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유대인’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 어떤 이미지가 떠올리나요? 저는 유대인 하면 탈무드(Talmud)와 홀로코스트(Holocaust)가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아!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나치 독일의 유대인 말살 정책을 피해 가족들과 함께 숨어 살았던 안네 프랑크(Anne Frank)도 있네요. 우리는 영화나 역사책을 통해 과거 유대인이 겪은 아픔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나치는 게르만인의 우월성을 바탕으로 한 민족주의를 합리화시키기 위해 수백만 유대인을 학살했습니다. 홀로코스트는 원래 ‘전쟁으로 인해 일어난 대참사’를 뜻하는 단어였어요. 그러다가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뜻하는 고유명사가 되었습니다.
* [절판] 노먼 핀켈슈타인 《홀로코스트 산업: 홀로코스트를 초대형 돈벌이로 만든 자들은 누구인가?》 (한겨레출판, 2004)
* [품절] 노먼 핀켈슈타인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분쟁의 이미지와 현실: 시오니즘 지식 권력은 어떻게 진실을 왜곡했는가?》 (돌베개, 2004)
* [절판] 미하엘 브레너 《다윗의 방패: 시온주의의 역사》 (들녘, 2005)
그런데 이 ‘홀로코스트’라는 고유명사를 내세우면서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을 은폐하는 유대인 세력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유대주의(Judaism)라고도 일컫는 시온주의(Zionism)를 신봉합니다. 시온주의가 처음 등장했을 때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은 잃어버린 선조의 땅을 되찾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시온주의자들은 중동 지역을 지배했던 영국이나 미국과 같은 제국주의 국가에 의존하면서 그들로부터 유대인으로서의 민족 정체성을 인정받으려고 했습니다. 지금도 대다수 유대인은 유대 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시온주의를 지지하면서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을 옹호하거나 폭력적인 점령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나치가 부활한 듯한 이스라엘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점령을 비판했다가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망각한 ‘반유대주의자’로 몰릴 수 있거든요. 서구의 유대계 출신 지식인들이 몸을 사리는 이유입니다.
* 주디스 버틀러 《위태로운 삶》 (필로소픽, 2018)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는 팔레스타인을 점령하려는 이스라엘의 군사 정책 정책을 정당화하는 ‘진리’로 행세하는 시온주의에 대해 의문을 제기합니다. 《위태로운 삶》에 수록된 『반유대주의라는 비난: 유대인, 이스라엘, 그리고 공적인 비평의 위험부담』은 이스라엘과 친 이스라엘 시온주의자들에 대한 공적 비판을 뭉뚱그려 반유대주의라고 오명을 덮어씌우는 발언의 문제점을 검토한 글입니다.
그렇다면 유대주의를 비판적으로 분석한 버틀러의 글과 페미니즘은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버틀러는 핍박의 세월을 오랫동안 견뎌온 피해자로서의 민족 정체성을 쉴 새 없이 강조하는 시온주의를 비판합니다.
유대인이 언제나 희생자로만 여겨지는 존재일 수는 없다. 그럴 때도 분명 있지만, 어떤 때는 분명 그렇지 않다. 어떤 정치적 윤리도 유대인이 희생자의 지위를 독점한다는 가정에서 출발할 수는 없다. “희생자”는 재빨리 바뀔 수 있고 순간순간 바뀌어서, 버스에 탄 자살폭탄 테러리스트에 의해 살해된 유대인일 수 있고 이스라엘의 총격에 무참히 살해된 팔레스타인 어린이일 수도 있다. (151~152쪽)
미국 내에 활동하는 친 이스라엘 시온주의자들은 실제 다른 소수민족에 비해 불이익을 거의 당하지 않았는데도 미국 사회 안에서 자신들의 민족 정체성을 ‘희생자’로 꾸몄습니다. 앞에서 인용한 문장을 봤을 때 작년에 읽은 《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이 생각났어요.
* [레드스타킹 여섯 번째 책] 권김현영, 루인, 정희진, 한채윤 《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 (교양인, 2018)
이 책에서 정희진은 ‘피해자’로서 여성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여성 운동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타자와 연대하는 페미니즘을 제안합니다. 피해자 정체성이라는 ‘땔감’을 구하면서 가해 세력을 처벌하는 여성주의와 시온주의는 각각 여성과 유대인도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상황을 인식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피해자 중심주의의 여성 운동과 시온주의 운동은 ‘피해자의 말이 곧 진리’이며 피해자 편을 들라는 뜻으로 오용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피해자의 지위를 독점하면서 이스라엘을 옹호하는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시온주의 운동의 한복판에서 복잡 미묘한 유대인 문제를 예리하게 들여다본 버틀러의 통찰이 용기 있게 느껴졌습니다.
* 강영안 《타인의 얼굴: 레비나스의 철학》 (문학과지성사, 2005)
* 콜린 데이비스 《처음 읽는 레비나스》 (동녘, 2014)
* 임옥희 《주디스 버틀러 읽기》 (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06)
책의 마지막 글인 『위태로운 삶』에서 버틀러는 독일의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의 타자 윤리학을 바탕으로 타자를 인정하지 않고, 타자에 대한 공적 애도가 무시되는 문제를 분석합니다. 대부분 사람은 낯선 타자를 만나면 공포와 불안을 느낍니다. 이 불안한 감정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은 무력을 앞세워 타자를 공격합니다. 레비나스는 이러한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투쟁하기 위해서 타자 윤리학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필자는 이 글을 읽기 전에 레비나스의 철학에 대해서 알아봤는데요, 솔직히 말해서 지금도 잘 모르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위태로운 삶』이 제일 어렵게 느껴졌어요. 이번에 제가 쓴 후기가 내용면에서 빈약하기 때문에 제 후기에 만족스럽지 못한 분들이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런 분들을 위해서 『위태로운 삶』을 알기 쉽게 설명한 《주디스 버틀러 읽기》[주]를 권합니다.
‘《위태로운 삶》 읽기’ 마지막 모임에 온 5명의 레드스타킹 멤버들은 『위태로운 삶』의 내용과 상관없이 각자 나름대로 글을 읽으면서 느낀 것들을 자유롭게 말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공독(共讀)을 마무리한 뒤에 다음 달부터 시작하게 될 ‘페미 스쿨’에 대한 논의를 했습니다. 다음 주 월요일에도 이 논의가 이어질 것 같습니다. 레드스타킹이 열심히 준비한 페미 스쿨에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주] 이 책에 ‘옥에 티’가 있는데요, 저자는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이 제시한 ‘호모 사케르(Homo Sacer)’를 ‘호모 사커’라고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