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쾌락 변태에 대하여 - 억눌리고 은밀하게 숨겨진 우리 내면의 악의 본능
엘리자베트 루디네스코 지음, 문신원 옮김 / 에코의서재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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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년. 한 남자가 감옥과 정신병원에서 갇혀 지낸 세월이다. 그는 여성을 유괴해 채찍으로 때리고 그 상처에 촛농을 떨어뜨리는 등 가학 행위를 저질러 감옥에 갔다. 이미 그는 매춘부를 고문하고 학대한 죄로 투옥된 적도 있었다. 남자는 수차례 수감생활을 하면서도 섹스를 즐겼으며 자신의 끔찍한 경험들을 책으로 남겼다. 그의 책은 모두 금서로 지정되었다. 당시 그의 이름이 얼마나 유명했는지 짐작이 간다. 그 남자의 이름은 마르키 드 사드(Marquis de Sade). 그의 이름은 지금도 ‘사디즘(sadism)이라는 용어 속에 남아 있다. 사디즘은 성적 대상에게 고통을 줌으로써 성적 쾌감을 얻는 변태성욕, 즉 도착증의 한 형태이다.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쓴 소설가 D. H. 로렌스(David Herbert Lawrence)는 ‘추악한 사랑은 신이 인류에게 준 최고의 장난’이라고 말했다. 이는 인간의 마음속에는 도착증이 숨어있다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감추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성적 쾌락을 느끼기 위해 이성과 욕망의 세계를 오간다. 도착증은 소수의 변태가 일으키는 이상 행동이 아니다. 인간 사회 어디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이다. 도착증은 우리가 끊임없이 감추려고 하는 어두운 내면이다.

 

자크 라캉(Jacques Lacan)이 이끈 파리 프로이트 학파의 일원인 정신분석학자 엘리자베트 루디네스코(Elisabeth Roudinesco)는 이성과 도덕을 넘어선 도착증의 기원을 추적한다. 중세 시대 기독교에서 모든 성적 쾌락을 죄로 여기기 전까지 육신의 고행에서 비롯된 성적 쾌락은 정신적 해방을 주는 실천 행위였다. 수도사들은 스스로 육체를 훈육하고 통제하는 극단적인 고행(금식, 채찍질, 오물 삼키기)을 통해 각종 욕망으로부터 정화되어 영적 깨달음과 구원의 길로 나아가는 축복을 경험할 수 있다고 믿었다. 계몽주의의 시대가 오면서 도착증을 ‘비정상’으로 규정하는 과학자들의 분류가 대중의 의식에 침투했다. 과학은 ‘이성’이나 ‘정상’이라는 이름으로 자위, 남색, 사디즘, 마조히즘(masochism)을 즐기는 개인들을 ‘변태’로 낙인찍는다. 루디네스코는 개인의 성적 욕망을 비정상적인 것으로 몰아붙여서 병리적인 증상으로 만드는 지식의 권력도 도착적인 억압이라고 주장한다.

 

도덕적 명령으로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를 억누르게 했던 권력은 인간성을 심각하게 짓밟는 도착적 상황을 연출한다. 아우슈비츠 수용소(Auschwitz Birkenau)는 ‘도착적 공간’이다. 이 끔찍한 공간 속에서 일어난 나치즘(Nazism)의 홀로코스트(holocaust)는 국가의 이성뿐만 아니라 인간성을 타락하게 만든 도착적인 범죄이다. 놀랍게도 홀로코스트를 저지른 아우슈비츠의 살인마들은 ‘정상적인’ 인간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일으킨 학살 행위를 부정하거나 아무런 악의적 동기가 없었다고 주장한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유대인 학살을 지휘했던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을 새로운 유형의 범죄자, 즉 ‘평범한 악(banality of evil)’을 지닌 인물로 평가했다. 그는 범죄 의도가 없었고, 과격한 나치주의자도 아니었다. 하지만 옳고 그름을 판단하거나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에 대한 성찰이 전혀 없었다. 악의 근원이 평범한 곳에 있듯이 도착적인 심리도 평범한 모습이다. 루디네스코가 갈파했던 ‘평범한 도착(倒錯)’은 불편하지만 부인할 수 없는 진리다.

 

정도를 크게 벗어난 범죄 수준의 경우를 제외하면 어느 정도의 도착증은 언제든 깨어날 수 있는 잠자는 욕망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불쑥 튀어나올지 모르는 평범한 욕망을 통제하고 제거할 수 있을까? 쉽지 않은 일이다. 역설적으로 개인의 도착증을 근절시키겠다는 국가의 거국적 담론은 ‘정상’과 ‘비정상’을 규정하면서 인간행동을 억압하고 통제했다. 심지어 누구를 살게 하고 누구를 죽게 할 것인지를 정하는, 극단적인 이분법적 도식이 만들어진다. ‘평범한 도착’보다 더 위험한 것은 가해자의 폭압을 폭압으로 느끼지 못하는 도착적인 사회이다.

 

 

 

 

 

※ Trivia

 

번역이 썩 좋지 않다. 아마도 원서의 문장을 직역해서 그런지 호흡이 긴 문장이 많은 편이다. 독자를 지치게 만드는 원인이다. 107쪽에 독일의 정신의학자 크라프트에빙(Kraft-Ebing)의 저서 『Psychopathia Sexualis』(1886)의 제목을 ‘성적 사이코패스’라고 번역했다. ‘Psychopathia’는 ‘정신병리’ 또는 ‘정신병질’을 뜻한다. 사이코패스(Psychopath)반사회적 인격장애증을 앓고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크라프트에빙이 자신의 책에 다룬 ‘정신병리’에는 동성애, 사디즘, 마조히즘 등이 포함되어 있다. 그는 이성애에 위반하는 섹슈얼리티를 병리적인 변태성욕으로 정의했을 뿐 타인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데서 생기는 인격의 문제로 보지 않았다. 물론, 독일어 사전에 있는 ‘Psychopath’도 ‘정신병리’라는 뜻을 가진 단어이다. 그러나 정신병질 환자 모두 사이코패스라고 볼 수 없다. 크라프트에빙이 정신병질 증상으로 분류했던 동성애가 오늘날에는 정상적인 성적 지향으로 인정받았다. 동성애가 부도덕한 성적 지향이라고 해서 사이코패스라고 단정할 수 없다. 크라프트에빙의 책 제목을 ‘성적 사이코패스’라고 번역해서 소개한다면 완전히 폐기 처분해야 할 성소수자에 대한 구시대적 편견을 다시 불러일으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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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20 12: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8-20 23:26   좋아요 0 | URL
돈이 많으면 일단 책을 최대한 많이 보관할 수 있는 집 한 채를 마련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원하는대로 책을 사고 싶습니다.. ㅎㅎㅎ

오늘 페미니즘 모임에 욕망에 관한 얘기가 나왔어요. 제 욕망의 대상이 책이라고 말했는데 멤버들은 욕망이 너무 건전하다고 말하더군요.. ^^;;

레삭매냐 2018-08-20 1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어딘가에 사두고 읽지 못하고
있는 책 중의 하나네요.

제목부터 참 거시키하여서 ㅋㅋㅋ

cyrus 2018-08-20 23:28   좋아요 0 | URL
잘 보관해두세요. 번역은 좋지 않지만, 주제나 내용이 흥미롭습니다. 십 년 전에 나온 책이라서 언제든지 절판될 수 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