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한 토막 


한창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다가
우리는 갑자기 입을 다물고 말았네.
발코니에 모습을 드러낸 소녀.
아, 무척이나 아름다웠네.
그녀의 자태가 눈부시게 황홀했기에
우리는 무심히 휴가를 즐길 수만은 없었다네.


바시아는 넋을 잃고 바라보는 남편의 시선을 놓치지 않았고,
크리스티나는 반사적으로 남편의 손을 꽉 잡았네.
순간 나는 생각했지: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하리라.
-당분간 여기 오지 마.
며칠 동안 내내 비가 올 거래.


과부인 아그네슈카만이
환한 미소를 머금고 그 사랑스러운 소녀를 반겼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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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 시크릿 닥터 - 내 친구가 산부인과 의사라면 꼭 묻고 싶은 여자 몸 이야기
리사 랭킨 지음, 전미영 옮김 / 릿지 / 2014년 6월
평점 :
절판


아직 170쪽 까지밖에 안읽었으지만, 이만큼만 읽어도 추천할 수 있다.

여자사람들이 읽어야할 책, 남자사람들도 읽어야할 책. 어쩐지 고맙고 안심이 되며 심지어 재미있다!! 밑줄 그을 부분이 많은데, 그건 나중에 한 번에 정리하는 걸로..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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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5-11-02 11: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은이가 처음 보는 이름인데, 책 제목이랑 표지가 아주 눈길을 끄네요.
일단 다락방님 밑줄을 읽어보고 싶으니,
다락방님은 서둘러 읽어주시고,
저는 여기서 기다리시고~~~~~~ㅎㅎㅎ

다락방 2015-11-02 15:49   좋아요 0 | URL
네, 아주 흥미롭게 읽고 있어요, 단발머리님. 저자는 산부인과 의사인데요, 궁금했지만 차마 친구들과 얘기하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 속시원이 대답해줘요. 이를테면, 질은 원래 냄새가 나는 게 정상이다! 이런 거요. 섹스와 오르가슴 얘기도 물론! 후훗

그렇게혜윰 2015-11-02 1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리즈로 출간되어도 좋겠어요^^

다락방 2015-11-02 15:50   좋아요 0 | URL
산부인과가 나왔으니 내과, 외과, 신경과 뭐 이런 시리즈로 말씀하시는 거죠, 그렇게혜윰님? ㅎㅎ 아무래도 산부인과에 대한 게 가장 흥미롭지 않을까 해요. 그간 말해오지 못했던 것들이 많았던 만큼 말이지요. 흣

기억의집 2015-11-02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부인과.... 진짜 가기 싫은 곳이죠. 제가 한동안 오줌소태가 있었는데, 산과 가기 싫어 민간요법으로 떼우려다 상황만 악화돼 치료기간만 늘어난 적이 있었어요. 참, 산부인과의사 친구가 진료보는 건 민망할 것 같아뇨. 묻는 거라면 몰라도....

다락방 2015-11-02 15:52   좋아요 0 | URL
네, 산부인과는 정말 가기 싫은 곳이죠. 그리고 가면 이상하게 위축되는 곳이구요. 한두번도 아닌데 닥터 앞에서 다리를 벌리고 누워있는다는 건 진짜 적응안돼요. ㅠㅠ 내과에서 목구멍을 보이는것처럼, 치과에서 입 안을 보이는 것처럼, 이비인후과에서 콧구멍을 보이는것처럼, 그렇게 자연스러워졌으면 좋겠어요. 이 책의 여자들이 많이 궁금해하는 것들, 그러나 차마 묻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서 대답해줘요. 재미있어요!

살리미 2015-11-02 1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자들이 읽었으면 좋겠어요^^ 이상한 야동들 때문인지 제대로 된 지식도 없이 오해하고 있는 부분들이 꽤 있는듯해서요 ㅎㅎ

다락방 2015-11-03 09:48   좋아요 0 | URL
맞아요, 오로라님. 저도 읽으면서 이건 남자들이 읽어야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포르노 배우들만 보고 자기 여자친구 혹은 아내들의 몸을 상상하고 그러길 바란다면, 그건 제대로 된게 아니죠. 재미있게 읽고 있어요. 힛
 

어린아이들이 위탁부모에게서 자라는 것과 비슷한 이 그룹 홈에는 또 다른 소녀가 한 명 살았다. 앙네스 클라르스퇴룀은 소녀들의 양육을 삶의 과제인 동시에 수입원으로 삼았다. (p.220)
















의료사고로 팔 한 쪽을 잃은 앙네스는 어려운 환경에 놓인 사춘기 소녀 세 명과 함께 살고 있다. 위탁부모와 비슷한 이 제도를 그룹 홈이라 부르는데, 그녀들은 자신들이 어디서부터 오게 된지도 모르는 난민소녀들이며, 온갖 불행한 일들을 어릴때부터 겪어왔다. 그런 그녀들을 다루기는 쉽지가 않고, 그런 그녀들의 불행을 위로하거나 격려하는 일도 쉽지 않다. 앙네스는 그런 소녀 세 명과 살고 있다. 십대의 소녀 세 명.


"내가 돌보는 아이들은 앞도, 뒤도 보이지 않는 무인지대에 있어요. 아무도 그 아이들을 원하지 않아요. 쓸데없다고 내던져진 아이들이에요. 이 아이들에게 유일하게 확실한 것은,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마주하는 자기비하예요. 아이들은 잠에서 깨어나길 싫어해요! 일어나고 싶어 하지도 않아요! 쓴맛은 대여섯 살 때 이미 아이들의 영혼을 파고들었어요." (p.229)



몇해전에 소개팅을 했었다. 우리는 서로 딱히 맞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그저 만나는 시간만을 조용히 보내고서는 각자의 갈 길로 갔다. 소개팅남에게 어떤 매력을 느끼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아주 오래 기억남는 그의 말이 있다. 그는 지금 비영리단체에서 일을 하고 있다고 했는데, 나중에는 어려운 환경의 아이들을 돕는 일을 하고 싶다고 했던 것이다. 주변에 학교에서 돌아오면 방치되어 있는 어려운 아이들이 갈 수 있는 장소를 만들고 싶다고, 방과후에도 그 아이들이 밥 먹을 곳, 놀 곳, 쉴 곳을 제공하고 싶다는 거였다. 그때 나는, 혹여라도 우리가 계속 알고 지내게 된다면, 당신이 그런 시설을 만들었을 때 어떤 식으로든 도움을 제공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 말은 진심이었다. 우리는 사실 그 뒤로는 다시는 연락하지 않았지만, 그가 그런 시설을 종국에 만들게 된다면, 나는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되고 싶다. 내가 그 당시에 생각한 것, 그리고 지금 생각하고 앞으로도 생각하는 건, 그런 시설에 책을 기증하는 것이었다. 나는 간혹 그림책을 사서 보고 아이들 책을 사서 읽기도 하니까, 내가 읽어본 책들을 기증하면 좋지 않을까. 그렇게 아이들의 공간에 책을 차곡차곡 쌓아주는 일은 그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지 않을까. 책이 어려운 환경에 놓인 아이들에게 유일한 대안도 아니며 또 최고의 놀잇거리는 아닐 수 있겠지만, 그래도 어떤 아이에게는 아주 유용한 놀이의 수단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어떤 식으로든 아이에게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지 않을까. 



어제 상담을 공부하고 또 일하고 있는 친구로부터 심규선의 신곡이 도착했다. 상담을 하는 아이들과 함께 듣고 많은 위로를 받은 노래라고 했다. 그래서 들어보았다.



심규선의 <피어나>



그간 심규선이 불렀던 노래와 좀 달라 앨범정보를 찾아보았다. 


접힌 부분 펼치기 ▼

 

잔잔한감성의여성싱어송라이터 "Lucia (심규선)" 
디어뮤즈먼츠와한국유방건강재단이발매하는월간 [Monthly DearMuse] 의세번째앨범.

유방건강의식향상을위한핑크리본캠페인의일환으로시작된 [Monthly DearMuse] 가세번째앨범을발매하였다. 지난 7월부터시작된 '닥터심슨' X '그_냥' 그리고 '타린(바닐라어쿠스틱)' X '준모(프로젝트슈즈)' 로이어진두개앨범은수준높은퀄러티의음악과의미있는가사로한국인디음악씬에서좋은반향을일으키고있다. 그뿐만아니라수익의일부가저소득층유방암환우들에게기부된다는점에서음악을사랑하는리스너들에게는물론아티스트들사이에서도각광을받는프로젝트가되었다. 

어느덧세번째를맞은 [Monthly DearMuse] 는많은사람들에게잔잔한감성의여성싱어-송라이터로알려진 "Lucia (심규선)"의참여로더빛을발하게되었다. 심규선은 '에피톤프로젝트', '캐스커','한희정', '참깨와솜사탕' 등대한민국인디씬을대표하는아티스트들이소속되어있는 '파스텔뮤직' 싱어-송라이터로서 2010년디지털싱글로데뷔하기이전부터 "여수국제락페스티벌국무총리상대상", "제 29회 MBC 대학가요제금상수상", "개인유투브채널동영상수십만조회수기록" 등많은수상과경력으로알려져있던아티스트이다. "부디", "꽃처럼한철만사랑해줄건가요?" "어떤날도, 어떤말도" 등다수의히트곡을남기며전문가, 대중에게고루인정받고있는대한민국여성싱어송라이터 "Lucia (심규선)" 은간절하게부르는감성적인노래를통해잔잔한감동을주는것으로잘알려져있으며가사의깊이또한남다르다. 

그러한 "루시아(심규선)"의장점은이번싱글의수록곡인 '피어나' 에서도여지없이발휘되고있다. 어떠한고난과역경이우리의삶을누를지라도, 살아있는한아픔을딛고꽃처럼피어나겠다는삶의의지를담고있다. 가사를곱씹으며듣고있으면마치한편의시를귀로읽는느낌이다. 불행과가난, 병듦이구체적으로묘사되면서우리사회의약자들을대변하는노래이기도하며,누구나언젠가겪게되는비극앞에선한생명의강한에너지와같다. 결국이노래는희망을노래하고있으며깊은위로를전해주고자하는메세지가담겨있다.이는 저소득층 유방암 환우들의투병기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된 음원이며한국유방건강재단과함께하는 핑크리본캠페인 속에서 어려운 이웃들에게 큰 힘이 되고자 하는 "루시아(심규선)" 의 소망이 담겨있는 곡이다. 

이번 [#DearMuse #201510A #PinkRibbon] 또한앨범의판매금액중일부는한국유방건강재단에기부되어저소득층유방암환우들의수술치료비로쓰여지며아모레퍼시픽핑크리본캠페인의일반인홍보대사핑크제너레이션이앨범아트웍디렉팅에직접참여하였다. 한국유방건강재단은국내최초유방건강비영리공익재단으로지난 2000년아모레퍼시픽이설립기금전액을출자하여설립한이후연중으로핑크리본캠페인을전개해오고있다. (네이버 앨범소개)

 

펼친 부분 접기 ▲


이 노래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한 조각 햇빛도 들지 않는 그런 캄캄한 궁지에
바람을 타고서 날아왔나 작고 외로운 꽃씨
어둡고 후미진 골목에서 넌 뿌리를 내렸지
눈길조차도 머물지 않는 그런 꼭 버려진 아이같이

구둣발에 채이고 머리 위 태양은 타는 듯 뜨겁네
아침이 더디 오길 긴 밤 지새우며 달빛에 위로해
여린 줄기 사이로 잎맥을 따라서 밀어올리는 건
외로움도 아니요, 원망도 아니요
살아있다는 증거

이 세상이 더 이상 낙원이 아니라도 꽃은 피어나
매일 아프고, 두려운 일들에 짓밟혀도 꽃은 피어나
멍든 가슴에 오래 맺힌 꽃 터지듯 병든 이 세상에
너의 향기로 너의 몸짓으로 디디고 일어나 피어나

메마른 바람이 허공에로 자장가를 부르면
의미조차도 알지 못해도 슬퍼 꼭 엄마의 노래같이

헛된 꿈은 쌓이고 거리 위 세상은 차갑게 식었네
안개비라도 오길, 긴 밤 지새우며 별빛에 기도해
어린 가지 사이로 잎새 끝끝마다 뻗어올리는 건
그리움도 아니요, 핑계도 아니요
살아있다는 증거

이 세상이 더 이상 낙원이 아니라도 꽃은 피어나
매일 아프고, 두려운 일들에 짓밟혀도 꽃은 피어나
멍든 가슴에 오래 맺힌 꽃 터지듯 병든 이 세상에
너의 향기로 너의 몸짓으로 디디고 일어나

사람들은 그 꽃의 이름을 몰라 영원히 그럴지 몰라
누가 봐주지 않아도 너의 꽃 피워올려
이 세상이 더 이상 낙원이 아니라도

이 세상이 더 이상 낙원이 아니라도 꽃은 피어나
어떤 불행에 가난에 아무리 짓밟혀도 꽃은 피어나
너의 가슴에 오래 맺힌 꽃 터트려 멍든 이 세상에
너의 향기가 멀리 퍼지도록 고개를 들어 자, 피어나




내가 듣기에 가사는 좀 뻔했고 그래서 오글거리는 느낌이었다. 나는 본디 <포기하지마>, <나는 문제없어>, <우리들만의 추억> 같은 류의 뻔한 가사를 가진 노래를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그렇지만 이 노래가 어딘가의 누군가에게 위로가 된다는 것만으로도 이 노래는 만들어진 역할을 충분히 다 했다고 생각했다. 책이든 음악이든 그림이든 영화든, 세상 모두의 심금을 울릴 수도 없고 세상 모두를 웃게할 수도 없다. 그러나 어딘가의 누군가가, 단 한 명이라도 웃거나 울거나 했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서 이미 제 역할을 톡톡히 다 한 셈이 아닌가. 마음이 묵직해졌다. 고마운 마음도 들었다. 이런 노래를 만들어 준 심규선에게도 고맙고, 그런 소녀들을 돌보고자 한 앙네스도 고맙고, 이런 이야기를 써준 헤닝 만켈에게도 고마웠다. 


헤닝 만켈은 자신의 소설을 빌어 이런 얘기도 했다.



"예순여섯, 많군요. 서른셋은 상당히 어린 나이지요. 그래도 우리나라에 오늘날만큼 심각한 위기는 일찍이 없었다는 사실을 알기에는 충분한 나이예요. 그런데 그걸 아무도 못 보는 모양이에요. 어쟀든 방향을 제시해야 할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눈에 보이지 않는 장벽이 계속 높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못 보고 있어요. 이 장벽은 사람들을 갈라놓고, 불화가 깊어지게 하지요. 겉으로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스톡홀름 지하철을 타고 교외로 조금만 나가보세요. 엄청난 격차가 존재해요. 서로 다른 세계라고 주장한다면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같은 세계인데도 중심지에서 멀어질수록 다음 역은 곧 다음 장벽을 의미해요. 변두리로 완전히 나가면 진실을 볼 건지 말 건지 여부를 결정할 수 있어요."

"진실이 뭔데요?"

"최극단이라고 생각했던 게 중심지라는 것, 그리고 그게 이제 막 스웨덴을 개조하려고 한다는 사실이지요. 축이 서서히 방향을 돌리고 있어요. 안쪽과 바깥쪽, 가까운 곳과 먼 곳, 중심지와 변두리가 위치를 바꾸는 거예요." (p.228-229)



남자는 우체부가 사흘에 한 번 찾아오는 외딴 섬에 홀로 산다. 그의 나이는 66세이며, 과거에는 의사였다. 그러나 의료사고를 낸 후 그는 오래전 자신의 조부모가 살았던 집으로 돌아와 이제 조용히 혼자 살고 있다. 겨울이면 얼음이 꽁꽁 어는 바다를 앞에 두고, 아침에 일어나 그 얼음을 깨고 얼음 샤워를 하는게 일과의 시작이다. 사흘에 한 번 보는 우체부에게도 퉁명스럽게 대하고 결코 그를 집 안에 들이지 않으며, 방 하나는 개미집으로 잠식당하고 있지만 그냥 둔 채, 늙은 고양이와 개를 각각 한 마리씩 키우고 있는, 그야말로 고요하고 적막한 생활을 하고 있는 그에게, 어느날 69세의 여자가 보조보행기를 끌고 찾아온다. 그녀는 사십년전 그가 사랑했던 여자. 그녀를 이토록 오랜만에 다시 집안에 맞아들이는 것이 마땅치 않았던 그였지만, 그는 그녀와 함께 과거에 약속했던대로 연못에 데려가고, 그간 존재를 알지 못했던 자신의 딸과도 만나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젊은 시절 가족을 이루고 시간이 흐른 후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면, 남자의 경우, 혼자 외롭게 지내다가 가족을 갖게 되었다. 고집스럽고 퉁명스러우며 피하기만 했던 그가, 이제는 저마다의 문제를 가진 사람들을 옆에 두는 것이 소중하다고 여겨지며, 그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을 행복해한다. 이 외딴 섬에서 소수의 사람들이 펼치는 축제는 지극히 평화롭고 행복한 분위기마저 풍긴다. 그는 이제 누구와도 헤어지고 싶지않고, 다시 혼자가 되었을 때, 이렇게 혼자 살 수는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나는 나의 노년에 대해 아주 여러번 생각한다. 그것이 지금과 많이 다른 식으로 진행될 것 같진 않다. 그러니까 갑자기 로또에 당첨이 되어 갑부가 된다거나 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사십살 연하의 남자와 갑자기 불같은 사랑을 진행하며 살게 될 거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그렇게 살아갈 수도 있겠지만, 사실 그건 예외적인 삶의 형태이고, 내 삶이 그렇게 예외적으로 흘러갈 것 같진 않다. 아마도 나는 혼자 조용히 늙어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남자는 집에 술을 자주 마시지는 않지만, 쟁여두고는 있다. 어쩌면 내 삶도 크게 다를 것 같지 않다. 늘 냉장고에 술을 넣어두고는 필요할 때마다 마시면서 조용히 앉아있는 것이 노년의 낙이 되지 않을까. 아침에 일어나서 나는 얼음을 깨고 그 밑으로 들어가는 일은 결코 할 수 없겠지만, 어쩌면 도넛츠를 먹는 걸로 일과를 시작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커피를 내려마실 수도 있고, 또 모르지, 모닝 맥주로 하루를 시작하게 될지도. 하루종일 한 마디도 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때는 어떤 말도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이 책속의 남자처럼 깊고 고독한 곳에 혼자 거주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아니, 어쩌면 더 좋을 수도 있겠다. 고양이와 개를 키우게 될지는 모르겠다. 별 거 없고 또 요란하지도 않았던 그들의 축제처럼, 나도 어느날에는 몇몇 사람들을 모아놓고 술을 마시고 맛있는 걸 먹으며 지는 해를 바라보는 것도 할 수 있겠다. 이 책을 읽다가, 사람에겐 결국 다수의 사람들이 좌르륵 줄 서 있어 나란히 기다리기보다는, 서로의 치부까지 다 알고 있는 속 깊은 몇명만이 필요한 걸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하고 싶지 않은 기분을, 그대로 알아주는 사람들. 그들과 어느 하루는 별 거 아닌 일들로 깔깔대며 웃으며 파티를 열 수도 있는 게 아닌가.




예전에는 언제나 뉴스에 매달렸다. 뉴스를 읽고, 듣고, 보았다. 세상은 나의 참여를 원했다. 어떤 날은 예타 운하에서 어린 소녀 둘이 익사했고, 또 어떤 날은 대통력이 저격당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알아야 했다. 하지만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섬에서 점점 더 고립되어 사는 동안 이 습관은 서서히 사라졌다. 신문도 읽지 않았고, 텔레비전 뉴스도 이틀에 한 번 정도만 보았다. (p.75)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건 사실 아주 많지는 않을 것 같다. 



iReaditNow 앱에 이 책을 다 읽고 '쓸쓸하고 고독하지만 따뜻한 이야기'라고 썼다. 정말 그렇다. 처음, 이 소설은 고독하고 쓸쓸하고 고집스러웠는데, 책장을 넘길수록 온기가 퍼진다. 누군가의 옆에 있고자 하는 사람들이 여기 저기에 있었다. 가진 게 넉넉한 이들이 아니었고, 사교적인 성격을 가진 이들이 아닌데도 그랬다. 개에 대해서도 그랬다. 



"개 때문에 전화를 드리는 겁니다. 사라 라르손의 스패니얼을 우리가 데리고 왔는데, 아무도 개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사람이 없더군요. 안락사를 시켜야 할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제가 개를 돌보았지요. 무척 아름다운 암놈입니다. 그런데 제가 남자친구가 생겼는데, 이 사람이 개 알레르기가 있어요. 그렇다고 안락사를 시킬 수는 없잖아요. 선생님 생각이 났습니다. 성함과 주소를 적어둔 게 있었어요. 혹시 이 개를 돌보실 마음이 있는지 여쭤보려고요. 거리에서 그 개를 보았을 때 차를 세우신 걸로 보아 분명히 개들을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요."

나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내 개가 얼마전에 죽었습니다. 그 개를 돌볼 수 있어요. 그런데 어떻게 이곳으로 오지요?"

"제가 데리고 가겠습니다. 사라 라르손이 개를 루빈이라고 불렀다는 걸 알아냈어요. 개 이름 치고는 무척 독특하지요? 그래도 이름을 바꿔 부르지는 않았습니다. 이제 다섯 살이에요." (p.351-352)




지난 주는 내게 매우 혹독했다. 직장생활이란 것에 대해 아주 많이 생각했다. 그럴 수만 있다면 당장 그만두고 싶다고 이만오천번쯤 생각했다. 왜이렇게 더러운걸까. 너무 오래다녀서 못볼 꼴을 다 본 것 같았다. 그래서, 이제 그만두고 싶었다. 그러나 대안이 없다. 대안에 대해서 생각하자, 하고는 계속계속 대안에 대해 생각했다. 마침 어제 외출했다 집에 돌아가는 길, 걸으면서는 생각이 무척 많아진다. 그래서 생각해봤다.



몇해전에 엄마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중에 엄마아빠 다 돌아가시고 나면, 동생들은 다 저마다의 가족이 있을테고, 나는 혼자일테니, 그때는 미국에 가 살아볼래, 라고. 거기가서 밥벌이를 하는 게 아니라, 그동안 모아둔 돈을 야금야금 써가면서, 그러면서 살아볼래, 라고. 어제 제일 처음 든 생각은 이거였다. 미국에 갈까. 다 정리하고 미국에 갈까. 그렇지만 지금은 밥벌이가 필요하다. 그러나 소박하게 살면 되지 않을까. 지금 다 정리하고나면 그동안 모은 돈과 퇴직금을 가지고 훅 날아가서 북까페를 차리는 건 어떨까. 그러니까 한국어로 쓰여진 한국어 북까페. 간판도 아예 한글로 달고. 그래야 내가 영어공부 안해도 되니까...내가 가진 거라곤 책밖에 없으니, 낯선 외국 땅에 한국어 책을 잔뜩 구비해둔 까페를 차리는 거다. 나는 계속 책을 읽어왔고 그래서 그 책들을 가지고 있고, 또 앞으로도 책을 읽을테고, 그 책들은 쌓여갈테니, 그걸 그냥 구비해두고 까페를 차리는 거다. 요리솜씨는 없으니 뭐 대단한 거 팔지말고, 만화방처럼 라면을 끓여주거나 하지도 말자. 라면 끓이다 세월 다 가... 커피랑 녹차, 홍차 티백만 준비해두고 그냥 조용히 앉았다 가라고.. 이걸로 대단한 밥벌이가 되지는 않겠지만, 단골들은 몇 생길것이고, 그날그날 소박하게 먹고살 수는 있지 않을까? 


그런 조용하고 소박한 밥벌이를 목표로 한다면, 굳이 미국에 가진 않아도 되잖아? 라는 게 이어진 생각이었다. 지방으로 내려가도 된다. 집값이 싼 지방에다 작은 집 하나 얻고, 작은 공간도 하나 얻어서,내가 가진 책을 다 가지고 내려가는 거다. 그리고 책장에 내가 원하는대로 꽂아놓고는, 하루종일 조용히 앉아 책을 읽다가 책을 읽으러 온 손님도 받고... 



아, 그렇지만 이 수입은 어쩌면 마이너스일지도 모른다. 알라딘 중고샵에 취직할까? 그렇다면 정기적인 수입이 매달 들어오긴 할텐데. 그냥 책들에 둘러싸여 사는 건 어떨까? 중고샵에서 일하면 월급이 얼마인지 모르겠지만, 지금보다 적으면 적어졌지 많아지진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사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까페에 취직하는 건 어떨까? 아르바이트로 취직하는 건...



어떻게도 결론을 못내리고 시간은 흘렀고, 날은 밝았고, 변함없이 나는 같은 자리에 출근해 앉아있다. 별 수 없는걸까? 별 수 없어야만 하는걸까?



이 책의 마지막은 이런 근사한 문장으로 끝을 맺는다.



더 가지는 못했다. 그러나 여기까지 왔다. (p.409)




대학 입학부터 지금까지 이십년간을 쉼없이 일해왔다. 그래서 여기까지 왔다. 이제 그만하고 싶다. 여기까지 온 건 정말 장하고, 더 갈 수 있다면 또 더 풍족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런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여기까지 온 걸로 이제 충분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여러가지 의미로 여기까지 온 걸로 나는 잘했다고 다독이고 싶다. 더 가지는 못할지도 모르지만, 더 가지 않아도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자꾸만 자꾸만 든다. 나는 너무 오래 일해왔다.




"나는 늘 얼음이 무서웠어."

그녀가 불쑥 입을 열었다.

"그런데도 얼음장을 건너 내가 사는 섬까지 왔어?"

"무서워한다는 게 그걸 할 용기를 내지 못한다는 뜻은 아니지." (p.121-122)






<피어나> 가 실려있는 앨범은 디지털로만 나온건가보다. 알라딘에선 찾을 수 없고, 대신, 정규앨범이 새로 나왔다는 걸 알게됐다. 아! 책만 안산다고 돈이 쌓일 줄 알았냐! 음반은 어쩔거냐!! 크- 음반을 생각하질 못했네..어쩔...3개월간 순수구매금액 줄일랬더만, 책을 안산다고 되는 게 아니었어..쩝...



시마는 아득히 사라지고 있는데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피를 얼마나 흘렸는지도 가믄하지 못했다. 지혈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고함을 쳐서 아이를 깨울 수 없다는 걸 깨닫고, 나는 시마의 귀에 입을 바짝 대고 속삭이기 시작했다. 살아야 한다고, 그냥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다고,여기 내 부엌에서, 이런 봄날에, 이제 막 하루가 시작된 아침에 죽는 건 옳지 않다고……. 내 말을 들었을까?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계속 시마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p.275)

"나를 맞아줘서 고마워. 바깥 얼음장 위에서 얼어 죽었을지도 몰라. 당신이 나를 못 본 척 할 수도 있었잖아."
"내가 당신을 한 번 떠났다는 게 또 그런다는 뜻은 아니지." (p.329)

죽음과 더불어 존재하던 모든 것은 소멸된다. 죽음은 내가 늘 겪던 어려움의 흔적만 남길 뿐이야. 사랑과 감정……. 하리에트가 너무 가깝게 다가와, 나는 그녀에게서 도망쳤다.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나를 떠나겠지. (p.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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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02 10: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1-02 15: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blanca 2015-11-02 1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다 읽고 나니 울컥해요...학교가 끝나고 갈 곳이 없는 아이들을 위한 공간에 대한 생각을 했던 그 남자도 그리고 도움을 주고자 했던 다락방님의 마음도 그렇고. 지난 주 유독 힘들었을 님을 생각해도 그렇고...

나도 조금 전에 이런 생각을 했어요. 사는 건 원래 이렇게 항상 힘들고 머리 아픈 문제들을 껴안고 있어야 하는 건가. 그냥 좀 평화롭게 편안하게일 수는 없는 걸까.

그리고 와인. 저 큰일 났어요--;; 지금 하루에 한번씩 자기 전에 꼭 반잔 하게 되는데 이게 점점 중독으로 가는 것 같아요. 이래도 되는 건지 그런 마음이...그래도 이 힘든 나날들 중에서 라떼와 책과 와인과 음악이 있어 좀 살만해 지는 것 아닐까요? 힘내요, 부디...

다락방 2015-11-02 15:59   좋아요 0 | URL
다들 자기자리에서 사소한 고민에 부딪히고 또 큰 고민에도 놓이게 되고 그러는 것 같아요. 대체적으로 사는 게 다 그렇지, 하고 넘기게 되다가도, 왜 어떤 날은 유독 견디기 힘들어질 때가 있잖아요. 지난주가 제게 그랬어요, 블랑카님. 이제 그만하고 싶다, 라고 계속 생각했어요. 사실 지금도 그래요. 그래서 계속계속 생각할 거에요. 그만둔다면, 그 후에 나는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하고요.

아니 그나저나, 와인..중독이라니. 하하하하하. 블랑카님, 그러다 금방 반 병 돼요. 저는 얼마전에 한 병을 다 마시기도 했답니다. 아, 블랑카님이 말씀하시니 지금 당장 와인을 마시고 싶어졌어요 ㅠㅠ 어제도 마셨지만 말예요.. 하하하하하.


네네, 기운낼게요, 블랑카님. 블랑카님도 기운내요. 그래서 우리 또 새롭게 맞이한 한 달을 잘 지내봅시다!

챔피언 2015-11-03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직장에서 힘들게 하는 사람의 무릎 꿇은 형상을 스케치 한다음에 님의 형상이 그 형상을 발로 까고 있는 스케치를 더하세요. 기분이 좀 풀어집니다. 제가 효과를 봤던 방법이니 믿을만합니다. 다만 약간의 그림 솜씨가 필요하니, 만약 그림에 자신이 없다면 드로잉과 관련된( 이충원 선생님의 스케치 쉽게하기 시리즈 추천) 책을 구매하셔서 연습할 필요가 있습니다. 형상이 실물과 닮으면 닮을수록 기분이 업됩니다.

다락방 2015-11-03 09:49   좋아요 0 | URL
오, 좋은 방법인 것 같아요. 말씀하신 것처럼 제가 그림 솜씨는 전혀 없지만 말이지요. 스케치 쉽게하기 시리즈까지 산다면..저는 필기체 교본과, 글씨 예쁘게 쓰기 교본에 이어 세번째 교본을 갖게 되겠네요. 다 하지 않고 쳐박아 두고 있다는 게 함정..Orz

그치만 스케치는 제가 진짜 못하는 거니까 역시 책으로 사서 공부좀 해봐야겠어요. 검색해볼게요. 고맙습니다. 흐흣.

무해한모리군 2015-11-03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직장에서 10년 근속상으로 금 한냥을 받았어요. 그리고 회사에 왔더니 감사팀에서 우울한 전화가 왔네요. 상을 받으면서 정확히 `너무 오래 일했군`이란 생각을 했는데, 이 글을 읽게 되었네요. 운명인가요? 아 직장생활 참 고단합니다... 저는 가만히 책읽고 주말엔 산타고 밤엔 노래부르고 이렇게 살고 싶은데 말입니다.

다락방 2015-11-04 08:02   좋아요 0 | URL
어제 다른 동료랑 술 마시면서 이런 얘기 또 했어요. 그 동료도 10년 다녔는데 얼른 나가야겠다, 너무 오래다녔다, 라는 생각을 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렇지만 나간다고 해도 다른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니 망설이게 되고, 그렇게 십일년을, 십삼년을 다니게 되겠죠. 하릴없이 우리 동업이나 할까, 뭘하면 좋을까, 이런 얘기도 해보고요.

고단합니다, 휘모리님.
저는 어제 저녁에 술 마신게 안주 탓인지 얹혔는데, 새벽에 잠 한 숨 못자고 손을 따고 여전히 속이 불편한데도 꾸역꾸역 출근해서 앉아있어요. 정말 고단하지요?
 

하는 놈들이 끝까지 해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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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집 2015-10-27 22: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글 읽으니, 나경원아버지 학원도 예전에 학교일 시키고 그랬다는 글 올라온 적 있었는데, 충암고는 한 술 더 뜨네요. 근데 저런 학교 보내는 인근 학부모 심정은 어떨까요? 저 정도면 인근 학부모들에게 똥통이라는 소리 나올텐데...

유부만두 2015-10-27 22: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쩜 좋아... ㅜ ㅜ 하지만 학부모들은 애 맡겨놓은 죄인이라 학교측에 암말도 못하고 가슴앓이만 했겠죠...

세실 2015-10-27 23: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울 아들 충암고 다녔다면 저도 페인트 전문가를 불러야했군요. 부자도 아닌데.
.. 참으로 황당합니다.

살리미 2015-10-28 00: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학생들 상대로 뻘짓하는 사학재단들 제발 좀 정신차렸으면 좋겠어요. 저런 마인드로 왜 교육사업을 하는지!! 하긴 이 나라에서 누굴 보고 배우겠어요 ㅠㅠ

[그장소] 2015-10-28 02: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학교자체를 재단으로 만드는 일이 더 위험한 건 아닌지..
뭐든 재단과 엮여서 일이생기는데..교육을 사업으로하는
마인드..부터..꽝 ...대놓고 돈벌겠습니다..잖아요.^^;;

transient-guest 2015-10-28 0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 그런건 아닌데, 이런 문제학교들이 종종 사립/종교사립구조로 수익사업을 하고 있죠. transient guest nation에서 이런 자들은 사형감입니다.

붉은돼지 2015-10-28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진짜 가지가지 여러가지 해도해도 너무하네

치니 2015-10-28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심지어 저도 충암고 기억 있어요.
중학교 때인가 스케이트를 타다가 어떤 오빠를 만났는데, 자신이 충암고 다닌다면서 악랄하기로 유명한 학교인데 넌 못 들었냐며 다짜고짜 학교 욕 하더라고요. 지금 생각하면 그럴 만도 했겠다 싶어요. 자기네 학교가 얼마나 이상한지 보는 사람마다 말하고 싶었을 거야...ㅠ

낭만인생 2015-10-28 1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나...
 
연애의 계절

















아주 오래전 신해철이 [밤의 디스크쇼] 디제이를 했을 때, 금요일이었나 토요일이었나 정확히 기억은 안나지만 청취자들로부터 엽서를 받아 그 주의 인기가요를 순위로 뽑아 틀어줬었다. 신해철에 대한 애정으로 듣던 나같은 사람이 많았는지 당시 1위는 계속 신해철의 노래가 했었는데, 그래서 신해철은 말했었다. 자신의 신곡이 나온것도 아닌데 자꾸만 디제이라고 1등하니 안되겠다, 여러분들이 보내주는 노래에서 신해철노래는 빼겠다, 라고. 그러나 애청자들은, 팬들은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신해철의 노래를 보내는 대신, 그들은 무한궤도의 노래를 보냈고, 1위는 신해철이 아닌 무한궤도의 노래가 했다. 그렇게 무한궤도가 해체하고 한참지난 후에도 밤의 디스크쇼에서는 '우리앞의 생이 끝나갈 때'를 들을 수 있었다. 먼댓글은 그 노래에 대한 추억.



여동생과 남동생이 주말동안 신해철이 불후의 명곡에도 히든싱어에도 나온다고 알려줬다. 보지도 않던 [불후의 명곡]을 보기 위해 티브이를 틀었는데, 마침 홍경민이 <안녕>을 부르고 있더라. 아...나는 안녕을 참 좋아하는데, 홍경민을 못보겠어. 뭐랄까, 저 제스쳐나 옷차림이나 무대 매너...이 모든게 다 오글거려. 뭔가 견딜 수 없는 기분이야...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모르겠는데, 아 진짜 못보겠다. 싫다거나 불편하거나 한 게 아니라, 정말 그냥 오.글.거.린.다. 해서, 그 프로그램은 보다 말았고, 늦게 들어온 남동생이 술이나 마시며 히든 싱어 보자고 해서 또 술을 꺼내가지고 [히든 싱어] 앞에 앉았다. 우리 울면 어떡하지? 라고 했는데 역시나 나는 계속 울었다. 출연한 게스트들은 모두 자기가 신해철과 각별한 사이었고 오래 함께 보냈으니 누가 신해철인지 알아맞힐 수 있다고 장담했고, 나의 남동생은 저들보다 자기가 더 잘 맞힐 수 있다고 했다. 왜? 자신은 신해철의 라이브앨범까지 정말 미친듯이 들었으니까. 정말로!! 김세황도, 신대철도 맞히지 못하는데 남동생은 백프로 정답률을 자랑했다. 누나 나한테는 이게 너무 쉬워, 다 들려, 다. 


신해철이 그리워 줄줄 눈물을 흘리면서, 남동생과 함께 우리가 그의 장례식에 다녀온 건 정말 잘했다고 말했다. 신해철을 앞에 두고 우리가 같은 프로를 보고 또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 몹시 행복했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누구를 좋아하는지 어떤걸 좋아하는지, 그것이 다른 사람과 늘 일치할 순 없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취향은 다를 수 있다. 그렇지만, 어떤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우리가 같은 걸 좋아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나와 시간을 오래 함께 보낼 사람은 가급적 술을 마셨으면 좋겠고 그렇게 같이 취했으면 좋겠다. 책을 읽지 않아도 아무 상관없지만,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신해철을 좋아했으면 좋겠다. 아주아주 나이들어서까지도 우리가 같은 노래를 듣고 또 같은 노래를, 한 가수를 같이 추억할 수 있다면 얼마나 근사할까.




"뭐 해?" "아무것도 안 해. 근데 나 정말 치매인가 봐. 어제 카드 명세서가 왔는데 전자 제품 매장에서 12만 엔 썼더라고. 뭘 샀는지 진짜 기억이 안 나는 거 있지. 자질구레한 걸 많이 샀나? 심각하지?" 나는 어젯밤부터 찝찝했던 일을 친구에게 털어놓았다.

"너 그거, 냉장고!" 친구가 냉큼 대답했다. 아, 맞다. 머릿속의 뭉게구름이 말끔히 개었다.

"난 말이야, 통장을 봤더니 65만 엔이나 인출했더라. 어디에다 썼는지 도무지 모르겠어." 나는 곧바로 말했다. "너 그거, 부동산취득세." "앗, 맞다." 어째서 남의 지출은 안 까먹는 것일까. 머릿속이 상쾌해져서 기쁘게 일어났다. (p.30)



















잘 늙어가고 싶다. 또한 다정한 사람들과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며 늙어가고 싶다. 언제까지고 친근한 사람들과 주고받을 수 있는 이야기가 있었으면 좋겠다. 소수의 몇 명과는 소소한 일상이야기를 언제까지고 함께 공유하며 즐거웠으면 좋겠다. 서로의 집에도 느긋한 걸음으로 놀러가고, 또 그렇게 느긋하게 집 안에 있는 음식들이며 술을 꺼내서는 함께 먹고 수다떨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조용히, 요란하지 않게 늙어가는 게 좋을 것 같다. 비가 오면 부침개를 부쳐 먹어도 좋겠지. 부침개 해먹을래? 전화를 걸면 응, 하고 또 느긋한 걸음으로 누군가 내가 있는 곳으로 와줬으면 좋겠다. 방문자는 내 집에 들어서면서, 요앞에서 막걸리 사왔어, 라고 말해도 좋겠지. 우리는 막걸리에 부침개를 먹으면서, 응, 근데, 요즘엔 <슬픈 표정 하지말아요>가 자꾸 생각나, 하며 흥얼거리고, 상대는 젓가락을 두드리며 함께 불러줬으면 좋겠다.



'사노 요코' 할머니는 늦은 나이에 한국드라마에 빠진다. 욘사마를 사랑하게 되고 이병헌을 좋아하게 된다. 물론 그 드라마들이 말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복해 보면서 푹 빠진다. 한국드라마가 있어서 행복했노라고 고백한다. 나야 언급되는 겨울연가, 가을동화..하는 것들을 하나도 보지 않았지만, 누군가가 보고 행복해할 수 있다면, 그건 또 그것대로의 의미가 있지 않나 생각한다. 그중에서 스토커의 집념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스토리는 엉망진창이다. 욘사마 수난의 역사다. 교통사고를 두 번이나 당하는데, 두 번 다 연인인 최지우를 마나러 가는 순간이다. 3미터만 더 가면 껴안을 수 있을 거리에서 욘사마는 커다란 차에 치여 날아간다. 그리고 기억상실증에 걸린다. 여주인공을 짝사랑하는 소꿉친구가 등장하는데 나는 이 남자만 한 스토커를 본 적이 없다. 굉장한 집념이다. 집념 하면 욘사마도 여주인공도 빠지지 않는다. (p.115-116)



술약속이 없어 평소보다 여유로웠던 주말, 텔레비젼 앞에 앉아서 채널을 돌리다가 드라마를 보게 됐다. [부탁해, 엄마] 라는 제목이었던 것 같다. 극중에서 유진은 비서였고, 자신이 모시는 대표의 아들과 연인사이었다. 대표는 자신의 비서를 몹시 인정하고 좋아했지만, 아들의 연인이라고 하니 보는 시선이 달라진다. 유진은 자신의 애인이 부잣집 아들인줄 몰랐다가 뒤늦게 알게 되서 연인과 사이가 안좋은 상황, 기분 안좋은 유진을 달래주겠다며 유진오빠의친구가 나타난다. 오빠의 친구로 말하자면 어릴적부터 유진을 좋아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끊임없이 유진에게 구애를 하는중인가보다. 여튼, 그가 유진을 달래주겠다고 한 방법이 어처구니 없는게, 유진의 회사로 찾아와 회사 복도에서 무릎꿇고 꽃다발을 전해주는 것이다. 그가 생각하기로는 이 꽃다발을 받으면 유진의 기분이 풀어질 거라는 것. 하아-


그 장면을 보면서 진짜 그 끔찍한 경솔함에 토할 것 같았다. 꽃다발을 준다-유진이 좋아할거다 라는 생각은 너무나 일차원적이 아닌가. 어떻게 그렇게 자기 좋을대로만 생각할까. 덕분에 유진은 회사복도에서 사람들이 다 보는데 남자로부터 꽃다발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고, 회사 동료들은 지나가다 보면서 '이열~' 하면서 야유하며 '애인한테 프로포즈 받는구나' 등의 말들을 내뱉는다. 이남자는 애인도 아니고 설사 애인이라 해도 회사 복도에 나타나서 공개적으로 이런 짓거리라니. 그건 여자의 사생활과 사회생활 모두를 엉망으로 만들어버리는 게 아닌가. 거기에서 유진이 난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안하는걸까. 아 진짜 엄청 때려주고 싶은 상황인데, 이 착한 유진은, 오빠 때문에 내가 난처해졌다며 조곤조곤 불만을 토로한다. 아..너무 순진해 빠졌다. 나였으면 진짜 쌍욕을 하고 꺼지라고 했을텐데. 그리고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고...하아-너무 싫어. 그런데 남자는 나 때문에 니가 난처해졌다면 미안하다면서 유명한 플로리스트에게 부탁해 준비해온 꽃다발이니 받아달라고 조른다..야, 이 개... 어휴...... 니가 정성스레 준비했다고 해서 내가 그걸 반드시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네가 나를 좋아한다고 해서 내가 그 마음을 받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사노 요코의 '스토커 집념'에 대한 글을 읽으니 갑자기 이 드라마의 이 장면이 생각나서 갑자기 또 빡이 확 쳐가지고...




나는 한국 드라마에 재산을 탕진했다. 남들 눈에는 경솔해 보일지라도 사실 소심한 나는 무언가에 재산을 탕진한 적이 없었다. (p.129)



하하. 귀여운 할머니시다. 한국 드라마에 재산을 탕진했다니. 그러나 그것이 사노 요코를 정말 행복하게 만들었다면, 거기에 재산을 탕진하는 게 뭐 어떤가. 내가 내 행복을 위해 돈을 쓰겠다는데!



대체적으로 유머가 있고 시니컬한 글이라 재미있게 읽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좋았던 건 아니다. 군데군데 나로서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생각들이 튀어나와서 뜨악했다. 맥락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남자의 생식기쯤은 마음대로 쓰도록 내버려뒀으면 좋겠다'(p.124) 라든가, 맞짱 뜬 뒤로 사이가 좋아진 선생님과 학생의 예를 들며 '폭력은 근사하다'(p.201) 라 할 때는 아, 뭐지 싶더라. 그러다 다음문장을 읽고는 꼰대같다...고 생각했다.




신분이 낮은 병사도 신분이 높은 상관도 피를 흘리며 죽을 줄 알면서 사지로 간다. 좋은 사람들이다. 여자로 군대를 꾸리면 도망가거나 꾀를 부리거나 패싸움을 할 것이다. 적보다는 평소에 마음에 들지 않던 동료를 몰래 죽인다든지, 본처와 첩이 같은 부대에 배정되면 뒤에서 쏠 수도 있다. 여자에게 대의란 없다. (p.209)



뭐지, 이 꼰대 할머니는.... 역시 에세이 읽기는 쉬운 게 아니다. 내 생각과 다른 생각을 엿보는 것은 분명 흥미롭지만, 그 생각이 나와 너무 어긋날때는 이렇게 짜증이 나...



분명,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나와는 다르다. 그리고 앞으로의 나는 또 지금의 나와 다를 것이다. '절대'라는 말을 함부로 쓸 수 없다는 것을 알고있다. 나는 이대로 변하지 않아, 나는 절대 그런 일은 하지 않을거야, 같은 것들은 얼마나 부질없는가. 그런데 사노 요코가 이런다.



나조차도 가까이서 찍은 러브신이 나오면 고개를 돌린다. 텔레비전이 크지 않아도 고개를 돌린다. 키스나 성교 장면은 징그럽다. 예전에 내가 저런 걸 했다니 거짓말 같다. 거짓말입니다. (p.206)



아아, 나도 나이들면 저렇게 될까? 지금의 나로 생각하자면, 나는 나이 들어서도 키스나 성교장면을 징그럽게 생각해서 고개를 돌리는 일은 하지 않을 것 같은데..그건 지금이 지금이라서인걸까? 나는 먼훗날이 되어서도 야한 영화 찾아보고 싶어질 것 같은데, 그게 단순히 지금의 생각인건가??




주말 오후에는 일자산엘 갔다. 해가 일찍 지는만큼 가지말까 생각도 했는데, 올라가다 해가 지면 바로 내려오자, 하고 올랐다. 아 그러나 가을산 이란 얼마나 아름다운가. 가기를 잘했다고 혼자서 진짜 오만번쯤 생각한 것 같다. 이런 풍경들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너무 좋아서 몇 번이나 멈춰 서 사진을 찍으며, 여행친구에게 문자를 넣었다. 우리 또 여행가자고, 숲길로 가자고. 가서 잔뜩 걷고 오자고. 바다 말고 숲으로 가자고. 

일자산으로 가는 길에는 이렇게 주렁주렁 감이 열린 감나무도 만날 수 있었다. 이 감나무가 있는 집은 감나무집이라 불리고 있나????






며칠전에는 내 책을 재미있게 읽었다는 고등학생 독자로부터 이메일을 받았다. 고맙고 기쁜 일이었다. 더 좋은 글을 쓰자고, 더 부지런히 읽고 더 부지런히 즐기면서 더 재미있게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건 즐겁게 먹고 즐겁게 살아야 가능한 일. 그래서 어제는 비도 오고 해서 육전을 먹었다. 육전을 먹는 건 즐거운 것들 중 하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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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15-10-27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육전.. 먹고 싶네요. 홍경민... 오글거림은 정말.. 저도. 채널 놀리게 만드는 사람 중 하나.

다락방 2015-10-27 16:25   좋아요 0 | URL
어떻게 설명할 수 없는 오글거림이 넘쳐요. 어휴, 못보겠어요 진짜 ㅠㅠ 그 오글거림의 정체는 무엇인지.. ㅠㅠ
육전은 양이 너무 적어서 마음껏 먹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워요..휴..

유부만두 2015-10-27 1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히든싱어 보다 울었어요....
그리고 사노 요코 할머니 글은 그냥 그렇더라구요. .. ㅋ 저도 꼰대 할매라고 리뷰에 썼어요.

다락방 2015-10-27 16:27   좋아요 0 | URL
ㅎㅎ 아 뭐지 짜증스럽네, 하면서 책의 리뷰들을 보는데 유부만두님 리뷰에 꼰대 라고 적혀있더라고요. 그래서 아, 맞아, 이 단어, 이 단어가 적절해! 했죠. 남자들이 아랫도리 쓰는거 내버려 두라는 것도 너무 짜증났고요 -_- 전체적으로 재미있고 유머도 있는데 몇몇 부분들이 뭐랄까, 그냥 넘어가기 힘든 짜증을 줘요. -0-

건조기후 2015-10-27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싫은 건 아닌데 차마 몰입해서 볼 수가 없고 빨리 끝났으면 좋겠고.. 불후의 명곡은 홍경민뿐만 아니라 대체로 다 그런 기분이었어요. 히든싱어는 정말 행복하게 울면서(?) 너무 잘 봤고요 ㅜㅜㅜㅜㅜ

다락방 2015-10-27 17:04   좋아요 0 | URL
아 다른 가수들도 그랬나요? 저는 딱 틀었는데 홍경민 나와서 으악 오글거린다 하면서 돌려가지고 다른 가수 부르는 거 안봤거든요. ㅠㅠ 어우 그 오글거림은 진짜 ㅠㅠㅠ
저도 히든싱어 울면서 봤어요 ㅠㅠ 어휴 그냥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hellas 2015-10-28 0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홍경민의 오글거림에는 무한대 동감해요. 진짜 왜 그런거죠? :0

다락방 2015-10-28 10:05   좋아요 0 | URL
터프한 락가수로 보이려고 하는 것 같은데 그게 너무 오글거려요. -0-

토이앤미 2015-11-13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음악도시 1위 그거 기억나요!! 아아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