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송 전형필 - 한국의 미를 지킨 대수장가 간송의 삶과 우리 문화재 수집 이야기
이충렬 지음 / 김영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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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충일 그를 만난 것은 다행이었다. 문대통령은 연평도 사건, 베트남전 참전용사, 항일독립투사 모두 현충인으로 대접했다. 나라를 위해 개인을 희생했던 모든 영령들을 위로하는 오늘, 일제에 의해 수탈되던 조선의 혼과 얼을 되찾기 위해 일생을 바쳤던 간송 선생님을 만나게 된 것은 의미있는 하루였다.

 

  젊은 나이에 오랜 선대의 부를 쌓아온 재산을 물려받은 그가 일본 동경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부의 뜻에 따라 조선의 판사가 되어 독립군을 위해 살려는 삶을 방황했다. 무엇보다 그의 마음을 끌지 못하는 삶이었으나 아버지의 뜻이라 거스르지 못하는 사이의 방황이었다. 그 때 위창 오세창 선생님을 만나 그 삶의 방향을 정하게 된다.

 

  두 사람의 정신이 만나는 데에는 인연이 있다. 위창 선생의 부친은 역매 오경석님이고 이는 추사의 제자였다. 첫만남에 역매 인장이 찍힌 '고성각자'탁본을 들고간 간송은 위창선생님과 특별한 인연을 갖게 되고 고서화 골동품을 수집하는 대수장가로서의 발을 내딛게 된다. 그러나 원래 그런 품성을 타고 났으니 그 귀한 문화재들이 제 발로 간송 선생님에게 굴러 들어왔고 간송 선생님은 선대로 쌓아온 재산을 그 대가로 다 지불해야 했다.

 

  오늘날 우리 나라 최고의 국보와 보물들이 간송 선생님으로 인해 보존되고 사람들 사이에 그 아름다움을 펼쳐 나갔으니 이는 선생님의 뜻과 의지가 컸던 탓이다. 영국인 개스비로부터 일괄처분받은 명품 청자 20점을 당시 서울 아파트값 400채값을 지불하고 사오는 배포와 그 이면의 문화재 사랑의 의지는 겸재 화첩, 혜원 화첩, 단원 그림 등 수많은 백자와 청자, 불상과 그림, 훈민정음 해례본까지 간송 미술관의 수장으로 오래 보존되게하는 인연을 만들었다.

 

  남북전쟁을 거치면서도 크게 흩어지지 않고 귀한 물건들이 보관될 수 있었던 데에는 간송 전형필 선생님의 뜻이 확고했기 때문이다. 아직 사설 미술관으로 가보지 못한 곳이 여기다. 매년 정기개관을 하는데 직업에 매인지라 선뜻 날짜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올해는 여기에 꼭 들러보고 싶다. 뒤늦게 선생님의 전기를 만난 탓이기도 하지만 현충일 정말 뜻있는 삶 하나를 나는 만났기 때문이다. 나의 고미술품 수집에 많은 교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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