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시사IN> 선정 "2008 올해의 책"은 단촐하게 준비했다면서도 먹을거리는 한가득이다. 남다른 점은 4개 분야의 구분에서 자연과학과 더불어 '생태'를 전면에 내세웠다는 점이다. 과학과 '생태'는 그간 기나긴 여정을 서로 대척점에서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과학은 점차 '생태'에 어떤 식으로든 이바지해야할 입장에 서 있다. 여하간 이번 <시사IN> 선정 "2008 올해의 책" 생태·자연과학 분야 선정작 및 추천작 목록에서도 그러한 일면들이 보이는 것 같아 의미롭다. 우리는 "생태적으루다가 살아야 헌다!"

생태·자연과학 분야는 "강양구(프레시안 사회팀장), 고중숙(순천대 교수·과학환경교육학부), 김국현(IT 평론가), 이강준(에너지정치센터 기획실장), 이억주(어린이과학동아 편집장), 장성익(계간 환경과생명 주간), 최규홍(연세대 교수·천문우주학), 표정훈(출판 평론가)"이 참여했다. 이들이 어떤 책들을 꼽았는지 유심히 정리해 두자.

'자연과학' 앞에 '생태'가 당당히 머리를 차지하고 나선 데에는 이유가 있는 모양이다. 이 분야 올해의 책으로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 선생의 『땅의 옹호』(녹색평론사)가 뽑혔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하는 것은 아닐까?

"'땅의 옹호'라는 제목과 '공생공락(共生共樂)의 (가난한) 삶을 위하여'라는 부제에서 드러나듯, '배타적인 탐욕과 약자에 대한 착취 없이는 한순간도 존속할 수 없는 근대적 삶의 방식을 뛰어넘어 오랜 세월 '대지에 뿌리박고' 살아온 사람들의 공생의 지혜로 돌아가자'라는 저자의 일관된 소신이 담겨 있다."

"진정으로 인간다운 삶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흙의 문화' '자율과 자치' '농적(農的) 순환사회' '진보가 아닌 개안(開眼)'이 필요하다고 절절히 호소한다. 물신과 경제 지상주의의 노예로 전락한 우리 시대의 뒤통수를 내려치는 준열한 경고이자, 주류 세태와는 전혀 다른 전복적인 행복 안내서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장성익)

"이 책을 읽으면 저자가 얼마나 '철저히 비타협적 자세'를 견지해왔는지 알 수 있다. 현실의 유력한 세력, 담론 중에 그의 편은 그 어디에도 있어 보이지 않는다. 신자유주의, (경제)성장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진보정당론, 녹색정당론, 사민주의 복지국가론 모두 저자의 비판 대상이다."

나는 <녹색평론>을 얼마전부터 정기구독하고 있다. 꼼꼼히 읽고는 싶지만, 여간 부담이 아니라 쌓아만 두고 있는 노릇이다. 얼마 전, <녹색평론> 본거지를 서울로 옮겼다는 소식을 들었다. 서울의 서교동 쪽이라고 기억하는데, 심심할 때 찾아가 놀아도 된다던데.

 

 

 

 

김종철 선생은 올해 『땅의 옹호』뿐 아니라, 그간 발행해온 <녹색평론>의 글들 중 가려뽑아 묶은 『녹색평론선집 2』와 자신이 썼다 <녹색평론> 서문을 엮어 『비판적 상상력을 위하여』를 내어놓았다. 이전에도 『녹색평론선집 1』(이미지가 안 보이는 것)이 있었고, 괄목할 만한 번역 작업으로는 최근의 것으로, 리 호이나키의 글을 번역한 『正義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가 있고, 감동적 작품 더글라스 러미스의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등이 있다. 『간디의 물레』가 예전부터 유명하다.

"<녹색평론> 창간(1991년) 이후 지난 17년간 쉼없이 "소농과 그 공동체를 기반으로 한 생태적 순환사회'에 대한 지향을 설득해왔지만 저자 스스로 밝힌 대로 '(세상은) 본질적으로 조금도 변하지 않았거나 질적으로 더 열악해졌고, 근대의 어둠은 훨씬 더 깊어졌다'. 그럼 어쩔 것인가? 저자도 묻는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 우리가 믿을 데는 정말 '기적'밖에 없는가?'"

"하지만 저자가 더욱 더 강조하는 것은 '우정'과 '환대'에 기초한 어떤 삶의 자세다. 그는 머리말에서 '우정'에 대해 "지금 세계를 황폐화하는 자본과 국가의 논리에 맞설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이자 "아무리 암울한 시대일지라도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데 필수적인 '희망'을 제공하는 원천"이라고 말했다. 이를테면 채식 전문 뷔페에 가서 각자 좋은 음식을 골라 먹는 것보다, 라면을 먹을지언정 여럿이 둘러앉아 함께 나눠 먹는 게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밖에 추천작으로는 피터 싱어의 『죽음의 밥상』(산책자), 마이클 폴란의『잡식동물의 딜레마』(다른세상), 제임스 콜먼의 『내추럴리 데인저러스』(다산초당), 제롬 보날디의 『(거의) 석유 없는 삶』(고즈윈), 이유진의 『동네에너지가 희망이다』등이 올라왔다. "먹을거리 문제, 에너지 위기 등 2008년의 최대 관심사가 그대로 반영됐다"는 평이다.

"이인식 과학문화연구소 소장의 『지식의 대융합』(고즈윈)도 주목할 만한 책으로 꼽혔다. 자연과학·인문학·경제학·예술·종교·환경 등을 통합하는 지식 융합 과정과 역사, 새로운 지식의 탄생 과정을 설명한 이 책에 대해 고중숙 순천대 교수는 "학문 간의 경계를 넘어 지식의 영역을 넓혀온 연구자들의 성과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추천인들은 자신의 전문 분야를 뛰어넘어 생태·환경 관련 서적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소로의 속삭임』(사이언스북스), 레스터 브라운의 『플랜B3.0』(환경재단 도요새), 장회익의 『공동체적 삶과 온생명』(생각의나무) 등이 그러한 관심에 따른 추천작이다.

이들과 함께 '올해의 책' 후보로 오른 책들은 프랑수아즈 모노외르의『수학의 무한 철학의 무한』(해나무), 김명진의 『야누스의 과학』(사계절), 리처드 도킨스의 『무지개를 풀며』(바다출판사), 마이크 데이비스의 『조류독감』(돌베개), 게일 A. 아이스니츠의 『도살장』(시공사), 박문호의 『뇌, 생각의 출현』(휴머니스트) 등이 올랐다.

 

<시사IN> 선정 "2008 올해의 책" - 문학분야


<시사IN> 선정 "2008 올해의 책" -어린이·청소년 분야

<시사IN> 선정 "2008 올해의 책" - 인문·사회과학 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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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08-12-17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해에 나온 책이 아니라도 선정하나보네요 ^^;; 제가 읽은 책이 다섯권쯤 되네요. 가장 대중적으로 좋았던 책을 제게 꼽으라면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는 어느 계층이 읽어도 참 좋은 책인거 같습니다.

멜기세덱 2008-12-17 12:05   좋아요 0 | URL
올해 출간된 책이 아닌 것은 제가 참고 삼아 덧달아넣은 것입니다. 본의 아니게 혼란을 드린 것 같습니다. "경제성장이 ~" 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책이죠. 많이들 읽어 보아야 할 책임에 분명합니다.

순오기 2008-12-17 2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난 문학위주의 독서라 여기는 '죽음의 밥상' 하나뿐~ 그것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지도 않았고요. 그래도 중3 아들이 완독한 것으로 위로 삼아요.^^
 

<시사IN>이 선정(제66호 2008년 12/20)한 "2008 올해의 책"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는 추천자로 "구춘권(영남대 교수·정치학), 김봉석(대중문화 평론가), 이동철(용인대 교수·중국학), 이종태(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 이택광(경희대 교수·영미문학), 조은영(북매거진 텍스트 편집장), 조현연(성공회대 교수·정치학), 조형근(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선임연구원)이 참여했다. 선정도서는 손낙구의 『부동산 계급사회』(후마니타스)다.

"『부동산 계급사회』(후마니타스)를 쓴 손낙구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노동 현장을 누비며 기자들을 상대하던 '노동자들의 입'(민주노총 대변인)이었다."

"부동산 문제가 단순한 주거 문제를 넘어, 교육과 학력 건강과 수명, 불평등과 빈곤, 심지어 노동쟁의와도 관련이 있음을 설득력 있게 설명해나간다. 한국의 부동산 문제는 재벌-관료제-언론-지식인-정치인으로 연결된 역사적이고 구조적인 것임을 자연스롭게 깨달을 수밖에 없다"(조현연)

"저자는 각종 기관에서 발표한 통계의 단순 인용에 그치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노력했다. 여러 수치를 비교·조합해 '아파트 값과 금융기관 수의 상관관계' '아파트 값과 서울대 합격률의 상관관계' '부동산과 수명의 상관관계'를 밝혀내는가 하면, '집 걱정률' '부동산 6계급' 같은 새롭고 흥미로운 개념도 적극적으로 제시했다.

"『부동산 계급사회』는 부동산 문제에 대해 수긍할 만한 해법을 제시하지만, 개발 지상주의에 빠진 현 정부에는 '쇠귀에 경 읽기'일 것 같다"(구춘권)

이같은 "『부동산 계급사회』라는 좋은 책, 손낙구라는 좋은 필자는 이미 세상에 나와" 있는데, 나는 아직 기회를 잡지 못했다. 사실, 내가 가진 부동산은 전무하다. 그렇다 하더라도, 아니 그러니까 더더욱, 나처럼 평생 부동산 한 번 제대로 가져보지 못할 이들이 이 책을 더더욱 읽어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밖의 추천작으로 "'자신의 머리'로 '지금 여기'에 주목"한 책들이 꼽혔다. 제일 먼저 작년(2007년) 화제작이자 '문제작'이었던 『88만원 세대』(레디앙)의 저자 우석훈(성공회대 외래교수)의 '한국경제 대안시리즈'의 마무리작인 『괴물의 탄생』(개마고원)이 꼽혔다. 그는 작년에『88만원 세대』『샌드위치 위기론은 허구다』를 썼고, 이 중 『샌드위치 위기론은 허구다』(개마고원)의 개정판 『조직의 재발견』(개마고원), 『촌놈들의 제국주의』(개마고원)과 더불어 이 책을 끝으로 4부작을 완간했다.

 

 

 

 

사실, 우석훈의 『괴물의 탄생』을 올해의 책으로 꼽아도 손색을 없었을 것인데, 아무래도 작년의 『88만원 세대』가 워낙에 문제작이었던 터라, 다소 손해를 본 감이 없지 않아 보인다. 이동철 용인대 교수는 "자신의 머리로 한국 사회를 분석하는, 우리 사회(과학)에서 보기 드문 미덕의 대표 사례다"라고 극찬했다. 더불어 김봉석은 "소장 경제학자의 담대하고 통렬한 한국 사회 비판"이라고 평했다. 아울러 우석훈은 책도 많이 냈다. 간략히 정리해 보고 가자.

 

 

 

 

 좌측 상단부터 『직선들의 대한민국』, 『우석훈, 이제 무엇으로 희망을 말할 것인가』(이 책은 지승호의 인터뷰집이다), 『명랑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도마 위에 오른 밥상』, 『한미 FTA 폭주를 멈춰라』, 『음식국부론』, 『아픈 아이들의 세대』. 우석훈 요즘 <시사IN>에 연재하고 있는 글도 곧 책으로 엮이지 싶다. 경제 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 대해 해박한 지식과 재치있는 말솜씨가 만날 안 좋은 소리만 해대도 읽는 이로 하여금 즐겁게 한다. 자신을 C급 경제학자라고 자처하는데, 이점을 적극 인정한다면, 여러분야에 걸쳐 C급 실력을 가진 박학다식의 소유자임에 틀림없다.

이어서 추천된 책들은 조효제의 『인권의 풍경』(교양인), 자크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궁리), 제프 일리의『The Left 1848~2000』(뿌리와이파리), 다치바나 다카시의『천황과 도쿄대』(청어람미디어), 쑹훙빙의 『화폐전쟁』(랜덤하우스)가 있고,

 

 

 

 

소수 추천으로는 남경태의 『역사-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들녘), 김한상의 『조국 근대화를 유람하기』(한국영상자료원), 김영민의 『동무론』(한겨레출판), 김기협의 『밖에서 본 한국사』(돌베개), 캔데이스 포크의 『엠마 골드만 평전』(한얼미디어), 공제욱의 『국가와 일상-박정희 시대』(한울), 천정환의 『대중지성의 시대』(푸른역사), 앤드루 글린의 『고삐 풀린 자본주의-1980년 이후』(필맥) 등이 있다.

 

 

 

 

  다들 관심가는 책들이다. 이 중에 김기협과 천정환의 것은 이전에 구입해 놓고도 아직 읽지 못하고 있으니, 어느 천년에 이 책들을 다 읽어나볼까? 남은 날은 많지가 않은데 말이다. 쓸데 없는 소리!

 

 

<시사IN> 선정 "2008 올해의 책" - 문학 분야

<시사IN> 선정 "2008 올해의 책" - 생태·자연과학 분야

<시사IN> 선정 "2008 올해의 책" - 어린이·청소년 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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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8-12-17 2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영민의 [동무론]도 [경제성장이 안되면...]처럼 많은 생각을 갖게 하는 책입니다.멜님이 읽지 않으셨다면 나중에 읽으시고(어쩜 벌써 완독하셨을래나요?)여울마당님과 저와 셋이서 블라블라 해보는 것도 좋은 것 같은데요.요렇게 말하는 저도 뜨문뜨문 읽고 있는 중이긴 합니다.^^;

우석훈의 [음식 국부론]=[도마 위에 오른 밥상]은 같은 책이죠. 개정판인데 최근에 그나마 품절되었군요. 좋은 책들은 품절도 후다닥 빠르네요. 근데 이 두 책은 생태장르에도 중복 포함된다고 여깁니다.

멜기세덱 2008-12-17 21:44   좋아요 0 | URL
동무론도 책소식을 여러 차례 들었는데, 파란여우님께서 권하시니, 어여 구해 읽어야겠네요.ㅎㅎ

<음식 국부론>하고 <도마 위에 오른 밥상> 어쩐지 낌새가 이상하다했는데, 개정판이었군요.ㅎㅎ 이 책들은 2008년작이 아니어서, 시사인 추천작들은 아니고요, 우석훈이 나온 김에 제가 그냥 올려둔 것 뿐이에요.ㅎㅎ

그나저나, '블라블라' 뭔 뜻일까요? 파란여우님의 고견을 얻을 수 있는 기회라면, 저야 감지덕지죠...ㅎㅎ
 

매년 이맘때면 각각의 신문사, 잡지사, 서점 등에서 "올해의 책"을 선정한다. <시사IN>도 2008년 12월 20일자 제66호에서 "<시사IN> 선정 올해의 책"을 발표했다.

  해마다 여러 매체에서 '올해의 책'을 선정한다. 온라인 서점의 위세가 강해진 다음부터는 누리꾼이 직접 '클릭'한 '올해의 책' 선정 작업이 한창이다. <시사IN>은 각 분야 전문가 30명에게 '올해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책을 세 권에서 다섯 권까지 추천해달라'고 요청했다. 굳이 전문가와 비전문가를 구분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시사IN> 편집진조차도 미처 챙기지 못한 양서를 가능한 한 폭넓게 독자에게 소개하고 싶어서였다.

  양서에 순위를 매기는 일은 조심스럽다. 어쩔 수 없이 각 분야 전문가들이 가장 언급을 많이 한 책을 첫머리에 실었지만, 4개 분야에서 추천된 책들은 한번 읽어보고 싶은 독서 욕망을 자극한다. 그래서 별도의 상자 기사에 추천 받은 목록을 최대한 실었다. 한 해 어떤 좋은 책이 우리 곁에 도달했는지 일별할 수 있는 의미 있는 독서 가이드 구실을 하리라 기대한다.

<시사IN>에서 선정한 4개 분야는 문학분야, 인문·사회과학 분야, 생태·자연과학 분야, 어린이·청소년 분야로 나누었다. 간단하게, 그러나 두루뭉술하게 나누어서 이래저래 빠진 책들도 있으리라 싶기도 하다. 목록들을 보니 챙겨봤어야 할 책들이 많아 보였다. 그래서 여기 정리해 둔다. <시사IN> 홈페이지에 가봤더니, 아직 제66호 기사는 안 올라와 있었다. 관련 기사와 함께 정리하면 좋겠으나, 여기서는 간단히 기사 중 일부분을 발췌 인용하며 정리해 두는 것에 만족하자. 우선 각 분야별 '올해의 책'으로 선정된 책은 다음의 4권이다.

 

 

 

 

 

 

 

  먼저, 문학 분야에서는 특이하게도(?) 시집이 뽑혔다. 심보선의 『슬픔이 없는 십오 초』(문학과지성사)가 그 주인공이다. 나 조차도 보관함에 챙겨두지 못했던 시집이고, 시인의 이름도 그리 낯익지 않다. 출판 도서 시장에서 맥을 못 추기는 시집만한게 없는데, 분야를 나눴다고 하지만, 그래도 소설을 제치고 '올해의 책'에 선정된 것은 놀랄만한 일이기도 하다.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는 손낙구의 『부동산 계급사회』(후마니타스)가 뽑혔다. 보관함에 챙겨둔지 오래였으나, 역시나 아직 나의 낙점을 받지 못했다. 생태·자연과학 분야에서는 김종철 녹생평론 발행인의 저서 『땅의 옹호』(녹색평론사)가 뽑혔다. 자연과학 앞에 애써 '생태'를 붙인 이유가 이 책을 '올해의 책'으로 뽑으려한 주최측의 의도는 아니었을까? 그렇다하더라도 그리 얄밉지는 않다. 어린이·청소년 분야에서는 권정생 선생의 『랑랑별 때때롱』(보리)가 선정됐다.

여기서는 문학 분야만을 정리하도록 한다. 기사를 대충 발췌 인용하는 것을 손으로 하려는 번거롭고 수고스러운 탓이다. 그런데, 문학은 올해 내가 참으로 소홀했던 듯 하다. 그래서 그나마 올해의 책 목록에 오른 책들이라도 챙겨 읽어야겠다 싶다. 혹여나 크리스마스니 연말연시니 해서 따뜻한 온정의 손길을 이 멜기세덱에게 전하려 하시는 아주 아름다운 뜻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라면, 이 목록과 페이퍼를 세심히 살펴보시라고 권한다. 더는 말하지 않는다.

문학 분야는 "고영직(문학 평론가), 박수연(문학 평론가), 신형철(문학 평론가), 오창은(문학 평론가), 이명원(문학 평론가), 이문재(시인), 임규찬(문학 평론가), 최성실(문학 평론가)"가 추천했다. 이들의 추천이 뭐 탁월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신뢰가 무너지지는 않을 정도이니, 이 목록을 열심히 읽어내는 것은 가히 나쁘지 않을 듯 싶다. <시사IN> 기자들도 독자들에게 챙겨 읽겠다고 약속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읽겠다는 뜻을 피력하기도 했으니, 추후 독후감들을 챙겨서 잡지에 게재하는 것도 해봄직하다. 이 참에 기대해 본다.

문학 분야에서 '올해의 책'에 뽑힌 심보선의 『슬픔이 없는 십오 초』기사 중 몇몇 구절들을 발췌해 둔다.

"요즘 젊은 시인들의 상상력이 거의 비슷비슷해요. 함께 모여서 매일 세미나를 하는 것처럼. 심보선 시인의 시집을 보고서 깜짝 놀랐어요. 시적 상상력이 굉장히 남달라요."

"심보선 시인은 199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풍경」이 당선하면서 등단했다. 당시 심사를 맡았던 황동규 시인과 문학 평론가 김주연씨는 이 시에 대해 '기성 시단의 어떤 흐름과도 무관하며, 시를 지망하는 사람들이 곧잘 사용하는 상투어들이나 빈말과는 전혀 다른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고 평했다. 이 시인에게 '독창성'이라는 낱말은 데뷔 때부터 친화력을 가진 단어였다."

심보선은 24살에 등단했다. 등단한 해가 1994년이니 14년이 되었다. 그럼 올해로 38~9이나 됐다. 이번 시집은 그의 첫 시집이다.

"심보선의 시집을 추천한 평론가들의 약평은 이렇다. '심보선의 언어는 집단의 고통이면서 개인의 고통인 현실을 무미건조하게, 그러나 묘하게도 비극적으로 드러낸다. 현재 한국시의 언어가 점점 상실하고 있는 자본주의 비판도 있고, 상징적 권력인 아버지 이야기도 있다. 그의 시는 그런 의미에서 개인과 집단의 이중주이다(박수연).' '한 권의 시집을 통해 1990년대를 거쳐 2008년에 이르는 시간 여행을 하는 느낌을 받게 된다. 1994년에 등단해 14년 만에 첫 시집을 펴낸 더딘 걸음이 이 시인에게는 복일 수도 있으리라. 그는 일상을 이야기하면서 시대를 담아내고, 시대를 이야기하면서 사회적 성찰의 알갱이들을 곳곳에 박아놓았다(오창은).'"

이 밖의 문학 분야 추천작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추천작들에 오히려 쟁쟁한 작품들이 많은 것 같다. 그 중에서도 김연수를 많이들 주목한 듯 하다. 그의 『밤은 노래한다』(문학과지성사)를 두고 평론가 신형철은 "김연수의 대표작은 늘 그의 최신작"이라고 말했단다. 사실 기억력이 떨어지는, 그래서 뭘 읽었는지 모르는 나로서는, 김연수의 작품을 하나쯤 읽었었던 것 같은데,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은 지난해 챙겨두었지만, 아직 읽지 못했다. 이 외에 정도상의 『찔레꽃』(창비), 시인 김선우의 소설 『나는 춤이다』(실천문학사),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창비) 등이 꼽혔다.

 

 

 

 

 

 

 

이 외 추천작들로 시집에서는 "진은영의 『우리는 매일매일』(문학과지성사), 고은의 『허공』(창비), 백무산의 『거대한 일상』(창비), 김정환의 『거룩한 줄넘기』(강), 허연의 『나쁜 소년이 서 있다』(민음사), 김혜순의 『당신의 첫』(문학과지성사), 김사이의 『반성하다 그만둔 날』(실천문학사), 황규관의 『패배는 나의 힘』(창비) 등이" 있다

 

 

 

 

 

 

 

 

"소설로는 황석영의 『개밥바리기 별』(문학동네), 이시백의 『누가 말을 죽였을까』(삶이보이는창), 윤고은의 『무중력 증후군』(한겨레출판), 이청준의 『신화의 시대』(물레), 김중혁의 『악기들의 도서관』(문학동네), 박상륭의 『잡설품』(문학과지성사)" 등이 있고, 외국 문학으로 『로드』(문학동네)도 꼽혔다.

 

 

 

 

거의 챙겨 읽은 게 없다. 황석영의 『개밥바리기 별』도 며칠 전에야나 읽었다.(그런데 나는 왜 이 책의 제목을 그냥 '개밥바리기'라고 알고 있었을까?) 올해 문학에게는 참 미안하다. 하긴 올해는 여기저기 정신이 없어서 다른 분야의 책들도 그리 많이 읽지 못했다. 하여간 꼽꼽히 이 겨울내내 챙겨 읽어야겠다.

 

<시사IN> 선정 "2008 올해의 책" - 인문·사회과학 분야

<시사IN> 선정 "2008 올해의 책" - 생태·자연과학 분야

<시사IN> 선정 "2008 올해의 책" - 어린이·청소년 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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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8-12-17 0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해의 책으로 올라온 것 중에 '엄마를 부탁해, 랑랑별 때때롱' 외에는 읽은 게 없군요.ㅜㅜ 고마운 페이퍼에요!^^
 

얼마 전 한 지인이 살만 루시디의 『한밤의 아이들』을 간절히 찾는다는 얘기를 들었다. 순간 『한 여름 밤의 꿈』과 살짝 헤깔려서 쪽팔렸지만, 아! 그 부커상에다가 '부커 오브 부커스'를 받았다는 그 책, 하며 이내 이 유명한 책이야, 어디든 가면 쉽게 구할 수 있을 거라고 장담했다가, 다시 한 번 쪽팔렸다. 구하기가 힘들게 되었단다. 인터넷이고 오프고 죄다 절판이고, 그래서인지 유명세 만큼이나 이제는 희귀본이 되어서, 헌책방에도 없단다. 그래서, 정 안되면 출판사에라도 전화해서 알아보지 그러냐 했는데, 아직까지 무소식인 걸 보면, 출판사에도 없는 모양이다.

일단, 내가 알라딘의 여러 고수들을 믿고, 한 번 알아보마 장담을 했는데, 이 희귀본을 선뜻 내어줄 이가 있을지 의문이다.

하서출판사에서 1989년에 나온 『한밤의 아이들』이다. 어쩜 이 책, 이미지도 없다. 이런!

옆의 이미지는 『한 여름밤의 꿈』

 

 

살만 루시디는 여러모로 유명한 인사고, 그의 작품들도 전세계적으로 많은 관심을 끌었다. 언뜻 떠올려도 『한밤의 아이들』외에 『악마의 시』, 그리고 최근 한국에 번역된 『분노』 등이 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부커 오브 부커스에 뽑힌 『한 밤의 아이들』이 아무리 그래도 절판인 것은 좀 그렇다.

 

 

 

 

 

 

 

알라딘에서 '한밤의 아이들'로 검색해보면, 딸랑 2권의 책이 검색된다. 그 중 하나는 영역본이고, 우리말 번역은 하서출판사에서 1989년에 나온 것이 유일하다. 어쩜 이거 너무 하잖아. 아직 살아있는 작가라 저작권 문제때문에 그런 것일 수 있겠다 싶은데, 하서출판사에서 이 책을 재출간하지 않고 있는 것도 좀 그렇다. 혹시나 이 출판사 부도났나? 그런 소식은 듣지 못했다.

 

 

 

 

 

 

 

그 지인이 왜 이 책을 구하고 싶어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왠지 나도 구해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렇게 구서광고를 내보는데, 잘 될지 모르겠다.

이런 책이 89년에 딸랑 한 번 나와서 근 20년간 재출간 혹은 개정판이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은 세계적으로 쪽팔린 일은 아닐까? 하서출판사는 좀 반성하시고, 어쩜, 다시 나와도 돈이 안되는데, 손해보라고 강요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대한민국 독자들도 좀 반성하시고, 여하튼, 어찌어찌 이 책을 구해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그 지인은 원서를 구해서 돈을 들여 번역을 해서라도 읽고 싶다고 그러는데, 그 마음, 참 아름답잖은가? 알라딘 지기들이 많이들 도움을 주셔야지 싶다. 구하게 된다면 '사례'는 당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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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8-12-14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게 절절히 찾으시니 저도 궁금해집니다. 대체 어떤 책일까요.

멜기세덱 2008-12-13 21:19   좋아요 0 | URL
ㅎㅎ,어떤 분의 도움으로 헌책방에서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었습니다. 책이야 뭐, 나름 유명하니깐...ㅎㅎ

MAMABOOK 2009-08-18 0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밤의 아이들 하서출판사
있습니다 연락 주세요
017-622-0222
 

   
 

민지의 꽃


강원도 평창군 미탄면 청옥산 기슭
덜렁 집 한채 짓고 살러 들어간 제자를 찾아갔다
거기서 만들고 거기서 키웠다는
다섯살 배기 딸 민지
민지가 아침 일찍 눈 비비고 일어나
저보다 큰 물뿌리개를 나한테 들리고
질경이 나싱개 토끼풀 억새……
이런 풀들에게 물을 주며
잘 잤니,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게 뭔데 거기다 물을 주니?
꽃이야, 하고 민지가 대답했다
그건 잡초야, 라고 말하려던 내 입이 다물어졌다
내 말은 때가 묻어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키지 못하는데
꽃이야, 하는 그 애의 말 한마디가
풀잎의 풋풋한 잠을 흔들어 깨우는 것이었다

 
   

시인 정희성의 4번째 시집 『詩를 찾아서』에 수록된 시다. 시인은 늦은 나이에 첫 시집 『답청』(1974년)을 펴내서인지, 여타 시인들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며, 느릿느릿 시의 걸음을 걸어왔다. 4년만에 두번째 시집으로 그 유명한 「저문 강에 삽을 씻고」가 수록된 동명의 시집 『저문 강에 삽을 씻고』를 출간한 것은 그의 느릿한 시작을 놓고 봤을때 이례적으로 빠른 속도를 보여준 것이라고 하겠다.(얼마 전 시인의 인하대 강연에서, 아직도 「저문 강에 삽을 씻고」의 시인으로 기억되고 소개되는 것이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론 아쉽고 멋쩍은 일이라고 한 바 있다. 좋은 시는 독자에게 오래 기억되는 법이긴 한데, 살아남은 노시인에겐 그게 뛰어넘기 힘든 높은 벽이 될 수도 있었겠다 싶다.) 정희성은 이것으로 1981년 제1회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한다. 아무리 봐도 정희성 시인은 김수영을 생각나게 한다. 중고등학교의 시험문제에서도 시인의 「답청」과 김수영의 「풀」이 비교지문으로 곧잘 등장하니 말이다. 이후 두번째 시집으로부터 13년만에 세번째 시집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를 펴냈고, 그로부터 10년만에 바로 이 시집을 펴낸 것이다.(시인은 올해 『돌아다보면 문득』(창비, 2008.)를 펴낸 바 있다.)

 

 

 

 

10년을 묵혀온 시들을 모아 펴낸 시집이라면, 참 묵직하기도 하겠다 싶지만, 그마저도 기대를 저버리고 마는 시인이 정희성이다. 시집이란 이미지에 걸맞게 시인의 시집은 제법 가볍기 그지 없다. 이 시집에 수록된 시는 43편에 불과하다.(대부분의 시인들은 보통 70~100편 가량을 시집으로 묶는다.) 과작(寡作)의 시인 정희성. 오랜 동안 교직에 몸담으면서 일과 생활에 지쳐서 시를 쓰는 것이 어려울 성 싶지만, 그게 그의 과작을 이끈 주된 이유는 아닌 것 같다. 많이 갈고 닦아서도 아닌 것 같고, 아무튼 그의 과작의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의 적은 시 중에서 기억에 오래 남고 읊조릴 시들이 비교적 많다는 사실이다.

한 권의 시집에는 어떤 천재적 시인이라고 할지라도 각각의 시편들의 성취정도는 둘쭉날쭉이기 십상이다. 물론 정희성의 시도 예외일 수 없다. 이번 시집에서도 그가 「저문 강에 삽을 씻고」의 시인으로 기억되는 일을 중단시킬만한 시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시집 『詩를 찾아서』에서 무척이나 주목되는 시가 바로 위의 시다. 이 시 「민지의 꽃」은 특별나거나 의미심장하거나, 시적 성취가 뛰어나거나, 뭔가 문제적이거나, 아름답거나, 괴기하거나, 어렵거나, 재미나거나, 독특하거나, 기타 등등의 시에 대한 찬사를 바치기에는 미흡한 시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나는 이 시를 주목하게 되고, 자꾸 읊조리게 된다.

시를 읽어보자. 강원도 어느 산골에 귀농한 제자를 찾아간 시적화자는 거기서 몇날을 묵었던듯 싶다. 그집 딸 민지와의 에피소드가 주된 내용이다. 앞마당의 잡초에 물을 주는 민지를 보면서, 시적화자는 어떤 성찰을 얻는다. 잡초를 꽃으로 여기는 민지의 그 행위와 인식이 때묻은 시적화자에게 주는 어떤 파토스는 커다란 충격으로 남은 듯 하다. 그게 다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이 시가 수록된 시집의 제목이 '詩를 찾아서'라는 점이고, 다시 눈여겨 볼 점은, 이 시가 「시가 오는 새벽」과 「詩를 찾아서」사이에 놓여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이 시집이 13년만의 소산이란 점을 염두에 두자. 그러한 사실들을 고려해 볼 때, 이 시는 이 시집에서 매우 의미심장한 역할을 감당하게 된다. 「시가 오는 새벽」에서 시인은 "내 이마 서늘"할 정도의 시적 영감을 받지만, 그것이 어떻게든 시로 탄생되어질 수 있었는지는 아직 의문으로 남는다. 그런 시적 영감 혹은 시에 대한 어떤 깨달음, 혹은 시에 대한 충격은 어느 한 날의 새벽으로는 다소 부족하다. 시적 영감이 시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시적 언어, 시적 인식에 대한 성찰과 깨달음이 동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민지의 꽃」이 필요했다.

「민지의 꽃」에서 시적화자는 때묻은 자신의 언어(말), 곧 세상의 때 묻은 인식을 깨닫고 충격을 받는다. 바로 민지가 보여주는 그 따뜻하고 순수하며, 시적화자와는 달리 결코 때묻지 않은 언어와 인식으로부터 언은 충격이다. 어떤 시가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키"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시인에게 시는 그 시를 읽는 독자를 감동시켜야할 의무와 책임이 있을 것이다. 세상의 때 묻은 언어는 그로부터 어떤 시가 되어도 그런 감동을 주기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시가 오는 새벽'에 얻었던 시적 영감이 시가 되지 못한 이유는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이로부터 시인의 자신의 언어와 인식의 한계를 절감하게 된 것이 아닐까? 뒤로 이어지는 「詩를 찾아서」에서 줄곧 찾아되는 것이 '말'이란 사실에서 그것을 확인하게 된다. 시인은 시의 언어를 찾아서 여기저기 헤매고 다니지만, 결국 찾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마도 시는 닿을 수 없는 그리움인 게라고/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마음인 게라고/끝없이 저잣거리 걷고 있을 우바이/그 고운 사람을 생각했다"(「詩를 찾아서」)는 체념만을 찾았을 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체념만이 아니다.

시를 찾아 나선 시인이 생각한 "그 고운 사람"은 '우바이'만이 아닐 것이다. 이미 시인은 때묻은 말에서 헤어날 수 없다. 그러나 시는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마음"이어서, 시인은 자꾸만 그 볼 수 없는 마음을 찾아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고뇌하고 떠돌 수 밖에 없을 따름이다. 그러나 보고 싶으면 볼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이가 있으니, 그게 바로 '민지'다. 그렇게 시인은 '우바이'를 생각하고 '민지'를 생각했을 것이다. 여전히 시를 찾지는 못했지만, 어떤 마음을 볼 것인지, 어떤 마음에서 오는 세상과 세상의 것들에 대한 인식인지, 어떤 언어여야 하는지를 슬며시 깨달았음을 느낄 수 있다. 그렇게 시인은 늘상 '시가 오는 새벽'에 몸을 부르떨며 시적 영감을 얻고, 민지의 언어와 마음과 인식을 넘지 못하는 자신의 때묻은 언어와 인식을 한탄하고, 또한 시를 찾아 떠나는 행위를 반복해가며, 그렇게 살다가 뜨엄뜨엄 뜻대로 되지 않는 고통들을 뱉어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런 산고의 산물이 이 시집에 엮인 시들일 것이고, 그것이 소량이고, 과작이어야 함은 분명한 이유를 가질 수도 있겠다. 연로한 시인에게 시를 토해내는 것은 말라가는 피를 토해내는 것일수도 있으니, 건강상으로도 과작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기도 하겠다.

민지는 세상의 눈으로는 '잡초'일 따름이지만, 그 마음으로부터는 '꽃'이다. '민지의 꽃'은 그래서 특별한 꽃이 된다. 시적화자가 그런 민지에게 세상적 인식, 곧 그것이 '잡초'란 사실을 알리지 못한 것은 아이에 대한 자애로움에서 온 것이 절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 틀렸다는 부끄러움에서 오는 오싹함이다. 시적화자가 입을 다물며 느껼 수 이 치떨림과 부끄러움이 느껴져 오는 듯하다. 그것이었으면 족하지 않을까? 시인의 "내 말은 때가 묻어/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키지 못하는데/꽃이야, 하는 그 애의 말 한마디가/풀잎의 풋풋한 잠을 흔들어 깨우는 것이었다"는 마지막의 첨언은 사족과 같이 느껴진다.

정희성 시인은 아마도 이 「민지의 꽃」에서 시심을 본 것이 분명하다. 늙으면 아이가 된다고 했던가? 연로한 시인은 어쩌면 민지의 마음까지도 얻었는지도 모르겠다. 근래에 펴낸 『돌아다보면 문득』이란 시집에 대한 기대는 그런 것들이다. 시인의 신작시집『돌아다보면 문득』을 진작에 손에 넣고도 아직 읽고 있지 않은 것은, 그런 기대감을 만끽해보고 싶은 짖궂음이다. 이 겨울을 틈타 한적하게 읽어보아야 겠다. 내일은 어느 잡초에게 물을 주어볼까? 아차, 겨울이잖아! 역시 나도 어쩔 수 없는 때묻은 인간을 뿐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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