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인 조르바》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Nikos Kazantzakis)는 자유인으로 살다 갔다. 실제 삶에서나 문학에서나 그는 자유의 극한 영역을 추구하고 탐문했다.

 

 

 

 

 

 

 

 

 

 

 

 

 

 

 

 

 

 

 

*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열린책들, 2009)

 

 

 

그의 자유로움은 종교적 통념을 넘어섰다고 판단한 그리스 정교회에 의해 파문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그의 육신은 죽어서도 그리스 본토에 안식처를 마련할 수 없었다. 크레타 섬에 있는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물론 자유를 갈망하는 정신은 카잔차키스만의 전유물일 수 없다. 그것은 모든 인간의 소망이다. 그 이유는 자명하다. 자유보다는 억압이, 평화보다는 전쟁이나 폭력적 상황이 넘쳐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여전히 세상은 성소수자들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수 없는 폭력적인 사회다. 특히 동성애자 정체성으로 세상을 살아가던 그/그녀들에게 사회란 폭력이 일상화된 두려움의 대상이다. 퀴어 문화축제는 일 년에 단 하루 성소수자들이 언어와 몸짓, 음악으로 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자유와 해방의 장이다. 그런데 동성애를 ‘문란한 성 문화의 일종’으로 보는 비 성소수자(non-sexual minority)들은 퀴어 축제 소식이 수면 위에 올라올 때마다 어김없이 이런 말을 한다. 성소수자를 보지 않는 것도 개인의 자유다.

 

 

 “성소수자가 누구를 좋아하는 것(성소수자가 퀴어 축제에 참가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이다. 그러나 그것을 보지 않을 권리도 있고, 이 또한 자유다.”

 

 

이렇게 말하는 비 성소수자는 ‘자유’, ‘권리’라는 단어를 억지로 끌어들여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한다. 성소수자의 성적 지향, 즉 섹슈얼리티(sexuality)는 정체성을 포함한다. 따라서 성 정체성(gender identity) 또한 섹슈얼리티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정체성은 인간 내면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으며 ‘나’라고 호명되는 존재를 설명할 수 있게 만드는 고유한 성질이다. 그러므로 정체성이 무엇인지 스스로 질문하는 과정은 존재 이유를 찾는 행위이자 작업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지 못하거나 사회로부터 박탈된 존재는 온전한 ‘나’, 더 나아가 인간으로 성장하지 못한다. 섹슈얼리티와 정체성은 철저히 분리될 수 없다. 성소수자는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산다는 정체성을 가진 채로 존재하고 있다. 이 세상의 누구에게든 사람의 ‘존재’를 반대하고 차별할 수 있는 권리는 없다. 만약 누군가가 그러한 권리가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그 권리를 부여받을 자격이 있는가? 정체성과 섹슈얼리티는 ‘옳고 그름’의 판단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

 

 

 

 

 

 

 

 

 

 

 

 

 

 

 

 

 

 

* 아민 말루프 《사람 잡는 정체성》 (이론과실천, 2006)

 

 

 

개인의 정체성은 종교, 인종, 민족뿐 아니라 언어, 생활방식, 신념 등이 어우러져 형성된다. 따라서 특정 개인이나 집단의 정체성을 한마디로 규정하기 어렵다. 그런데 어떤 사회나 집단에 대한 소속감이 투철한 사람들은 상대방에게 한쪽의 정체성(사회나 집단의 다수를 차지하는 정체성)을 추구하도록 강요하거나 강제로 편입시킨다. 그런 사람들은 상대편 사람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려고 하지 않고, 상대방의 호소와 고통을 느껴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단지 ‘우리 편’이라는 관점 그리고 ‘우리’라는 이름으로 호명하게 만드는 단일한 정체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콩쿠르상 수상 작가 아민 말루프(Amin Maalouf)는 다중성을 인정하지 않는 정체성을 ‘사람 잡는 정체성’이라고 말했다. 그는 아랍인 출신이지만 기독교인이다. 모국어는 아랍어이지만 프랑스어로 글을 쓴다. 복잡한 정체성을 가진 작가는 자신을 어느 쪽에 더 가깝냐고 묻는 ‘집요한 질문’에 오랫동안 시달렸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종교, 민족, 인종이라는 틀에 갇힌 고정불변의 정체성이 저지르고 있는 많은 갈등과 비극을 분석한다.

 

상대방의 정체성을 거부하거나 박탈하는 것을 자유와 권리라는 이름으로 행사하는 태도는 ‘고상하게 포장한 권위주의’다. 비 성소수자는 성소수자를 바라볼 때 과도한 의미를 부과하는 것을 경계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숨겨야 하는 그들이 얼마나 큰 고통에 시달려왔을 지를 헤아려야 한다. 이번 달 29일 토요일, 대구에서 열한 번째 퀴어 축제가 진행된다. 매년 퀴어 축제가 열리는 날이면 동성애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축제를 막기 위해 거리를 행진한다. 퀴어 축제에 참여하는 성소수자들은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축제의 장에 들어오는 순간, 그들 모두 ‘자유’가 된다. 단 하루만 자유를 마음껏 누리려고 하는데 두려울 게 뭐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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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05 01: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6-05 15:17   좋아요 1 | URL
토니 쿠시너라는 이름을 처음 들어봐서 인터넷에 검색해봤어요. 검색 결과를 확인하다가 쿠시너의 <미국의 천사들>의 퀴어링에 대한 연구 논문을 발견했어요. ***님 덕분에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