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 - 1998 제1회 백석문학상 수상작 문학과지성 시인선 220
황지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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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이 아침은 어제 저녁부터 내리기 시작한 장맛비가 추적추적 끈덕지게 내리는 ‘흐린 날’보다 더욱 축축한 날이다. 이런 날에는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라는 시를 읽는 것이 다소 모자람 있지만 제격이다.


그러므로,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혼자 앉아 있을 것이다

완전히 늙어서 편안해진 가죽부대를 걸치고

등뒤로 시끄러운 잡담을 담담하게 들어주면서

먼 눈으로 술잔의 水位만을 아깝게 바라볼 것이다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 부분


  내가 아직은 이런 감상에 젖을 나이는 아니다. 아직은 결혼도 하지 않았고, 그리하여 ‘초경을 막 시작한 딸아이’가 있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나는 술도 잘 못한다. 아직까지 ‘술잔의 수위’가 줄어드는 데에 아까움을 느껴본 적은 없다. 하지만 왜일까? 이런 흐린 날에는 그래도 이 시가 마음에 동요를 일으키니 말이다. 그래서 시는 이중, 삼중, 다중의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이 사람에게는 이렇게, 저 사람에게는 또한 저렇게. 그리하여 모든 이들의 공감을 이끌어 내는 것이 시의 목표라면 목표이다.

  시집의 제목을 정하는 데 재미난 일화가 있단다. 정작 시인은 시집제목을 ‘等雨量線’으로 하려고 했는데,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편집자들이 상업적 전략을 발휘하여, 보다 많은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면서도 공감과 관심을 불러일으킬만한 제목을 골랐으니 그게 바로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이다.

  이 전략은 대성공을 거두어서 시집이 대박이 났단다. 원래 붙이려던 ‘등우량선’으로 했다면 아마도 쪽박을 찼을 거라는 안도의 한숨 속에 왠지 모를 아쉬움이 남아 있는 듯하다. 무슨 아쉬움이 남았을까? 그건 아마도 제목이 가지는 상징적 의미가 다만 상업전략에 치우쳐 무시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제목이라는 것은 시집의 얼굴이 되고, 시집으로 엮인 시들의 전체적 맥락의 중심이 되는, 그리고 그 시들을 풀어내는데 열쇠가 되는 그런 의미를 담아내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은 시집의 제목을 ‘등우량선’이라 정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되질 않았으니, 시집은 많이 팔렸더라도 끝내 아쉬움은 남았으리라. 그 후에 시인은 이런 생각 품지 않았을까? ‘정말로 등우량선이라 했으면 팔리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시인은 왜 시집의 제목을 ‘등우량선’으로 하려고 했을까? 여기서 「등우량선」을 읽는 것이 필요하겠다. ‘等雨量線’이란 제목을 단 시는 모두 4편이 있는데, 이중 가중 짧은 「等雨量線 2」를 맛보도록 하자.


고르바초프가 사라지던 날

연기나는 地球儀; 머리에 깍지낀 손을 얹고

포로들은 이란 고원을 넘어가고,

이집트로 들어간 그때부터

대일파스만한 관광 엽서, 받았습니다.

이 인류를 위해 누군가 한 사람은

사막으로 나가봐야겠지요?

거기서 누군가가 울었습니까?

해가 람세스 신전으로 내려가고

그대가 보낸 北 아프리카의 붉은 밤;

덴 것처럼

그날 내내 내 얼굴이 후끈후끈했습니다.

피가 없는 평화를 원한다면

날 내버려두십시오.

나는 남조선, 선거 끝난 담벼락을

터덜터덜 지나왔습니다.

                        「等雨量線 2」 전문


  ‘등우량선’이란 기상도에서 같은 강우량의 지역을 선으로 이어그인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이 시는 왜 ‘등우량선’이란 제목을 달고 있을까? 얼핏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알아내려고 눈을 부릅뜨고 뚫어지게 쳐다볼 필요는 없다. 이 시는 부분적으로 다양한 사건들 상황들 지역들을 마구잡이로 섞어 놓았다. 아니 그것을 선으로 그어놓았다. 그렇다면 이것은 세상에 그어진 ‘등우량선’인 셈이다. 그 선으로 이어진 지역은 곳 같은 등급이라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고르바초프가 사라지던 날”은 “포로들은 이란 고원을 넘어가”던 날이다. 그리고 “대일파스만한 관광 엽서, 받”은 날이기도 하다. “나는 남조선, 선거 끝난 담벼락을/터덜터덜 지나”온 날인 것이다. 이런 것들은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 그것은 조금만 더 시집을 충실히 읽어내면 또 다른 시편들에서 찾아 낼 수도 있다.

  아까 제목이 시집을 대표한다고 했는데 그런 의미에서 시집은 첫째 번으로 실리는 시도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오히려 시집 전체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제목보다 더욱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 열쇠가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위의 시에서 나타나고 있는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이는 사건들을 동급으로 줄그어 놓은 시인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파악하기 위해서 첫째번의 시를 읽어볼 필요가 있으리라.


논에 물 넣는 모내기 철이

눈에 봄을 가득 채운다


흙바닥에 깔린 크다란 물거울 끝에

늙은 농부님, 발 담그고 서 있는데

붉은 저녁빛이 斜線으로 들어가는 마을,

묽은 논물에 立體로 내려와 있다


아,

아직은 저기에 바깥이 있다

저 바깥에 봄이 자운영꽃에 지체하고 있을 때

                                                             내

               몸이 아직 여기 있어

아름다운 요놈의 한세상을 알아본다


보릿대 냉갈 옮기는 담양 들녘을

노릿노릿한 늦은 봄날, 차 몰고 휙 지나간 거지만

                        「아직은 바깥이 있다」 전문


  이 시에서 시인은 ‘바깥’을 말한다. 새삼스레 왜 ‘바깥’인가? ‘바깥’은 대립적 존재로써 ‘안’이 있다. 우리는 어쩌면 늘 ‘안’에서 사유하고 살아간다. 그러하기에 ‘바깥’은 엄연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소외되고 잊혀진다. 그래서 시인의 ‘바깥’의 관한 사유는 새삼스러운 것이 된다. 안과 바깥은 대립적 사유에서는 ‘바깥’은 소외되지만, 이 시인의 ‘바깥’의 사유는 대립을 넘어 조화로, 조화를 넘어 지향으로써의 ‘바깥’이 된다. 그럴 때에 안과 밖의 경계는 무너지는 것이다.

  또한 안과 밖은 이면대립이 아니다. 밖은 셀 수 없을 만큼 존재하고 있다. 우리의 인식범위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안과 밖은 다중대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경계를 무너뜨리며 거기에 ‘등우량선’이 그어지게 된다. 바로 이것이다. 시인의 사유에서 등우량선은 이런 ‘바깥’에 대한 사유 속에서 그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等雨量線 2」를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여지가 주어졌다. 내가 존재하는 곳과, 고르바초프가 사라지던 곳의 경계는 허물어지고, 그리고 저 멀리 소외되었던 포로들이 고원을 넘어가는 곳까지도 그 선은 놓치지 않는다. 무엇하나 놓쳐버리지 않고, 나와 같이, 나와 같은 의미에서 사유하고자 하는 것이 시인의 진실이 아니겠는가?

  그런 면에서 이 시집의 제목은 ‘등우량선’이 되어야 했다. 시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는 이런 시인의 사유의 큰 틀에서 잠시 방황하고 주저했던 시기의 단편에 지나지 않으니, 시집의 제목으로써는 다소 부족한 감이 있으리라. 하지만 어떠랴? 이 시집을 엮고 있는 모든 시들이 어쩌면 등우량선으로 그어져 같은 등급의 시들인 것인지도 모를 일이니, 시인은 제목을 바꾸는 데에 그리 반대하지 않을 것 아니겠는가?

  이 시집에서는 나는 좀 특별히 울컥한 대목이 있어 이걸 말하고 끝나야겠다.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어머님 문부터 열어본다.

어렸을 적에도 눈뜨자마자

엄니 코에 귀를 대보고 안도하곤 했었지만,

살았는지 죽었는지 아침마다 살며시 열어보는 문;

이 조마조마한 문지방에서

사랑은 도대체 어디까지 필사적인가?

당신은 똥싼 옷을 서랍장에 숨겨놓고

자신에서 아직 떠나지 않고 있는

생을 부끄러워하고 계셨다.

나를 이 세상에 밀어놓은 당신의 밑을

샤워기로 뿌려 씻긴 다음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빗겨드리니까

웬 꼬마 계집아이가 콧물 흘리며

얌전하게 보료 위에 앉아 계신다.

그 가벼움에 대해선 우리 말하지 말자.

                        「안부 1」 전문


  화자의 어머니는 치매에 걸린 노인이거나 중풍을 맞은 환자이거나. 그런 어머니를 아들은 지극정성으로 보살핀다. 그런 아들의 마음은 곧 어머니의 마음과 등급을 이룬다. “그 가벼움에 대해선 우리 말하지 말자.”고 말하는 아들의 마음은 “생을 부끄러워하고 계”시는 어머님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어머니는 때론 ‘꼬마 계집아기가’되기도 한다. 이것 또한 등급을 이룬다. 이런 등급 속에는 사랑이 있다. 이 시도 또 하나의 등우량선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시인의 바깥에 대한 사유는 결국 모든 것에 관심을 가지려는 조화와 사랑의 결과, 곧 ‘등우량선’으로 줄줄이 이어 결코 끊이질 않는 인연의 선을 만들어 놓았다. 황지우 시인의 사유 속에는 이런 기상도가 그려질지도 모를 일이다. 하나의 등우량선만으로 그려진 일기도말이다. 그게 이상한 것은 ‘안’의 삶과 사유 속에서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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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사르 2011-04-18 1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등우량선에 대한 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저도 시집 제목을 왜 저걸로? 갸웃하면서 시를 읽었네요. 멜기세덱님의 리뷰를 읽고 등우량선에 대해서 더 생각해보는 계기가 될 거 같습니다. 시인의 아주 넓은 마음 속에는 세상 만물이 등우량선 범위 내에 들어가는 게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당신 문학동네 시집 71
김용택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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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섬진강>의 시인, 섬진강의 작은 시골 마을의 교사로 재직하면서 순박하고 순수함 그 자체의 아이들의 모습들을 그려낸 <섬진강 이야기>, 이런 것들이 주는 그는 '섬진강'으로 존재한다. 그는 "1948년 전북 임실에서 태어나 1982년 '창비 21인 신작시집' <<꺼지지 않는 횃불로>>에 <섬진강 1> 등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섬진강으로 시작한 그는 아직 끝끝내 섬진강을 벗어나 살지 못하고 있으며, 우리에게 또한 섬진강 이상으로 기억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시인에게는 자랑이면서도, 아픔이지 않을까?

  <섬진강> 연작에서 그려지는 그의 농촌시적 경향은 김용택이란 시인을 가히 우리 문단의 총아의 위치를 만들어 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이후 펴낸 시집이건, 산문집이건, 시선집이건 간에 그야말로 대박들을 만들어 내긴 했지만, 그 무엇도 <섬진강> 이상은 아니었다. 시집의 판매량만을 놓고 본다고 한다면야, 이후의 책들이 베스트셀러를 연신 기록하고 있지만, 시인 김용택에 붙은 섬진강은 여전하게 그를 휘어감는다. 이것은 섬진강의 시인 김용택의 딜레마라고도 할 수 있고, 김용택을 읽는 우리 독자에게는 아쉬움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분명 나에게는 그 아쉬움이 아주 진하게 남아있다.

  나는 근래에 김용택을 멀리하고 있었다. 그가 펴낸 책들은 그에게는 소중한 것들이겠지만, 어딘가 모르게 대중에게 영합하는 외로움과 고독을 본으로 하는 서정시인의 본령에서 벗어난 듯한 냄새가 나기때문이다. 이것은 나의 독특한 성향에서 기인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한번쯤은 김용택 시인에게 날카롭게 딴지 걸어보고 싶은 부분이기도 하다. 과연 그는 어떻게 생각할까? 대답이 궁금해 진다.

  시인 김용택이 조금씩 류시화처럼 되어가는 느낌! 나에게는 좋은 느낌은 아니다. 그가 이전에 펴낸 <<그 여자네 집>>은 어느 정도의 성취를 거두었다고는 하나 <<연애시집>>에서는 조금 갸우뚱이다. 이어서 나온 것은 이 시집 <<그래서 당신>>인데, 이것에게서도 아쉬움은 남는다.

  "잎이 필 때 사랑했네 // 바람 불 때 사랑했네 // 물들 때 사랑했네 // 빈 가지, 언 손으로 // 사랑을 찾아 // 추운 허공을 헤맸네 // 내가 죽을 때까지 // 강가에 나무, 그래서 당신"

  '사랑타령'이라고나 할까? '그래서'라는 접속사의 사용에서 번뜩이는 기지를 느끼기는 하지만, 그런 시적 깨달음은 뭐랄까? 수준미달이 아닐까? 이 시집은 참 가벼웁다. <섬진강>의 무게보다도 가볍다. 어쩌면 그의 시들이, 이전의 섬진강의 그 구체적 모습들과 거기에 담긴 구구절절의 이야기들이 그 끝을 보여서인 것인지, '사랑타령'의 관념 속에서, 날아다니는 그 관념들을 가슴에서 울렁이다가 내보내고 있는 것이서인지 모르겠다. 그가 서문에서 쓰고 기뻤다는 <남쪽>이라는 시를 보자.

  외로움이 쇠어

  지붕에 흰 서리 내리고

  매화는 피데

  봉창 달빛에

  모로 눕는 된소리 들린다

  방바닥에 떨어진 흰 머리칼처럼

  강물이 팽팽하게 휘어지는구나

  끝까지 간 놈이

  일찍 꽃이 되어 돌아온다

  '지붕', '매화', '달빛', '꽃' 등 이러한 것들이 더이상 우리에겐 구체화되지 않는다는 것. 하지만 이 시가 담고 있는 것은, 어느 옛 선비의 읊조리는 시조와 같은 그런 고상한 감이 담겨 있는듯도 하다. 왜 이 시를 쓰고 시인은 기뻤을까?

  "바람이 불면 // 내 가슴속에서는 풀피리 소리가 납니다"<그리움>

  2연으로 된, 위에서처럼 문장으로는 단 한 문장으로 되어있는 시. 이런 것들이 많이 있다. 이것은 꼭 일본의 하이쿠같은 느낌이다. 이것은 <<연애시집>>에서도 주로 사용되고 있는 방법들이다. 이것은 좀 구식의 느낌이 든다. 시적 후퇴, 아니면 시적 능력의 후퇴? 어떤면에서 나는 그가 시인으로서는 진화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이것이 아쉬움이다. 그리움이라고 하는 것이 '풀피리 소리'가 된 것은 더이상 새롭지 못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나만의 느낌인 것인가?

  이런 점에서 안도현 또한 그런 종류의 아쉬움이다. 어쩌면 김용택은 많은 책들을 펴내야 하므로, 시를 쓸 시간이 꽤나 없어서 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와중에 시집 한 권 내자고 이쪽 저쪽에서 보체는 통에 이런 후퇴한 시들을 토해낸 것은 아닌지. 내가 너무한 듯도 하다.

  <그래서 당신>에서 나는 대부분의 경우에 수긍할 수 있었다. "음! 그렇지" 정도의 감탄사 외에서, 어떠한 새로움도, 그 이상의 통찰도, 명쾌함도, 번뜩이는 기지도 보기 어려웠다. "그래서 당신"이 아닌 "그러나 김용택은"이라고 묻고 싶다. 김용택 시인의 시적 진화는 어젠쯤 이루어 질 수 있을까? "그래서" 아쉬움이 남는 "당신", 시인 김용택의 이번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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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기세덱 2006-06-19 1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뭔가 미안한 마음이 있어, 별을 하나 더 띄워준다.
 
사라진 손바닥 문학과지성 시인선 291
나희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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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높은 가지를 흔드는 매미소리에 묻혀

 

내 울음 아직은 노래 아니다.


차가운 바닥 위에 토하는 울음,

풀잎 없고 이슬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지하도 콘크리트벽 좁은 틈에서

숨막힐 듯, 그러나 나 여기 살아있다

귀뚜르르 뚜르르 보내는 타전소리가

누구의 마음 하나 울릴 수 있을까.


지금은 매미떼가 하늘을 찌르는 시절

그 소리 걷히고 맑은 가을이

어린 풀숲 위에 내려와 뒤척이기도 하고

계단을 타고 이 땅밑에까지 내려오는 날

발길에 눌려 우는 내 울음도

누군가의 가슴에 실려가는 노래일 수 있을까.

                                「귀뚜라미」


  안치환의 노래다. 아직도 이 노래를 들으면서는 마음은 잔잔한 풀밭을 헤매면서 귀뚜라미 울음에 왠지 모를 가슴 속 어느 한 덩이, 덩이가 울렁이는 듯하다. “귀뚜루루르 귀뚜루루르 보내는 내 타전소리가/누구의 마음 하나 울릴 수 있을까.” 그러나 그 귀뚜라미는 내 가슴에서 크게 울었다.

 

  이 노래를 좋아하면서, 나는 이 노래의 가사를 안치환이 쓰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야말로 주옥같은 이 가사는 곧 시였다는 사실을 알았고, 이 시를 쓴 이는 나희덕이라는 여류시인임을 알았다. 나희덕! 이 이름도 왠지 귀뚜라미 울음의 작음 울림으로 들렸다. 그로부터 나는 나희덕이란 이름을 내 귓가에 귀뚜라미 울음과 같이 기억했고, 이 노래를 좋아 듣던 만큼이나, 듣던 때에나 또한 흥얼거릴 때에나, 나희덕이란 이름도 함께 기억했다. 하지만 그 이름뿐이었다.


배추에게도 마음이 있나 보다.

씨앗 뿌리고 농약 없이 키우려니

하도 자라지 않아

가을이 되어도 헛일일 것 같더니

여름내 밭둑 지나며 잊지 않았던 말

― 나는 너희로 하여 기쁠 것 같아.

― 잘 자라 기쁠 것 같아.


늦가을 배추 포기 묶어 주며 보니

그래도 튼실하게 자라 속이 꽤 찼다.

― 혹시 배추벌레 한 마리

이 속에 갇혀 나오지 못하면 어떡하지?

꼭 동여매지도 못하는 사람 마음이나

배추벌레에게 반 넘어 먹히고도

속은 점점 순결한 잎으로 차오르는

배추의 마음이 뭐가 다를까?

배추 풀물이 사람 소매에도 들었나 보다.

                                「배추의 마음」


  이 시는 중학교 3학년 1학기 1단원 시의 표현 소단원(2)에 수록되어 있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나희덕! 그 이름이 불현듯 튀어나왔다. 내가 중학생이 아니고, 이놈의 국어교과서를 학교 다닐 시절보다 더 열심히 공부해야할 입장에 있어, 새롭게(이제 다시 8차 교과서를 펴낸다고 하니 새로울 건 이제 없지만) 7차교과서를 공부하다보니, 이 책에 나희덕의 시가 있었던 것이다. ‘배추의 마음’을 읊는 나희덕의 마음이 아하 곧 ‘배추의 마음’임을 느끼면서, 내 소매에는 ‘배추 풀물’이 들었고, 어느새 ‘귀뚜라미’의 울음소리 들려왔다. 나희덕! 나희덕! 이 이름이 계속해서 내 주의에서 맴돌았다.


처음엔 흰 연꽃 열어 보이더니

다음엔 빈 손바닥만 푸르게 흔들더니

그 다음엔 더운 연밥 한 그릇 들고 서 있더니

이제는 마른 손목마저 꺾인 채

거꾸로 처박히고 말았네

수많은 槍을 가슴에 꽂고 연못은

거대한 폐선처럼 가라앉고 있네


바닥에 처박혀 그는 무엇을 하나

말 건네려 해도

손 잡으려 해도 보이지 않네

발밑에 떨어진 밥알들 주워서

진흙 속에 심고 있는지 고대 들지 않네


백 년쯤 지나 다시 오면

그가 지은 연밥 한 그릇 얻어먹을 수 있으려나

그보다 일찍 오면 빈 손이라도 잡으려나

그보다 일찍 오면 흰 꽃도 볼 수 있으려나


회산에 회산에 다시 온다면

                                「사라진 손바닥」


  ‘배추 풀물’이 거의 다 빠져갈 즈음, 나는 재미삼아, 대학교 말년, 교양수업으로 시창작 강의를 수강한 적이 있다.(나는 전공이 국어교육이었지만, 국어국문학과 강의 중에 이 수업을 들은 것이다. 이 과목은 국문과 전공과목이지만, 내가 들었으니, 교양이나 다름없게 된 것이다. 그만큼 대충 들었다.) 아하 이런, 나희덕! 그 이름은 또 내게 확 띄었다. 아뿔싸, 이젠 도저히 나희덕을 만나지 않고는 아니 되겠구나. 하지만 나는 참으로 게을러서 나희덕 시인을 이제야 만났다.

 

  삼일간의 예비군 훈련 덕분인 것이다. 삼일 동안 4권의 시집을 읽었고, 그 중 하나가 바로 나희덕 시인의 이 시집 『사라진 손바닥』이다. 말하자면, ‘사라진 손바닥’이 불현듯, 혹은 우연처럼, 혹은 어쩔 수 없는 필연처럼.

 

  왜 그렇게 돌고 돌아, 이제야 만나야만 했을까? 나희덕이라는 이름을 안지는 10여년의 세월이 더 지난 듯한데, 왜 이제여야 하는가? 하긴, 그걸 묻는다고 뭐가 달라질 것은 없다. 내 운명은 왜 이런가 하고 따지니 보다, 앞으로의 운명을 걱정하는 것이 차라리 나은 것처럼. 그러니, 이제는 나희덕을 제대로 만나는 것이 필요할 터, ‘사라진 손바닥’이 내 얼굴에 뺨을 치고 말게끔 그렇게 만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나희덕과의 만남을 가능하게 해 준 예비군 훈련에 고답다는 말과 함께, 나는 이 시집『사라진 손바닥』을 통해, ‘연밥’도 여러 그릇 얻어먹었다고나 할까, 나희덕 시인이 숨겨 둔 ‘빈손’ 또한 잡아보았다고나 할까, ‘흰 꽃’이 하얗게 내 앞에서 빛났다고나 할까, 그럴 수 있어서 또한 즐거웠다. 귀뚜리미가 울고, 풀물 냄새도 나고.

 

  이렇게 내가 오랜 세월을 거쳐 나희덕을 만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왜일까? 나는 거기에 나희덕의 시의 힘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도덕적인 갑각류’라는 말이 뢴트겐 광선처럼 나를 뚫고 지나갔다. 벗어나려고 할수록 더욱 단단해지던, 살의 일부가 되어버린 갑각의 관념들이여, 이제 나를 놓아다오.

                                                                  <시인의 말>


  ‘관념’을 떨쳐버리고, 잘 짜여진 비단결처럼, 나희덕의 시는 곱디고운 아름다운 옷으로 나를 감싸주고 있었다. 시집 곳곳에는 따뜻함과 정겨움을 느낄 수 있었다. 귀뚜라미의 울음처럼, 배추의 마음처럼, 따뜻한 겨울 솜옷처럼, 나를 감싸주고 있었다. 그게 바로 나희덕의 힘이 아니겠는가?


잘 비워낸 한 생애가 천천히 식어가는 동안

그가 마지막으로 건네는 국밥 한 그릇을

눈물도 없이 먹어치웠다.

국밥에는 국과 밥과 또 무엇이 섞여 있는지,

국밥 그릇을 들고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서둘러 삼키려는 게 무엇인지,

어떤 찬도 필요치 않은 이 가난한 음식을

왜 마지막으로 베풀고 떠나는 것인지,

나는 식어가는 국밥그릇을 쉽게 내려놓지 못했다.

                                「국밥 한 그릇」 부분


  이게 바로 시인의 마음이었으니, 나희덕이란 이름은 내게 참으로 여린 잎사귀의 흩날림이었던 것이다. 이 시집의 해설을 쓴 김진수는 ‘직조술로서의 시학’이라고 명명하였거니와, 나는 나희덕이 만들어 내는(만들어 낸다는 말에는 어느 정도 문제가 있지만) 시들은 따뜻한 털옷, 한 땀 한 땀 뜨개질을 해낸, 바늘로 세세히 박음질을 한 그런 옷의 시학이 아닐까 한다. 앞으로 한 동안은 나희덕의 시세계에서 이런 따뜻함 느끼지 않을까 한다. 근데, 지금은 한여름이군! 아하! 그렇다면 또한 얼마간이 지난 후에 또 우연처럼 나희덕이 내게 찾아올 것이야!


땅 속에서만 꽃을 피우는 난초가 있다

땅 위로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없기 때문에

본 사람이 드물다 한다

가을비에 흙이 갈라진 틈으로 향기를 맡고 찾아온

흰개미들만이 그 꽃에 들 수 있다

빛에 드러나는 순간 말라버리는 난초와

빛을 피해 흙을 파고드는 흰개미,

어두운 결사에도 불구하고 두 몸은 희디희다


현상되지 않을 필름처럼 끝내 지상으로 떠오르지 않는

온몸이 뿌리로만 이루어진

꽃조차 숨은 뿌리인

                                「땅 속의 꽃」


  그 때까지는 ‘땅 속의 꽃’으로 남아있을 나희덕의 시를 내가 ‘흰개미’가 되는 그 때에 다시 만날 수 있겠지! 그렇게 나희덕의 시는 내게 또 다가올 것이다. 나희덕과의 기나긴 인연의 줄 굵게 잡고 놓지 않기만 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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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7-05 2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멜기님, 오늘 보내주신 책 두권 잘 받았습니다. 넘 감사하고 기쁩니다.
즐겁게 독서할게요. 제 서재에 페이퍼로도 간단히 올렸어요. 괜찮죠?
그러고보니 나희덕의 시집 한 권 사야지 하면서 미루고 있었는데, 이 시집
제가 좀 바구니로 담아갑니다.^^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창비시선 156
함민복 지음 / 창비 / 199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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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지금 이 시간은 무척 피곤하다. 아니 점점 피곤해왔고, 이제는 조금의 여력이 남아 있을 것같지 않은 지금이다. 왜 그렇냐고? 물으신다면, 내 사생활의 일부, 일부이면서도 어쩌면 대부분의 전체를 대표하는, 그 일부를 조금 공개해 보자.

  내가 일하는 곳은, 우리나라 고등교육 기관인 '대학'이라는 공간이다. 그 '대학'은 이미 오래전부터 철저하게 주5일제를 실시해왔고, 빨간 날이면 다 노니, 오늘이 월요일이어서, 난 엊그제와 어제, 양일은 쉬임없이, 쉬었다. 이틀을 그렇게 쉬다보면, 생활패턴은 급격한 변화를 일으킨다. 이러한 변화는 일요일을 맞는 오후에 극에 달해, 다음날 월요일을 준비하기 위해서 또다른 급격함을 겪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월요일에도 존재했다.

  월요일부터는, 즉 오늘부터는 내가 국방의 의무를 아직 다 마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예비군 훈련이 시작되는 날인 것이다. 그렇다. 오늘 나는 예비군 훈련을 받고 왔다. 그러니, 오늘은 아침 일찍 일어나야 했고, 평소보다 더 빠른 아침이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 내 생활패턴의 더욱 급격한 변화를 주기 위하여 일요일을 꼬박 샌 것이다. 그것은 조력자가 있어, 월드컵을 관전하다보니, 날 새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날을 꼴딱 새고, 예비군 훈련, 그 하는 것 없는 훈련에도 힘이 들고, 또한 6월의 이른 여름 땡볕에 마구 쪼이어 나는 지금 녹초와도 같다. 아니 녹초이다. 그런데 내가 아직 이 녹초를 풀어내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또한 월드컵 때문이다. 일본과 호주의 관심가는 경기가 지금 시작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지금 무얼 하는가? 옆에는 텔레비전을 틀어 놓고, 지금 나는, 오늘 내가 읽은 시집 한 권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왜 지금 이때에 시집인가? 그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오늘 내내 땡볕에 쪼이면서도 그 허술한 예비군 훈련 사이사이, 이 사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사이가 길었고 많았다. 그 사이사이 나는 가지고 간 이 시집을 단숨에 읽어 내었던 것이다.

  단숨에 읽힌다는 것은, 쉽다는 말보다는 본질적으로 어떤 매력, 감동, 재미가 있었다는 뜻이어야 한다. 쉽다는 의미는 그와 함께 따라오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 아무리 쉬워도 재미없는 것은 단숨에 읽힐 수 있어도 결코 그렇게 읽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팽겨치기, 바로 그것에 쉽다는 말은 더욱 잘 어울린다.

  그래서, 나는 이 녹초와도 같은 정신과 육체를 가지고 이 시집을 말하려고 한다. 함민복. <<햄버거에 관한 명상>>이란 시집을 머릿속에 떠올리면서 나는 이 시집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를 읽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 시집은 <<햄버거에 관한 명상>> 이전에 나온 것이다. 1996년에 나온 것이니, 내가 대학에 오기 전, 내가 고1 이었을 시절에 나왔다. 이 책이 나올 때, 시인은 강화에 있었다. 나도 그때는 강화에 있었다. 같은 공간적 근접 거리에 있었으면서도, 나는 나의 경계에 꽃이 피는 지는 몰랐으니, 이것도 좀더 관심가는 대목이었을 것이다.

  이 시집은 첫 시는 <선천성 그리움>이다. 총 4부로 이루어진 이 시집의 제1부 또한 '선천성 그리움'이다. 그것은 그만큼 이 시가 갖는 중요성을 나타낸다고 하겠다. 시집을 사 보라는 의미에서 맛보기로 이 한 편 올려보자.

    사람 그리워 당신을 품에 안았더니

    당신의 심장은 나의 오른쪽 가슴에서 뛰고

    끝내 심장을 포갤 수 없는

    우리 선천성 그리움이여

    하늘과 땅 사이를

    날아오르는 새떼여

    내리치는 번개여    <선천성 그리움>

  이 시는 7개의 행이 아닌, 7개의 연으로 이뤄져 있다. 그만큼 한 행으로 된 한 연, 즉 한 줄의 시구들이 갖는, 아니 거기에 시인이 부여하는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 한 줄 한 줄을 더많은 여유, 혹은 되새김을 가지고 읽으라는 시인의 권고, 혹은 명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 우리 독자는 그 시인의 명령에 복종하는 자세를 가져보자. 결코 그것은 수동적 읽기가 아닐 것이다.

  사람을 그리워 하는 것은 특정 사람에 대한 사람이나 모든 이들에 대한, 만인에 대한 사랑이나, 매 한가지 즉, 사랑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품에 아는 행위는 그 사랑에 대한 자동적 결과이자, 행위이다. 그 행위는 하지만, 일치될 수 없는, '심장을 포갤 수 없는' 사랑이다. 그렇다고 그것은 사랑을 멸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사랑을 서로가 서로에 대한 사랑이며, 그 사랑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합이상의 것이 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의 사랑이 모든 것이 동일하여, 더 나아질 어떤 것도, 사랑의 극대화도 이루어 질 수 없는 것이 되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 사랑하는 사람들은, '선청성 그리움'을 갖게된다. '선천성 그리움' 아 이것은 사랑을 사랑답게 한다.

  이 시집의 큰 줄기는 '사랑'이다. 그 사랑은 '그리움'과 동의어다. 슬픔도 있고, 아픔도, 외로움도, 고독도 있다. 그렇지만 종국에는 사랑, 그 사랑에 대한 그리움, 그 그리움이 명징하게 새겨놓는 추억, 추억에 대한 아픔 이면의 행복도 있다.

  '사랑'이라고 하는 거대한 폭의 부피는 무엇들로 채워질 수 있을까? 그 큰 부분이 '어머니'다. 어머니에 대한 시편들이 무척 많은 비중을 차지하며 이 시집을 아름답게 한다. 거기에 아버지도 포함된다. 시인 자신에 대한 사랑도 있다. 자신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이 냉소적이고 자조적이라 하더라도, 냉소적 자조적 낙망이 아니라, 그것은 희망을 위한 냉소이며 자조이다.

  정말 정신이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빨리, 하려고 했던 말을 내뱉어내고 끝내야 겠다. 이 시집에는 뛰어난 언어의 표현을 찾아보기 힘들다. 다소 상투적이지 않나 할 정도로, 표현과 비유와 시적 언어 사용의 측면에서 이 시집은 다른 시인들의 것들에 비해 빼어날 것이 전혀 없다. 하지만, 이 시집이 그러한 부족을 충분히 채우고도 남을 것은, 시인의 깨달음, 통찰력, 그리고 그것을 되새기게 하는 시적 전략들이라고 생각된다.

  우리 시가 얼마나 많이 어머니를 얘기했던가? 어머니의 사랑을 노래했던가? 자신의 고뇌와 격정을 노래했던가? 하지만, 여기에는 그 많은 어머니, 사랑, 고뇌와 슬픔을 함민복만의 깨달음으로 아하! 무릎을 치며 읽게 만드는 명석함이 있다.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그 경계에 피는 것은 '사랑'이다. 그것이 곧 이 시집에서 내가 얻은 결론이다. 가시가 있는 꽃이 피어도, 향기가 없는 꽃이 피어도, 색이 흐릿한 꽃이 피어도, 내 경계, 내 삶의 경계에는 꽃, 꽃 한 송이 피어난다는 사실, 나는 그런 꽃, 사랑이 피어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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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 - MBC 느낌표 선정도서
신경림 지음 / 우리교육 / 199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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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해 전 MBC의 ‘느낌표’라는 교양 프로그램에서 “책을 읽읍시다.”라는 코너가 전국적으로 큰 인기를 얻은 적이 있다. 이 프로그램은 우리나라의 독서 현실이 그야말로 참담함을 인식하고 독서의 생활화를 위해 만들어진 어쩌면 획기적이면서도, 또 한 면으로는 우리를 부끄럽게도 하는 것이었다. 어쨌든 전국적으로 독서 열풍을 일으키고, 부진한 도서 판매고를 기하급수적으로 늘리는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공을 세운 것임에 틀림없다.

 

  전 국민이 ‘느낌표’에서 선정하는 책을 따라 읽었다. 나도 그 중의 하나로 열심히 그 책들을 읽었던 기억이 있다. 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비롯해, 《괭이부리말 아이들》, 《백범일지》, 《삼국유사》등등, 많은 좋은 책들을 만날 수 있었고, 아니 그 책들을 읽을 수 있도록 압박하는 좋은 역할을 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동안 많이 미뤄두었던 책들임에 분명했고, 어지간해서는 읽어내기 따분한 책들도 열심히 읽을 수 있도록 해 준 고마운 프로그램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내가 이 프로그램을 기억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이 책《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때문이다. 이 책이 나온 것은 1998년이었다. 하지만 그리 일반인에게는 알려지지 않았고, 잠들어 있던 이 책이 크게 인기를 얻게 된 것은 전적으로 ‘느낌표’에 선정된 탓이었다. 내가 ‘느낌표’에서 선정해준 책들을 열심히 읽던 와중에 조금씩 지루해가고 있을 즈음, 이 책은 나에게 진정으로 책 읽는 기쁨을 느끼게 해 주었다. ‘느낌표’가 내게 준 값진 선물이었던 것이다.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는 제목 그대로 시인들의 자취와 흔적을 찾아, 그 안에서 시인을 어떤 생각과 느낌을 가지고 시를 쓰게 되었는지를 기행문 형식으로 재미있게 풀어가고 있는 책이다. 이것은 시에 대한 다른 책들과는 다르게 시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시인들이 나고 자란 고향, 그들이 살았던 집, 그들이 걸었던 길들을, 저자 자신이 직접 체험하고 걸으면서, 시인이 느꼈던 느낌 그대로를 또한 새롭게 느껴보고, 그러함으로써 그들이 남긴 시들을 살펴본다. 이것은 하나의 외재적 비평 방법으로, 우리에게 시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면서도, 따분하고 지루하기만 한 시 읽기에 재미와 기쁨을 더해주는 효과를 주고 있다.


  “나는 이 기행을 하면서 많은 것들을 배웠다. 목월의 향토색 짙은 밝은 색깔의 이미지가 무엇에 연유하는가도 알았으며, 영랑의 맑은 노래가 어떻게 생성되었는가도 알았다. 또 어떤 시인의 어느 부분이 과장되고 어느 부분이 축소되었는가도 확인됐다. 이 동안에 어느 면 닫혀 있던 내 시관도 많이 수정되었다. 나는 시를 새롭게 공부한다는 느낌으로 이 기행을 하는 동안 늘 들떠 있었다. 시를 이렇게 재미있게 읽을 수도 있구나, 새삼스럽게 감탄하기도 했다.”


  저자의 말처럼, 나도 또한 이 책을 읽으면서 ‘들떠 있’지 않을 수 없었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가 어떻게 태어나는지 곰곰이 물어 본다면, 이 책이 우리에게 주는 큰 효용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시는 단순히 시인의 머릿속에서 태어나는 것이 분명 아니다. 자기가 보았던 풍경, 사물, 그리고 자신이 체험한 현실에서 시가 태어나는 것은 자명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애써 외면해 버리고, 시를 놓고 거기에 쓰인 언어 기호 자체만을 풀어내려고 하고, 분석해 내려 하고, 이해하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시 읽기는 제대로 된 읽기가 아니다. 아니 시는 “마음이 흘러간 바”를 적은 것이기에 그 마음을 느껴야 하건만, 이러한 시 읽기는 우리에게 ‘감상’을 하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정상적인(?) 학교교육을 받은 우리들에게는 여전히 답답하고 지루하기만 한 시 읽기가 아닐 수 없기에, 이 책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를 만나는 순간 나는 그동안 내가 시를 잘못 알았다는 것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저자가 하나하나 찾아떠난 그 길을 나도 어느새 걸어가고 있으며, 주옥같은 시들이 어떻게 태어났고, 그간 내 머릿속에서 좀체 설명되지 않던 구절들이 물흐르듯이 흘러 어느새 내 마음속에서 강한 감동으로 흘러내렸다.

 

  이 책을 만나고 나는 꼭 한 번 다시 읽고, 신경림 시인이 찾아 갔던 그 길을 나 또한 걸으리라는 결심을 굳게 했다. 하지만 책장 깊이 박아두고 있다가, 근래 다시 읽게 되었다. 아직 그 길을 가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지금도 처음 읽던 그 느낌 그대로 내 마음은 여전히 요동친다. 이 책 한 권을 들고 시인들의 자취를 찾아 떠나고 싶은 마음이 지금도 가슴 속에서 요동을 치다 못해 나를 힘들게 한다.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가 ‘느낌표’를 통해 재간되고 나서 얼마 후 아쉬웠던 내 마음을 달래기라도 하는 듯,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2권이 나왔다. 내가 그것을 바로 구해 읽은 것은 말할 필요가 없으리라. 1권은 이미 작고한 시인들을, 2권은 생존 시인들을 다루고 있다. 작고한 시인들의 흔적들을 찾아나서는 1권 못지않게 2권은 살아있는 시인들을 직접 만나 얘기하고, 때론 술 한 잔 주고받기까지 더욱 재미와 감동을 주고 있다.

 

  이 2권의 책은 시 해설서가 아니다. 하지만 그 역할을 충분히 해내고 있다. 아니 어떤 시 해설서보다 더욱 충실한 해설서, 해설다운 해설서라고 할 만하다. 이 책은 기행문이다. 기행문의 박진감과 현장감, 그리고 살아있는 시를 만나게 해주는 귀한 책이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정작 저자 자신, 즉 ‘신경림을 찾아서’는 없다는 것이 한 가지 아쉬움으로 남는다.


    다들 잠이 든 한밤중이면

    몸 비틀어 바위에서 빠져나와

    차디찬 강물에

    손을 담가보기도 하고

    뻘겋게 머리가 까뭉개져 앓는 소리를 내는 앞산을 보며

    천년 긴 세월을 되씹기도 한다.


    빼앗기지 않으려고 논틀밭틀에

    깊드리에 흘린 이들의 피는 아직 선명한데,

    성큼성큼 주천 장터로 들어서서 보면

    짓눌리고 밟히는 삶 속에서도

    사람들은 숨가쁘게 사랑을 하고

    들뜬 기쁨에 소리 지르고

    뒤엉켜 깊은 잠에 빠져 있다.


    참으려도 절로 웃음이 나와

    애들처럼 병신걸음 곰배팔이 걸음으로 돌아보는 새벽

    별들은 점잖지 못하다

    하늘에 들어가 숨고

    숨 헐떡이며 바위에 서둘러 들어가 끼어앉은 내 얼굴에서는

    장난스러운 웃음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신경림, 〈주천강 가의 마애불―주천에서〉전문


  이 시를 제대로 느끼기 위해서는 ‘주천강’에 가봐야 하지 않을까? 신경림 시인이 본 그 모습을 나는 가서 보아야 하겠다. 그래서 그 감동 그 느낌 그대로를 느껴보고, 별을 보고, 하늘을 보고, ‘병신걸음, 곰배팔이 걸음’도 걸어보고, 춤도 추어보고, 그렇게 ‘장난스러운 웃음’도 웃어보면 정말 좋지 않을까?

 

  그래, 나도 한 번 그 길을 걸어가 보자. 꼭 결심을 실행해 보리라. 어쩌면 나도 ‘시인을 찾아서’ 한 권 쯤 낼 수 있지 않겠는가? 상상만 해도 즐거운 결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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