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된 인간들 - 한국의 산신 그 신화와 역사를 담다 문화와 역사를 담다 5
박정원 지음 / 민속원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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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인간에게 길흉화복을 내린다고 믿어지는 초자연적인 존재이다. 조상들은 산에 신이 살고 있다고 믿어 산신제를 올렸다. 산신은 산 혹은 그 산의 영역에 속한 모든 자연물을 관장하는 신령이다. 서양인에게 산은 신을 만나는 다리 역할을 했다. 그리스인들은 높다란 언덕에 신전을 지었고, 기독교인들은 높은 산에 올라 하느님을 만났다. 그와 달리 동양인에게는 산 자체가 숭배 대상이었다. 특히 우리 민족에게 산은 아름다움의 대상만이 아닌 살아 숨 쉬는 신성한 존재였다. 조상들은 위대한 장수나 임금은 죽어 산신이 되어 마을을 지키고 나라를 지킨다고 믿었다. 지금도 사찰에 가면 산신을 모시는 장소가 있다. 그 앞에서 저마다 소망을 담아 간절한 기도를 올리는 사람들이 있다. 단군 역시 산신이 되었다는 기록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산신은 인격신이 아닌 민중의 정신적 지주였다.

 

그러나 산신은 토속신과의 혼용, 융합과정 등 여러 세월을 거치는 동안 미신의 산물로 퇴색된다. 급격하게 불어 닥친 도시화 물결 속에서 산신과 관련된 상징물들은 미신을 타파한다는 이유로 쓸쓸히 방치되거나 폐기됐다. 이제 남은 것이라곤 별로 없다. 예전에 있었던 산신 문화를 전해줄 수 있는 고령의 마을 사람들마저 사라지고 나면 기나긴 역사와 조상의 얼이 담긴 산신 문화의 명맥이 잊힐 것이다.

 

「월간 산」의 박정원 기자가 펴낸 《신이 된 인간들》(민속원, 2018)은 이처럼 사라져 가는 산신 문화의 흔적을 찾아내는 한편 조상들의 마음속에 담겼던 기원을 엿볼 수 있는 책이다. 저자는 신화 자체는 물론 전설과 민담에서 화석으로 남은 산신의 조각을 모아 잃어버린 산신 문화의 원형을 추적한다. 문헌상으로 산신의 시원은 단군 신화에서 찾을 수 있다. 단군은 우리나라 초대 산신이다. 조상들은 자연에 대해 외경심을 갖고 있었다. 특히 자기가 사는 마을 근처의 산과 강, 언덕에는 마을을 지켜주는 자연신이 있다고 믿었다. 애초에 자연신은 여성 산신이었으나 농경 중심 정착 사회와 유교 문화가 결합한 이후로 남성 산신이 숭배의 대상이 됐다.

 

민중으로부터 존경받는 인물은 죽어서도 산신으로 추앙받았다. 전설에 따르면 단종의 영혼이 백마를 타고 태백산으로 와서 산신이 되었다고 한다. 단종은 문종의 뒤를 이어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즉위했다. 그러나 3년 뒤 숙부인 수양대군(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청령포로 유배되어 비운의 죽음을 맞이했다. 영월에 유배됐던 단종에게 자주 머루와 달래를 진상했던 신하 추익한은 단종이 죽던 날 곤룡포를 입고 태백산으로 들어가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이 말을 전해 들은 이 지역 사람들은 단종을 태백 산신으로 모시고 해마다 음력 9월에 제를 올리게 됐다.

 

우리나라 신의 종류는 한둘이 아니다. 산신과 용신, 천신에 속하는 옥황상제와 관우, 최영 같은 장군신 등이 있다. 특히 최영은 우리나라 최고의 장군신이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에게 밀려 비극적 최후를 맞은 최영은 무속에서는 중요한 신격으로 추앙된다. 최영은 역사 속에 자신의 자취를 분명히 남긴 현실의 인물이다. 그런데 그는 무당들의 수호신이 되어 신격화되었을까. 최영의 억울한 죽음에 답이 있다. 무속 신앙은 억울하게 죽은 영혼은 저승에 안착하지 못하고 떠돈다고 생각한다. 그중에서 억울하게 죽은 왕(앞서 소개한 단종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장군 등은 신격으로 추대된다. 최영은 사후 100년도 안 되어 장군신으로 숭상된 특별한 인물이다. 조상들이 굿을 한 까닭은 자신과 가족의 고통을 덜기 위해서였다. 이때 좌절한 영웅들의 영혼을 위로해주고 자신들의 어려움을 호소하면 그들이 들어준다고 생각했다. 장군신에 대한 조상들의 생각은 단순히 미신의 형태라기보다는 ‘민심’에 가깝다. “민심은 천심이다”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천심’은 ‘신의 마음’인 셈이다. ‘현실적인 신’이나 다름없는 왕이 무능하면 민심을 읽지 못한다. 민중은 무능한 왕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신이 된 인간’, 즉 산신에게 기도를 드린다. 따라서 산신 문화에는 조상들의 소박하고도 간절한 마음이 깃들어 있다.

 

지역마다 다양한 산신 문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는 만큼 여성 산신이 차지하는 비중도 무시할 수 없다. 남성 중심의 가치관이 지배하면서 많은 여성 산신들이 사라지거나 남성 산신으로 대체되는 바람에 여성 산신을 숭배하는 문화가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여성 산신은 정견모주(正見母主)이다. 정견모주는 가야산 자락에 사는 민중들이 가장 우러러보는 신이었다. 천신(天神) 이비가지의 아내가 된 여신은 대가야의 시조 이진아시왕금관가야국의 수로왕을 낳았다. 제주도 탄생 설화에 반드시 언급되는 설문대 할망도 꼭 기억해야 할 여성 산신이다. 제주도를 만든 설문대 할망이 있었기에 제주도는 예로부터 ‘여성이 많은 섬’으로 알려져 왔다.

 

대대로 내려오는 신화나 설화 그리고 산신 등에서 볼 수 있듯 우리나라에는 다양한 문화들이 현존한다. 우리 조상들은 삶을 살아왔다. 기쁨은 나누고 슬프고 힘든 일은 함께 극복하려 했다. 산신 문화는 이웃과 희로애락을 같이 할 수 있었던 하나의 놀이문화였다.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산신 문화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산신은 우리나라의 민속 신앙임에도 비현실적 존재로 치부되고 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류를 번성시킨 곳에는 풍부한 상상력을 재료로 삼은 튼실한 구조의 신화가 있었다. 신화는 인류의 삶의 시작과 함께 존재해 왔다. 신화의 주인공 신은 내밀한 인간 정신의 기원을 파악할 수 있는 ‘뿌리’와 같다. 그 뿌리를 따라가다 보면 가정과 국가의 평안을 바라는 우리의 산신 문화가 깊게 자리 잡고 있다. 산신 문화에 근원을 둔 역사적 가치가 잊히는 것은 우리의 뿌리를 스스로 외면하는 일이다.

 

 

 

 

※ Trivia

 

* 근대 철학자 칸트‘신은 죽었다’고 과감하게 주장했다. (28쪽)

→ 저자는 글을 쓰면서 과감하게 실수를 저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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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20 12: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4-20 15:46   좋아요 1 | URL
산에 자주 가면 신기를 느낄 수 있는 건가요? ^^
저는 산 차제가 신이라고 생각해요. 산꼭대기에 오르려면 산신의 심기를 건드리면 안 돼요.. ㅎㅎㅎ

sprenown 2018-04-20 15: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터키를 형제의 나라라고 하지요.
왜냐 하면 같은 신을 모셨거거든요.단군이 터키어 탕그리와 같답니다.
하늘 신이란 뜻이예요!
마침 좋은 날씨에 제주에 내려왔어요!
너무 좋네요. 한라산도 올라서 백록담도 봤구요
한라산 등반할땐 등산 스틱 꼭 챙겨오세요!

cyrus 2018-04-20 15:52   좋아요 0 | URL
와우! 정말 부럽습니다. 날씨가 한창 좋을 때 제주에 가셨군요. 지금 대구 날씨도 엄청 좋은데 미세먼지 때문에 나들이를 마음대로 할 수가 없어요. ㅠㅠ

제주도에 딱 한 번 가본 적이 있어요. 그때 겨울이었어요. 무슨 산인지 기억이 나지 않은데 등정 코스가 유명한 산이었어요. 친구와 그 산에 갔는데 날씨가 최악이었어요. 산에 오르기 전에는 비가 내렸어요. 산 중반까지 올라갔을 때 비가 눈이 되는 마법을 목격했어요.. ㅎㅎㅎ 시간이 지날수록 눈바람이 거세졌어요. 정말 그때 등산하다가 죽을 수 있겠다는 두려움을 느꼈어요.. ㅎㅎㅎㅎㅎ 그래서 빠른 포기를 하고 하산했습니다. 하산하니까 눈바람이 잠잠해졌어요. 역시 산은 아무나 오르는 게 아니었습니다.. ^^;; 제주도에서 즐거운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sprenown 2018-04-20 15: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3박4일간의 좋은 여행이었어요!
한라생태숲은 꼭 와보세요.
정말 종습니다.노루도 뛰어다닙니다!
이제 비행기 탑니다.담주부터 열심히 일 해야죠!

cyrus 2018-04-20 15:58   좋아요 0 | URL
일상으로 돌아오셔서 책도 읽어야죠..^^

sprenown 2018-04-20 17: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방금 서울에 도착했어요.
주말에 마저 읽고 올릴게요!
독서에 대해 강박관념을 갖을 필요는 없는데.. 나름대로 규칙이 있어야 할것 같더군요^^.1주일정도에 한권읽고 독후감 써보려고요

cyrus 2018-04-21 10:45   좋아요 0 | URL
제주도 여행하면서 찍은 사진도 보여주세요. ^^

sprenown 2018-04-21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북풀이나 서재기능에 익숙치 못해 사진올리는 법을 모릅니다. 그냥 책읽고 간신히 독후감써서 올릴줄 밖에 몰라요. 별로 필요성도 못느끼구요^^. 어젠 낮술에 제주 떠나는게 아쉬어서 자랑이 심했네요. 주위에서도 그러던데 저도 한 1년정도 휴직하고 살고 싶더군요^^.

cyrus 2018-04-22 11:41   좋아요 0 | URL
놀러 간 거 자랑할 수도 있죠. sprenown님과 댓글을 주고받았을 때 제주도의 추억을 떠올릴 수 있어서 좋았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