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의 마지막날은 막힌 변기를 뚫는 것으로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고 화장실을 다녀오니 변기가 막혔다. 공교롭게도 내가 볼 일을 본 뒤였다. 끙. 아니 이런일이 왜 대체 내게 일어나는가....나는 난처한 표정과 말투로 변기가 막혔어...라고 말했고 남동생은 대체 누나는 어떤 사이즈(응?)로 볼 일을 보기에 면기를 막히게 하냐며 ...뭐, 지저분한 얘기는 이쯤하고. 남동생은 스맛폰을 들여다보길래 그냥 그런가보다 하며 나는 저 막힌 변기를 어떻게 뚫을 것인가 고심하고 있었는데, 아주 쉬운 방법을 찾아냈다며 남동생은 내게 자신의 스마트폰을 들이밀어 동영상을 보여주었다. 아, 너 막힌 변기 뚫는 방법을 찾고 있었던거구나!
방법은 간단했다. 변기를 비닐로 막고 돌리는 것이다. 돌리면 압이 차오르니 그 때 그 압을 다시 변기로 밀어 넣어주면 뻥- 하고 뚫리는 것. 말로 설명해 무얼하리, 우리가 본 영상을 찾아 올려보려고 했으나, 흐음, 우리가 본 영상을 올리자니 지저분하기 짝이 없구나. 혹여라도 이 방법을 알고 싶으신 분들은 검색창에 <뻥투사용방법>을 검색해보시길 추천한다.
남동생과 나는 커다란 비닐과 테이프를 준비해 변기를 밀봉했다. 그리고 동영상에서 본대로 했다. 세 번쯤 하고나니 정말이지 뻥 뚫렸고, 남동생은 내가 연휴 마지막날 누나때문에 막힌 변기 뒷수습이나 해야 하냐며 궁시렁거렸다. 여튼 남동생이 참 듬직하고 믿음직스러웠다. 나는 남동생을 무지막지하게 사랑한다. 남동생은 최고다. 나에겐 너여야만 해!!
연휴가 시작되면서 동시에 나는 연휴동안 책 읽을 생각에 들떠있었다. 혼자 방안에 콕 처박혀 책들을 쌓아두고 읽어야지. 그러나 첫날은 연휴를 온몸으로 즐기느라 늦잠에 낮잠까지 어휴 책을 읽게 안되는거다. 집중도 잘 안되고 늘어지길래 나가서 산책을 하고 그 길로 까페에 들러 책을 읽었다. 커피와 함께 읽고 있던 책을 마저 다 읽고 왔다.

이튿날엔 여동생 식구들을 비롯 모든 친척들이 방문하는 바람에 내 시간을 가질 짬이 없었다. 집안에 사람들이 가득가득한게 나는 그다지 좋질 않았다. 이 방엘 가도 저 방엘 가도 누군가가 꼭 있고, 또 그렇게나 사람이 많이 와있는데 나 혼자 빈 공간을 찾아내 책을 읽는것도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을 것 같고...책을 들고 까페로 나가 잠시라도 혼자 있고 싶었지만, 조카들을 두고 나 혼자 나가자니 도무지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해서, 저녁 무렵 마트에 가 술을 잔뜩 사가지고 왔다. 제부랑 남동생이랑 함께 나갔는데 나는 술을 잔뜩 사고 제부는 회를 샀다. 전으로 안주 하긴 싫었으니까. 다들 우리같은 생각을 가졌던건지 횟집엔 사람이 엄청나게 줄을 서서 회를 포장하고 있었다. 헐...여튼 회를 사가지고 집에 와서는 늦도록 술을 마셨다. 다음날 친척들이 모두 돌아가고 여동생 식구들만 남았는데, 여동생 식구들은 제부를 제외하고 우리집에 며칠 머무르기로 했다. 명절을 맞아 여동생이 입술에 물집이 잡히고 좀 힘들어 보여서 함께 있자고 한 것. 의도도 좋았고 내 뜻도 기꺼이 그러했고 조카들은 사랑스러웠다. 조카를 데리고 올림픽공원에 산책을 가, 조카가 원하는 초콜렛을 사주고 조카와 함께 소리지르며 뛰어다니는 것은 명절의 하이라이트. 가장 즐거운 일이었다. 나는 조카의 웃는 얼굴을 보는 것이 무척이나 좋다. 늘 이 아이를 웃게 해주고 싶다고 자꾸자꾸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좋아하고 사랑하고 웃게 해주고 싶다고해서 아이와 함께 노는 일이 힘들지 않은건 아니다. 일요일에는 아침부터 낮까지 이 아이랑 계속 함께 놀아주는데, 아, 나는 이 아이에게 몇천번이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면서도, 정말 예쁘다고 쓰다듬으면서도, 나는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도 낳지 않을거라고 결심에 결심을 거듭했다. 사랑한다고해서 아이를 돌보는 일이 마냥 기쁘기만은 한게 아니라는 걸 절절히 실감했달까. 오후 세시쯤 완전 기진맥진해서 내 방에서 나와 놀던 조카에게 "이모 마루에 나가서 잠깐 쉬다올게" 라고 했더니 조카가 "나도 이모 따라갈래" 라고 하는 그 순간, 아, 정말 폭발할 뻔했다. 눈물이 핑 돌았다. 너무 힘들어서. 그렇다고 내가 그 아이와 뭐 대단한 걸 한 것도 아닌데. 조카가 하자는대로 가만히 앉아서 말상대를 해주었을 뿐인데. 공주놀이를 해주고, 마트에 가는 놀이를 해주고, 책을 읽어주고, 같이 낙서를 해준것 뿐인데. 별 거 아닌 것 같은 일들인데 사람이 이렇게 지치고 녹초가 되다니...이런 생활을 내 여동생을 비롯한 이땅의 엄마들이 매일 하고 있다니..오, 신이시여. 엄마들은 정말이지 위대합니다. 게다가 내 여동생은 갓난아기를 품에 안고 있다고!! 이래서 어린이집과 유치원이 필요한거구나. 아이가 하나여도 엄마는 엄마의 시간이 필요한데, 그 애들을 늘 데리고 있으면 매일매일을 아니 매시간을 대체 어떻게 버틸 수 있는거지? 자식에 대한 사랑으로 그게 버텨질 수 있는 것일까? 그건 정말이지 어마어마한 희생이 아닐까. 아- 그나마 제부가 교사이고 칼퇴를 하며 직장과 집이 가까워 다섯시 반이면 집에 도착을 하고, 방학이면 거의 집에서 아이들을 같이 봐주기 때문에 여동생의 경우엔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여동생은 남편에게 아이를 맡기고 바람을 쐬고오고, 나가서 커피를 마시고 오고, 운동을 하러 다녀온다. 그 시간들이 없다면 아마 동생도 버티지 못했겠지.
나는 도무지 할 자신이 없다. 매일을 아이들과 그렇게 보낼 자신이 없다. 사랑은 사랑이고 예쁜건 예쁜거지만,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을것 같다. 어제도 헬쓰장 다녀온 남동생에게 나는 소리를 질렀고(너만 운동하고 오면 다냐!), 남동생은 내게 변기 뚫어줬는데 왜이러냐며 맞받아쳤다. 나는 내가 변기 뚫을테니 니가 애 보라고 소리를 질렀고, 옆에서 여동생은 야 언니 스트레스 지금 대박이야, 라고 내 상황을 설명해줬다. 여동생은 언니 남동생이랑 나가서 맛있는 것 먹고 천천히 들어오라고 했고, 갓난 아기를 안고 있는 여동생에게 첫째 조카까지 맡기고 나가는 것이 썩 내키지 않아 망설여졌지만, 외출했던 우리 엄마가 들어오시는 바람에 행복한 마음이 되어 안심하고 나갔다. 그리고는 남동생과 순대국을 시켜두고 가운데 순대를 또 시켜두고 부지런히 먹었다. 시장에 들러 바나나를 사고 마트에 들러 조카에게 줄 과자와 우유를 사고 집에 돌아왔더니 조카 둘이 자고 있더라. 나는 잽싸게 책을 챙겨서는 다시 나갔다. 나 까페에 다녀올게, 한 시간만 있다 올게, 라고 말했고 여동생과 엄마는 충분히 쉬다 오라고, 밤에 들어와도 된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한시간 반을 까페에 있다 왔다.

밤에 잠든 조카를 바라보며 또 얼마나 예쁜가를 생각하다가, 이렇게 예쁜 아이를 이렇게 사랑스런 아이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면서도 함께 노는게 힘들다는 것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를 생각했다. 사랑한다면 사랑한다는 그 이유 하나 만으로도 힘들지 않을 수 있어야 하는거 아닐까. 게다가 아이가 둘이라면 하아- 한숨부터 나와. 매일을 엄마로서 그 아이들과 살아야 한다니. 나는 정말이지 거짓말 하나 보태지 않고, 회사 나가서 일하는게 더 편한거라는, 더 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에 나가있는 동안이 훨씬 더 편한거라고. 나는 결혼하지 않고 애도 낳지 않겠다고 결심에 결심을 거듭하다가 여동생에게 너 정말 대단하다는말을 했다. 너는 어떻게 사니 대체, 어떻게 아이 둘을 매일 보고, 그 틈틈이 운동을 하고 산책을 하고, 그러다 명절이라 시댁에 가서 요리도 하고, 아니 그런것들을 대체 어떻게 하며 살고 있는거니. 나는 그럴 자신이 없다. 나는 그냥 연애만 하고 살아야겠어. 그러자 내동생은 그러라며 이렇게 말했다.
언니, 결혼은 해도 후회 안해도 후회라잖아? 내 생각엔 안하고 후회하는 게 나은것 같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 완전 사랑한다 내동생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짱멋져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니가 최고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난 그동안 사람들로부터 '그렇다면 해보고 후회하는 게 나은것 같다' 란 말만 들어왔는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 짱멋져. 캡이다 너는 ㅋㅋㅋㅋ
나이 먹을수록 점점 더 내 공간이 소중해지고 나는 점점 더 폐쇄적이 되어가는 걸까. 일 년에 한 번 만나는 친척들과 함께하는 술자리가 즐거운 면도 분명 있지만, 나는 내가 머무르는 내 집이 복작거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들에 대한 반가운 마음이나 즐거움 보다는 혼자 있고 싶은 마음이 훨씬 더 크다. 작년말에 사주를 봤을 때 나는 혼자 있는게 더 편하고 신난 사람 이라는 말을 사주봐주시는 분이 해주셨었는데, 어휴, 이번 명절에 혼자 있는 시간이 얼마나 그립던지 미칠뻔했다. 명절 내도록 그런 생각을 했다. 앞으론 명절마다 아예 한국을 떠나있어야 겠다고. 그 비행기값..을 갚으려면 절약에 절약에 또 절약을 해야겠지만, 그게 잘 안되서 또 발을 동동 구르긴 하겠지만, 여행 자체도 내겐 몹시 힘이 들지만, 하아, 복작거리는 집에는 내 마음의 평화와 안정이 없어. 흑 ㅠㅠ
조카를 보는 일도 그렇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내내 붙어있는 것을 잘 해내지 못하는 사람인 것 같다. 사랑하는 것과 함께 사는 것이 꼭 함께 가야 하는 게 아님을,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더 힘든 것임을 완전 엄청나게 깨닫는다. 그러다가 여동생이 틀어둔 <응답하라 1994>의 샤워하고 수건으로 하반신만 가리고 나온 칠봉이를 화면상으로 잠깐 보며, 나는 왜 내 칠봉이의 벗은 몸을 보지 못했던가, 라고 잠깐 속상해하고, 훌쩍. 맨정신으로 연휴의 마지막날을 보낼 수 없어 김치를 안주 삼아 막걸리를 마셨다. 사다 둔 막걸리를 다 비워내고 남동생과 나는 이 압박감을 어떻게 극복하냐며 맥주를 꺼내 2차를 하기 시작했다. 안주는 계속 김치였다.

그렇게 2월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