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삶이 기적이다
이사벨 아옌데 지음, 권미선 옮김 / 민음사 / 2011년 11월
평점 :
품절


나에게 연애란 언제나 1프로쯤 부족한 것이었다. 어떤 사람을 원하는지 에이포 용지에 가득 채울 수 있지만, 그런 사람을 만나 사랑하는 게 아닌 이상, 상대가 내게 '완벽할'리 없으니까. 설사 에이포 용지에 가득 찬 그 사람이 바로 나타난다 해도, 내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치명적인 단점 혹은 약점을 가지고 있을 수 있으니, 연애란 게 완벽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 언제나 무엇인가는 포기해야 하는 것, 그나마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꼭 지켜줘야 하는것들을 지켜주는 상대라면, 어떤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포기를 감당해야 하는 것이 연애라고 생각해왔다. 뜨거운 감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내게 꼭 맞는 상대가 나타나면, 그 사람에겐 언제나 불안한 마음도 동시에 생겼다. 이 뜨거운 열정을 그가 다른 누군가와 나눌 수도 있다는 생각에. 열정 대신 안정감을 선택하면 그건 그것대로 지루했다. 격하게 뛰는 가슴을 느끼고 싶은데. 그래서 그 둘을 저울질 해보니 불안함이 더 큰 걸 견디지 못하겠기에, 나는 늘, 약간은 지루하지만 안정적인 상대를 선택하게 되었다. 그들은 내게 지나치리만큼 잘해주고 한없이 다정하다. 내가 싫다고 하는 걸 듣고 외우고 그대로 실천해주고자 한다. 더이상 바랄 게 없을 정도로 완벽한 매너와 예의, 다정함을 갖추고 있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부족하다고 느꼈고, 그 부족함을 채워줄 다른 사람을 다른 식의 포지션으로 여기저기에 놓아두어야 했다. 연애에 있어서 나는 만족할 줄도 몰랐고 충분하다고 생각하지도 못했으며 다만, 이렇게 일프로쯤 부족한 것이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하던 즈음, 이 책을 읽게 됐고, 처음부터 이런 문장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는 내가 꼭 끌어안아도 절대 깨어나지 않는다. 오로지 내가 침대에서 나오려고 할 때만 깨어난다. 그는 나의 육체와 나의 불면증, 나의 악몽에 익숙하다. (p.11)



이사벨 아옌데가 나에게 말하는 것 같았다. 익숙한 것, 그것이 사랑이라고 내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연애란 건, 상대에게 익숙해지는 과정인거라고, 부족하다 넘치다를 생각하는 게 아니라, 이 사람은 이런 사람인 거라고 익숙해지는 바로 그 과정. 나는 그 과정들을 받아들이기에 훈련이 덜 된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익숙해지기 보다는, 혹여 익숙해지는 과정에서 구속하지나 않을까, 그게 두려웠다. 나를 잡으려고 하면 절대 가만있지 않겠어, 내 안에는 언제나 날카로운 송곳이 여러개쯤 숨겨져 있는 것 같았다. 이사벨 아옌데는, 이런 나에게 또 말했다.



격정적인 열정보다 매일 이렇게 반복되는 일상이 우리를 더욱 단결시킨다. (p.12)



반복되는 일상을 함께 하는 것은 무엇보다 내가 두려워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우리가 서로가 서로에게 질려간다면, 그건 얼마 안되 무너지고 말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린 지칠거야, 난 끊임없이 다른 곳을 보겠지. 그는 내가 원하는 걸 전부 채워줄 수는 없어, 난 얼마 되지 않아 그로부터 돌아설테니, 우리는 반복되는 일상을 함께 하지 않아야 해. 나는 언제나 돌아서는 것을 생각했다. 언제쯤 이별을 말할까를 고민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사벨 아옌데는 반복적인 일상이 우리를 더욱 '단결' 시킨다고 말했다. 맙소사. 단결이라니! 난 왜 단결에 대해서는 한 순간도 생각해보지 못했을까? 단결은 식구들이랑만 하는 줄 알았는데.. 그러고보니 가족들과 단결할 수 있는것도 일상을 오랜시간 반복해왔기 때문이 아닌가. 그렇다면, 반복되는 일상이, 서로에게 익숙해지는 것이 연인으로부터 단결을 부를 수도 있겠구나. 그 단결은 열정보다는 익숙해짐이 불러오는 것일테고. 책을 펼치자마자 이토록 파고드는 글이라니. 



이사벨 아옌데는 딸을 잃었다. 딸의 죽음을 보았다. 자신이 사랑하는 가족과 지인들을 한 데 모아 부족을 이루며 살고자 하는 그녀의 꿈이 내게는 좀 지나치게 보이긴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막강한 힘을 가질 수도 있는거란 생각이 들었다. 손녀 딸이 아파 병원에 입원했을 때 열 명이 넘는 사람들이 병실에 가득찰 수 있다니, 그 누구도 아픈 환자를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일상으로 단결하고, 그 단결을 좀 더 단단히 하고자 부족을 이루며 살고 싶은건지도 모르겠다.


남편과 자식 그리고 주변의 사랑하는 사람들과 일상을 보내면서, 그녀는 틈틈이, 당연하게도 죽은 딸을 떠올린다. 죽은 딸에게, 그녀는 주변 사람들의 일상을 말해준다. 레즈비언을 경멸했다가 레즈비언이 되어버린 며느리를, 남편에게 맞고 살던 친구를, 마약 중독인 엄마에게서 태어난 남편의 손녀를, 그리고 죽은 딸의 남편에 대한 일까지도. 그들 모두는 거친 인생을 헤쳐나가며 각자 나름의 위치에서 힘들어하는 과정들을 겪었고, 이사벨 아옌데는 그런 모습들을 지켜보며 언제나 그 중심에서 그들에게 해결책을 제시해주고자 한다. 그러나 엄청난 사랑에서 나온 행위는 때때로 지나친 간섭을 불러 오기도 하고, 싸움의 계기가 되기도 한다. 점을 보고 그 점에 대해 맹신하는 것이, 한 사람은 반드시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내 함께 사는 것만이 세상을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부분에서는 나와는 좀 생각하는 게 다르다고 고개를 갸웃하긴 했지만-자꾸만 사람들에게 짝을 찾아주려고 엄청나게 애를 쓴다-, 그녀는 이 한 권의 책에서 몇 번이나 코끝을 찡하게 만들고, 



두려움은 어절 수 없었다. 그건 내가 감수해야 할 몫이었다. 하지만 그런 고통으로 인해 온몸이 마비되는 것은 허락할 수 없었다. 네가 죽은 이후 나는 그 어느 것도 두렵지 않다고 말한 적이 있다. (아니면 어딘가에 글로 쓴 적이 있었다.) 하지만 파울라,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을까 봐 두렵고 그들이 아파하는 모습을 보게 될까 봐 두렵고 늙어서 망가져 가는 게 두렵고 날로 증가하는 이 세상의 빈곤과 폭력, 그리고 부패를 봐야 한다는 사실이 두렵다. 하지만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네가 없다는 슬픔을 견뎌 내며 그 슬픔을 내 편으로 만드는 법을 배웠다. 너의 부재와, 내가 살면서 잃은 것들이, 이제는 조금씩 달콤한 추억이 되어 가는구나. (p.153)



그리고 그 횟수만큼 피식- 웃게도 만든다. 




"오늘은 너무나도 불행한 날이에요!" 안드레아가 훌쩍이며 나에게 말했다.

"안드레아, 하루 종일 좋았던 순간이 단 한 번도 없었니?"

"아니요, 있었어요. 한 여자아이가 넘어져 이가 부러졌어요."

"하지만 맙소사, 안드레아, 그게 왜 좋은 거니?"

"내가 아니니까요." (p.128)



하하하하. 안드레아는 그녀를 꼭 닮은 손녀임에 틀림없다.



키 1미터 50센티미터는 땅바닥에 떨어진 것을 쉽게 줍고 미니스커트가 유행할 때 아버지 넥타이 네 개로 치마를 만들 수 있다는 걸 제외하면 아무런 장점도 없다. (p.359)



"무슨 일을 하십니까?" 그가 대화를 시작하려는 듯 내게 물었다. (중략)

"소설가 입니다."

"우와! 아주 흥미롭군요! 나도 정년 퇴임하면 소설을 쓸 생각입니다."

"정말요? 그러면 지금은 무슨 일을 하고 계신데요?"

"치과 의사입니다." 그가 내게 자기 명함을 건넸다.

"나는 정년 퇴임하면 어금니를 뽑을 생각입니다." 내가 그에게 대답했다. 



그리고 코끝이 찡하게 한만큼에 피식 웃게 한만큼을 더해서, 반복되는 일상을 어떤 마음가짐으로 사는 것이 좋을지도 보여준다. 그녀가 강제하는 게 아니라, 그녀의 생각과 또 그녀가 주변 사람들(하다못해 어린 손주들까지도!)과의 대화를 통해서.



"알레한드로, 너를 슬프게 하는 건 뭐니?" 내가 물었다.

"안드레아하고 싸우는 거요. 하지만 전 우리 관계를 개선해 보기로 했고, 꼭 그렇게 할 거예요. 각자 자기 고통에 책임져야 한다고 배웠거든요."

"그건 늘 진실은 아닌 것 같구나. 난 파울라의 죽음에 대해 책임질 수 없고 로리 역시 자신의 불임에 대해 책임질 수 없어." 내가 반박했다.

"어떤 고통은 피할 수 없어요. 하지만 고통에 대한 반응만큼은 우리 스스로 조절할 수 있어요. 위예 할아버지한테는 제이슨이 있어요. 할머니는 파울라 고모가 죽고 나서 재단을 만들어 우리 기억 속에 고모의 생상한 모습이 영원히 남아 있도록 해 주셨고요. 그리고 로리는, 친자식을 가질 순 없지만 우리 셋이 있잖아요." (pp.433-434)






이사벨 아옌데는 칠레의 전(前)대통령인 '살바도르 아옌데'의 조카이다. 그녀는 피노체트의 쿠데타로 인해 베네수엘라로 망명을 가게 되었고, 현재는 캘리포니아에서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다. 이 책을 읽고있을 즈음, 신문에서는 '미첼 바첼레트'의 대통령 당선 소식을 볼 수 있었는데, 그 기사를 읽다가 칠레의 정권의 역사가 우리의 것과 별반 다르지 않구나, 하고 생각했다. 



칠레 대통령 미첼 바첼레트



이사벨 아옌데의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았었는데, 이사벨 아옌데를 알고 나니 칠레의 새로운 대통령에 대한 기사가 유독 눈에 띄고, 그렇게 그 기사를 읽고났는데 이 책의 뒷부분에서도 미첼 바첼레트에 대한 언급이 된다. 이사벨 아옌데의 망명과 미첼 바첼레트의 대통령당선에 대한 소식과는 별개로 하나의 책과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맞물려 연결지을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더 깊은 독서로 이어지고 그 독서가 다시 신문 기사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즐겁고 새로운 경험이었다. 




사랑하는 사람, 소중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내가 보호하고 지켜야할 대상이 있다는 뜻이다. 그건, 내게 약점이 있는 것임을 의미한다. 나는 늘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까 두렵고 소중한 사람이 다칠까 두렵다. 하지 않아도 좋을 걱정으로 잠자리에서 뒤척이기도 수차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들 이런 걱정들과 염려로 일상을 보내고 있을텐데, 그들중 누군가가 지나친 걱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불행을 이성적이지 못한 방법으로 해결하고 싶어한다해도, 어떻게 마냥 화를 내고 싸울 수 있을까. 우리는 그런 서로에게 또다시 익숙해지며 대화를 해야할 것이고, 너무 사랑하는 마음을 다스려 한 발 뒤로 물러서는 방법도 배워야 할 것이다. 이사벨 아옌데가 깨달은 것도 결국 그것이다.



그제야 우리는 서로를 정면으로 공격했고 결국 문명화된 합의에 이르렀다. 그는 내 삶에서 좀 더 존재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고, 나는 그의 삶에서 좀 더 부재하도록 노력하기로 했다. (p.225)



그녀는 죽은 딸 파울라를 그리워하며 그녀의 영혼을 느낀다. 그녀가 느낀다면, 그녀가 느끼는 것이 맞다. 그것을 기적이라 부른다면 그것은 역시 기적일 것이다. 그것을 운명이라 부른다면, 그건 운명일 것이다. 내게 일어나는 일, 그것을 내가 무어라 부르든, 그것은 내가 부르는 그대로가 맞다. 내 삶에 기적이 찾아든다면, 그 기적이 내게 오도록 내가 만들었고, 이것이 내 운명이라 생각이 든다면, 이것이 운명이 되도록 매순간 내가 결정한 일이다.



슬픔과 기쁨을 함께하며 보낸 세월들이 모두 합쳐지면, 그게 우리의 운명이 된다. (p.471)




이즈음은, 내가 이 책을 읽기에 적절한 타이밍이었고, 결국 이 타이밍은 앞으로 펼쳐질 나의 일상에 또 하나의 기쁨과 슬픔을 보태주었다. 이 역시 내 선택이었다.




갑작스럽게 노화가 진행된 일다 할머니의 말년은 우리가 아닌 딸이 맡아 돌봤다. 의사들은 그녀가 담배를 오래 피워 거듭 폐렴에 걸리면서 노화가 심각해졌다고 했다. 그 후 점점 할머니에게서는 살아왔던 삶이 잊히기 시작했다. 일디타는 자기 어머니의 마지막 단계가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거라고 이해하고, 두 살짜리 어린아이에게 인내심을 무한대로 발휘할 수 있다면 여든 살 노인에게 그 인내심을 아낄 이유가 없다고 결론 내렸다. 일디타는 어머니가 목욕하고, 식사하고, 비타민을 복용하고, 침대로 자러 갈 수 있도록 애정 어린 시선으로 돌봤다. 일디타는 계속되는 똑같은 질문에 열 번을 똑같이 대답했고, 노인네가 무의미한 얘기를 막 끝낸 다음 녹음기를 틀어 놓은 듯 몇 번이고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해도 듣는 척해 줘야 했다.(p.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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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eamout 2013-12-24 2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리 크리스마스!

다락방 2013-12-26 08:28   좋아요 0 | URL
드림아웃님, 크리스마스 잘 보냈어요? 전 <변호인>보고 눈물만 줄줄 흘렸네요 ㅠㅠ

단발머리 2013-12-24 2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키햐~~~ 좋아요.
역시 크리스마스엔 다락방님 리뷰를 읽어야돼!!!
메리 크리스마스~~

다락방 2013-12-26 08:29   좋아요 0 | URL
우앙 단발머리님이 좋아해주셔서 제가 다 좋으네요. 히히.
크리스마스 잘 보냈어요? 벌써 지나버렸다니, 이제 다시 일 년을 기다려야 한다니...흑흑. 아쉬워요. ㅜㅜ

달팽이 2013-12-24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사벨 아옌데의 운명의 딸 읽어보세요. 좋아하실거예요.^^

다락방 2013-12-26 08:29   좋아요 0 | URL
저는 영혼의 집을 한 번 읽어볼까 생각중이었는데 운명의 딸이 더 나을까요? 흐음.

레와 2013-12-26 0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슬픔과 기쁨을 함께하며 보낸 세월들이 모두 합쳐지면, 그게 우리의 운명이 된다."


이 문장 참 좋군요..

다락방 2013-12-26 11:40   좋아요 0 | URL
좋지요? 이 에세이가 참 좋았어요. 에세이는 이렇게 써야하는구나, 라는 깨달음도 동시에 얻었답니다.

주태백 2013-12-30 0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가도 되나요? 출처는 확실히 밝혀두겠습니다.!!

다락방 2013-12-30 08:15   좋아요 0 | URL
옙! 아침 일찍부터 오셨네요!!
 











"나는 매일 당신과 함께했었소. 그랬다는 것을 아시오?"

"네, 그러셨다는 걸 알아요." 마르티네가 말했다.

"내게 남은 나날 역시 당신과 함께할 거요. 오늘 밤처럼, 매일 저녁 나는 당신과 저녁을 먹겠소. 육신으로가 아니라 영혼으로. 어차피 육신은 의미가 없으니. 오늘 밤 나는 이 세상에서 그 어떤 것도 가능하다는 것을 배웠소, 소중한 자매여." (p.68)



로벤히엘름 장군은 청년시절, 목사의 딸인 마르티네에게 반해 연정을 품었지만, 그 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했고, 그렇게 시간은 흘러 그는 승진을 하고 결혼을 하고 지내고 있었다. 그러던 그에게 31년후, 그녀의 집에서 열리는 저녁식사에 가게 될 기회가 생긴다. 삼십일 년. 이제 그들은 더이상 젊지 않고 각자의 삶에 안착하고 있었던 그 오랜 시간이 흐른 후. 그곳에서 그는 마르티네의 요리사인 바베트가 만든 환상적인 식사를 먹다가 '무언가 빈 것 같았던' 자신의 삶을 떠올린다. 그 식사의 감격 후, 그는 집으로 돌아가며 그녀에게 말한다. 매일 당신과 저녁을 먹겠다고, 영혼으로.


얼마전에, 오래전에 읽었던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 <하느님의 보트>를 다시 구매했다. 읽었을 당시엔 뭐야, 이건 동화야? 라며 시큰둥했던 기억이 나는데, 요즘 자꾸 그 소설이 생각났다. 오래전에 읽어 정확히 기억할 순 없지만, 내가 기억하는 그 소설의 줄거리가 맞다면, 나는 그 내용을 다시 한 번 읽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 여자가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를 잊지 못하고 내내 자신에게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소설. 그리고 여기는 엄청난 스포일러가 될텐데, 결국, 마치 소설처럼(!) 그가 문을 열고 그녀에게로 돌아오면서 끝을 맺는. 나는 이 내용을 다시 한 번, 지금 읽어보고 싶었던 거다. 


그렇다고 내가 누군가가 돌아오기를 바라며 살고 있는건 아니다. 그러나 간혹 그리워지는 사람이 있는 건 사실이다. 이건 누구나 그럴테지만, 아주 가끔은, 그가 다시 내 앞에 나타난다면 나는? 하는 가정을 해보곤 한다. 내게 연인이 있는 상황이라면 그 사람에게 안녕을 고하고 그를 만날것인가, 지금 내 상황이 변했으니 당신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할것인가, 하고. 나는 여기에 대해서 정말이지 답을 내릴 수가 없다. 그래서 그가 다시 내 눈 앞에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똑같은 크기만큼, 차라리 나타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을 갖기도 한다. 그가 거기 있기 때문에, 내 눈에 보이지 않는 먼 곳에 있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그리워할 수 있는거고 아름다운 거라고. 나타나는 순간 비극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그리고 바베트의 만찬을 읽으며, 그리워하는 방법에는 아주 여러가지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 그와 식사를 하자. 나는 로벤히엘름 장군처럼 매일을 그와 식사하진 않을테다. 나는 간혹 다른 누군가와 식사를 할텐데, 그 때는 앞에 있는 상대에게 집중하고 싶고, 혼자 식사를 하는 중에는 나에게 집중하고 싶다. 그러나 그 중에 한 끼쯤은, 간혹 혼자 앉아 식사를 하며 천천히 씹을 어떤 때에는, 그를 생각하며 함께 식사하고 싶다. 


커피를 마시는 어느 아침에는 혹은 오후에. 뜨거운 커피가 든 컵을 양 손으로 잡고 호호- 불면서 그를 떠올리며 함께 커피를 마시고 싶다. 그 순간에는 그를 향한 나의 영혼이 아주 강해서, 그에게 가 닿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바로 그 때, 그도 커피를 마시며 잠깐 숨을 고르고 나를 떠올린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자체로 완벽한 순간이 될텐데! 우리의 영혼은 함께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실텐데. 간혹 그 순간들에 쿠키를, 케익을 함께 내어놓기도 해야지.






나는 '이자크 디네센'의 소설은 처음 읽어보는데, 책을 펼쳐 책날개에 실린 작가 설명을 보니 이렇게 써있더라.



1885년 덴마크 코펜하겐 북부의 롱스테드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카렌이며, 필명인 이자크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인물 이삭('웃음'이라는 뜻)에서 따온 것이다. 28세에 브로르 폰 블릭센 남작과 결혼하여 남작부인이 되었다. 제국주의 시대에 동아프리카 케냐에서 커피 농장을 경영했고, 영국인 사냥꾼 데니스 핀치 해튼과 사랑에 빠졌으나, 운명의 장난으로 연인과 농장을 모두 잃은 후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서 메릴 스트리프가 열연한 바로 그 주인공이다. (책날개 中)



악. 이 여자가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바로 그 주인공이라고? 나는 아직 그 영화를 보지 못했는데? 그러다 몇해전 한 알라디너가 내게 한 말이 떠올랐다. 내가 아직 그 영화를 보지 못했단 말에 그는 이렇게 말했었다. '락방님이 아직 그 영화를 보지 않았다니 반칙이에요' 라고. 그 댓글을 보자마자 반드시 이 영화를 보고야말리라, 고 결심했었는데, 시간이 이렇게 흐르는동안 나는 대체 이 영화를 안 보고 뭘한걸까? 혹시나 책이 있진 않을까 검색해보니, 오, 역시 원작이 있었다!



















으악, 책부터 읽어야겠다. 게다가 무려 30프로 할인된 가격에 이 책이 판매되고 있다. 맙소사!! 내가 산다!!








<바베트의 만찬> 속에서 바베트가 차려내는 음식들을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다. 할수없이 영화를 봐야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 만찬에 참석한 사람들이 음식을 먹고 마시는 장면을 보고싶다. 그 음식의 색깔과 빛깔을, 흔들리는 와인잔속의 와인이 로벤히엘름 장군의 입 속에 들어가는 장면을, 그가 그 와인을 마시면서 마음속에서 끓어오르는 복잡한 생각들이 드러나는 장면들을 확인하고 싶다. 청년시절, 사랑고백조차 하지 못했던 로벤히엘름 장군과 삼십일 년이 흐른 지금의 로벤히엘름 장군을 보고싶고, 그런 그가 영혼으로 매일 저녁 당신과 식사하겠다고 말하는 그 눈빛을 보고 싶다.





그후에 일어난 일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손님들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한다. 마치 수많은 작은 후광들이 하나로 합쳐져 거룩한 광채를 내기라도 한 듯 천상의 빛이 집 안을 가득 메웠다는 것 외에는. 말수가 적은 노인들은 말문이 틔었고, 수년간 거의 듣지 못했던 귀가 열렸다. 시간은 영원 속으로 녹아들었다. 자정이 훨씬 지난 시각, 창문이 황금처럼 빛났고 아름다운 노래가 바깥의 겨울 공기 속으로 흘러나갔다. (pp.66-67)




오늘은, 당신에게 메리 크리스마스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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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 2013-12-24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락방님 오늘 저녁 만찬을 여시겠군요. 메리크리스마스예요.
ps) 아웃오브아프리카는 영화관에서 보지않으면 큰 의미가 없답니다.

다락방 2013-12-24 13:55   좋아요 0 | URL
네, 오늘 저녁엔 만찬을 열 예정입니다. 와인을 마실거에요. 안주는 뭐가 좋을까, 생각하다가 엄마가 사둔 파프리카로 하기로 했습니다. 치즈도 준비 되어 있고요. 고기를 사갈까 말까..계속 고민중이에요. 어제 회식에서 배터지게 고기를 먹었기 때문에...

영화는, 영화관에서 보지 않아도 저는 의미를 찾을 수 있을것 같아요.

Mephistopheles 2013-12-24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보단 영화가 더 낫다...라는 평가가 지배적입니다....(댓글 하나가 이런 페이퍼가 양성되는군요..ㅎㅎㅎ)

다락방 2013-12-24 13:56   좋아요 0 | URL
네, 책이 막 확- 좋지는 않더라고요. ㅎㅎ
덕분에 보고 싶은 영화가 생겼지 뭡니까, 메피스토님!! 굿 다운로더로 다운 받으려고 했더니 없어서..할 수없이.......다른 방법을 찾아볼 수밖에 없겠어요. ( ")

Mephistopheles 2013-12-24 14:28   좋아요 0 | URL
므하하하하하하(이 웃음의 의미는...)

http://blog.aladin.co.kr/mephisto/1596239

다락방 2013-12-24 14:34   좋아요 0 | URL
헐. 메추리 요리는..진짜 메추리 원형 그대로..이네요. 어쩐지 멘붕... 하하하하하

Mephistopheles 2013-12-24 15:03   좋아요 0 | URL
양꼬치집에 가면 메추리구이 파는 곳이 있어요. 원형 그대로 쫙 펴서 구워주는데...
뼈채 오도독 씹어 먹음 제법 고소합니다.

다락방 2013-12-24 16:00   좋아요 0 | URL
아차산 입구에 가도 메추리 원형 그대로 구워서 파는 사람들 많아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아무개 2013-12-24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다락방님은 역시 가족과 함께 하는 성탄전야인가요?
저는 오랫만에 옛 부서 동료들과 만나기로 했어요.
제가 잠시 마음을 줬던 친구도 온답니다.
오랫만에 취해 볼까나~~ ^0^

2.아웃 오브 아프리카 영화 봤는데 전!혀! 기억이 나질 않아요. 헐!

3.제가 만약 오늘 저녁에 족발을 먹으면서
다락방님을 간절하게 떠올린다면 함께 먹는거니까
족발 안주는 피해주세요 ㅇㅎㅎㅎㅎㅎ

4.사랑하는 다락방님....
올 한해도 성실히 글 읽고, 글 쓰고 또 사랑하느라 고생했어요.
덕분에 많이 즐겁고 따뜻해진거 같아요....
우리 모두 내년에는 조금만 더 행복해져 봅시다!
메리 크리스마스 앤드 해피 뉴이어~ ^^


다락방 2013-12-24 14:37   좋아요 0 | URL
1. 오오오오 술 취하면 꼬장문자 보내요, 아무개님. 내가 다 받아줄게 ㅋㅋㅋㅋㅋ 저는 엄마랑 와인 마실까 생각중이에요. 엄마의 스케쥴은 묻지 않았지만 제가 와인마시자고 하면 냉큼 오케이 하실듯요 ㅋㅋ

2. 전 아웃오브아프리카도 일단 책으로 먼저 볼랍니다!

3. 저는 저녁에 아마도 족발은 안 먹을거에요. 고기는 어제 배터지게 먹기도 했고 엄마는 족발을 잘 안드셔서...그래서 어쩌지..뭐먹지..뭘로 안주를 하지.. 남동생이 회사에서 케익 받았다고 가져온다는데 케익을 안주로 할까...뭐, 고민중입니다.

4. 아무개님, 내년에도 따뜻하게 해줄게요!
:)

아무개 2013-12-24 14:51   좋아요 0 | URL
1.폰....수신거부 설정 해놓으십쇼!!! 캬하하하

2.삽겹살 먹고 돼지갈비 먹고 치킨 먹고 피자까지 먹고
집에가서 햄계란볶음 해 먹는 ***님이!
파프리카와 케익만으로 안주를 한다굽쇼!!!!????


다락방 2013-12-24 15:59   좋아요 0 | URL
그렇게 쉬지 않고 먹는 *** 님이 대체 누굽니까? 그 사람이 인간이 정녕 맞단 말입니까? 네? 누구냐고요, 누구!!

레와 2013-12-24 15: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나의 메뉴는 볶음쌀국수+홍합탕=와인 ^^v


파프리카랑 버섯이랑 양파랑 같이 볶아먹는건 어때요?
와인과 함께라면 모든 음식이 축복!

메리크리스마스~*

다락방 2013-12-24 15:58   좋아요 0 | URL
아 귀찮아서 오늘은 못볶겠어요. 어제 회식이라 열나 먹고 늦게 잤더니 피곤.. 일단 집에 가서 컨디션 보고 볶든지 말든지 해야할듯. 나 이러다가 집 가자마자 잘지도 몰라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지난주 금욜에도 집에가자마자 밥도 안먹고 바로 잤다능. 그리고 물론 일어나서 밥 먹고 와인마시고 혼자 쑈했지만 ㅋㅋㅋㅋㅋㅋㅋㅋ

메리크리스마스, 레와님~ :)

blanca 2013-12-24 16: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바베트의 만찬은 영화가 더 더 정말 너무 좋아요! 그리고 세상에나, <아웃오브아프리카>를 안 보셨다니요. 저는 세 번 정도 봤는데 볼 때마다 눈물이 줄줄 나더라고요. 추천 또 추천합니다. 그래서 원작도 읽어보려고 했었는데 글씨가 너무 작더라고요. 그래서 변명같지만 아직 시도하지 않았어요. 크리스마스 이브. 저는 지금 몹시 배가 고픈데 마트에 식료품을 주문했는데 주문한 사람이 너무 많아서 내일 온다고 합니다.--;; 그리고 더불어 에쿠니 가오리의 저 소설은 장바구니에 담아갑니다. 너무너무 기대되네요. 마지막 스포일러를 읽지 말았어야 하는데, 하는 아쉬움은 조금 남지만요^^;; 메리 크리스마스!

다락방 2013-12-26 11:38   좋아요 0 | URL
<영혼의집> 사려고 검색하다가 블랑카님의 페이퍼를 봤어요. 그래서 지금 이걸 어쩌나, 망설이고 있답니다. 저도 이사벨 아옌데의 작품을 아무것도 읽어보지 못한 상태로 에세이를 먼저 접하게 된거거든요. 제 경우에 마르케스의 마술적리얼리즘은 재미있게 읽긴 했지만, 이사벨 아옌데의 에세이에서 가끔 점을 치고 맹신하는 게 음, 좀 지나쳐 보였던 것도 사실이거든요. 그래서 <영혼의 집>을 읽고 싶었는데 확- 도전을 못하겠네요. 흐음.
그래도 이 책은 참 좋았어요.

아니, 식료품은 왔나요? 도착 한거에요? 크리스마스에 맛있는 것 좀 드신겁니까?!!

프레이야 2013-12-25 0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베트의만찬,은 올 시월 부산국제영화제 행사의 하나로 박찬일 쉐프가 한 음식과영화에 대한 강연에서 알게 됐어요. 아웃오브아프리카,도 언급했었죠. 찜만 해두곤 잊었는데 디비디가 있군요. 담아야지. 다락방님에게도 메리 크리스마스^^

다락방 2013-12-26 11:39   좋아요 0 | URL
저도 바베트의 만찬을 꼭 챙겨봐야겠어요. 블랑카님도 극찬하시고 밑에 댓글 달아주신 라일라님도 극찬하시니 꼭 보고야 말겠어요. 만찬 장면 너무 궁금해요!
아웃오브아프리카도 잊지 말고 다음에 지를 때 꼭 포함할겁니다. 불끈!

크리스마스 잘 지내셨어요, 프레이야님?
:)

LAYLA 2013-12-25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는 다시 생각해도 명작인거 같아요. ^^

다락방 2013-12-26 11:39   좋아요 0 | URL
오케오케 접수합니다!!
 
버림받은 그녀 - HQ-666
린 레이 해리스 지음, 정성희 옮김 / 신영미디어 / 2013년 12월
평점 :
절판


"그녀가 관심 없다고 하면 어쩌죠?"

"관심 없으면 그렇게 떠나지도 않았을 거다."

바비가 대답했다.

"여자들은 뭔가 겁나지 않으면 달아나지 않아. 그녀가 원하는 것이 네 재산과 이름뿐이었다면 결혼 서약을 하는 것에 전혀 망설임이 없었을 거야. 내가 장담한다." (pp.229-230)



1. 겁나지 않으면 달아나지 않는다는 말은 틀리지 않다. 여자는, 남자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의무감에 결혼한다는 생각 때문에 괴로웠다. 자신은 그를 사랑하는데. 그래서 그녀는 도망쳤다.


2. 부자 남자들이 가난한 여자를 두고 서로 좋다고 싸우는 걸 볼 때도 짜증났는데, 완전 부자남자가 완전 부자여자랑 사랑하는 걸 봐도 짜증이 나네.


3. 난 그냥 내 남자가 아닌 부자 남자가 짜증나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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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3-12-17 0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영화쿠폰 안쓰시는 분, 저 좀 주세요!

2013-12-17 22: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2-18 08: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2-17 09: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3-12-17 11:30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

2013-12-17 11: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2-17 11: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2-17 13: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2-17 14: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2-18 19: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3-12-19 10:56   좋아요 0 | URL
우히히히 고맙습니다. 잘 볼게요!

2013-12-21 15: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2-23 13: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침 출근길. 버스정류장에 도착하려면 아직 좀 더 가야하는데, 정류장에 서있던 마을버스가 막 출발하려고 한다. 나는 냅다 뛰었다. 사실 저 버스를 타지 않아도 괜찮다. 그 다음버스, 그 다음버스를 타도 나는 지각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눈 앞에서 버스를 놓칠순 없지. 어느틈에 나는 입밖으로 소리내어 외치고 있었다. 가지마, 가지마!!


내 앞에서 뛰던 아저씨 때문에, 그 앞에서 뛰던 여고생 때문에 버스는 출발이 자꾸 늦춰졌고, 결국 나도 간신히 헉헉대며 그 버스에 오를 수 있었다. 으학. 감사합니다- 라고 외치며 버스에 타고 숨을 고른다. 크- 아침마다 빡 세...나는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갈치구이, 계란말이와 함께 밥을 먹고 왔는데 소화가 다 됐네? 버스에서 내린 뒤 까페에 들러 샌드위치를 산다. 그리고 사무실에 와서 커피를 내렸다. 



파트리크는 짙은 레드 와인으로 가득 채운 와인잔을 그녀에게 건넸다. 에리카는 와인 향이 풍기도록 잔을 살짝 돌리고, 코를 잔 안으로 깊숙이 넣은 다음, 입을 다문 채 향을 들이마셨다. 강한 오크향이 콧구멍으로 빨려 들어가 발끝까지 쫙 퍼지는 듯했다. 기분 좋았다. 에리카는 와인을 조심스럽게 맛보았다. 입안에서 와인을 굴리며 공기를 약간 빨아들였다. 향만큼이나 맛도 좋았고, 파트리크가 와인에 꽤 돈을 썼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파트리크는 기대하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환상적이야!"

"그래, 지난번에 네가 와인 맛을 안다는 걸 깨달았어. 유감스럽게도 난 한 상자에 50크로나 하는 와인이랑 한 병에 수천 크로나나 하는 와인이랑 뭐가 다른지 모르겠지만."

"너도 알 수 있어. 이건 습관의 문제이기도 해. 와인을 제대로 맛보려면 벌컥벌컥 마시지 말고 시간을 들여야 하거든."

파트리크는 부끄러워하며 손에 든 와인 잔을 바라보았다. 벌써 3분의 1이나 비어 있었다. 그는 에리카가 스토브에서 요리를 확인하려고 등을 돌렸을 때 그녀의 와인 시음법을 흉내 내려고 애쎴다. 정말 전혀 새로운 와인을 맛보는 것 같았다. 그는 에리카가 했던 대로 와인 한 모금을 입안에서 굴렸다. 그랬더니 갑자기 완전히 다른 맛이 났다. 심지어 아주 약간의 초콜릿 맛, 다크 초콜릿 맛, 다소 강한 레드베리 맛, 약간의 딸기 맛이 섞여 있다고 느끼기까지 했다. 굉장했다. (pp.258-259)


















12월에는 약속이 가득차버렸다. 더이상 약속을 잡기 곤란해져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약속이 없던 어제. 퇴근한 후 바로 들어가 드디어 와인을 입안에서 굴려보기로 했다. 아 설레인다. 집에 돌아가 옷을 후딱 갈아입고 손을 씻고 식탁을 앞에 두고 앉았다. 와인과 잔을 꺼내두고 흐흣 따랐다. 안주는 밥과 볶은김치였던터라(응?), 와인을 먼저 마셔보기로 했다. 김치를 먹은 후에 와인을 마시면 어쩐지 제대로 맛을 음미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나는 언제나 급하게 마시는 사람인지라, 의식적으로 입안에서 굴려야 한다. 와인을 한 모금 입안에 물고, 안에서 굴려보았다. 어떻게 굴리는지 몰라서, 그러니까 굴린다는게 대체 뭘 어떻게 해야하는건지 몰라서 그저 와인을 입에 물고 혀를 왔다리갔다리 해보았다. 혀 전체가 찌릿찌릿했다. 뭔가 살짝- 오는 것 같았는데, 그렇다고 거기에서 다크 초콜릿 맛이라든가 뭔 베리..어쩌고 하는 맛이 느껴지진 않았다. 아, 갈 길이 멀구나. 조금 더 연습해야겠어. 와인의 맛을 느껴보기 위해 집에 와인을 떨어지게 하지 말자. 언제나 쟁여두자. 지금도 책장에는 두 병의 와인이 날 기다리고 있다. 솔직히, 모든 약속을 모조리 다, 취소하고, 매일 집에 가서 와인을 입에 머금고 맛을 느끼고 싶다. 그렇지만...그렇게 되서 결국 와인 맛을 알게 될까봐 두렵기도 하다. 그러면 더이상 싸구려 와인을 사마시려고 하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지금은 싸구려 와인으로 충분히 만족하는데, 앞으로 점점 더, 더더더더 비싼 와인을 마시고 싶어지면 어쩌지? 난....그럴 돈은 없어...그냥 지금처럼 벌컥벌컥 삼켜버리기를 고집해야할까? 그게 사는 방법일까?




에리카는 한숨을 쉬며, 허리가 고무줄로 처리되어 있는 헐렁한 조깅바지와 간밤에 입고 잔 티셔츠를 그대로 입었다. 그녀는 월요일부터 다시 다이어트를 하겠다고 다짐했다. 지금 시작해 봐야 소용이 없었다. 오늘밤에 이미 세 코스짜리 저녁식사를 준비하려고 계획했던 데다, 요리로 남자를 매혹하려면 크림과 버터를 빼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월요일은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에 안성맞춤인 날이다. 그녀는 월요일부터 운동을 시작하고 웨이트 와처스 다이어트 프로그램을 따르겠다고 만 번째로 엄숙하게 다짐했다. 그러나 오늘은 아니었다. (p.241)



아, 에리카, 사랑합니다. 나 역시 어제부터 108배를 매일 하고 잠들자고 새롭게(!!또 새로워!!) 다짐했던 터다. 그런데 어제는 안됐다. 어제는 와인을 음미해야 했기 때문에. 와인을 마시기 전에는 속히 와인을 느끼고 싶은 마음에 백팔배를 하지 못했고, 와인을 마시고 나서는 와인을 마셨으니까 하지 않았다. 그렇게 월요일이 지나버렸으니 이를 어쩐다. 에리카도 이미 밝힌 터다. 월요일은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에 안성맞춤인 날이라고. 그러니 다음 월요일부터 시작하자. 그러나 오, 다음 월요일엔 회사에서 전체 회식이 있다. 그렇다면 그 월요일도 그냥 넘겨버릴테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면 다시 그다음 월요일을 기다려야 한다. 그래. 새해다. 새해에 시작하자. 월요일보다는 새해가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에 더 맞춤하지 않은가! 지금은 일단, 새해가 오기 전까지, 허리가 고무줄로 처리되어 있는 바지와 간밤에 입고 잔 티셔츠를 그대로 입고 지내자. 새로운 삶을, 2주후엔 시작할 테니까.


아니, 근데, 나 이 책 읽고 처음 알았는데, 남자를 유혹하기 위해서는 크림과 버터를 준비해야 하는거냐? 그건 나를 유혹하려고 하는 게 아니란 말이냐, 정녕? 오호라. 



그녀는 잘 때 입는 티셔츠를 벗었다. 티셔츠를 입고 재면 항상 몇 그램 정도가 더 나갔기 때문이다. 그녀는 심지어 팬티도 무게가 나가는지 궁금했다. 아니겠지.에리카는 오른발을 먼저 올려놓았지만 아직 바닥을 딛고 있는 왼발에 체중을 어느 정도 싣고 있었다. 그녀는 점차 오른발에 체중을 실었고, 체중계 바늘이 60킬로그램에 도달했을 때 그대로 멈춰 있길 바랐다. 그러나 아니었다. 마침내 모든 체중을 싣자, 체중계 바늘은 무자비하게도 73킬로를 가리켰다. 그렇군. 그녀가 걱정한 대로, 예상 몸무게보다 1킬로그램이 더 나갔다. 1킬로그램 정도는 더 나갈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지난번, 그러니까 알렉스를 발견한 날 아침에 몸무게를 쟀을 때보다 무려 2킬로그램이나 더 찐 셈이었다. (pp.240-241)



나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항상 몸무게를 재고, 오늘도 그랬다. 저울 위에 올라가서 바늘의 눈금을 보는 순간 정확히, 늘어날 줄 알았지만 또 늘어났군, 했기 때문에, 엉엉엉엉, 에리카가 저울과 사투하는 저 장면을 도무지 눈물 없이는 읽을 수가 없다. 무게가 또 늘었다고 생각되는 날이면, 나 역시 옷을 벗고 다시 재야겠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옷을 벗고 재기도 했고. 그렇게 해서 몇그램 정도 빠졌다한들, 어마어마한 숫자가 바뀌지는 않는다. 아, 에리카. 우리 같이 질리안 마이클스 언니를 만날까요, 진득하게? ㅜㅜ
















난 이제 이 언니의 dvd 가 어디에 가 처박혀 있는지도 알지 못한다.

여튼, 새 삶은 새해에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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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17 09: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2-17 11: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무개 2013-12-17 0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아 왜 태그에 아직도 얼음.공.주.가????

2.저는 평상복도 허리에 고물줄......쿨럭~ ㅠ..ㅠ

3.종로에도 와인빠가 있을까요?

4.전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는데 새해 계획을 아예 세우지 않고 살고 있네요....

5.혹시<오래오래>라는 책 읽고 페이퍼 쓰실 생각 없으신가요?
강신주 책에 <오래오래>라는 책이 나오는데 보자마자 다락방님이 떠올랐고
검색해보니 역시 다락방님도 관심이 있으신거 같던데.....
근데 난 왜?? 내가 이책을 읽고 싶은게 아니고
다락방님이 읽고 쓴 글이 읽고 싶은걸까요....하.하.하.

다락방 2013-12-17 11:32   좋아요 0 | URL
1. 저 책의 제목이 얼음공주 니까요. 하하하하

2. 저는 고무줄 조차 없는 항아리 치마를 입기도 합니다. 펑퍼짐한 원피스..( ")

3. 와인바가 있다한들 가격이 너무 비싸서 차마 갈 수 없어요. ㅠㅠ

4. 전 늘 세워요. 다이어트..

5. 그 책은 오래전부터 보관함에 넣어두었고, 아무개님의 댓글을 보자마자 <중고알림등록>신청해 두었습니다. 중고로 나온다면 제가 읽고 페이퍼를 쓸 지도 모르겠어요. 물론 시간을 정할 순 없습니다. 전 7년전에 산 책도 읽지 않고 있으니까요...orz

2013-12-17 21: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2-18 08: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2-19 15: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주태백 2013-12-21 1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혹시 다락방 님이 "이 유경" 작가 님이신가요?

우연히 "독서 공감, 사람을 읽다." 라는책을 사서 보게되었는데 너무 좋와서 한 5시간을 웹서핑 끝에

겨우 "이 유경" 작가님의 블로그라고 생각되는 곳에 이렇게 찾아 오게 되었습니다.

혹시 맞으시다면 매우많이 영광입니다.

책 너무 잼있게 읽었어요 ^^...

재 주위에 짐승같은 녀석들이 많은데 그 매마른 정서에 불꽃이 될거같아서 설레였고,

그래서 이렇게 불쑥 방명록 남깁니다.

몇권사서 이 짐승들에게 나눠 주고싶어요.

다음책도 언제일지 몰라도 기대하고 물러갑니다. ^^

자주 들러서 눈팅할게요 감사합니다.!




PS. 검색하다가 Tstori 에 "레와 _ing" 다락방님? 친구분 티스토리에 방명록도 남겨보고... (방명록은 수정.)

밤새 뜬눈으로 책읽고 잠을청할려니 다락방님의 책속에 나오던 블로그 이야기 때문에 여기저기 뒤지다

드디어 오게 되었습니다.

흑... 이제 뒹굴거리로 가야겠습니다.

다락방 2013-12-22 00:19   좋아요 0 | URL
아하하하, 제대로 찾아 오셨습니다. 다섯시간이나 걸리셨다니, 참 죄송하네요. 책에 주소를 넣는걸 제가 꺼려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겼네요. 즐겁게 읽어주셨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책으로 내면서 여러가지 걱정이 많았는데, 이렇게 책이 재미있어 친히 찾아와주시는 분도 계시고..전 오늘 제가 자랑스럽습니다.

다음 책을 낼지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것도 정해진 게 없지만, 누군가 기다려준다는 생각을 하니 행복합니다. 고맙습니다. 헤헷 :)
 
The Kinfolk Table 킨포크 테이블 one The Kinfolk Table 킨포크 테이블 1
네이선 윌리엄스 지음, 박상미 옮김 / 윌북 / 2013년 12월
평점 :
품절


혼자 하는 식사는 자유로워서 좋다. 내가 원하는 시간, 내가 원하는 메뉴를 정할 수 있고, 얼마만큼의 시간을 이 식사에 투자할 것인지도 내가 결정할 수 있다. 그건 그것대로 충분히 만족스럽지만, 가끔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 식사를 하는것이 즐거울 때가 있다. 좋은 사람과 좋은 메뉴, 그리고 함께 하는 이야기와 웃음들이 행복을 선사하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래서 같은 메뉴를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이 가장 충족된 기쁨을 준다. 내가 맛있어 하는 이것을 당신도 맛있어하고, 함께 이것이 맛있으니 이야기는 더욱 무르익을것 같다. 까다로운 입맛을 가진자와 나와 비슷한 입맛을 가진자와 동시에 약속을 잡아야 한다면, 어쩔 수없이 후자로 기울고야 만다. 먼 길을 여행할 때도 마찬가지. 나는 언제나 그 길을 내 친구 D와 함께하고자 한다. 그 친구가 지도를 잘 보고 내가 길을 묻는등의 역할 분배도 그렇지만, 우리는 그 낯선곳에서 '이것 먹자' 라고 했을 때 '그래 좋다'라는 답을 서로 할 수 있는 사이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는 잘도 먹는다.


누군가와 '함께' 먹는다는 즐거움이 이 책에도 잘 나타나 있다.


"내가 자랄 때는 외가나 친가의 온 가족들이 브런치를 먹으러 모일 때가 많았어요. 베이글과 훈제 연어, 참치, 다른 훈제 생선과 키쉬를 먹었지요. 아침에 일어났는데 모두들 모여 있다는 건 참 좋아요." -일라이 서스맨 (p.30)


언젠가 [무한도전]의 '못친소'에서 김제동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부시시 일어나 함께 아침을 먹는데 김제동이 '아 좋다' 한거다. '다같이 모여서 아침을 먹으니까 좋다' 며. 혼자 먹는게 나빠서가 아니라, 정말이지 가끔은, 소중한 사람 여럿과 함께 먹고 싶어지니까. 그 때 행복함이 물씬 생겨나기도 하니까.


언젠가는 크리스마스 즈음에 파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아주 오래전부터 해왔다.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내 집으로 초대하는 것. 그들이 내 집에 도착했을 때, 초대받은 모두가 서로를 아는 사이인 건 아니지만, 이 파티를 계기로 서로 알게되고 친근해졌으면 좋겠다. 나를 아는 사람들이 한 곳에 모였다면, 그들이 서로를 싫어할 리 없을 것 같다. 우리는 한데모여 즐거울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고 내가 거창한 파티를 준비하려는 게 아니다. 한 테이블에 모인 사람 모두가 둘러 앉아 술과 음식을 한껏 즐기며 이야기 나누고 싶은거다. 따뜻하고 정겨운 저녁 식사 한 끼,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이 책의 책장을 넘기다가, 내가 꿈꾸던 바로 그런 식사 장면이 등장하는 것 같아서 행복해졌다. 아, 이렇게 말이야, 이렇게.





내가 초대할 인원은 열명이 조금 넘어갈 것 같은데, 그렇다면 흐음, 음식을 서빙할 도우미가 있어야 할까. 잠깐 생각해 보았지만 우린 서로가 서로의 도우미가 되는 것이 파티를 가장 잘 즐길 수 있는 방법인 것 같다. 그리고 이 테이블에 어떤 음식들이 놓이면 좋을까. 이런 음식들이면 정말이지 좋지 않을까.









하아- 이 사진들은 예술이며 고문이다. 음식 사진만 화면에 꽉 찬 게 아닌데도 얼마나 맛있을까 침을 흘리게 만드니 고통스러워. 이 모든 음식들을 내가 다정한 벗들을 초대할 저녁 식사 메뉴로 내고 싶은데, 나는 요리 머저리..도무지 자신이 없다. 이 책에는 당연히 혹은 친절하게도 레시피가 나와있다. 그러나 나와있다고 다 만들 수 있는 건 아니다. 재료중에 한두가지 이상씩은 꼭 외계어(다진 붉은 러시안 케일 1다발 p.32, 아루굴라 4컵 p.74)같은 게 등장해서 멘탈이 잠시 멈추고, 그나마 이건 가까스로 준비할 수 있겠다 싶으면 무슨 오븐을 몇 도로 예열을 해놓고 어쩌고 해야하고...



위의 사진은 <스페인 오믈렛 토르티야>인데, 이건 큰 마음 먹고 언젠가 한 번 만들어 보리라, 는 다짐을 하게 됐다. 그러다 이내, 이 음식을 만들어 먹는 저 남자의 거친 손을 보며, 아 젠장, 이런거 만들어주는 남자가 나 좋다고 하면, 그 때는 앞뒤볼것 없이 확- 결혼해 버리는거야, 라는 생각이 드는 게 아닌가! 나는 늦잠자고 부시시 일어났는데, 아침에 저렇게 스페인 오믈렛 토르티야를 내게 내민다면, 우와- 진짜 짱행복할 것 같다. 마음놓고 잘난척할 수도 있겠지. 나, 이런거 아침마다 먹어, 라고.



사진 한 장 한 장이 아름다운데, 오, 아름다운 문장들도 툭툭 튀어나온다. 잊을만하면 한 번씩 툭, 툭.



색깔이 예쁘고 맛이 신선한 이 샐러드는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송가와도 같아요. (p.35)


이런 낭만적인 문장의 주인공인 샐러드는 이런 비쥬얼이다.



뭔가 진짜 여름의 송가 같다. 크-  몇 개의 문장을 더 옮겨보자면,


어느 날 로마의 노천카페에서 완벽한 카푸치노 한 잔을 마시며 이 오래된 열망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그 순간 그녀는 이 세상 어디에서나 삶은 머그잔과 프렌치 프레스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p.50)


매년 7월 말, 뉴햄프셔야 있는 호수 주위로 야생 블루베리가 익을 때가 되면 우리 가족은 블루베리를 따서 잼을 만들었어요. (중략) 아침에 리코타 치즈와 함께 통밀 토스트에 발라 먹거나 요거트에 넣어 먹어보세요. 일 년 내내 여름을 간직하는 좋은 방법이에요. (p.60)



브루클린과 코펜하겐에서의 저녁 식사 모임을 찾아간 이 책의 저자 '네이선 윌리엄스'는, 그러나 '여유있는' 사람들만 찾아갔던 건 아닐까 싶다. 가끔 그들이 요리하는 환경이 혹은 거주하는 환경, 밥을 먹는 그 환경이, 지나치게 '환상적' 이란 느낌이 들기도 했으니까. 물론 그들과 내가 추구하는 바가 다르고 삶의 방식도 다르니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 그래도 이런 공간은, 그림속의 한 장면 같지 않은가.






내가 이렇게 안살어서 그렇지, 사실 저게 그렇게 꿈의 공간은 아닌건가. 얼마든지 저렇게 살 수 있나? 암튼 이쁘다. 


아, 저녁 식사를 초대하게 되면 빠지지 않고 꼭 생굴과 연어를 차려두고도 싶다. 화이트 와인과 함께하면 대박이지 않을까. 이렇듯 정갈한 연어를 보노라니 당장이라도 집어 먹고 싶어..



물론 내가 가장 먹고 싶은건, 바로 이 구운 토마토 였다.



이건 뭐 보기만 해도 미쳐버릴 것 같아. 술도둑..될 것 같다. 와인도둑.. 하아- 이런것들을 차려두고 멋진 남자들을 단체로 불러서 함께 술을 마시고 깔깔거리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그들을 초대할 때, 내 집에는 방이 아주 많았으면 좋겠다. 화장실도 물론 여러개 였으면 좋겠고. 그나저나 저 토마토 옆의 메뉴는 레몬을 올린 닭가슴살인가, 뭐 그런 이름인데. 저것도 좋아 보인다. 히융 ㅠㅠ 매일 이것들을 먹기만 하고 회사에 출근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구나.



아름다운 음식과 아름다운 사람들의 사진들이 책장을 넘길때마다 펼쳐져서 기분이 아주 좋아진다. 책장에 꽂아두고 간혹 꺼내보면 훈훈한 기분이 될 것 같아, 크리스마스 선물로 이보다 더 좋은게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 책을 다 보고나서야 2권을 예약판매중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아, 이게 앞으로 계속 나오는 시리즈라면, 나는 이제 어쩌면 좋아. 계속 정기적으로 돈을 지불하게 되겠구나. 이 사진들을 보느라고.


아 빨리 돈 모아서 커다란 집을 하나 사야겠다. 방이 많은 커다란 집. 부엌도 커다란 집. 그래서 파티를 하고 싶다. 배터지게 먹고 마시고 싶다. 웃다가 너무 좋아서 울고 싶을것 같은, 그런 밤을 만들고 싶다. 내 시선이 어딜 향해도, 그곳에 소중한 사람들의 시선이 있었으면 좋겠다. 이 책은, 그런 나의 욕망을 부채질한다.


주변 사람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독서공감, 사람을 읽다> 를 줄 게 아니라면, 이 책은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 물론 두 권 다 줘도 좋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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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3-12-16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베트의 만찬이 떠오르네요.

다락방 2013-12-16 18:04   좋아요 0 | URL
저 메피스토님의 이 댓글 보고 으응 이것은 뭣이냐 싶어 검색하고 책을 오늘 구매했습니다. dvd 는 책을 본 다음에 생각해볼 예정입니다. 메피스토님이 말씀하신 건 책인가요 영화인가요?

Mephistopheles 2013-12-17 10:09   좋아요 0 | URL
둘 다지요. 영화를 먼저 보고 나서 책을 나중에 접했지요...

레와 2013-12-16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븐온도는 내가 맞출테니, 락방은 얼른 집을 사도록해요!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이 책 소개글에 보면 나무가지에 빵반죽을 말아서 모닥불에 둘러앉아 구워먹는 장면이 나와요.
만드는 과정이 너무너무너무 간소한거야!! 이게 말이돼!!!! 어!!!!!
나는 빵 한번 만들라치면 부엌이 온통 밀가루 범벅이 되는데...ㅡ.ㅜ


무튼 꿈이 현실이 되는 그날이 빨리 오기를..!

다락방 2013-12-16 18:05   좋아요 0 | URL
나무가지에 빵반죽..모닥불..난 못봤는데 ㅎㅎ

음식이 잔뜩 차려지면 냄새도 정말 좋겠죠? 모두들 술마시고 꽐롸되는 밤을 만들자 움화화화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