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보다 페미니즘’ 첫 번째 강연은 나에게 무거운 숙제를 던져주었다. 나 스스로 풀어가야 할 숙제이다. 다음 주 토요일(4월 28일)에 있는 두 번째 강연을 위한 ‘예습’도 해야 한다. 집중적으로 읽어야 할 책이 많아져서 다음 주가 고비가 될 것으로 보인다.

 

 

 

 

 

 

어젯밤에 월요일 강연 때 휴대폰으로 찍은 사진들을 정리했다. 나중에 급진 페미니즘을 공부하면서 다시 보려고 사진을 많이 찍었다. 그런데 사진 화질이 구리다. 휴대폰에 저장된 사진 중에는 《성의 변증법》 원서 책표지가 있는 강연 화면을 찍은 것도 있다.

 

 

 

 

 

 

 

 

 

 

 

 

 

 

 

 

 

 

 

* 슐라미스 파이어스톤 《성의 변증법》 (꾸리에, 2016)

* 한우리 역 《페미니즘 선언》 (현실문화, 2016)

* 앨리스 에콜스 《나쁜 여자 전성시대》 (이매진, 2017)

 

 

 

 

《성의 변증법》은 내가 이미 여러 차례 언급했을 정도로 뛰어난 책이다. 이 책은 ‘급진 페미니즘을 대표하는 고전’이다.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은 이 책에서 사랑과 결혼, 그리고 출산의 과정에서 억압받는 여성의 문제를 직설적으로 표현했다. 그녀는 여성을 억압하는 가부장제 자본주의 사회 구조의 뿌리까지 파고들어가 남성 중심의 판을 근본적으로 뒤흔들기 위해 행동했다. 그녀가 1969년에 결성한 ‘레드스타킹(Redstockings)’은 당시 주류 여성단체였던 전미여성기구(NOW)에 반기를 들며 급진적 여성운동을 주도한 단체였다.

 

 

 

 

 

 

강연 자료에 있는 《성의 변증법》 원서는 1970년에 출간된 초판이다. 그런데 나는 초판 표지를 보자마자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표지 디자인이 단순하고 촌스러워서 이상한 게 아니다. 표지 디자인 그림과 급진 페미니즘을 표방한 책이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서 이상하다.

 

여자의 초상화를 그린 화가는 에드가 드가이다. 발레리나, 세탁부, 매춘부 등 여성들을 소재로 이들의 일상을 포착한 작품들을 남겼다. 흔히 드가를 가리켜 ‘무희의 화가’라 부른다. 드가가 평생 그린 그림의 절반 이상이 춤추는 발레리나를 그린 작품이기 때문이다. 말년에 드가는 눈병으로 시력이 심하게 나빠져서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가 없었다. 그는 조각 제작에 관심을 보였고, 발레리나의 역동적인 자세를 점토로 빚어냈다. 드가는 여성을 주제로 한 작품들을 많이 남겼지만, 평생 독신으로 살다간 ‘여성 혐오자’였다.

 

 

 

 

 

 

 

 

 

 

 

 

 

 

 

 

 

 

* 베른트 그로베 《에드가 드가》 (마로니에북스, 2005)

* 앙리 루아레트 《드가 : 무희의 화가》 (시공사, 1998)

* 제임스 H. 루빈 《그림이 들려주는 이야기》 (마로니에북스, 2017)

 

 

 

 

대부분 학자는 드가의 여성 혐오 원인을 그의 유년 시절에서 찾는다. 드가는 어릴 적 어머니의 외도를 목격하면서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 이런 어머니를 보고 자란 드가는 여성을 혐오하게 됐고, 공개적인 자리에서도 여성 혐오 발언을 서슴없이 꺼냈다.

 

 

 “혹시 여자 손님이 온다면 향수냄새를 너무 피우지 말았으면 좋겠군. 토스트같이 정말 냄새가 좋은 음식이 나올 때는 그런 강한 향기가 얼마나 거슬리는지 말이야.” (앙리 루아레트 《드가 : 무희의 화가》 158쪽)

 

 

  드가는 모델들에게 악의 없는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당신은 아주 특별한 종족이군.” 어느 모델에게 그가 말했다. “엉덩이가 꼭 서양 배같이 생겼어. 꼭 모나리자처럼.” (앙리 루아레트 《드가 : 무희의 화가》 159쪽)

 

 

 드가는 발레리나를 그린 작품들을 장난조로 “내 상품”이라고 일컬었다. (베른트 그로베 《에드가 드가》 47쪽)

 

 

그러나 드가의 여성 혐오를 ‘괴팍한 화가의 특이 행동’으로 간주해선 안 된다. 여성 혐오는 ‘개인의 문제’로만 볼 수 없다. 여성 혐오는 ‘사회구조의 문제’로 접근해서 인식해야 한다. 여성을 혐오하는 드가의 의식에는 여성을 차별하는 사회적 통념이 반영되어 있다.

 

 

 

 

 

 

 

 

 

 

 

 

 

 

 

 

 

 

 

* 에른스트 헤켈 《자연의 예술적 형상》 (그림씨, 2018)

* 조너선 마크스 《인종주의에 물든 과학》 (이음, 2017)

* 스티븐 제이 굴드 《다윈 이후》 (사이언스북스, 2009)

 

 

 

 

드가가 살았던 19세기에는 인종주의에 가까운 진화론이 유행하고 있었다. 독일의 생물학자 에른스트 헤켈은 다윈의 진화론을 옹호했고, 1천여 종의 생물에 학명을 붙이는 등 계통학, 생태학 연구 등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하지만 헤켈이 주장한 진화론은 다윈 진화론의 진짜 의미를 왜곡하는 오점을 남기기도 했다. 헤켈은 “개체 발생은 계통 발생을 반복한다”는 명제를 내세운 ‘발생반복설’을 주장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의 조상들이 겪었던 진화 과정을 되풀이하면서 태어난다. 헤켈의 진화론은 ‘단선적 진화론’이다. 단선적 진화론이란 인간은 처음에는 열등한 상태로 태어나지만, 일정한 진화 과정을 거쳐 우수한 상태로 발전한다고 보는 이론이다. 그래서 헤켈의 진화론은 ‘열등한 종족(문화)’와 ‘우수한 종족’을 판단하는 척도가 된다. 헤켈은 진화론이 ‘역사 발전의 방향성’을 설명할 수 있으며 진화 자체를 ‘진보’라고 생각했다. 또 그는 인종을 계통학적 방식으로 분류하여 흑인을 ‘야만적 인종’으로 규정했다. 헤켈의 진화론은 우생학과 골상학의 이론적 근거로 활용될 뿐만 아니라 ‘여성 차별’을 정당화하는 과학적 근거로도 악용되었다.

 

드가는 골상학에 심취하여 골상학적 이론이 반영된 습작들을 남겼다. 그는 하층계급 출신의 발레리나를 ‘진화가 덜 된 열등한 존재’로 인식했다. 드가의 여성관을 생각한다면 드가의 그림 속 여성들은 ‘인간’이라고 보기 어렵다. 드가는 동물을 관찰하듯이 여성을 그렸다. 여성을 하나의 인격체로 보지 않은 그의 그림이 ‘여성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그려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한마디로 말해서 《성의 변증법》 원서 표지는 물과 기름 같은 ‘여성해방론자’와 ‘여성 혐오자’의 잘못된 조합이다. 대체 누가 이런 끔찍한 표지를 생각했을까? 파이어스톤은 본인 책의 ‘얼굴’이 ‘여성 혐오자’의 그림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원서 초판의 ‘이상한 표지’를 생각하면 파이어스톤의 생전 모습이 있는 《성의 변증법》 번역본 표지가 더 마음에 든다. 이 표지야말로 《성의 변증법》의 진짜 얼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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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8-04-19 14: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970년. 이때만해도 여성학에 관한 책들이 얼마나 나왔을까?
그래서 저렇게 평범하게 나왔겠지.
또 저때만해도 여자 얼굴만 그린 그림이 또는 그런 그림을 표지로 삼는 게
흔한 일이었을까 싶기도 하다.
그에 비하면 정말 지금은 격세지감이지.
그 시절엔 너 같이 문제 삼지도 못했을 거야.

cyrus 2018-04-19 15:10   좋아요 1 | URL
맞아요. <성의 변증법>을 만든 출판사는 ‘여성주의’ 책 표지에 반드시 ‘여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만약 초판 표지가 우리나라에 공개됐으면 난리 났어요... ㅎㅎㅎ 페미니즘 책 표지에 ‘분홍색’이 들어간 것도 별로예요. 빨간색, 보라색이 좋아요. 보라색이 페미니즘을 상징하는 색이에요. ^^

stella.K 2018-04-19 15:28   좋아요 1 | URL
나도 동감이긴 한데 난 솔직히 페미니즘 책이라고 해서
꼭 그렇게 특정색이 들어가야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솔직히 그 책을 고르는덴 표지가 반인데
요즘 나오는 페미니즘 책 표지는 마음에 안 들어.
그런데 오늘 발견한 책이 있는데
<세계 곳곳의 너무 멋진 여자들>이란 책이 있는데
그건 좀 마음에 들더군. 무슨 잡지모냥 세로 이단으로 되어있더라구.
그림도 맘에 들고. 단 얇은 게 흠이긴 해.ㅋ

2018-04-19 16: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4-19 18:03   좋아요 1 | URL
시대에 앞서간 행동을 하셨군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페미니즘 책을 읽어도 모르는 게 많고, 혼란을 겪을 때가 많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