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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농장.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7
조지 오웰 지음, 김기혁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평점 :
《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Down and Out in Paris and London)》은 에릭 아서 블레어(Eric Arthur Blair)가 1933년에 발표한 첫 번째 작품이다. 작가가 된 블레어는 이때부터 필명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 이름은 바로 조지 오웰(George Orwell)이다. 《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줄여서 ‘파리와 런던’)은 오웰의 대표작 《동물농장》과 《1984》에 비하면 인지도가 낮은 편이지만, 사회 비판적인 시선을 유지한 작가로서의 오웰을 이해하려면 《파리와 런던》을 지나쳐서는 안 된다. 조지 오웰이 멸망의 나락으로 떨어질 것 같은 혼란스러운 세계(스페인 내란과 제2차 세계대전이 연이어 일어나고 전체주의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한 1930년대 후반) 한가운데에 우뚝 솟으면서 자란 ‘나무’라고 한다면 이 나무의 ‘씨앗’은 블레어의 모습을 간직한 《파리와 런던》이다. 《동물농장》과 《1984》는 당도(문학적 성숙도)가 높은 ‘열매’라 할 수 있다. 책벌레들은 ‘오웰 나무’에 열린 두 개의 ‘열매’를 너무 많이 먹었다. 같은 열매만 계속 먹을 수 없지 않은가. 그러므로 오웰에 관심 많은 책벌레는 훌륭한 ‘열매’와 ‘나무’를 있게 해준 ‘씨앗’에 주목해야 한다.
1922년에 블레어는 영국의 식민지인 버마(현재 미얀마)에서 경찰로 근무했다. 그러나 5년 뒤에 그는 고국의 제국주의적 행보에 회의를 느껴 경찰 일을 그만두었다. 블레어는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위해 프랑스 파리에 살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개고생하기 시작했다. 그는 파리의 빈민가에서 생활했고, 너무나 가난해서 며칠 내내 쫄쫄 굶을 때가 많았다. 그래도 돈을 벌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들은 다 해봤다. 영어를 가르치는 가정교사부터 시작해서 파리 호텔 안에서 가장 천한 일로 여기는 접시 닦는 일까지 했다. 파리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블레어는 런던으로 건너갔지만, 그의 형편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블레어는 스파이크(부랑자 보호소를 뜻하는 속어)를 전전하는 부랑자 신세였다. 《파리와 런던》은 파리와 런던에서 가난하게 생활했던 블레어의 자전적인 경험이 반영된 작품이다. 《파리와 런던》이 수록된 문학동네 출판사의 번역본에서는 이 작품을 ‘자전소설’로 소개되어 있는데, 사실을 바탕으로 쓴 ‘논픽션(nonfiction)’으로 보는 게 맞다.
그렇다면 왜 《파리와 런던》에 주목해야 할까. 오웰의 첫 번째 작품이라서? 맞는 말이긴 한데, 나는 너무나도 당연한 이유를 언급하고 싶어서 이 글을 쓰는 게 아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파리와 런던》은 블레어가 ‘오웰’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문학의 거목으로 자랄 수 있게 만든 ‘씨앗’이다. 이 작품은 파리의 빈민가 풍경과 런던의 스파이크 내부 모습을 그림처럼 생생하게 눈앞에 펼쳐 놓는다. 오웰은 그곳에 사는 다양한 하층민들과 부대끼며 살면서 그들의 일상생활과 생각을 관찰하듯이 꼼꼼히 들여다본다.
소설의 원제에 들어있는 ‘Down and Out’이라는 표현은 ‘빈털터리’, ‘노숙자 신세’를 뜻한다. 역자는 ‘Down and out’을 ‘따라지 인생’이라고 의역했는데, 이 표현은 작품에 등장하는 가난한 사람들이 처한 상황이 압축돼 있다. ‘따라지 인생’은 남에게 매여 보람 없이 사는 하찮은 인생을 뜻한다. 말 그대로 ‘노예’처럼 사는 인생이다. 오웰은 호텔의 접시닦이가 현대 사회의 노예라고 말한다(275~276쪽). 그들은 하루에 열 시간 또는 열다섯 시간씩 접시를 닦는다. 호텔에 일하는 요리사와 웨이터들은 접시닦이를 반말로 하대하며 온갖 잡일을 그들에게 시킨다.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서 일하고 매일 부당한 처우를 받는데도 접시닦이는 노조를 만든다거나 파업을 시도할 생각을 하지 못한다. 오웰은 ‘따라지 인생’으로 살아가는 저임금 노동자, 걸인, 부랑자에 향한 대중의 편견(‘게으르다’, ‘사회에 무익한 기생충 같은 존재’)을 비판하면서 그들도 장시간 저임금으로 살아가는 ‘인간’이므로 이들이 처한 상황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촉구한다.
《파리와 런던》의 화자는 ‘블레어’지만, 그의 말과 시선은 우리가 아는 그 ‘오웰’과 비슷하다. ‘오웰’이 되려고 하는 블레어는 《파리와 런던》을 통해서 빈부 격차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그 문제에 대한 솔직하고도 비판적 견해를 밝힌다. 투철한 비판 정신에 입각한 오웰의 글쓰기는 《파리와 런던》에서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Trivia
* It was a very narrow street—a ravine of tall, leprous houses, lurching towards one another in queer attitudes, as though they had all been frozen in the act of collapse.
아주 비좁은 거리였다. 문둥병에 걸린 것 같은 높다란 집들이 마치 와그르르 무너지다가 바싹 얼어붙은 듯 서로에게 비스듬히 묘하게 기울어져 협곡을 이루었다. (128쪽)
→ 문둥병은 한센병(나병) 환자를 멸시하는 의미가 반영되어 있는 구시대적인 표현이다.
* 프랑스의 전당포는 처음이었다. 웅장한 석조 정문(물론 ‘자유’ ‘평등’ ‘박애’라고 새겨져 있었다. 프랑스는 경찰서 건물에도 이렇게 쓰여 있다)으로 들어가자 학교 교실같이 넓고 텅 빈 방이 나왔다. (151쪽)
→ 프랑스 국기에 들어있는 적색을 상징하는 ‘Fraternite’를 우리나라에선 흔히 ‘박애’라는 의미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오역이다. ‘Fraternite’는 ‘형제애’를 뜻하므로 ‘우애’로 번역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