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운동은 책에 기초한다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오지원 옮김 / 유유 / 201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종이책이 단 한 권도 없는 세상을 상상해보자. 어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책 없으면 무슨 재미로 사나. 내가 이런 반응을 보인다면 대부분 사람은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다. “책 없는 세상을 살아가는 게 재미없다고? 책이 없으면 스마트폰을 보면 되지.” 스마트폰을 사용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일이 독서보다 더 재미있다는 점은 인정한다.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방송, 영화, 드라마, 스포츠 경기 생중계 등을 볼 수 있으니까. 나는 책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내는 일이 익숙한 편이다. 그래서 책을 안 읽으면 마음이 허전하다. 마치 하루 세끼 밥을 잘 먹다가 갑자기 한두 끼 식사를 거르면 확 밀려오는 공복감을 견디지 못하는 상태와 같다. 나도 하루에 스마트폰을 4시간 정도 들여다보는 중독 증상이 있다. 하지만 책을 읽을 때만이라도 스마트폰을 멀리한다. 아무 이유 없이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습관을 줄이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손이 스마트폰에 가게 되면 책을 읽어야 한다면서 나 자신을 세뇌한다.

 

스마트폰을 멀리 할 수밖에 없는 결정적인 이유가 있다. 눈을 건강하게 만들려면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습관을 줄여야 한다. 밤에 스마트폰 화면을 오래 보고 나면 눈이 침침하다. 20대 중반에 시력이 완전히 상실되기 직전까지 간 적이 있어서 될 수 있는 대로 밤에는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않는다. 안 그래도 시력이 나쁜데 점점 더 나빠진다면 책을 더 이상 볼 수 없는 최악의 상황이 올 수 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찾아오는 시력 상실은 사망 선고나 다름없다. 너무 많이 책을 읽은 탓에 30대 후반부터 서서히 시력이 떨어지기 시작해서 말년에 완전히 시력을 상실한 보르헤스(Borges)처럼 살고 싶지 않다. 책을 너무 많이 읽는 것도 눈 건강을 나쁘게 만드는 원인이기도 하지만, 눈에 가장 많이 부담을 주는 것이 스마트폰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는 서두에 책 없는 세상을 상상해보라고 언급했을까. 책 없는 지루한 디스토피아(dystopia)를 떠오르게 하는 ‘상상 실험’을 나보다 먼저 한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바로 오스트리아의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이다. 그의 서평 선집인 《모든 운동은 책에 기초한다》 서문에서 츠바이크는 책이 없는 삶을 상상하면서 느꼈던 감정을 밝힌다. 그가 이런 상상을 하게 된 이유가 있다. 츠바이크는 생전 처음으로 문맹을 만났는데, 이 사소한 만남이 그의 상상력에 불을 지폈다. 문맹은 어느 여성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글자를 모르는 그는 편지에 적힌 글을 읽지 못해 츠바이크에게 대신 편지를 읽어달라고 부탁했다. 츠바이크는 그가 문맹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고, 그가 자신에게 편지를 읽어달라고 부탁하고 나서야 그 사실을 알았다. 특별한 경험을 한 츠바이크는 글을 읽지 못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 상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시간 동안 책에서 읽은 것들을 생각해보지 않기로 했다. 츠바이크는 문자를 완전히 삭제한 채 살아가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라고 결론을 내리면서 ‘상상 실험’을 종료했다. 문자와 책이 없는 삶은 책에서 나온 정신적 영양분을 먹고 자란 ‘나’라는 존재 자체가 완전히 소멸한 끔찍한 상황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을 결국 ‘나’라는 존재를 이해하는 행위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이미 알고 경험한 정도만큼만 책을 통해 얻을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스스로 부족한 부분을 메우기 위한 노력을 할 때만이 책을 읽는 진정한 가치가 있다. 그래서 츠바이크는 독서를 ‘사적이고 개인적인 삶에서 영혼을 확장하고 세계를 건설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우리는 독서의 힘을 의식하지 못한다. 독서의 힘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은 서서히 성장하면서 커가는 아이의 상태에 비유할 수 있다. 부모는 편식하는 아이들의 식습관을 고쳐주기 위해 반찬을 골고루 먹으면 키가 쑥쑥 커지고 건강해질 수 있다고 말한다. 아이는 부모의 말을 믿지 않지만, 속는 셈 치고 서서히 반찬을 골고루 먹기 시작한다. 이 아이는 부모가 하라는 대로 다 했는데 몸에 별다른 변화가 나타나지 않아서 실망할 것이다. 사람마다 성장 속도는 다르다. 그리고 몸이 성장하면서 변화하고 있는 것을 본인조차도 느끼지 못할 때가 있다. 독서도 마찬가지다. 책을 빨리, 많이 읽는다고 해서 똑똑한 사람이 되는 건 아니다. 책을 읽고 머리로만 깨우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책으로 쌓은 지식과 견문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빛을 발하기 때문에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모든 운동은 책에 기초한다》에 수록된 『세계상으로서의 책』이라는 글은 ‘서문의 후속편’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츠바이크는 이 글에서도 책과 독서를 각각 ‘축전지’와 ‘정신적 힘’에 비유하는데, 이 문장이 끝내주게 좋다.

 

 

 책은 전류를 비축한 축전지와 같이 우리에게 연결된 채로 내부에서 계속 작용하며 무한히 흐르는 정신적 힘에 늘 다시 불을 붙이는 역할을 한다. 언제까지나 지치지 않는 그것은 우리 지식의 저장고이자 영원한 완성이란 없는 건축물인 세계상을 쌓아 올리는 진짜 벽돌이다.

 세계는 확장되기 때문에 점점 압축되거나 요약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리고, 우리는 모든 것을 직접 보고 관찰할 수 없으므로 부지런히 책에 담긴 수많은 타인의 밀도 높은 견해를 스스로에게 날라야 한다. 

 

 (『세계상으로의 책』에서, 70쪽)

 

 

요즘 책 좋아하는 사람들은 읽을 만한 책을 소개해주는 서평을 쓰거나 ‘북튜버’로 활동하고 있다. 책과 함께 하는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끼거나 여전히 독서를 부담스러워하는 사람들은 다른 독자가 쓴 서평이나 북튜버 영상을 보면서 ‘간접적으로’ 독서를 체험한다. 물론 그들의 선택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책 읽는 시간을 절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독서는 개인이 스스로 해야 하는 일이다. 무조건 타인의 독서에 지나치게 의존해서 책을 접하면 달면서도 쓴 ‘책의 맛’, 그리고 ‘나’를 성장하게 만드는 ‘책의 힘’을 제대로 느낄 수 없다. 독서는 머리로 하는 운동이다. 이 정신적 운동을 스스로 직접 해보지 않고 남이 알려준 대로 보기만 하면 절대로 자신의 정신을 스스로 성장시킬 수 있는 힘을 키울 수 없다. 츠바이크가 말했던 대로 독서라는 운동을 진지하게 하려면 책 속에 있는 밀도 높은 타인의 견해(또는 지식)를 내 머릿속에 스스로 날라야 한다. 몸으로 하는 운동은 작심삼일에 그치더라도 ‘머리로 하는 운동’은 그만둬서는 안 된다. 책의 힘을 듬뿍 받아 정신이 성장하는 것을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책을 너무 멀리해서 정신이 서서히 둔해지는 것도 의식하지 못한다. 독서를 홀대하는 삶이 무조건 불행해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이런 삶을 사는 사람은 현실의 변화, 자신과 다른 생각들을 받아들이지 못해 혼란스러워한다. 이러면 세상이 즐겁게 보이지 않고, 살아갈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 그들이 유일하게 의존하는 것은 자신의 입맛에 맞는 영상 매체이다.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아주 매끄럽게 만든 영상은 그들에게 삶의 낙이 된다. 이렇다 보니 자신을 불편하게 만드는 세상에 불만을 표출하게 되고, 심지어 자신과 맞지 않는 타인을 위협하거나 파괴하려고 한다. ‘머리로 하는 운동’을 가볍게 여겨선 안 된다. 그 운동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이 달라질 수 있다.

 

 

 

 

 

※ Trivia

 

* 지금 우리 삶에서뿐 아니라 그 어디에서나 책은 모든 지식과 학문의 시작을 이루는 알파와 오메가다. (26쪽)

 

→ ‘삶에서뿐 아니라’를 ‘삶뿐만 아니라’로 고쳐야 한다.

 

 

* 163쪽에 있는 역주

마리 바시키르체프(Marie Bashkirtseff):

우크라이나 출신의 러시아 조각가. 열세 살부터 써 온 일기로 잘 알려져 있다.

 

→ 바시키르체프는 조각 작품도 남겼지만, ‘화가’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삭매냐 2019-07-02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세상에 읽을 책이 없다니...
그야말로 끔찍한 상상이네요 ㅋㅋㅋ

그리하야
싸이러스 브로는 영원한 책쟁이라니깐.

cyrus 2019-07-03 09:15   좋아요 0 | URL
다시 생각해보니 책은 엄청 많은데, 그 중에 내가 읽고 싶은 책이 단 한 권도 없는 상황도 끔찍하네요.. ㅎㅎㅎㅎ

저는 친하게 지내는 사람도 많지 않고, 여러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는 편이 아니라서 혼자서 시간을 보내는 일이 익숙해요. 그래서 책에 대한 애착이 강한 것 같아요. 책쟁이로 살다가 죽으렵니다... ^^

2019-07-03 10: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7-03 11:27   좋아요 0 | URL
제가 (컴퓨터, 모바일) 게임을 많이 하지 않아서 책 아니면 저 혼자 즐길 수 있는 오락거리가 없어요. 어떤 사람은 책에 애착이 많은 제 인생이 별나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요, 저는 오히려 책과 함께 하면서 지낸 덕분에 게임, 유흥, 육욕이 주는 쾌락에 빠지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