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문학은 약 천 년의 역사를 가졌다. 러시아 문학에 대해서 논하면 도스토옙스키나 톨스토이를 가장 많이 떠올릴 것이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라는 제목으로 잔잔한 어조로 우리의 마음에 위로를 주는 푸시킨은 국민 시인으로 추앙받는다. 19세기 러시아 문학은 푸시킨과 고골, 투르게네프,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체호프로 맥을 이어가면서 그 황금기를 구가한다. 특히 이 시기의 러시아 문학은 사회 현실을 농도 짙게 반영하는 사실주의 문학으로서 세계문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 이정식 《시베리아 문학기행》 (서울문화사, 2017)
* 김진영 《시베리아의 향수 : 근대 한국과 러시아 문학, 1896-1946》 (이숲, 2017)
* 이광수 《유정》 (애플북스, 2014)
민중성이 짙고, 사상성이 강했던 러시아 문학은 일제 강점기 조선의 민중과 지식인들의 마음을 울렸다. 조선 지식인들이 바라본 러시아는 근대화될 조선의 미래가 그려진 ‘유토피아’였다. 생경한 서양문화를 접한 조선 지식인들은 러시아를 ‘제1세계’로 받아들였다. 특히 조선 지식인들은 시베리아를 방랑과 자유의 공간으로 인식했다. 조선인의 러시아행은 피식민지인의 위치로서 겪는 좌절감을 ‘자유와 해방’에 대한 희망으로 바꾸려는 식민지 조선 탈출의 여정이었다.
춘원 이광수는 1914년 6개월 동안 바이칼 호수 근처에 생활한 적이 있으며 시베리아와 바이칼 호수를 배경으로 한 장편소설 《유정》을 썼다. 소설은 양부, 양녀 관계로 살아온 최석과 남정임, 두 남녀의 비극적 사랑을 다루고 있다. 최석은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함께 했던 친구의 친딸 남정임을 맡아 기르는 교사이다. 그러나 정임은 석을 좋아하게 되고, 석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되는 정임과의 애정 관계를 벗어나기 위해 조선을 떠나 시베리아로 향한다. 석이 홀로 향하는 시베리아는 세속의 혼잡한 일, 그것으로부터 비롯된 정신적 고통을 잊을 수 있는 안전지대이다. 그는 그곳에서 자살을 감행한다.
방대하면서도 눈부실 정도로 화려한 러시아 문학의 황금기에 가려진 작가를 꼽자면, 프세볼로트 미하일로비치 가르신(Vsevolod Mikhailovich Garshin)이다. 가르신은 1880년대 중후반에 활동했던 작가였고, 생전에 20여 편의 소설을 썼을 정도로 많은 작품을 남기지 않았다.
* [e-Book] 가르신 《나흘 동안》 (이북코리아, 2013)
* [e-Book] 가르신 《시그널》 (이북코리아, 2017)
* [e-Book] 가르신 《붉은 꽃》 (위즈덤커넥트, 2018)
1877년에 러시아와 터키 간의 전쟁이 일어나자 가르신은 의용군으로 입대한다. 그러나 그는 전장에서 다리에 상처를 입었는데, 이때의 경험을 토대로 쓴 첫 작품이 바로 단편소설 《나흘 동안》이다. 이 작품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소설은 1인칭 시점으로 서술되어 있다. 전쟁 중에 크게 다쳐 대열에서 이탈한 병사가 나흘 동안 겪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다리를 심하게 다쳐 몸을 움직일 수 없는 병사는 나흘 동안 전사한 터키 병사의 시체 옆에서 지내게 된다. 병사는 시체가 썩어가는 장면을 눈앞에 보면서 전쟁의 참상을 깨닫는다.
사내에게는 이미 얼굴이 없었다. 뼈에서 밀려 내린 것이다. 나도 몇 번이나 두개골을 손에 잡아본 일이 있고, 머리의 표본을 여러 개 만든 일이 있지만, 이 무서운 해골의 웃음은, 영원한 웃음은, 여태까지 느끼지 못한, 기분이 나쁘고 추악한 것으로 느껴졌다. 반짝이는 단추가 달린 군복 차림의 이 해골은 나를 몸서리치게 했다.
‘이것이 전쟁이다. 이것이 전쟁의 모습이다.’
나는 생각했다.
(가르신, 《나흘 동안》 24쪽)
소설은 전사자의 시체가 썩어가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민중이 희생당하는 전쟁의 참상을 극대화한다. 가르신은 이 데뷔작 한 편으로 명성을 얻는다. 그러나 그의 전성기는 오래 가지 못한다. 그는 정신 발작에 시달렸고, 정신병원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붉은 꽃》은 작가의 정신병원 입원 경험을 토대로 한 단편소설이다. 이 작품은 정신병원 내부의 음울한 풍경과 분위기가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 작품의 주인공 역시 군인인데, 그는 자신을 병원을 정기적으로 점검하는 차르(Tsar, 러시아 황제)의 감독관이라고 주장한다. 병원 관계자는 이 군인을 정신병자로 규정하고, 그를 독방과 비슷한 병실에 강제로 보낸다. 군인은 의사와 면담하면서 자신과 같이 불행한 사람을 고문하고, 가둬 두기만 하는 감시 보호 체제의 기능에 의문을 드러낸다. 그러나 의사는 그의 말을 ‘정선이 불안정한 환자’의 헛소리로 치부하고, 대충 흘려 넘긴다.
시간이 지날수록 군인은 범상치 않은 언행을 한다. 자신은 ‘보이지 않는 공’의 형태 속에 있고, 자신이 그 공의 중심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는 공이 부여하는 힘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고 확신한다. 군인은 정신병원 내부 안에 있는 정원에 핀 ‘붉은 꽃’에 집착한다. 그는 이 붉은 꽃에서 ‘신비하고 강한 힘의 흐름’을 느꼈다면서, 언젠가는 꽃이 세상을 파괴할 것으로 생각한다. 군인이 보기에 붉은 꽃에는 신에게 대항하는 사악함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군인은 붉은 꽃에 사로잡혀 망상과 환상에 끊임없이 시달린다. 결국, 그는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꽃을 제 손으로 파괴하기로 결심한다. 군인은 기어이 꽃을 꺾는 데 성공하지만, 다음 날 아침에 숨을 거둔다. 그토록 파괴하고 싶었던 꽃을 손에 꼭 쥔 채. 그의 얼굴은 무척 평화로워 보인다. 군인에게는 꽃을 파괴하는 일이 본인이 만족할 수 있는, 자유와 해방을 찾기 위한 ‘의무’였을 것이다. 그런데 ‘정상’의 위치에 있는 의사들, 그리고 작품 밖에 있는 독자의 시선에는 그의 행동은 ‘비정상’으로만 보일 뿐이다. 정상과 비정상으로만 나누는 이분법적 판단은 개인이 자유와 해방을 찾는 방식을 일차원적으로 보게 만든다. 소설은 인간의 사소한 행위마저 일차원적으로 보는 ‘정상-비정상’으로 선을 그은 경계를 허물고 비웃는다. 이러한 도발적 글쓰기는 주류의 경계에 벗어난 ‘광인’이라면 할 수 있는 방식이다.
가르신도 《유정》의 최석, 그리고 《붉은 꽃》의 병사처럼 죽음을 숨 막히는 세상에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최후의 탈출구로 여겼던 것일까. 가르신은 계단에 몸을 던져 자살을 시도했고, 부상 후유증에 시달리다가 33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 심현정, 이은희 옮김 《세계 단편소설 베스트 37》 (혜문서관, 2012)
《시그널》은 가르신 사후에 발표된 단편소설이다. 이 작품의 결말은 《나흘 동안》과 《붉은 꽃》과는 다르게 감동적인 여운이 있다. 《세계 단편소설 베스트 37》에 ‘신호’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