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은 상식에 벗어난 기행을 펼치는 전위예술가로 명성을 날렸다. 1960년 독일, 무대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던 백남준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울면서 뛰어다니다 도끼로 피아노를 부쉈다. 그리고 가위를 든 채(!) 객석 맨 앞줄에 앉은 전위음악가 존 케이지에게 달려갔다. 백남준은 케이지의 넥타이를 가위로 싹둑 잘라버렸다. 관객들이 어리둥절해 있는 사이 그는 유유히 무대를 빠져나와 방송으로 알렸다. “여러분, 공연은 끝났습니다”
그의 공연은 ‘피아노포르테를 위한 연습곡’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지게 됐다. ‘피아노포르테를 위한 연습곡’은 기존의 권위와 관습을 타파하는 백남준 특유의 예술관을 잘 드러난 공연으로 평가받는다. 이 공연에서 눈여겨 볼 부분은 가위로 넥타이를 자른 백남준의 행동이다. 넥타이는 서구문화권에선 남성 권위를 상징하는 장식물이다. 백남준은 늘 넥타이를 매는 남자들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서 넥타이를 잘랐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넥타이 자르기는 남성에 대한 공격, 권위에 대한 공격이며, 서구 문화에 대한 공격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만약에 백남준이 ‘여성’이라면, 아니 여성 전위예술가가 넥타이를 자르는 행위를 했다면 관객과 평론가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백남준의 공연과 다른 상반된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이 여성은 예술가로 인정받지 못하고, ‘남성 혐오주의자’로 비난받았을 것이다. 프로이트라면 넥타이를 자르는 여성이 남성의 거세 공포를 환기하는 상징이라고 해석했을 것이다.
* 마리아 미즈 《가부장제와 자본주의》(갈무리, 2014)
* 찰스 버그먼 《오리온의 후예》(문학과지성사, 2010)
가위는 ‘무기’가 될 수 있다. 인류사는 무기와 함께 발전했다. 금속을 제조하고 가공하는 기술이 향상되면서 무기가 발달하였고, 군주는 영토 확장에 더욱 치열하게 몰두했다. 이른바 ‘제국’이 탄생하는 것이다. 무기를 만들 줄 알고, 무기를 능숙하게 다룰 줄 아는 남성은 권력을 쥔 세력으로 급부상했다. 수렵 채집 사회의 남성과 여성은 비교적 평등했다. 원래는 남성과 여성 모두 사냥을 했지만, 농경사회 이후에 남성은 사냥을, 여성은 양육을 담당했다. 역사적으로 남성과 여성의 ‘성별 분업 노동’이 시작된 것은 ‘무기’와 관련이 있다. 이런 분업의 형태가 수만 년 동안 유지되면서 집 안에 머무는 여성은 남성으로부터 통제받고, 착취당하는 ‘남성의 전유물’로 전락한다.
마리아 미즈는 《가부장제와 자본주의》(갈무리, 2014)에서 ‘사냥꾼-남성’ 모델 중심으로 형성된 젠더 이분법 및 성별 노동 분업이 남성들은 수혜자로 등극하고, 여성들은 극단적으로는 ‘노예’로 전락시켰다고 말한다. 찰스 버그먼의 《오리온의 후예》(문학과지성사, 2010)는 사냥이 ‘남성 대 여성’, ‘인간 대 자연’, 그리고 ‘문명 대 식민지’로 이분법으로 구분하는 기준이 되는 '남성성'의 역사를 들려준다. 오리온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사냥꾼이다. 그는 아르테미스 여신이 쏜 화살에 맞아 죽고 별자리가 된다. 오리온은 ‘사냥꾼-남성’ 모델에 근접하는 남성성의 원형이다. 이 영웅적인 사냥꾼의 신화에 매료된 남성은 권력에 대한 욕망을 남성만이 가지고 있는 원초적 욕구로 인식했고, 사냥 행위를 통해 ‘자연’ 또는 ‘여성’을 지배하려는 욕구를 분출했다.
* [절판] 조지 L. 모스 《남자의 이미지》(문예출판사, 2004)
* 에드워드 루시-스미스 《남자를 보는 시선의 역사》(개마고원, 2005)
* [품절] 플로랑스 타마뉴 《동성애의 역사》(이마고, 2007)
《남자의 이미지》(문예출판사, 2004), 《남자를 보는 시선의 역사》(개마고원, 2005), 《동성애의 역사》(이마고, 2007) 등은 폭력, 권위주의, 남성 우월주의를 표면화한 남성성이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설명한다. 이 세 권의 책을 쓴 저자들의 설명은 크게 차이가 없다. 18세기 독일의 미술사가 빙켈만은 고대 그리스 조각에서 ‘고귀한 단순함과 고요한 위대함’을 발견했다. 그는 그리스 조각에 나타난 남성성을 ‘이상적인 아름다움’이라고 추켜세웠다. 고대 그리스의 미술은 주로 신과 영웅에 속하는 남성을 누드로 표현했다. 빙켈만은 고대 그리스 조각으로 재탄생한 남성의 신체가 ‘용기’와 ‘명예’와 같은 도덕성을 상징한다고 봤다. 고대 그리스인들과 빙켈만은 벌거벗은 남성의 몸을 조형의 백미로 추구했다. 그런데 문제는 고대 그리스인과 빙켈만 같은 신고전주의자들은 남성만을 ‘인간’으로 인식했다는 것이다. ‘사냥꾼-남성’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시대 속에서 여성은 ‘인간’이 될 수 있는 기본 자격조차 갖추지 못한 존재였다.
*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1》(현대지성, 2018)
* [품절] 조이한 《그림에 갇힌 남자》(웅진지식하우스, 2006)
신고전주의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의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는 ‘사냥꾼-남성’에 부합하는 아름다움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다비드는 이 작품에서 고대 로마 역사가 티투스 리비우스의 《로마사》에 나오는 호라티우스 삼형제 이야기 중 한 장면을 그렸다.
전투에 나가기 전 삼형제는 조국을 위해 승리를 맹세한다. 형제들의 비장한 표정에 죽음을 불사하겠다는 각오가 드러난다. 이들의 결의는 칼을 건네는 아버지 앞에서 맹세하는 모습에서 두드러진다. 이처럼 호라티우스 형제의 모습에서 ‘조국 수호’라는 대의를 위해 무기를 드는 강인한 남성성이 느껴진다.
* 허버트 스펜서 《진보의 법칙과 원인》(지만지, 2004)
제국주의 시대에도 ‘사냥꾼-남성’ 남성성은 건재했다. 근대 이후 남성은 가부장적 권력과 경제력을 내세워 가족 및 사회의 ‘지배자’ 지위를 유지했다. 그리고 남성은 세계로 눈을 돌려 식민지를 통치하는 ‘지배자’로 군림했다. 허버트 스펜서가 주장한 사회진화론은 남성성과 결합해 여성 차별, 식민지(피식민지 여성) 정복 등을 정당화하는 이념이 되기도 했다. 사회진화론자들은 찰스 다윈이 제시한 ‘진화’를 ‘진보’와 동일하게 보는 오류를 범했다. 백인 남성 지식인들은 ‘이성’, ‘문명’, ‘진보’는 남성의 세계에 속하고, ‘자연’은 여성의 영역에 속한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반제국주의’, ‘반자본주의’를 앞세운 마르크스와 그의 사상을 이어받은 독일 사회민주당은 유럽의 식민지 지배를 옹호하기도 했다.
마리아 미즈는 남성과 여성을 이분법으로 구분하여 남성의 ‘자연’과 ‘여성’ 지배를 용인하는 구분을 ‘식민주의적 구분’이라고 했다. 그리고 ‘식민주의적 구분’에 익숙한 백인 남성을 ‘자본주의적 가부장제의 화신’이라고 표현하면서 비판했다.
세계는, 최소한 우리 모두가 사는 세계는 유한하기 때문에, 다른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가부장제의 화신인 백인남성은 현실의 유한성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신처럼, 강하고 영원하며 전지전능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그는 낮은 곳에서, 좀 더 원시적인 것에서부터 좀 더 높고 복잡한 수준의 존재로 영원히 진보하고 진화한다는 발상을 발명해 왔다. 이런 발상은 주로 유대인이나 아리아인과 같은 가부장적 유목민의 정복이라는 역사적 경험에 그 물질적 뿌리를 두고 있다. 유대교나 기독교의 신학자는 자연을 정복하고 복속시키면서 영원히 팽창할 권리라는 발상에 필요한 종교적 정당성을 부여해 왔다.
진화적 변화라는 발상은 서구의 ‘선진’ 국민이 진보에 대해 가진 생각의 중심이 되었다. 그들은 모든 ‘뒤처진’ 국민에게 진보의 상징이 되었다. 같은 방식으로 남성은 여성에게 진보의 상징이 되었다.
(마리아 미즈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430쪽)
식민지라는 용어 자체가 옛말이 된 지금도 ‘남성-사냥꾼’ 남성성, ‘식민주의적 구분’에서 비롯된 여성차별 등은 여전히 남아 있다. 과학 기술 발전의 덕을 보면서 ‘진보’의 정점에 도달한 인류는 ‘낙관적인 진보’에 도취했던 과거 인류의 행동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 유발 하라리 《호모 데우스》(김영사, 2017)
*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김영사, 2015)
이제 인류는 지적 능력을 바탕으로 신의 영역을 넘보는 존재(호모 데우스, Homo Deus)가 되려고 한다. 유발 하라리는 과학 기술을 현명하게 사용하지 못할 경우 ‘파멸’이라는 불행한 대가를 얻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여성은 과학기술에 대한 진입장벽에 마주친다. 여성이 과학기술계에 진입했다 할지라도 결혼과 출산으로 과학기술 활동을 계속하기가 어려워진다. ‘신이 된 인간’에 속하게 될 인류 대부분은 남성이다. 그들이 선호하는 생명공학, 인공지능 등 과학기술은 인류 전체를 위협하는 ‘무기’가 될 수 있다.
국가주의, 영웅 신화, 가부장제가 강화된 사회일수록 위계질서와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남성 중심의 위계질서가 공고화된 사회일수록 성폭력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권력 관계에서 소외된 남성일수록 과도한 남성성의 발현을 통해 남자다움을 인정받으려고 한다. 아직도 일부 남성들은 ‘남성-사냥꾼’ 남성성이 찬양받던 시절을 그리워한다. 그 시절 남성들은 ‘가부장적 권력’, ‘경제력’으로 표상되는 남성성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당당히 드러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남성이 ‘강인한 남성성’을 연기하면서 수행하던 시대는 끝났다. 이제는 남성 스스로 넥타이를 잘라내야 한다. 그리고 호모소셜(homosocial, 남자들의 연대)을 유유히 빠져나와 자신 있게 말해야 한다.
“남성 여러분, 이제 세상은 달라졌습니다. 권위를 내세운 우리의 공연은 끝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