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불의의 사고로 다치거나 병이 들면 법률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장애인이 된다. 내년이면 우리나라에 ‘장애인’이라는 용어가 나온 지 30주년이 되는 해이다. 1981년에 ‘심신장애자복지법’이 제정되면서 처음엔 ‘장애자’라는 말이 나왔다. 그러나 일부에서 ‘자(者)’가 ‘놈’을 뜻한다며 이의를 제기하고 나서면서 1989년 ‘장애인복지법’으로 개정돼 현재 ‘장애인’이 공식 용어가 되었다.

 

1987년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라는 단체에서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가 친구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장애우’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하지만 장애우는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정식으로 기재되지 않은 용어이다. 그런데도 지금도 여전히 언론과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는 이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또한 ‘장애우’는 장애인에 대한 또 다른 편견을 만든다. 비장애인은 ‘장애우’의 의미를 ‘비장애인에게 도움받아야 하는 친구’ 정도쯤으로 가볍게 인식할 수 있는데, 이러한 인식에는 장애인이 비주체적이고 의존적인 존재라는 전제를 담고 있다. 그리고 ‘장애우’는 장애인 자신을 표현하는 1인칭으로 쓸 수가 없다. 장애인이 ‘나는 장애우입니다’라고 말하면 ‘장애가 있는 나’를 표현한 건지, 아니면 ‘장애가 있는 친구’를 표현한 건지 알 수 없다. ‘친구’는 혼자가 아닌 상대가 있어야 쓸 수 있는 것인데, ‘나는 장애우입니다’라는 말은 문법상 맞지 않다.

 

 

 

 

 

 

 

 

 

 

 

 

 

 

 

* 수전 웬델 《거부당한 몸》 (그린비, 2013)

 

 

 

장애인들은 무심코 들리는 말 한마디에 깊은 상처를 입는다. ‘비장애인들도 하기 힘든 일을 장애인이 해냈다’라는 찬사 속에도 ‘장애인은 비정상이다’ 또는 ‘역경을 극복하지 못한 장애인은 불행하다’라는 편견이 들어있다. 《거부당한 몸》(그린비)은 장애인을 대하는 비장애인들의 편협한 인식에 문제를 제기하는 책이다. 장애인들이 무언가를 해냈을 때 언론과 미디어는 그들을 ‘인간 승리’ 또는 ‘역경을 극복한 영웅’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면서 칭송한다. 이런 ‘장애인 영웅 신화’는 1%의 ‘성공한 장애인’과 그렇게 되지 못한 99%의 장애인들 간의 거리감을 느끼게 만든다. ‘장애인 영웅 신화’에 익숙한 비장애인들은 ‘장애’를 모든 장애인이 극복해야 하는(극복할 수 있는) ‘장벽’으로 잘못 인식한다. 장애인은 신체적으로 불편함을 가진 사람일 뿐 평생 고통 속에 살아가는 불행한 사람이 절대로 아니다.

 

 

 

 

 

 

 

 

 

 

 

 

 

 

 

* 수전 손택 《은유로서의 질병》 (이후, 2002)

 

 

 

‘기형’을 장애의 의미에 결부시켜 쓰는 경우가 많다. 기형은 의학적인 용어로 신체의 선천적 형태 이상을 가리킨다. 의학계에서는 기형이란 용어 대신 ‘선천성 이상’ 또는 ‘희귀난치성 질환’이라는 표현을 권장하고 있다. 그런데 선천적 질환(illness)으로 인해 생긴 장애를 ‘질병(disease)과 구분 없이 사용하면 장애 경험이 없는 비장애인은 장애를 ‘건강하지 않은, 치유가 어려운 상태’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비장애인은 질병과 장애에 대한 두려움을 크게 느낀다.

 

내 몸에 있는 질병은 몸 전체가 느끼는 생생한 고통이지만, 나와 무관한 질병은 단어로만 존재하는 관념일 뿐이다. 내가 경험하지 않은 질병은 ‘은유’를 동반한다. 불행을 동반하는 불치병일수록 은유는 부정적인 어휘가 된다. 그래서 장애는 ‘건강하지 않은’ 개인의 문제로, 건강은 당위가 아니라 욕망이 된다. 건강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장애가 무서워서’ 건강해지고 싶은 것이다.

 

수전 손택(Susan Sontag)은 자신의 책 《은유로서의 질병》(이후)에서 ‘질병은 질병일 뿐, 질병은 저주가 아니며, 신의 심판도 아니므로 곤혹스러워할 필요가 없으며,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녀는 암 투병을 계기로 그녀는 암이라는 질병이 죽음의 은유로 사용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암이 누구나 올 수 있는 평범한 질병으로 바뀐 오늘날, 이러한 은유의 무게감을 가장 많이 느끼는 이들은 아마 장애인들일 것이다. 비장애인의 편견 속에서 장애는 질병 자체와 동일시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실제로 많은 장애가 통증이나 합병증을 수반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질병과 그에 따른 통증을 장애에 무조건 끼워 맞춰서 설명하는 것은 장애인을 타자화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장애인의 몸은 ‘병들고 아픈 몸’으로 남게 된다. ‘병들고 아픈 몸’은 ‘질병과 장애가 없어서 건강한 정상인의 몸’의 범주에 속하지 않으며, 비장애인은 ‘정상인의 몸’을 가지기 위해 장애와 질병을 ‘극복해야 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여기서 장애는 ‘질병’이라는 은유로 바뀐다. 장애인은 태어날 때부터 건강하지 않았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아픔과 불편함을 참으면서 살아야 한다. 그래서 비장애인은 질병을 극복하지 못한 장애인을 볼 때마다 측은지심을 느끼고, 보호자나 간병인 없이는 혼자 살 수 없다고 단언한다. 그들은 장애가 있는 삶을 ‘살아갈 가치가 없는 삶’이라고 믿는다. 이렇듯 현실을 추상화하고 결과로서의 은유는 장애 경험과 장애인의 삶을 온전히 이해하는 데 역효과를 일으킨다.

 

장애는 저주가 아니며, 불행을 안겨주는 질병도 아니다. 건강한 몸으로 장수를 누리면서 살 수 있다면 그만큼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지만 우리의 몸은 분명히 한계가 있다. 우리 모두는 영원히 젊고, 아프지 않고, 팔팔한 몸을 유지하면서 살아갈 수는 없다. 앞서 말했듯이 우리는 누구나 장애인이 될 수 있다. 장애에 대한 상투적 표현이나 은유에 물들지 않으려면, ‘장애를 가진 다양한 몸’과 그 몸에 대한 여러 가지 경험을 많이 이야기해야 한다. ‘장애’를 이야기하면서 ‘몸의 차이’가 ‘차별’로 구조화된 인식을 해체할 수 있는 좋은 연구들이 많이 나올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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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8-12-11 1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습니다 우린 누구나가 다 장애인이 될 수 있습니다!

cyrus 2018-12-11 17:05   좋아요 1 | URL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공부하는 통합 교육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아이를 장애인과 비장애인으로 구분해서 가르치면, 비장애인 학생은 장애에 무지한 상태로 자라게 됩니다. 장애를 낯설어하고, 장애인과 대화하는 것을 어려워해요. 제가 그런 환경에서 자라서 그런지 장애인 친구를 알게 되기 전까지 그렇게 장애에 대한 막연한 편견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장애인의 경험에서 나오는 지식이 정말 중요합니다. 비장애인으로 살다가 장애인이 된 사람들에게는 그런 지식이 ‘삶의 지혜‘가 되거든요. ^^

카알벨루치 2018-12-11 17:15   좋아요 1 | URL
미국이나 선진국은 그런 교육적 환경이 가능한 것 같은데 , 그것도 교육한다고 무조건 되는건 아닌 것 같고 학부모의 인식과 의식의 변화가 가장 중요한게 아닐까 생각됩니다

우리나라의 학부모의 의식이 그런 배려가 생길려면 무거운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요! 학부모나 교육의 일선에 선 사람들, 아니 모든 이에게 필요한 것 같아요!

이전에 어떤 분이 장애인화장실에다 물건을 쌓아 창고로 활용했던 경우를 본 적이 있었는데 장애인학교 교사가 그걸 목격하고는 항의를 하더라군요 그때 제가 깜짝 놀랬지요 장애인에 대한 생각을 전혀 못하고 무심하게 넘겼던 저의 무신경함을 반성했더랬어요!

cyrus 2018-12-11 17:33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사회가 빨리 변하기 때문에 장애인을 위한 정책을 만드는 것도 신중하게 해야 하고, 정책 하나 생각하는 것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려요. 또 살면서 익숙하게 느꼈던 인식을 확 바꾸는 것도 쉽지 않아요.

2018-12-11 13: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12-11 17:13   좋아요 0 | URL
맞아요. 장애학을 공부하면 내 몸의 한계를 이해하게 되고, 장애인을 ‘차별받고, 사회에서 분리해야하는 존재’로 만드는 사회구조 전체를 볼 수 있어요. 정말로 이런 사회구조를 조금이라도 알게 되면 ‘장애’라는 말을 함부로 쓰면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장애는 ‘남의 일‘이 아닙니다.

2018-12-12 00: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12-12 17:01   좋아요 1 | URL
<거부당한 몸>을 읽기 전에는 장애인들에게 ‘영웅’이라고 찬사를 보내는 것에 문제가 있다고 느끼지 않았어요. 저는 그냥 그런 찬사가 당연하다고 생각했어요. 이 책을 보면서 제가 장애와 장애인을 너무 막연하게 생각했다는 걸 알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