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답게 산다는 것
안대회 지음 / 푸른역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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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四戒. 소동파


수레나 가마를 타는 것은 다리가 약해질 조짐이고

골방이나 다락방은 감기 걸리기 십상이다

어여쁜 여인은 건강을 해치는 도끼이고

맛난 음식은 창자를 썩게 하는 독약이다       p 52


선비답게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이야기하는 것인가? 나는 그 화두를 소동파의 절식에서부터 찾는다. 먹는 것과 예쁜 여자, 몸의 안락과 폐쇄적인 것을 경계하라는 4계는 늘 오늘날 우리들의 생활을 쫓아다니며 유혹하는 것들이다. 먹는 것으로부터 탐하는 마음이 생기고 여자로부터 진심이 생긴다. 몸의 안락과 폐쇄적인 생활에서 치심이 생기니 이것은 삶의 진정성으로 들어가는 입문의 과정이기도 했을 것이다. 다음으로 건너가 보자.


과부의 노래. 유몽인


칠십 먹은 늙은 과부

규방을 지키며 단아하게 사는데

사람들이 개가를 권하며

무궁화처럼 멋진 남자를 소개했네

여사(女史)의 시를 제법 외웠고

어진 여인들의 가르침을 배운 몸이

백발에 젊은 티를 낸다면

분가루가 부끄럽지 않겠소           p62-3


오랜 시절 세상으로부터 물러나 수절하며 스스로의 공부를 세워가는 때에 자신의 재주 있음을 세상에 드러내라는 사람들의 권유에 빠지지 않고 나이가 늙도록 평생 가꾸어 온 자신의 청정함을 지키느니만 못하다는 말씀이라. (인조반정을 맞아 광해군에 대한 충심을 바꾸지 않았던 그의 세간의 이야기와는 별도로..) 물론 나야 세상에 나아가 이름을 떨칠 만한 그릇도 못되거니와 세상의 변방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책이나 읽으며 사는 일에 만족하고 있다. 하지만 또한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 내 주변의 작은 일들에도 나를 세우지 않고 그저 주어진 일을 충실히 해가면서 일에 대상에 들러붙는 마음이 있다면 빨리 거두어서 나 스스로 떳떳해지고 세간의 욕을 먹는 일이 없다면 그것이 세상의 주인된 삶이 아닐까? ‘젊은 티’를 낼 필요가 없이 있는 그대로의 삶에 만족할 때을 ‘분가루’가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세상의 욕심으로부터 벗어난 사람들은 일종의 바보들이었는데 그런 그들도 삶의 진정성에 대한 욕심만큼은 누구 못지 않았다.


讀書有感. 이하곤(1677-1724) 호는 澹軒


가난한 집에 가진 거라곤 책 다섯 수레뿐

그것을 제외하면 남길 물건이 전혀 없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서책을 못 떠나니

전생에는 틀림없이 좀벌레였나 보다


서치였던 그가 모은 만권의 장서는 모두 양질의 책으로 유명했다. “눈썹 하나 머리털 하나까지 닮지 않은 것이 없어야 인물을 제대로 그렸다고 할 수 있다.”는 사실적 화론을 펼친 회화이론가이기도 했던 그는 책 거간꾼만 보면 옷을 벗어서라도 책을 구입할 정도로 애서가였다. 그렇게 모은 책이 만 권을 넘어 만권루라고 불리웠다. 그는 부친이 좌의정과 이조판서를 지내 벼슬길이 보장되었지만 충북 진천의 초평에 있는 별서에 완위각이란 서재를 짓고 평생을 책을 읽었다. 이곳에 윤유, 윤순, 최창대, 심육, 김창흡 등의 학자와 예술가가 방문하여 책을 읽고 시문을 나누었다. 특히 이곳에는 중국책이 많아 새로운 정보와 지식을 교류하는 정보의 장이었다.


책을 뒤적이다. 이하곤


우리 집에는 무엇이 있나

서가에는 만 권 서책이 있네

맹물마시며 경서를 읊조리노니

이 맛을 정말 어디에 견줄까


맹물로 밥때를 넘겨야 했던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경서를 읊조리고 있는 마음의 풍요로움을 보여주는 이 글을 보며 때로는 서글픈 생각이 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정보와 가객 계섬과의 인연 또한 눈 앞을 떠나지 않는다.


한섬은 전주의 기생인데 황교 이판서가 그를 집으로 데려다가 가무를 가르쳐 온 나라에 명성이 자자했다. 한섬이 나이가 들어 제집으로 돌아간 지 한 해 남짓 지나 판서가 세상을 떴다. 한섬이 즉시 말을 달려 판서의 묘에 이르러 한 번 곡을 하고 술 한 잔을 따르고 술 한 잔 마시고 노래 한 곡을 불렀다. 다시 두 번째 곡을 하고 두 번째 잔을 따르고 두 번째 잔을 마시고 두 번째 노래를 불렀다. 이렇듯이 돌려서 하기를 하루 온종일 한 뒤 자리를 떴다.              (추채기이)


윗글에서 한섬이란 이름으로 나온 기생이 계섬이며 이판서는 이정보다. 이정보는 계섬을 직접 지도하며 유달리 사랑했다. 그러나 오로지 그 음악만을 사랑했을 뿐 사사로운 감정을 섞지 않았다고 하니 인품도 훌륭했다. 그만의 방식으로 절절하고 깊은 마음을 담아 스승을 보내는 계섬의 추모방식이 눈에 띈다. 이처럼 스승과 제자 사이의 깊은 인간적인 유대감은 보는 이로 하여금 깊은 감동을 자아낸다. 저자는 선비다운 삶의 외연을 넓혔다. 기생의 삶에서 이젠 천민으로 달려가 보자.


누운 채 청산을 사랑하느라

날마다 늦어서야 일어나노니

뜬구름도 흐르는 물도

시 안으로 다 들어오네

우스워라!

이 내 몸은 선골(仙骨)이 아니런가

뱃속 가득한 연하(煙霞)로는

배고픔을 못 고치네       홍세태(1653-1725)


조선 숙종 때의 천민 출신의 여항시인이다. 조선 후기에는 중인 이하의 평민과 천민들이 모여 시회를 여는 경우가 적지 않았고 이러한 부류의 문인을 여항문인이라 했다. 이 때부터 비로소 조선의 문학이 다양한 계층에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들에게는 벼슬로 나아갈 길이 애초에 막혔기 때문에 오로지 진실한 마음과 작품으로 자족하는 삶을 누리는 것만이 앞에 놓여진 길이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재능을 꽃피우지 못하는 여한이 남아 시 안으로 스며드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던가 보다. “배고픔을 못 고치네” 마음이 아프다.


한바탕 풍류는 해외까지 퍼졌지만

십년토록 이덕무와 대문을 마주했네

강산이 냉정하다 다들 말하는 것은

밤새 나눈 정담 장면 보지 못한 탓이지      -박제가-


역시 조선 후기의 벗들의 부러운 만남인 그들을 잊을 수 없다. 박지원,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강세황, 홍대용, 황윤석 등의 만남. 비록 서얼 출신으로 자신의 재능을 나라에서 쓰지는 못하였지만 그들 간의 만남만으로도 조선시대의 밤하늘을 아름답고 그 무엇보다 빛나게 수놓았던 별들의 만남이었을 것이다. 박제가가 이서구에게 보내는 회인시는 중국에까지 이름을 떨친 강산 이서구가 냉정한 사람으로 알려졌으나 사실은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들의 빛나는 우정을 생각건대 정말 “그대와 하룻밤 만나 나눈 이야기가 십년 동안 읽었던 책보다 낫네”하는 말을 생각게 한다.


우정이 나왔으니 우정에 관한 연암 선생의 글을 하나 더 보자.


공교롭고도 오묘하지요. 이다지도 인연이 딱 들어맞다니! 누가 그런 기회를 만들었을까요? 그대가 나보다 먼저 태어나지 않고, 내가 그대보다 늦게 태어나지 않아 한 세상을 살게 되었지요. 또 그대가 얼굴에 칼자국 내는 흉노족이 아니요, 내가 이마에 문신하는 남만 사람이 아니라 한나라에 같이 태어났지요. 그대가 남쪽에 살지 않고 내가 북쪽에 살지 않아 한마을에 같이 살고, 그대가 무인이 아니고 내가 농사꾼이 아니라 함께 선비가 되었지요. 이야말로 크나큰 인연이요 크나큰 만남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상대의 비위를 맞추는 말을 구차하게 해야 하거나, 억지로 상대의 행동을 똑같이 따라해야 한다면, 차라리 천 년 전 옛사람을 친구로 삼든가 일백 세대 뒤에 태어날 사람과 마음이 통하기를 기다리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벗과의 우연적인 만남을 이야기한다. 참다운 벗은 무엇인지 나에게 생각하게 한다. 상대의 비위를 맞추는 말이 아니요, 억지로 행동을 같이 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읽은 책을 나누고 지식을 나누고 취미를 나누는 친구들은 평범한 친구들이다. 같이 테니스를 치고 같이 축구를 하고 같이 등산을 하는 것도 그런 것이 아닌가? 하지만 나아가 그 행위 속에 삶의 중요한 가치를 나누고 진리를 구하는 마음을 나누어야 비로소 벗인 것이다. 그것이 빠진 바에야 차라리 천 년 전의 성인의 말씀을 읽는 것만 못하고 일백 세대 뒤의 성인의 마음과 교우하는 것만 못하다는 말씀으로 들린다. 천 년의 시간을 넘는 지혜의 말씀, 아니 억천만년의 시공간을 넘은 영원한 진리로 이끄는 만남과 정신의 교우가 없다면 그것은 칼자국과 문신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마지막으로 책읽는 자세에 대한 퇴계 선생의 교훈으로 넘어가보자.


제가 쓴 <도산기>와 <도산잡영>이 그대의 책상 위에까지 올라갔다고 하니 너무도 땀이 나고 송구스럽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본래 지어서는 안 되지요. 산에 사는 사람에게 아무 일이 없다 보니 그저 필묵으로 장난을 치며 즐긴 것뿐입니다. 글상자에 감춰두고 아이들에게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뜻을 같이 하는 벗 여럿이 멀리서 나를 찾아와 사흘 밤을 자고 갈 때 선물할 것이 없어 경계를 깨뜨리고 꺼내 보여주었습니다. 벗들이 가져가겠다고 조르기에 막지 못하고 퍼뜨리지나 말아달라고 간곡히 부탁했지요. 그런데 벗들이 내 말은 아랑곳하지 않고 남에게 보여주었나 봅니다. 아니면 그 글을 베낄 때 아이들이 베껴서 내보냈는지도 모릅니다. 남이 모르게 하려면 차라리 짓지 않는 게 낫다고 합니다. 이미 짓고서 다시 비밀에 부치는 짓은 옛사람이 비웃은 바인데 제가 이러한 경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퇴계 선생이 1563년 이중구에게 답한 편지 중에 있는 글을 200년 뒤 다산 선생이 충청도 청양의 금정찰방으로 좌천된 후 날마다 아침 일찍 일어나 퇴계의 편지를 읽고 독후감을 쓸 때 모아둔 것이다. 이 글에 대한 독후감도 읽어보자.


나는 평소에 큰 병통이 있다. 무릇 생각한 것이 있으면 바로 글로 지어내고, 지은 것이 있으면 남에게 보이지 않고는 못 배기는 버릇이다. 생각이 떠오르는 즉시 붓을 잡고 종이를 펴서 잠시도 머뭇거리지 않고 써내려가고, 글을 짓고 나서는 스스로 사랑하고 스스로 좋아한다. 문자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을 만나면 내 주장이 흠이 없는지 편벽된지 아니면 만난 사람이 가까운지 먼지를 미처 헤아리지 않고 급히 보여주려고 건넨다. 그러므로 남에게 한바탕 말하고 나면 뱃가죽 안과 상자 속에는 한 가지 물건도 남아 있는 것이 없다. 그로 인하여 정신과 기혈이 흩어지고 새어나가서 쌓이고 익어가는 맛이 전혀 없는 듯하다. 그리하고서야 어찌 성령을 함양하고 몸과 명예를 보전할 수 있겠는가.

요즈음 와서 점검해 보니, 모두가 경천(經淺) 두 글자가 빌미가 된 결과다. 이것은 덕을 숨기고 수양하는 공부에 크게 해로운 데 그치지 않는다. 비록 주장이 현란하고 글솜씨가 화려하다고 해도 차차로 천박하고 값싸져서 남에게 존중을 받지 못하게 된다. 지금 선생의 말씀을 읽고 보니 느끼는 바가 크다. 


다시 200여년이 넘은 오늘날 이 글을 읽는 내게도 깊은 감동을 주는 글이다. 200년의 세월을 넘은 그들의 교우가 지금의 나의 마음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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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3-02 0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간추려 소개하신 옛 선비들의 글이 향기롭습니다.

달팽이 2007-03-02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사님의 댓글에 마음이 향기로워지는군요.

짱꿀라 2007-03-02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책 저도 지금 갈등을 하고 있는 책인데 사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네요. 달팽이님의 서평을 읽어보면 괜찮은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지금도 판단이 안서네요.

달팽이 2007-03-02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덤으로 한 권 더 주잖아요. 그 책도 괜찮고요.
하긴 역사에 대해서는 폭넓고 깊이 아시는지라...
제가 뭐라고 말씀드리긴...

파란여우 2007-03-02 1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팽이님, 이러는 게 아닙니다. 마음잡고 환경공부좀 해볼려고 벼르는 사람에게
자꾸 이런 식으로 고전의 향기를 들이대면!
들이대면....아이, 고전은 내년에 계획하고 있단 말에요.
소동파의 아내 사랑을 기억하고 있기에 또 보관함으로
그러니까 순전히 동파 할배랑 달팽이님때문이얌...
추천은 안했어요. 살 때 땡스투 하려고(착한 파란여우^^)

달팽이 2007-03-02 2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우님 비내릴 것 같은 늦은 밤에 모두가 잠들어 고요한데
잠은 오지않고 펼쳐든 책에 마음을 빼앗겼어요.
그 흥을 시간이 늦어 다 옮기지 못했으나
행간의 의미 너머를 읽어내어 그 흥을 살려내시는
여우님 때문에 은근히 그대의 댓글이 기다려지기도 한다오..^^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조너선 사프란 포어 지음, 송은주 옮김 / 민음사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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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11 사건에 의해 세계무역기구 건물이 지상에서 사라진 지 6년 째가 되는 해다. 사람들 사이에서 이제 더이상 입에 오르지 않는 아팠던 역사의 상처를 말없이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아직 우리 주위에는 있다. 아물지 않은 상처로 늘 반복되는 같은 하루의 기억으로 괴로워하며 어제와 똑같은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그들에게 역사란 과거가 아니며 오늘이라는 현재로서 살아있다. 이 책은 9.11사건이 남겼던 역사적 흔적이 고스란히 한 아이의 가슴 속에서 살아있는 모습을 아이의 섬세한 감정과 생각들 그리고 아버지를 찾으려는 깊은 그리움과 두려움의 이야기로서 보여준다. 소통을 원하는 간절한 욕망과 단절된 세계와 바로 옆에 있지만 그 사이에 놓여진 벽 때문에 괴로워하는 한 아이의 성장기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을 사랑해주는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의 진정한 소통을 원한다. 그토록 가까이 존재하면서도 한번도 그 사람의 진정한 마음과 소통해본 적이 없는 삶은 아직 우리에게 남겨진 인간의 비극의 골자이며 무거운 과제이다.

  베트남 전이 일어났을 때 수많은 신문보도와 뉴스보도도 베트남 전에 대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진 못했다. 사람들의 마음 속 어딘가를 건드려야만 그들의 억눌렀던 감정을 분출시키고 그들이 마음 속에서 하고 싶었던 내면의 말들이 두려움과 공포를 걷어내고서 양심의 소리를 낼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런 비밀의 열쇠는 쉽게 찾아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한 사진기자에 의해 비로소 이루어졌다. 네이팜탄을 맞고서 절규하는 한 베트남 소녀의 울부짖음이 담긴 사진 한 장을 통해서였다. 그것을 통해 미국사회에서 반전여론이 거세게 몰아치게 되었고 그 폭풍과도 같은 양심의 소리는 세상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는 똑같은 한 점을 자극하여 같은 목소리를 지구상 곳곳에서 울려나오게 하였다. 이 책도 바로 그러하다. 미국의 세계지배구조라든지, 아랍과 이스라엘의 민족분쟁이라든지, 미국과 이라크의 대립이라든지 오사마 빈 라덴이라는 무거우면서도 역사적인 사건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으면서(때로는 그런 역사적 사건은 그와 동떨어진 개인의 삶에 아무런 침투도 하지 못할 때가 많다.) 그저 한 아이의 아버지를 추억하는 과정을 따라 솔직하고 감동적으로 써내려가면서 보여주는 그 상처를 보고 있으면 어쩔 수 없이 우리 마음의 작동기제 한 점이 꼼짝없이 눌러진 것처럼 테러와 전쟁의 비극과 그 씻을 수 없는 상처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세계무역기구 빌딩이 무너지는 그 순간 오스카의 아파트로 전화가 걸려온다. 오스카는 얼어붙은 채 전화를 받지 못한다. "너 거기 있니? 너 거기 있니? 너 거기 있니? 너 거기 있니? 너 거기 있니? 너 거기 있니? 너 거기 있니? 너 거기 있니? 너 거기 있니? 너 거기 있니? 너 거기 있니?"(열한번이나...)하는 아버지의 전화를 그는 절대로 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아이의 정신적인 상처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아버지를 잃은 상실감보다 그 아버지의 마지막 전화를 받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두려움이 바로 세상 사람들과의 소통을 단절시키는 삶의 시작을 만들어낸다. 대중교통수단에 대한 공포증이 생기고 고층 아파트의 윗층으로 올라가지 못하게 된다. 론이라는 아저씨를 사귀는 엄마와의 소통도 단절되고 그는 그저 아무것도 없는 자신의 가슴 속 황폐한 한 곳으로 갇힌다. 그 곳에서 그는 움직일 수도 움직일 의지도 잃게 된다. 그것은 이 세상으로부터 점점 멀어져가는 뉴욕의 여섯번 째 구가 되어버린다.

  이러한 그의 상처는 할아버지의 상처와 닮은 데가 있다. 드레스덴의 한 마을에서 자신의 사랑하는 여인이 아이를 가지게 된 것을 들은 다음 날 자신을 이루고 있던 모든 것을 그 도시에 무수하게 쏟아져내린 짧은 폭격으로 잃어버린다. 우리들의 삶은 늘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연약한 기반 위에 서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인가가 영속적으로 지속되기를 기대하는 것만큼 우리를 어리석게 만드는 것은 없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들 모두를 잃었고 자신의 육체의 일부를 잃었다. 하지만 그가 잃었던 가장 큰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과의 소통 자체를 잃어버렸다. 그는 단지 오른손에 '예'와 왼손의 '아니오'를 통해서만 세상과 소통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늙은 할아버지의 쭈굴쭈굴한 손에 적힌 두 글자는 오스카의 모습을 달리 보여주는 거울이다.

  아버지를 그 누구보다도 사랑했고 아버지와의 추억만이 자신의 삶 속으로 깊이 들어왔던 것이라고 믿고 있던 한 아이에게서 세상은 훌쩍 아버지를 앗아가버렸다. 그는 저 세상으로 갈라진 틈새에다 대고 자꾸만 아버지를 불러댔을 것이다. 순간 늘 그대로 있던 그의 모든 공간이 이젠 그저 껍질만 남은 채로 그에게 주어졌다. 그에게 있어 오로지 의미있었던 것은 아버지를 기억하는 것이었고 그 아버지에게 깊이 다가가지 못했던, 그래서 하지못했던 숙제를 마치는 것이었으리라. 파란 병 속에 든 열쇠의 자물쇠를 찾아가는 과정은 바로 그 과정이었고 그는 그것을 통해서 아버지에게 다가가려고 하였다. 또한 그것은 진정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오스카의 이런 생각과 일상 그리고 감정들을 대할 때마다 그 작고 다른 아이들과 조금밖에 다르지 않은 생각들과 행동에서 전쟁과 테러의 흔적을 읽어낼 수 있고 눈물을 흘릴 수 있다. 다시는 이런 전쟁이 되풀이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 조그마하고 손톱만큼 이상한 행동과 세밀하면서도 감수성깊은 심리 묘사. 그것이 이 소설이 가진 매력이다.

  그 인류의 비극이 한 가정의 분위기를 어떻게 구성해가고 있는지 오스카와 엄마와의 관계, 그 누구보다도 오스카에게 절대적인 사랑을 바친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할머니(아들의 죽음이후 자신의 삶의 연속이 오로지 손자에게 존재한다고 생각하는지..) 그리고 외부세계와의 소통을 잃고 말을 잃어버린 할아버지의 손바닥을 통해 볼 수 있다. 그 손바닥의 주인공이 아들에게 보내지 못한 그리고 썼던 글씨도 없는 무수한 편지들...이 가족을 지배하는 기묘한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이해되지 못하는 이들의 행동 속에 깊은 영혼의 상처와 절망이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책이 주는 유일한 낙관이 있다면 상처받은 영혼을 가진 가족구성원들 간의 동병상련적인 배려와 보살핌이다. 한 아이의 영혼을 치유하기 위한 길었던 여정에 엄마도 론 아저씨도 그의 친구들도 할머니도 블랙할아버지도 그리고 쪼글한 두 손 위에 '예'와 '아니오'를 쓴 채 말을 잃어버린 할아버지도 꼭 필요한 존재였다. 즉 오스카 하나의 존재를 이 세상에 있게 하기 위해 그 모든 것이 다 필요했던 것이다.(드레스덴의 폭격도 세계무역기구의 테러도...) 할아버지와 함께 아버지의 시체도 없는 관을 파헤치던 날 할아버지와 오스카는 비로소 부재한 아버지를 통해 자신들의 인생의 지워지지 않는 상처의 일부를 묻을 수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 부분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 어떤지 모르지만 나는 마음에 든다. 우리는 무사할 것이다. 실제로 그의 마음은 사건이 일어나기 전으로 거슬러간다. 아버지가 세계무역기구 건물의 바닥에서 다시 떨어졌던 장소로 올라가고 건물에서 거꾸로 스텝을 밟으며 나온다. 집으로 들어와서는 나이프와 포크가 입에서 음식을 꺼집어내고 면도기가 아버지의 수염을 갖다붙인다. 아버지와 함께 했던 침대에서 뉴욕의 여섯번째 구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오스카는 아버지에 대한 정신적 상처를 씻어내었음을 보여준다. 어떤 역사적 상처와 비극 앞에서도 우리들의 영혼이 상처받지 않는 부분이 존재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메세지는 아니었을까? 티베트의 비극에서는 달라이라마가 있었고, 캄보디아에선 마하 고사난다가 있었고 베트남엔 틱낫한 선사가 있어 전쟁의 상흔과 상처를 보듬어준다. 보이지 않는 곳의 영혼의 상처를 감싸안고 어루만져주는 많은 부처님들. 그들은 우리들의 곁에 우주라는 이름으로 늘 존재한다. 문득 마음이 환해진다.

  이렇게 일상적이고 조그만 이야기들을 통해 전쟁과 인류의 비극이라는 무거운 주제에 깊이 천착할 수 있다니...소설가 김연수의 다음 말이 이해가 된다. "지난 5년간 나온 소설 중 가장 아름답다." 그리고 존 업다이크란 사람이 누군지 몰라도 이 책에 대한 그의 소감은 마음에 든다. "드높은 독창성과 감정의 집요한 묘사." 어떤 찬사도 아깝지 않다. 그러니 사람들이여, 이 책을 읽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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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2-28 2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명하고 감동적인 리뷰에 보관함으로 직행입니다.^^

달팽이 2007-03-01 0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은 제쳐두고 제 마음은 전달되었나요?^^

짱꿀라 2007-03-04 0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관함에 잠자고 있는 책인데 역시 달팽이님의 서재실에서 다시 리뷰를 읽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명쾌한 리뷰 명리뷰 잘 읽고 갑니다.
 
신 기생뎐
이현수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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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현수 작가는 2005년의 어느 4월 기생 부용의 산소를 찾았다. "봉분의 잔디가 하도 푸르러 눈이 아팠다. 나는 묏등에 가만히 손을 갖다대었다. 그대가 잃어버린 신발을 찾아주겠노라고, 그대들이 하고 싶은 말을 놓치지 않고 쓰겠노라고, 상상이 아닌 짐작으로."  부용의 봉분 앞에서 그녀의 삶을 생각하던 작가는 어쩌면 조선시대에 한많은 상처를 안고 살다간 기생의 환생은 아니었을까? 그녀는 이 소설을 소재가 작가를 선택한 것이라고 했다. "기생들은 불현듯 나를 불렀고, 나는 그들이 불러주는 말을 받아적었다." 조선시대 기녀들의 영혼이 그녀의 이야기 속에서 되살아난다. 그 기녀들이 자신의 삶 속 깊이 아로새겨진 영혼의 상처와 못다한 이야기들이 현대 여성의 펜을 통해 하소연되고 있다. 그 영혼들은 다만 자신들의 애처로웠던 삶의 이야기를 누군가가 공감하고 연민의 눈물을 한 방울 떨구면 영혼의 위안을 받을거라 생각하였는지도 모른다.

  다시 수백년의 세월이 흐른 뒤 한 여인이 꿈을 꾼다. 자욱하게 깔린 안개 속으로 정처없이 걸음을 옮기다가 멀리서 부옇게 불을 밝히고 있는 등을 발견할런지도 모른다. 반가운 마음에 걸음을 옮기자 안개는 걷히면서 부용각의 선명한 기와 아래로 분주하게 오가는 기생들을 만날런지도 모른다. 말없이 오가는 분주한 발걸음 사이로 바람맞아 소슬하게 쓸리는 댓잎의 소리가 뜰 안을 가득 메우고 한바탕의 꿈같은 햇살은 묘한 색채의 마술로 공간을 더욱 신비롭게 만들런지도 모른다. 우리 옛 조상들의 삶 중 하나였던 기생들의 삶, 그 마지막 자리에 이 부용각이 있었고, 그 곳에서 마지막 기생으로서의 삶을 살다가 미스 민의 아릿다운 환영이 눈 앞을 스치고 간다. 그녀는 바로 나다. 나는 잠에서 깬다. 그리고 나는 전생에 마지막 기생으로서의 삶을 기억해낸다. 그리고 그 삶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묻는다. 그 답이 하나의 소설로 이어진다.

  처음 듣는 작가 이름. (문학에 약한 탓이지만) 하지만 그녀가 뿜어내는 이야기들은 마치 실제로 눈 앞에 부용각과 그 주위 배경과 구조와 위치 그리고 살아나는 인격들로 인해 문득 현실적인 화면이 되어 가득 찬다. 타박네의 앙칼지면서도 매서운 고함소리가 등골을 시리게 하고 오마담의 소리는 갈빗뼈를 서걱서걱 긁어댄다. 교자상 가득히 채워진 맛난 음식들 사이로 남녀의 허무한 욕망은 춤을 추고 그 욕망을 또 다른 욕망이 집어삼키고 그 욕망은 또 다른 욕망이 집어삼키면서 그 욕망의 허무함을 알게 된다. 그렇게 평생을 제대로 된 기생노릇에 걸었던 오마담은 욕망 없이 모든 남자들을 받아들이게 된다. 정사의 절정에 다다랐을 때 정면으로 바라본 그녀의 얼굴은 표정이 없었던 것이다. 남자에게서 받은 재산은 그것이 필요한 남자에게 아무런 거리낌없이 돌려지고 자신의 몸 속으로 들어왔던 수많은 남자들이 오고 가도 자신의 마음이 그에게 따라가지 않고서 왔을 때 남김없이 사랑하는 그녀는 이미 기생생활로서 인생을 꿰고 목에 걸고 다녔던 것이리라.

  한 남자가 와서 사랑이 되고 그 사랑이 남긴 상처는 어디로 갔을까? 기생에게 있어 그것을 무로 돌려보내는 작업이 바로 '소리'이자 '춤'이다. 미스 민의 춤사위는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기와 그 삶의 상처를 씻어내는 춤이자 남자와의 잠자리의 욕망과 집착을 털어내는 춤이 된다. 춤은 하나의 예술을 통해 승화된다. 자신이 춤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오마담의 '소리'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가 닿으려했던 스승의 소리는 바로 자신의 인생을 완성시키는 닿을 수 없는 절대의 소리였지 싶다. 모든 남자를 받아주면서도 박기사만은 받아줄 수 없었던 것은 바로 그 가져서는 안되는 욕망과 집착에 자신이 빠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라고 믿고 싶다.(박기사의 순수하고 지극한 사랑에 대한 죄책감이라기보다는..)

  집시 여성에게는 불문율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돈을 받고 몸을 주는 것은 상관없으나 '마음'을 주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욕망과 사랑의 집착을 완전히 버리고 바람처럼 걸림없는 삶을 지향했던 그들의 마음을 볼 때 능히 그럴만한 일이다. 우리 나라의 기생들을 생각하며 문득 집시 여성의 삶이 떠올랐던 것은 왜일까? 미스민과 오마담의 삶은 여러겹의 지층처럼 쌓인 한과 상처로 얼룩진 것이었을까? 아닐 것이다. 비록 사회적으로 신분적으로 천시받고 자신의 재능을 펴지 못하는 기생이었지만 바로 그 제약적인 삶을 통해서도 삶의 깨달음을 추구했던 그리하여 삶의 의미를 얻었던 영혼이 아니었을까?

  그 삶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 옛날의 기생들이 신분제적 한계 속에서 그 흔하디 흔한 한 남자의 마음을 평생 얻는 것이 이룰 수 없는 한이 되어 마음의 긴장감을 만들어내었다면 이제는 그 긴장감을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 그러한 한계를 만들어내어야 하는 점은 대비된다. 그래서 이미 평등위주의 사회에서 기생의 마지막 삶을 이어가기 위해 미스 민은 스스로 마음 속의 한계와 긴장을 놓치지 않는다. 그것이 기생의 삶을 지향하는 한 여자의 팽팽한 마음의 현을 고르는 방법이었으리라.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친구를 스스로 버리고 화초를 올리는 살풀이 춤에서 그는 끊어질 듯 끊어질 듯 마음의 현줄을 팽팽하게 만들어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 삶의 모습이야 뒤바뀌어도 그 이면에 정신적인 삶이야 어찌 다르다 할 수 있겠는가?

  집시 음악을 켠다. 스산하게 이는 바람 속에서 슬픈 듯 슬픈 듯 울리는 선율 너머로 그 슬픔을 묘하게도 아름다움으로 바꾸어내는 영혼의 연금술이 있다. 그 슬픔이 슬픔인 듯 하면서도 선율에 마음이 실리는 순간 그것은 그저 내 가슴 온통 젖게 하는 선율이 되고 슬픔은 사라지고 선율만 남는다. 이현수 작가는 이 책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우리 앞에서 사라져가는 기생의 삶이 그 애처로움이 그 슬픔이 점점 어둠 속에 파묻혀가며 남기는 여운 뒤에 이들의 삶 속에서도 다른 어느 계층 못지 않게 추구해왔던 삶의 의미는 있지 않았을까? 하고 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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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2-12 1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생들의 가얏고 소리와 허공에 그려내는 살풀이의 춤사위, 그리고 집시음악...
이 모두가 조화를 이루어내는 멋진 글입니다. 집시의 춤은 우리네 정서와는
반대쪽에 있지만 왠지 그들의 외면적인 정열 뒤에도 스산함이 서려있는 게 아닌지.
이 책, 언어적 감각이 노랫가락처럼 살아있어 군데군데 소리 내어 읽었지요..

달팽이 2007-02-12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랬군요. 드팀전님 블로그 들렀다 구해본 책입니다.
이현수작가의 글솜씨가 보통이 아니더군요...
앞으로 더욱 기대가 됩니다.

파란여우 2007-02-13 1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런 책 읽으면 여성의 상대인 남성이 가여워져요.
모성(자궁에 집착하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함몰된채 살아가는 남성성을 가엽다고 하면
화를 내시려나요. 뭐 부성성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박근혜같은 여자도 있지만.
기생이 불러주는 말을 적었다는 책을 그냥그저 바라만 봤는데 달팽이님의 리뷰는
어째 자꾸 지름질을 재촉하십니다.

달팽이 2007-02-13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뭐 저도 가여운 남자입니다.
파란여우님같은 멋진 여자 앞에만 서면...

짱꿀라 2007-02-26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작품을 대하면서 뭐라 할까? 참 고민이 된 작품이었습니다. 워낙 작품성이 있어서 그런가 저는 읽는 멍한 상태에서 읽었습니다. 뭐 어렵기도 했고요. 리뷰 잘 읽고 갑니다.
 
처음처럼 - 신영복 서화 에세이
신영복 글.그림, 이승혁.장지숙 엮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신영복 선생님의 다음 책이라 내심 조그만 기대를 가졌던 것은 사실이다. 내 대학 시절,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16여년 전에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란 책을 들고서 이렇게 살 수 있다면 감옥이란 곳에서도 살 수 있겠구나 싶었기 때문이다. 그 젊은 시절의 배움욕구로 가득찼던 나에게 선생님은 세상과 단절된 곳에서도 깊은 공부를 할 수 있구나 하는 희망의 메세지였기 때문이다. 감옥에서 그 물질적인 결핍과 환경의 결핍 속에서 피워낸 정신 세계는 그 모든 결핍을 풍요로 만들어내는 연금술적인 언어로서 승화되었고 그것을 지켜보는 한 청년은 바른 삶의 모델을 또 한 분 만난 것에 무척이나 기뻐했었다. 아직 삶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방황하는 길목에서 자신의 양심에 따라서 용기있게 살아갔던 하지만 사회가 수용하지 못해서 자신만의 정신세계를 펼쳐갔던 꿋꿋하고도 큰 그릇을 가진 선생님의 품이 부러웠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이 책을 받는 순간 '아, 이제 신영복이란 이름도 상품화되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든 것은...멋있게 만들어진 까만색 상자 속에 든 책 한 권과 노트를 펼치며 약간의 씁쓸함의 찌꺼기들을 떨쳐버리지 못한 것은 아직 내 마음 속의 때가 많이 낀 탓일까? 사실 '강의'라는 책을 접하면서도 나는 이런 생각을 조금은 했었다. 선생님께서 고전에 대한 책을 내셨구나 하는 기대 한편으로 컨텐츠는 과연 어떨까? 하는 궁금함도 컸다. 물론 강의는 선생님의 명성과 더불어 많은 일반인들이 동양고전에 입문하도록 도와준 고마운 책이라는 생각에는 아직도 변함이 없다. 하지만 '관계론'으로 재해석해낸 선생님의 개성적인 해석은 대부분의 동양고전의 학문적 해석보다는 내용이 간소하고 그 마음으로 증험해내어 자신의 체험으로 써내려간 사람들의 이야기와 비교하면 다소 가볍다는 느낌이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선생님의 고전 공부가 계속되어 정말 선생님의 삶에 대한 깨달음과 지혜의 글로서 다시 만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없지 않았다.

  선생님의 글과 그림을 ,잘 디자인되고 인쇄된 종이와 글을 빼버리고, 읽으면 그 선생님의 초심이 더욱 잘 읽힐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왠일인지 상품화와 대중화의 색깔이 불현듯 인식되어 책읽기를 방해한다. 대부분의 글은 이미 예전에 읽었던 글이다. 물론 선생님께서 이 책을 스스로 내지 않으려했다가 주위의 권유에 못이겨서 내면서 60여편의 글을 새로 첨가하였다고 한다. 물론 주어진 책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는 나의 잘못이 99%다. 하지만 그 아쉬운 1%의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앞으로 더욱 선생님에게 거는 기대가 크기 때문이다. 다시 한 편 한 편의 글과 그림을 본다. 옆의 글들은 밀어두고 글과 그림을 쳐다보고 있으면(이왕이면 색깔도 흑백으로 가정한다) 선생님의 그 불합리한 사회구조 속에 형을 살 때 그 모든 것을 수용해내며 마음으로 피워내는 꽃같은 마음을 읽어낼 수 있다.

  마음을 비워내고 또 비워내서 단순해지고 투명해진 마음의 파동을 따라서 느껴본다. 제목처럼 '처음처럼'은 초심이라고 흔히 말해지듯 아무 마음의 상념없이 오로지 '모르는 마음'으로 대상과 사건과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그 마음에 하나의 뜻을 품었다면 그 품은 뜻 하나 밖에 달리 아무런 마음도 없는 상태이다. 그러니 오롯하고 온전한 마음이 담겨진 상태인 것이다. 지금, 선생님에게는 바라보는 사람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또 그 사람들의 마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마음의 공간도 있어야 하고 또 감옥 생활에 비해 해야 할 사회적 활동도 많다. 따라서 선생님께서 초심을 생각한다는 것은 지금 생활 속에서 "감옥" 하나를 스스로 만들어내어야 하는 과정이 필요하리라는 생각이다.

  불필요한 말이 많게 되어버렸다. 사실은 그 감옥을 내가 가지고 싶은 것이다. 처음처럼이란 마음가짐도 내가 가지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존경하는 선생님께 투사한다. 모쪼록 선생님의 처음과 같은 글들을 아니 내면적으로는 더욱 깊어진 글들을 다시 대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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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gos678 2007-02-10 1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생님이 책 출간을 망설였던 이유가 바로 님과 같은 마음 때문이었겠지요. 이 책이 상업적인 기획상품이라는 데는 저도 동의합니다. 하지만, 전 그 분의 진심을 믿어요.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쉽고 편하게 그 분의 글을 읽는 계기가 된다면 그것도 나쁘진 않겠단 생각도 들구요. 다만 좀 더 비상업적인 출판사를 통해 그 분의 글을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단 소망은 있습니다.

달팽이 2007-02-10 1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공감합니다. 로고스님
만나서 반갑습니다.
훌륭한 작가는 책을 계속내면서 자신의 인생의 성찰을 더욱 키워가야만 합니다.
아니면 자신의 독자들의 인식이 그 작품에만 정체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는 사람일수록 더욱 그러해야 한다는 것이 저의 소견입니다.
그냥 일반적인 작가라면 그 사람에게 싫증나면 안 읽으면 되지만..
신영복 선생님은 그런 작가랑 또 다른 분이잖아요...

글샘 2007-02-10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저 책에는 점수를 후하게 주지 못할 것 같긴 합니다. 보관함에 넣어 두지도 않았습니다만... 신영복 스탈이 아닌 사람들을 겨냥해서라면, 필요한 작업같아 보이기도 해요.^^

혜덕화 2007-02-11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관함에 담아두었는데, 한 번 망설이게 되네요.

달팽이 2007-02-11 1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마 받아들이기에 따라서 필요하겠지요..글샘님. 하여튼 마음은 넓으셔서...
제가 괜히 혜덕화님의 맑은 마음을 어지럽힌 것은 아닌지...

프레이야 2007-02-11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전 아직 읽지 못했지만 신영복 선생뿐만 아니라 누구든 '처음처럼'을 지켜가기란 쉽지 않겠지요. 사람이 상품화 되어 울겨먹기 대상이 되는 것, 씁쓸하고 쓸쓸한
그림입니다. 그래도 누군가에게로 향하는 첫사랑의 순정만큼은 간직하시려는 님,
맑습니다.

달팽이 2007-02-11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경님/첫마음의 기억이랍니다. 그것이 집착이 되어선 안되는데...
님의 마음을 고맙게 받습니다.

짱꿀라 2007-02-26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신영복 선생님의 글을 힘이 있나 봅니다. 이분의 글을 대할 때면 존경심이 절로 나오니 말이죠. 잘 읽고 갑니다. 잘 지내고 계시죠. 출장관계로 잘 들어오지 못하다가 오늘 들어오게 되었네요. 행복한 하루 되세요.

달팽이 2007-02-26 1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오사카로 가신다고 했었죠. 님의 서재에서 본 듯 하군요.
앞으로 좋은 자료 기대합니다.산타님.
 
천 개의 공감 - 김형경 심리 치유 에세이
김형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06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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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나 자신의 내면에 어린 아기가 웅크리고 있다. 때로는 분노에 가득찬, 때로는 좌절감으로 녹아버린, 때로는 수치심과 부끄러움으로 보이지않을 만큼 작아져버린 아이 하나. 어쩌면 이 모든 심리적 약점을 모두 갖춘 아이가 아직 우리들 가슴 한 켠에서 울부짖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아이를 내팽개친 채 우리는 밖으로 향하는 마음의 고삐를 쥐지 못하고서 우주 천지를 다니며 소동을 일으킨다. 우리가 지나온 곳마다 폐허다. 상처투성이이다. 그 아이는 부정적인 양분을 먹고 자라는 괴물이다. 이 괴물의 마음을 어떻게 치유하는가가 우리들의 인간관계맺기에 있어서의 열쇠가 된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이 아이에 대해 바로 쳐다보기를 주저한다. 두려워한다. 아니 회피하고 싶어한다. 그런 이유로 그 아이는 여전히 방치된 상태로 남겨져 있다.

  김형경씨의 치유의 첫단계는 바로 이런 자신을 '직면하기'이다. 그동안 꺼려했던 사소한 일 하나가 마음에서 눈덩이처럼 부풀어 나의 우주를 오염시키는 경험을 사람들은 누구나 한번쯤 경험한다. 그러나 그 눈앞을 가득 메운 문제가 사실은 그것을 제대로 눈 앞에 가져와 다정하게 쳐다만 보아도 해결되는 경우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에 끼인 작은 티 하나가 세상을 왜곡되게 만들듯 우리는 그것을 제대로 직면할 용기를 갖지 못한다. 작가 스스로 이야기하듯 자신도 이런 힘든 과정을 거쳤고 그 시작을 하는 데 가장 많은 시간과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이미 '직면하기'가 되면 문제의 반은 해결된 것이고 그 문제에 대해 어느 정도 낙관해도 좋은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다음 헤르만 헤세의 말은 이런 이야기를 뒷받침해준다. "만일 당신이 누군가를 미워한다면, 당신은 그 사람 안에서 당신의 일부인 그 어떤 점을 발견하고 미워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일부가 아닌 것은 아무것도 우리를 괴롭힐 수 없다." 사실 자기 알기가 바로 되면 나머지는 불필요한 부분이다. 그래서 작가는 이 장을 제일 처음 썼을 것이다.

  가족관계, 성과 사랑, 관계 맺기는 사실 그 영역이 독자적으로 구분되는 것은 아니지만 편의상 사례를 중심으로 그렇게 구분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렇게 드러난 문제의 대부분의 원인은 유아기 때의 가족 내에서의 부모와 자식 간의 억압기제와 뒤틀린 욕망구조와 관련된다고 한다. 자신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스펀지같이 세상을 흡수하고 형성할 때 ,절대자의 위치에 있는 부모의 마음 상태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처럼 보인다. 그 문제행동이 성인이 된 지금에 있어서도 드러나고 있다는 점도 공감이 간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모든 문제행동의 원인을 유아기때 형성된 심리적인 문제로 환원시키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은 것들도 있다. 작가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500여권이 넘는 많은 심리학 책들을 읽고 정리해내었고 그것을 사람들의 경험을 분석함으로써 많은 사례적인 검토를 거쳐서 이야기한다. 자신을 알고자했던 그 치열했던 노력이 자신의 심리를 깊이 이해하게 했고 그 깊은 내면에서 나오는 말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진단에서 많은 공감이 가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또 다른 위대한 정신을 드러내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지금 이 순간'에 깨어 있으면 우리가 과거에 자아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고 자아를 초월할 때에 비로소 온전한 삶을 살 수 있다고 한 것도 고려해야만 한다.

  심리치료는 현대생활의 관계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상당히 많은 도움이 될 것임을 인정한다. 그리고 자신을 들여다보는 디딤돌의 역할도 충분히 해내리라는 것도 인정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수많은 이론을 갖다붙여서 현실을 설명하는 것보다 자신의 마음을 직접 들여다보고 알아가는 체험이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주는 힘이 된다. 타인의 설명은 비록 한 순간의 이해와 해결을 가져올런지는 몰라도 결국은 나의 문제를 타인의 설명을 빌어서 넘기는 것에 불과하다는 단정을 감히 한다. 물론 그 타인의 말과 설명이 자신의 삶을 더욱 잘 이해시켜주고 자신 스스로를 바라보게 도움이 됨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타인의 설명으로서가아니라 자신 스스로의 체험으로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자신의 문제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자신을 이해하고 바로 보아서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학문을 넘어서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심리치료가 가진 한계는 두더지 뿅망치처럼 당장 올라온 두더지의 머리를 방망이로 두드림으로써 그 구멍의 문제는 해결할 수 있을지라도 또 다른 구멍에서 올라오는 두더지의 머리를 순간 순간 힘껏 두드려야 하는 문제가 생긴다는 점이다.

  작가의 책을 '사랑을 선택하는 기준'이라는 책부터 거의 다 보아왔다. 그의 삶과 공부가 나에게도 많은 가르침을 주고 있고 생각할 단서를 제공하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작가와 같은 자기보기를 제대로 해낸다면 성격과 인격의 안정성 속에서 타인과 더불어 사는 문제를 지혜롭게 해결할 수는 있을 것이라 공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삶은 단지 문제행동을 교정하는 것으로 의미가 한정지워지지는 않는다. 그녀가 말하듯이 삶의 성숙을 향한 방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심리학과 종교적 영역에 대한 인식의 가능성을 열어두었으리라고 생각한다. 비록 내 인식이야 작가의 능력에 한참 따라가지 못하지만 그래도 이 책을 덮으며 작가가 열어두었던 심리학의 한계 영역에(경계가 가물가물한) 눈길이 더 가는 것을 어찌할 수 없다.

  나는 나이고 너는 너이고 우리는 마음이 만들어낸 경계인가? 나 속의 마음의 문제를 해결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나는 나이자 너이고 우리다라고 말한다. 나와 너의 구별이 없고 나와 우리의 경계가 없다. 그러면 문제는 바로 나 속에 갖추어져 있는 그것을 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공감'은 이미 우리가 갖추고 있는 타인의 마음이다. 나 아닌 타인의 마음..그런데 원래부터 우리는 쭈욱 '공감'이었던 것이다. 아름다운 말 공감 그 자체였다고... 하나의 공감 속에 이미 천의 만의 공감이 다 갖추어져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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