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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0호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10월
평점 :
“플라스틱 포크로 비행기 안에서 콩을 찍어 먹으며 파시즘을 걱정하는 사람.” 영국의 신문사 <선데이 타임스>가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에게 보낸 찬사이다. 이 문구는 에코의 산문집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뒤표지에 있다. 유쾌한 성격의 에코는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다. 이 책에서 에코는 자신이 겪은 경험들을 바탕으로 어리석은 세상을 비틀어 보고 있다. 그는 세상의 어리석음에 분노하는 것이라면 웃으면서 화를 낼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세상의 그 모든 어리석음에 대해 불같이 화를 내는 것은 어리석음의 목록을 더 늘어나게 해줄 뿐이다. 짧은 글로 이런 얘기를 쉴 새 없이 풀어내는 에코이지만 그 안에는 허를 찌르는 촌철살인의 웃음이 있다. 글 속에서 그는 여러 표정을 지닌 사람으로 나타난다. 그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엉뚱한 질문을 던지다가 피식 웃음이 나오는 대답을 한다.
에코는 악의적인 일이나 잔혹함에 화가 난다면 웃을 수 없다고 했다. 그의 말이 일리가 있다. 요즘 들어 웃음을 줄어들게 만드는 일들이 많아지고 있다. 온라인에서 의도적이고 악의적인 가짜 뉴스가 급속히 번지고 있다. 공인의 사생활이나 민감한 정책 현안은 물론, 국가 안보나 국가 원수와 관련된 턱도 없는 가짜 뉴스까지 나온다. 요즘의 가짜 뉴스는 과거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넓고 빠르게 퍼진다. 이른 시간 안에 불신과 분열을 조장한다. 또 꼼짝없이 가짜 뉴스의 덫에 걸린 사람을 죽음으로 내몬다. 가짜 뉴스는 표현의 자유 뒤에 숨은 살인자다. 우리는 악의적인 가짜 뉴스를 보고 웃으면서 화를 낼 수 있을까?[주]
에코의 마지막 소설 《제0호》는 에코 특유의 웃음을 생각하면서 읽을 수 없다. 잘 드러나 있지 않다가 어느 순간 일상을 파멸시키는 가짜 뉴스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가짜 뉴스에 현혹되는 과정, 또 그 가짜 뉴스를 만든 인물이 몰락하는 과정을 신랄하게 묘사한다. 안정적인 직업이 없는 글쟁이 콜론나는 창간을 앞둔 신문사 <도마니(이탈리아어로 ‘내일’을 뜻함)> 주필 시메이를 만나게 되면서 창간되지 않을 신문 <제0호> 제작 과정에 투입된다. <제0호> 제작을 위해 자금을 대는 사람은 ‘콤멘다토르 비메르카테’라는 세력가다. 세력가와 주필은 사회 거물들이 궁지로 몰 만한 가짜 뉴스를 만들려고 한다. 주필은 편집 회의에 참석할 때마다 대중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자극적인 기사 작성법을 알려준다. 에코는 이 소설에서 돈벌이나 정치적인 거래를 목적으로 가짜 뉴스를 만드는 황색 저널리즘의 실체를 해부한다.
에코는 20년 전부터 《제0호》을 구상했다.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부패 정치 청산의 물결이 일던 1992년 이탈리아다.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이 출간된 연도는 1992년이다. 재미있게도 이세욱 씨가 두 권의 책을 번역했다. 《제0호》를 읽으면서 어디서 본 듯한 기시감을 느꼈다. 《제0호》에 콜론나는 신문을 함께 만드는 동료들에게 신문 기사를 반박하는 독자의 편지에 반박하는 기술을 알려준다. 그때 콜론나가 반박의 기술을 설명하면서 언급한 편지글은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의 『반박을 반박하는 방법』에 나왔던 글이다. 서양 고전문학 작품과 에코 자신이 과거에 썼던 글 일부를 패러디한 묘사는 독자들에게 쏠쏠한 재미를 안겨준다.
죽음을 앞둔 에코는 《제0호》를 쓰면서 익살스럽게 웃어보지만, 그 웃음이 죽음의 두려움을 달래는 자기 위안이었는지, 아니면 소설의 분위기가 너무 무거울까 봐 애써 웃어주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소설에 간간이 나오는 에코의 유머를 보면 애잔한 마음마저 든다. 《제0호》는 에코의 웃음과 슬픔이 교차하고 있는 소설이다.
이세욱 씨는 《제0호》를 ‘음모론에 잘 빠지는 기자와 나쁜 저널리즘을 보여 주는 익살스럽고 풍자적인 이야기’라고 소개한다. 그러나 나는 소설에서 시도한 에코의 풍자를 웃으면서 볼 수가 없었다. 가짜 뉴스를 곧이곧대로 믿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헛소리하면 웃으면서 화를 낼 수 있지만, 가짜 뉴스로 인해 점점 더 파열음을 내는 현실을 보면 그저 화가 날 뿐이다. 가짜 뉴스가 지배하는 세상은 인간의 악의가 얼마나 잔혹하고 야비한지 보여준다. 나는 그런 세상을 향해 정색하면서 화를 내는 방법을 선택하겠다. 웃으면서 화내는 에코의 방식으로 여태 즐겨왔으니 이제는 정공법으로 진지하게 정색할 때다.
[주] 이세욱 옮김,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 1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