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기 도자사 - 분원의 설치를 전후한 조선 전기 도자의 역사
김영원 지음 / 일조각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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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전기의 도자사를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책 중 하나다.

청자에서 분청사기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청자인지 분청사기인지 뚜렷하지 않은 기물들을 보게 되고 또 그 가마터 조사를 통한 파편과 기물들을 통해 조금은 접근해갈 수 있었다. 흔히 왜 분청사기라는 도자기가 생산되었고 언제쯤 왜 쇠퇴의 길을 걷다가 언제쯤 소멸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정확한 정보가 없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조선 전기 도자사의 흐름에 대한 설명을 통해 이런 궁금증을 조금은 풀어주고 있다.

 

  또 나아가 백자의 사용이 언제부터인지 연질백자와 경질백자의 사용이 언제쯤인지....상감백자의 연질백자의 예와 경질백자의 예에 대한 풍부한 자료가 아쉬웠다. 세조 연간 이후 조선에서 청화백자를 자체 생산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토청의 존재와 그것이 사용된 기물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이 없는 부분도 아직 아쉽다. 토청이 사용된 예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두껑 달린 백자청화매조문 호를 많이 드는데... 그 외에도 다른 기물을 볼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 비록 자기편이라도 토청의 색감이나 그림 형태를 통해 그 시대를 조금은 들여다볼 수 있으리라 기대했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많은 노력을 들여 정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도자사에서 크게 벗어난 것은 없었다고 생각하며 그래서 새로운 것이라 할만한 것도 없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정품을 눈에 익히면서 내가 가진 기물들에 대해 다시 보고 생각해보게 된 기회는 되었다. 아직 청자인지 분청사기인지 구분이 뚜렷하지 않고(그렇다고 깨어서 태토를 살펴볼 수도 없고, 조형과 상감기법과 청자빛깔로 보면 14세기 말의 청자인지 15세기 초의 분청사기인지 아직 미결상태다. 그래서 앞으로 더욱 공부를 해야 하는 숙제를 갖게 된다.

 

  조형과 사용된 청화안료, 회화의 양식과 쓰인 유약의 상태 등 많은 것을 다시 살펴보아야 하리라.  굽을 처리한 방식도 내화토 빚음인지 태토 빚음인지 가는 모래 받침인지 굵은 모래받침인지 갑발을 씌워 구워낸 것인지에 대해 보는 안목이 더욱 필요하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실물을 보는 기회를 더욱 자주 만들어야 하겠다고 생각한다.

 

  책 한 권으로 또 다른 곳으로 갈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준다면 그 한 권의 역할을 다 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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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두 사람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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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여기에 나오는 단편 소설들을 매우 어둡다. 세월호 사건으로부터 촛불집회가 일어나기까지의 상황을 예감으로써 그려나간다면 이와 비슷한 어두운 색조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세상은 모르고 오직 아빠와 딸 사이에서만 흐르는 그 무거움과 불편함의 이야기에서 '아이를 찾습니다'에서는 절망을 극복하게 해 줄 아이라는 존재가 더욱 심연의 어둠속으로 삶을 추락시키는 존재가 된다. 어쩌면 이 책은 희망을 찾아볼 수 없는 사회에 대한 반영이 아닐까 생각된다.

 

  오래된 사랑의 원점은 그 두 사람이 사랑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허무함을 극복하려 허무함을 한 스푼 더 떠서 그 위에 얹는 행위의 반복밖에 되지 않는 만남의 의미를 보여주는 듯하다. 늘 허무의 원점으로 회귀하는 각자의 삶은 결국 존재의 소멸이라는 것에서 끝이 난다. 과연 쳇바퀴처럼 도는 이 인생에서 빠져나가는 방법은 무엇일까? 때론 선문답같기도 하고 때론 디스토피아의 깨고 싶은 꿈같기도 하다. 아무리 노력해도 나아질 것이 없는 삶, 아무리 희망을 가지려해도 사회의 뿌리부터 썩어버린 그래서 은폐와 왜곡과 거짓만이 통하는 사회에서 사는 삶이란 것이 이런 것일까?

 

  멀쩡하게 죄없는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는데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현실.. 그것은 마치 '신의 장난'처럼 끝없는 좌절과 절망만을 비참하게 느끼게 하는 상황과도 같다. 어떤 몸부림을 쳐도 그것에 영향을 주지 못하고 결과도 바꿀 수 없는 깊은 절망감....우리는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인간의 내면에서 또 나아가 사회와 국가와 세상에서 어떤 희망을 갖고 살아갈 수 있을까?

 

  이 지독한 절망 속에서 어쩌면 우리 스스로에게 '희망'을 묻고 싶은 것은 아닐까?

 

 이 소설의 희망은 소설 밖의 한 문장이다.

 


 "이십년을 함께 해온 아내 은수에게. 사랑과 경의를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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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 전형필 - 한국의 미를 지킨 대수장가 간송의 삶과 우리 문화재 수집 이야기
이충렬 지음 / 김영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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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충일 그를 만난 것은 다행이었다. 문대통령은 연평도 사건, 베트남전 참전용사, 항일독립투사 모두 현충인으로 대접했다. 나라를 위해 개인을 희생했던 모든 영령들을 위로하는 오늘, 일제에 의해 수탈되던 조선의 혼과 얼을 되찾기 위해 일생을 바쳤던 간송 선생님을 만나게 된 것은 의미있는 하루였다.

 

  젊은 나이에 오랜 선대의 부를 쌓아온 재산을 물려받은 그가 일본 동경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부의 뜻에 따라 조선의 판사가 되어 독립군을 위해 살려는 삶을 방황했다. 무엇보다 그의 마음을 끌지 못하는 삶이었으나 아버지의 뜻이라 거스르지 못하는 사이의 방황이었다. 그 때 위창 오세창 선생님을 만나 그 삶의 방향을 정하게 된다.

 

  두 사람의 정신이 만나는 데에는 인연이 있다. 위창 선생의 부친은 역매 오경석님이고 이는 추사의 제자였다. 첫만남에 역매 인장이 찍힌 '고성각자'탁본을 들고간 간송은 위창선생님과 특별한 인연을 갖게 되고 고서화 골동품을 수집하는 대수장가로서의 발을 내딛게 된다. 그러나 원래 그런 품성을 타고 났으니 그 귀한 문화재들이 제 발로 간송 선생님에게 굴러 들어왔고 간송 선생님은 선대로 쌓아온 재산을 그 대가로 다 지불해야 했다.

 

  오늘날 우리 나라 최고의 국보와 보물들이 간송 선생님으로 인해 보존되고 사람들 사이에 그 아름다움을 펼쳐 나갔으니 이는 선생님의 뜻과 의지가 컸던 탓이다. 영국인 개스비로부터 일괄처분받은 명품 청자 20점을 당시 서울 아파트값 400채값을 지불하고 사오는 배포와 그 이면의 문화재 사랑의 의지는 겸재 화첩, 혜원 화첩, 단원 그림 등 수많은 백자와 청자, 불상과 그림, 훈민정음 해례본까지 간송 미술관의 수장으로 오래 보존되게하는 인연을 만들었다.

 

  남북전쟁을 거치면서도 크게 흩어지지 않고 귀한 물건들이 보관될 수 있었던 데에는 간송 전형필 선생님의 뜻이 확고했기 때문이다. 아직 사설 미술관으로 가보지 못한 곳이 여기다. 매년 정기개관을 하는데 직업에 매인지라 선뜻 날짜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올해는 여기에 꼭 들러보고 싶다. 뒤늦게 선생님의 전기를 만난 탓이기도 하지만 현충일 정말 뜻있는 삶 하나를 나는 만났기 때문이다. 나의 고미술품 수집에 많은 교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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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데우스 - 미래의 역사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김명주 옮김 / 김영사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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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피엔스를 읽으면서 인류역사를 이렇게 시원하게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유발하라리는 천재역사학자임에 틀림없다. 훨씬 육체적 능력이 뛰어나고 뇌의 용량이 컸던 네안데르탈인을 멸종시키고 지구를 접수한 점령자 '사피엔스'의 특징은 네트워크 능력이었다. 그러나 개체가 네트워크할 수 있는 능력은 기껏해야 수백명이다. 그래서 사피엔스의 발전은 그 한계가 있다. 문제는 보다 복잡하고 수많은 네트워크의 공간이 인류역사의 발전으로 탄생된 것이다. 인터넷이란 공간은 그 중 하나다.

 

  1998년 '딥 블루'는 인간 체스를 접수했다. 2015년과 2017년의 '알파고'는 한국의 이세돌과 중국의 커제에게 압승함으로써 인간게임의 최고자리를 빼앗았다. 인간의 두뇌가 처리할 수 있는 데이터의 한계를 훌쩍 넘어 상상할 수 없는 처리용량과 속도를 가진 인공지능이 속속들이 출현하고 있다. 의식으로부터 분리된 이러한 뛰어난 지능들이 상상할 수 없는 데이터들을 다루고 세상을 정리해나갈 것이고 이러한 과학기술발전과 만물인터넷 그리고 뇌과학과 바이오생명공학은 인류가 기반해왔던 20세기의 가치들을 폐기처분할런지도 모른다.

 

  인간이 고대에는 맹목적인 신이라는 것을 만들어내고 그 허구에 의해 세상을 지배했다면 근대에 와서 인간의 정체성에 눈뜨기 시작했고 자본주의시대에는 기업과 로고가 그 신의 허구를 대신했다. 그러나 민주주의와 인본주의의 가치는 인류가 놓치지 못하는 보루로서 남아있는 듯 했다. 하라리는 이러한 인간정체성의 최후의 보루가 21세기 4차 산업혁명에 의해 폐기될런지도 모른다고 한다. 인간의 자유의지라고 하는 것은 과연 완벽한가? 내가 판단하는 미감과 선택지와 가치는 과연 바른 것인가? 그것을 판단하는 기준과 근거인 데이터량은 21세기 인류가 만들어낸 알고리즘의 데이터량을 절대 따라갈 수 없을 것이고 그와 더불어 데이터가 제시해주는 내 생명과 건강상태에 따른 처방을 아무런 거부감없이 수용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슈퍼컴퓨터에 의해 처리된 정보는 나를 나보다 더 잘 알것이고 나보다 더 합리적인 판단과 선택을 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오늘날 우리가 기반하고 있는 중요한 가치들은 어쩌면 보다 차원높은 지능을 가진 알고리즘에 의해 폐기처분될런지도 모른다.

 

  왜 사람들은 대도시로 몰리는가? 도시의 크기가 커질수록 많은 예술가들과 지식인들과 시인들과 경제인들과 정치인들이 몰린다. 데이터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보다 서로 다른 많은 사람들의 상호작용을 낳게 되고 그 과정을 통해 보다 큰 창조성과 새로움을 낳게 될 것이다. 그래서 작은 마을보다 큰 대도시가 보다 역동적이고 발전의 속도가 빠르게 될 것이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그 네트워크와 상호작용이 보다 쉽고 빠르고 잘 이루어지는 쪽으로 발전해왔고 또 앞으로 그렇게 발전하게 될 것이다.

 

  그런 면에서는 아직도 그 초기의 부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자연과학적 지식의 일부과 사회과학에 적용되고 심리학의 일부가 경제학에서 행태경제학으로 섞이고 문학이 과학적으로 근거있음이 증명되고 등.... 그러나 이러한 일들이 네트워크와 인터넷 알고리즘에 의해 보다 획기적인 속도와 양으로 상호작용하게 된다면 앞으로 수십년 사이에 우리들이 지금 전혀 예상하지 못할 정도로 인류의 모습과 세상의 모습을 바꾸어놓을 것이 분명하다. 그 변화의 흐름 속에서 유발하라리는 우리 인류가 어떤 선택지를 할 것인지 묻고 있다. '멋진 신세계'처럼 거대한 디스토피아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그 큰 기술적 문제를 다루는 쪽으로 인류의 진화가 진행되어간다면 앞으로의 세상은 우리에게 더욱 큰 능력의 진화를 이루어내는 길이 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호모 데우스는 그래서 인류가 신과 만나면 이루어질 일들에 대해 미리 생각해보게 되는 책이다. 인류가 호모로 남게 된다면 더욱 진화된 세상에서 네안데르탈인의 운명처럼 사멸하고 폐기될 것이고 데우스로 되어 인류진화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면 새로운 행성의 미래에 살아가게 될 것이고 그 시대는 지금까지의 삶과는 완전히 다른 삶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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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나는 장자다
왕멍 지음, 허유영 옮김 / 들녘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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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곤붕의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너무나도 큰 상상력의 존재인가? 아니면 마음의 웅혼함인가? 아니면 삶의 깨달음인가? 아마 그는 수천년을 자란 나무처럼 어디에도 쓸모없는 인간이 되어 어느 곳에도 쓸모없는 글을 이렇게 써내었는지도 모른다. 썩은 고목과 식은 재와 같이.....그는 처세하는 세상의 기술과는 상관없는 크고 깊은 도를 표현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왠지 그의 글을 따라가다 보면 불교의 선사상과 같은 진정한 공의 세계를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노자의 도덕경같이 엄숙하지 않다. 아주 문학적이다. 오히려 아주 큰 상상력으로 씌여진 글 같다. 소요유의 글이 제물론으로도 이어지고 양생주, 인간세, 덕충부와 대종사 그리고 웅제왕에게로 이어진다. 모든 만물을 동등하게 대할 수 있는 경지야 말로 권력과 명예와 돈이 태풍처럼 돌아가는 정치권의 소용돌이의 중심에서도 자신을 지키며 왕을 보좌할 수 있는 곳에 처할 수 있는 길이다. 겉은 부드러운 원같되 안은 자신의 진리를 파지하는 각을 유지하는 것처럼.....

 

  세상에 큰 깨달음을 가진 사람이 사는 방식이 있다면 세상을 떠나 소요하는 삶도 있지만 세상 속에 살아가면서도 자신을 숨겨 도에 계합해 살아가는 진인도 있다. 장자는 소도축꾼의 예를 들어 그 칼의 씀을 비유해 설명하기도 하고 아무렇게나 자라 어떤 용도로도 사용할 수 없는 나무에 비유하기도 한다. 때로는 발뒤꿈치가 없이 사는 사람에 비유하기도 하고 세상 속에 살면서도 세상의 눈을 피해 사는 미치광이의 삶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삶의 진리란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자신의 마음을 텅 비게 해서 깨끗한 거울처럼 우주의 진리를 마주하고 살 수 있을까? 왕멍님의 훌륭한 해설도 감히 내가 미치지 못하는 인연이지만 장자의 웅혼함을 학문적으로 설명하는 부분에 대한 내 느낌이 그와 다른 것은 인문한적이고 문학적 해석이 아닌 삶에 대한 깊은 깨달음같은 무언가가 아쉬운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어찌하면 한 방울의 물이라도 허물없이 마셔서 소화해낼 수 있을까?  낙동강의 물을 다 마시고 맛을 알게 되는 그 '맛'이 내 마음 속의 무언가를 건드린다.

 

  삶의 작은 행동 하나도 진실로 허물없이 하게 되는 진리의 삶...그는 어쩌면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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