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의 계절
아주 오래전 신해철이 [밤의 디스크쇼] 디제이를 했을 때, 금요일이었나 토요일이었나 정확히 기억은 안나지만 청취자들로부터 엽서를 받아 그 주의 인기가요를 순위로 뽑아 틀어줬었다. 신해철에 대한 애정으로 듣던 나같은 사람이 많았는지 당시 1위는 계속 신해철의 노래가 했었는데, 그래서 신해철은 말했었다. 자신의 신곡이 나온것도 아닌데 자꾸만 디제이라고 1등하니 안되겠다, 여러분들이 보내주는 노래에서 신해철노래는 빼겠다, 라고. 그러나 애청자들은, 팬들은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신해철의 노래를 보내는 대신, 그들은 무한궤도의 노래를 보냈고, 1위는 신해철이 아닌 무한궤도의 노래가 했다. 그렇게 무한궤도가 해체하고 한참지난 후에도 밤의 디스크쇼에서는 '우리앞의 생이 끝나갈 때'를 들을 수 있었다. 먼댓글은 그 노래에 대한 추억.
여동생과 남동생이 주말동안 신해철이 불후의 명곡에도 히든싱어에도 나온다고 알려줬다. 보지도 않던 [불후의 명곡]을 보기 위해 티브이를 틀었는데, 마침 홍경민이 <안녕>을 부르고 있더라. 아...나는 안녕을 참 좋아하는데, 홍경민을 못보겠어. 뭐랄까, 저 제스쳐나 옷차림이나 무대 매너...이 모든게 다 오글거려. 뭔가 견딜 수 없는 기분이야...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모르겠는데, 아 진짜 못보겠다. 싫다거나 불편하거나 한 게 아니라, 정말 그냥 오.글.거.린.다. 해서, 그 프로그램은 보다 말았고, 늦게 들어온 남동생이 술이나 마시며 히든 싱어 보자고 해서 또 술을 꺼내가지고 [히든 싱어] 앞에 앉았다. 우리 울면 어떡하지? 라고 했는데 역시나 나는 계속 울었다. 출연한 게스트들은 모두 자기가 신해철과 각별한 사이었고 오래 함께 보냈으니 누가 신해철인지 알아맞힐 수 있다고 장담했고, 나의 남동생은 저들보다 자기가 더 잘 맞힐 수 있다고 했다. 왜? 자신은 신해철의 라이브앨범까지 정말 미친듯이 들었으니까. 정말로!! 김세황도, 신대철도 맞히지 못하는데 남동생은 백프로 정답률을 자랑했다. 누나 나한테는 이게 너무 쉬워, 다 들려, 다.
신해철이 그리워 줄줄 눈물을 흘리면서, 남동생과 함께 우리가 그의 장례식에 다녀온 건 정말 잘했다고 말했다. 신해철을 앞에 두고 우리가 같은 프로를 보고 또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 몹시 행복했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누구를 좋아하는지 어떤걸 좋아하는지, 그것이 다른 사람과 늘 일치할 순 없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취향은 다를 수 있다. 그렇지만, 어떤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우리가 같은 걸 좋아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나와 시간을 오래 함께 보낼 사람은 가급적 술을 마셨으면 좋겠고 그렇게 같이 취했으면 좋겠다. 책을 읽지 않아도 아무 상관없지만,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신해철을 좋아했으면 좋겠다. 아주아주 나이들어서까지도 우리가 같은 노래를 듣고 또 같은 노래를, 한 가수를 같이 추억할 수 있다면 얼마나 근사할까.
"뭐 해?" "아무것도 안 해. 근데 나 정말 치매인가 봐. 어제 카드 명세서가 왔는데 전자 제품 매장에서 12만 엔 썼더라고. 뭘 샀는지 진짜 기억이 안 나는 거 있지. 자질구레한 걸 많이 샀나? 심각하지?" 나는 어젯밤부터 찝찝했던 일을 친구에게 털어놓았다.
"너 그거, 냉장고!" 친구가 냉큼 대답했다. 아, 맞다. 머릿속의 뭉게구름이 말끔히 개었다.
"난 말이야, 통장을 봤더니 65만 엔이나 인출했더라. 어디에다 썼는지 도무지 모르겠어." 나는 곧바로 말했다. "너 그거, 부동산취득세." "앗, 맞다." 어째서 남의 지출은 안 까먹는 것일까. 머릿속이 상쾌해져서 기쁘게 일어났다. (p.30)
잘 늙어가고 싶다. 또한 다정한 사람들과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며 늙어가고 싶다. 언제까지고 친근한 사람들과 주고받을 수 있는 이야기가 있었으면 좋겠다. 소수의 몇 명과는 소소한 일상이야기를 언제까지고 함께 공유하며 즐거웠으면 좋겠다. 서로의 집에도 느긋한 걸음으로 놀러가고, 또 그렇게 느긋하게 집 안에 있는 음식들이며 술을 꺼내서는 함께 먹고 수다떨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조용히, 요란하지 않게 늙어가는 게 좋을 것 같다. 비가 오면 부침개를 부쳐 먹어도 좋겠지. 부침개 해먹을래? 전화를 걸면 응, 하고 또 느긋한 걸음으로 누군가 내가 있는 곳으로 와줬으면 좋겠다. 방문자는 내 집에 들어서면서, 요앞에서 막걸리 사왔어, 라고 말해도 좋겠지. 우리는 막걸리에 부침개를 먹으면서, 응, 근데, 요즘엔 <슬픈 표정 하지말아요>가 자꾸 생각나, 하며 흥얼거리고, 상대는 젓가락을 두드리며 함께 불러줬으면 좋겠다.
'사노 요코' 할머니는 늦은 나이에 한국드라마에 빠진다. 욘사마를 사랑하게 되고 이병헌을 좋아하게 된다. 물론 그 드라마들이 말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복해 보면서 푹 빠진다. 한국드라마가 있어서 행복했노라고 고백한다. 나야 언급되는 겨울연가, 가을동화..하는 것들을 하나도 보지 않았지만, 누군가가 보고 행복해할 수 있다면, 그건 또 그것대로의 의미가 있지 않나 생각한다. 그중에서 스토커의 집념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스토리는 엉망진창이다. 욘사마 수난의 역사다. 교통사고를 두 번이나 당하는데, 두 번 다 연인인 최지우를 마나러 가는 순간이다. 3미터만 더 가면 껴안을 수 있을 거리에서 욘사마는 커다란 차에 치여 날아간다. 그리고 기억상실증에 걸린다. 여주인공을 짝사랑하는 소꿉친구가 등장하는데 나는 이 남자만 한 스토커를 본 적이 없다. 굉장한 집념이다. 집념 하면 욘사마도 여주인공도 빠지지 않는다. (p.115-116)
술약속이 없어 평소보다 여유로웠던 주말, 텔레비젼 앞에 앉아서 채널을 돌리다가 드라마를 보게 됐다. [부탁해, 엄마] 라는 제목이었던 것 같다. 극중에서 유진은 비서였고, 자신이 모시는 대표의 아들과 연인사이었다. 대표는 자신의 비서를 몹시 인정하고 좋아했지만, 아들의 연인이라고 하니 보는 시선이 달라진다. 유진은 자신의 애인이 부잣집 아들인줄 몰랐다가 뒤늦게 알게 되서 연인과 사이가 안좋은 상황, 기분 안좋은 유진을 달래주겠다며 유진오빠의친구가 나타난다. 오빠의 친구로 말하자면 어릴적부터 유진을 좋아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끊임없이 유진에게 구애를 하는중인가보다. 여튼, 그가 유진을 달래주겠다고 한 방법이 어처구니 없는게, 유진의 회사로 찾아와 회사 복도에서 무릎꿇고 꽃다발을 전해주는 것이다. 그가 생각하기로는 이 꽃다발을 받으면 유진의 기분이 풀어질 거라는 것. 하아-
그 장면을 보면서 진짜 그 끔찍한 경솔함에 토할 것 같았다. 꽃다발을 준다-유진이 좋아할거다 라는 생각은 너무나 일차원적이 아닌가. 어떻게 그렇게 자기 좋을대로만 생각할까. 덕분에 유진은 회사복도에서 사람들이 다 보는데 남자로부터 꽃다발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고, 회사 동료들은 지나가다 보면서 '이열~' 하면서 야유하며 '애인한테 프로포즈 받는구나' 등의 말들을 내뱉는다. 이남자는 애인도 아니고 설사 애인이라 해도 회사 복도에 나타나서 공개적으로 이런 짓거리라니. 그건 여자의 사생활과 사회생활 모두를 엉망으로 만들어버리는 게 아닌가. 거기에서 유진이 난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안하는걸까. 아 진짜 엄청 때려주고 싶은 상황인데, 이 착한 유진은, 오빠 때문에 내가 난처해졌다며 조곤조곤 불만을 토로한다. 아..너무 순진해 빠졌다. 나였으면 진짜 쌍욕을 하고 꺼지라고 했을텐데. 그리고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고...하아-너무 싫어. 그런데 남자는 나 때문에 니가 난처해졌다면 미안하다면서 유명한 플로리스트에게 부탁해 준비해온 꽃다발이니 받아달라고 조른다..야, 이 개... 어휴...... 니가 정성스레 준비했다고 해서 내가 그걸 반드시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네가 나를 좋아한다고 해서 내가 그 마음을 받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사노 요코의 '스토커 집념'에 대한 글을 읽으니 갑자기 이 드라마의 이 장면이 생각나서 갑자기 또 빡이 확 쳐가지고...
나는 한국 드라마에 재산을 탕진했다. 남들 눈에는 경솔해 보일지라도 사실 소심한 나는 무언가에 재산을 탕진한 적이 없었다. (p.129)
하하. 귀여운 할머니시다. 한국 드라마에 재산을 탕진했다니. 그러나 그것이 사노 요코를 정말 행복하게 만들었다면, 거기에 재산을 탕진하는 게 뭐 어떤가. 내가 내 행복을 위해 돈을 쓰겠다는데!
대체적으로 유머가 있고 시니컬한 글이라 재미있게 읽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좋았던 건 아니다. 군데군데 나로서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생각들이 튀어나와서 뜨악했다. 맥락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남자의 생식기쯤은 마음대로 쓰도록 내버려뒀으면 좋겠다'(p.124) 라든가, 맞짱 뜬 뒤로 사이가 좋아진 선생님과 학생의 예를 들며 '폭력은 근사하다'(p.201) 라 할 때는 아, 뭐지 싶더라. 그러다 다음문장을 읽고는 꼰대같다...고 생각했다.
신분이 낮은 병사도 신분이 높은 상관도 피를 흘리며 죽을 줄 알면서 사지로 간다. 좋은 사람들이다. 여자로 군대를 꾸리면 도망가거나 꾀를 부리거나 패싸움을 할 것이다. 적보다는 평소에 마음에 들지 않던 동료를 몰래 죽인다든지, 본처와 첩이 같은 부대에 배정되면 뒤에서 쏠 수도 있다. 여자에게 대의란 없다. (p.209)
뭐지, 이 꼰대 할머니는.... 역시 에세이 읽기는 쉬운 게 아니다. 내 생각과 다른 생각을 엿보는 것은 분명 흥미롭지만, 그 생각이 나와 너무 어긋날때는 이렇게 짜증이 나...
분명,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나와는 다르다. 그리고 앞으로의 나는 또 지금의 나와 다를 것이다. '절대'라는 말을 함부로 쓸 수 없다는 것을 알고있다. 나는 이대로 변하지 않아, 나는 절대 그런 일은 하지 않을거야, 같은 것들은 얼마나 부질없는가. 그런데 사노 요코가 이런다.
나조차도 가까이서 찍은 러브신이 나오면 고개를 돌린다. 텔레비전이 크지 않아도 고개를 돌린다. 키스나 성교 장면은 징그럽다. 예전에 내가 저런 걸 했다니 거짓말 같다. 거짓말입니다. (p.206)
아아, 나도 나이들면 저렇게 될까? 지금의 나로 생각하자면, 나는 나이 들어서도 키스나 성교장면을 징그럽게 생각해서 고개를 돌리는 일은 하지 않을 것 같은데..그건 지금이 지금이라서인걸까? 나는 먼훗날이 되어서도 야한 영화 찾아보고 싶어질 것 같은데, 그게 단순히 지금의 생각인건가??
주말 오후에는 일자산엘 갔다. 해가 일찍 지는만큼 가지말까 생각도 했는데, 올라가다 해가 지면 바로 내려오자, 하고 올랐다. 아 그러나 가을산 이란 얼마나 아름다운가. 가기를 잘했다고 혼자서 진짜 오만번쯤 생각한 것 같다. 이런 풍경들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너무 좋아서 몇 번이나 멈춰 서 사진을 찍으며, 여행친구에게 문자를 넣었다. 우리 또 여행가자고, 숲길로 가자고. 가서 잔뜩 걷고 오자고. 바다 말고 숲으로 가자고.
일자산으로 가는 길에는 이렇게 주렁주렁 감이 열린 감나무도 만날 수 있었다. 이 감나무가 있는 집은 감나무집이라 불리고 있나????
며칠전에는 내 책을 재미있게 읽었다는 고등학생 독자로부터 이메일을 받았다. 고맙고 기쁜 일이었다. 더 좋은 글을 쓰자고, 더 부지런히 읽고 더 부지런히 즐기면서 더 재미있게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건 즐겁게 먹고 즐겁게 살아야 가능한 일. 그래서 어제는 비도 오고 해서 육전을 먹었다. 육전을 먹는 건 즐거운 것들 중 하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