 있을까? 로드가 세상의 모든 여성을 위해 남긴 ‘선물’을 확인해볼 수 있는 날이 확정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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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9-07-12 12: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일기를 쓰고 나면 머릿속이 정돈되고 근심이 줄어드는 효과를 봅니다. 누구에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저 자신을 위해서 일기를 쓰는 거라고 말할 수 있어요. 글쓰기의 놀라운 효과를 잘 압니다.

cyrus 2019-07-12 15:29   좋아요 0 | URL
맞아요. 지금 글쓰기의 긍정적 효과를 제대로 누리고 있는 분이 페크님이시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