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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기생뎐
이현수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9월
평점 :
이 현수 작가는 2005년의 어느 4월 기생 부용의 산소를 찾았다. "봉분의 잔디가 하도 푸르러 눈이 아팠다. 나는 묏등에 가만히 손을 갖다대었다. 그대가 잃어버린 신발을 찾아주겠노라고, 그대들이 하고 싶은 말을 놓치지 않고 쓰겠노라고, 상상이 아닌 짐작으로." 부용의 봉분 앞에서 그녀의 삶을 생각하던 작가는 어쩌면 조선시대에 한많은 상처를 안고 살다간 기생의 환생은 아니었을까? 그녀는 이 소설을 소재가 작가를 선택한 것이라고 했다. "기생들은 불현듯 나를 불렀고, 나는 그들이 불러주는 말을 받아적었다." 조선시대 기녀들의 영혼이 그녀의 이야기 속에서 되살아난다. 그 기녀들이 자신의 삶 속 깊이 아로새겨진 영혼의 상처와 못다한 이야기들이 현대 여성의 펜을 통해 하소연되고 있다. 그 영혼들은 다만 자신들의 애처로웠던 삶의 이야기를 누군가가 공감하고 연민의 눈물을 한 방울 떨구면 영혼의 위안을 받을거라 생각하였는지도 모른다.
다시 수백년의 세월이 흐른 뒤 한 여인이 꿈을 꾼다. 자욱하게 깔린 안개 속으로 정처없이 걸음을 옮기다가 멀리서 부옇게 불을 밝히고 있는 등을 발견할런지도 모른다. 반가운 마음에 걸음을 옮기자 안개는 걷히면서 부용각의 선명한 기와 아래로 분주하게 오가는 기생들을 만날런지도 모른다. 말없이 오가는 분주한 발걸음 사이로 바람맞아 소슬하게 쓸리는 댓잎의 소리가 뜰 안을 가득 메우고 한바탕의 꿈같은 햇살은 묘한 색채의 마술로 공간을 더욱 신비롭게 만들런지도 모른다. 우리 옛 조상들의 삶 중 하나였던 기생들의 삶, 그 마지막 자리에 이 부용각이 있었고, 그 곳에서 마지막 기생으로서의 삶을 살다가 미스 민의 아릿다운 환영이 눈 앞을 스치고 간다. 그녀는 바로 나다. 나는 잠에서 깬다. 그리고 나는 전생에 마지막 기생으로서의 삶을 기억해낸다. 그리고 그 삶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묻는다. 그 답이 하나의 소설로 이어진다.
처음 듣는 작가 이름. (문학에 약한 탓이지만) 하지만 그녀가 뿜어내는 이야기들은 마치 실제로 눈 앞에 부용각과 그 주위 배경과 구조와 위치 그리고 살아나는 인격들로 인해 문득 현실적인 화면이 되어 가득 찬다. 타박네의 앙칼지면서도 매서운 고함소리가 등골을 시리게 하고 오마담의 소리는 갈빗뼈를 서걱서걱 긁어댄다. 교자상 가득히 채워진 맛난 음식들 사이로 남녀의 허무한 욕망은 춤을 추고 그 욕망을 또 다른 욕망이 집어삼키고 그 욕망은 또 다른 욕망이 집어삼키면서 그 욕망의 허무함을 알게 된다. 그렇게 평생을 제대로 된 기생노릇에 걸었던 오마담은 욕망 없이 모든 남자들을 받아들이게 된다. 정사의 절정에 다다랐을 때 정면으로 바라본 그녀의 얼굴은 표정이 없었던 것이다. 남자에게서 받은 재산은 그것이 필요한 남자에게 아무런 거리낌없이 돌려지고 자신의 몸 속으로 들어왔던 수많은 남자들이 오고 가도 자신의 마음이 그에게 따라가지 않고서 왔을 때 남김없이 사랑하는 그녀는 이미 기생생활로서 인생을 꿰고 목에 걸고 다녔던 것이리라.
한 남자가 와서 사랑이 되고 그 사랑이 남긴 상처는 어디로 갔을까? 기생에게 있어 그것을 무로 돌려보내는 작업이 바로 '소리'이자 '춤'이다. 미스 민의 춤사위는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기와 그 삶의 상처를 씻어내는 춤이자 남자와의 잠자리의 욕망과 집착을 털어내는 춤이 된다. 춤은 하나의 예술을 통해 승화된다. 자신이 춤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오마담의 '소리'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가 닿으려했던 스승의 소리는 바로 자신의 인생을 완성시키는 닿을 수 없는 절대의 소리였지 싶다. 모든 남자를 받아주면서도 박기사만은 받아줄 수 없었던 것은 바로 그 가져서는 안되는 욕망과 집착에 자신이 빠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라고 믿고 싶다.(박기사의 순수하고 지극한 사랑에 대한 죄책감이라기보다는..)
집시 여성에게는 불문율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돈을 받고 몸을 주는 것은 상관없으나 '마음'을 주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욕망과 사랑의 집착을 완전히 버리고 바람처럼 걸림없는 삶을 지향했던 그들의 마음을 볼 때 능히 그럴만한 일이다. 우리 나라의 기생들을 생각하며 문득 집시 여성의 삶이 떠올랐던 것은 왜일까? 미스민과 오마담의 삶은 여러겹의 지층처럼 쌓인 한과 상처로 얼룩진 것이었을까? 아닐 것이다. 비록 사회적으로 신분적으로 천시받고 자신의 재능을 펴지 못하는 기생이었지만 바로 그 제약적인 삶을 통해서도 삶의 깨달음을 추구했던 그리하여 삶의 의미를 얻었던 영혼이 아니었을까?
그 삶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 옛날의 기생들이 신분제적 한계 속에서 그 흔하디 흔한 한 남자의 마음을 평생 얻는 것이 이룰 수 없는 한이 되어 마음의 긴장감을 만들어내었다면 이제는 그 긴장감을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 그러한 한계를 만들어내어야 하는 점은 대비된다. 그래서 이미 평등위주의 사회에서 기생의 마지막 삶을 이어가기 위해 미스 민은 스스로 마음 속의 한계와 긴장을 놓치지 않는다. 그것이 기생의 삶을 지향하는 한 여자의 팽팽한 마음의 현을 고르는 방법이었으리라.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친구를 스스로 버리고 화초를 올리는 살풀이 춤에서 그는 끊어질 듯 끊어질 듯 마음의 현줄을 팽팽하게 만들어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 삶의 모습이야 뒤바뀌어도 그 이면에 정신적인 삶이야 어찌 다르다 할 수 있겠는가?
집시 음악을 켠다. 스산하게 이는 바람 속에서 슬픈 듯 슬픈 듯 울리는 선율 너머로 그 슬픔을 묘하게도 아름다움으로 바꾸어내는 영혼의 연금술이 있다. 그 슬픔이 슬픔인 듯 하면서도 선율에 마음이 실리는 순간 그것은 그저 내 가슴 온통 젖게 하는 선율이 되고 슬픔은 사라지고 선율만 남는다. 이현수 작가는 이 책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우리 앞에서 사라져가는 기생의 삶이 그 애처로움이 그 슬픔이 점점 어둠 속에 파묻혀가며 남기는 여운 뒤에 이들의 삶 속에서도 다른 어느 계층 못지 않게 추구해왔던 삶의 의미는 있지 않았을까? 하고 묻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