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개의 공감 - 김형경 심리 치유 에세이
김형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06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누구나 자신의 내면에 어린 아기가 웅크리고 있다. 때로는 분노에 가득찬, 때로는 좌절감으로 녹아버린, 때로는 수치심과 부끄러움으로 보이지않을 만큼 작아져버린 아이 하나. 어쩌면 이 모든 심리적 약점을 모두 갖춘 아이가 아직 우리들 가슴 한 켠에서 울부짖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아이를 내팽개친 채 우리는 밖으로 향하는 마음의 고삐를 쥐지 못하고서 우주 천지를 다니며 소동을 일으킨다. 우리가 지나온 곳마다 폐허다. 상처투성이이다. 그 아이는 부정적인 양분을 먹고 자라는 괴물이다. 이 괴물의 마음을 어떻게 치유하는가가 우리들의 인간관계맺기에 있어서의 열쇠가 된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이 아이에 대해 바로 쳐다보기를 주저한다. 두려워한다. 아니 회피하고 싶어한다. 그런 이유로 그 아이는 여전히 방치된 상태로 남겨져 있다.

  김형경씨의 치유의 첫단계는 바로 이런 자신을 '직면하기'이다. 그동안 꺼려했던 사소한 일 하나가 마음에서 눈덩이처럼 부풀어 나의 우주를 오염시키는 경험을 사람들은 누구나 한번쯤 경험한다. 그러나 그 눈앞을 가득 메운 문제가 사실은 그것을 제대로 눈 앞에 가져와 다정하게 쳐다만 보아도 해결되는 경우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에 끼인 작은 티 하나가 세상을 왜곡되게 만들듯 우리는 그것을 제대로 직면할 용기를 갖지 못한다. 작가 스스로 이야기하듯 자신도 이런 힘든 과정을 거쳤고 그 시작을 하는 데 가장 많은 시간과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이미 '직면하기'가 되면 문제의 반은 해결된 것이고 그 문제에 대해 어느 정도 낙관해도 좋은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다음 헤르만 헤세의 말은 이런 이야기를 뒷받침해준다. "만일 당신이 누군가를 미워한다면, 당신은 그 사람 안에서 당신의 일부인 그 어떤 점을 발견하고 미워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일부가 아닌 것은 아무것도 우리를 괴롭힐 수 없다." 사실 자기 알기가 바로 되면 나머지는 불필요한 부분이다. 그래서 작가는 이 장을 제일 처음 썼을 것이다.

  가족관계, 성과 사랑, 관계 맺기는 사실 그 영역이 독자적으로 구분되는 것은 아니지만 편의상 사례를 중심으로 그렇게 구분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렇게 드러난 문제의 대부분의 원인은 유아기 때의 가족 내에서의 부모와 자식 간의 억압기제와 뒤틀린 욕망구조와 관련된다고 한다. 자신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스펀지같이 세상을 흡수하고 형성할 때 ,절대자의 위치에 있는 부모의 마음 상태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처럼 보인다. 그 문제행동이 성인이 된 지금에 있어서도 드러나고 있다는 점도 공감이 간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모든 문제행동의 원인을 유아기때 형성된 심리적인 문제로 환원시키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은 것들도 있다. 작가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500여권이 넘는 많은 심리학 책들을 읽고 정리해내었고 그것을 사람들의 경험을 분석함으로써 많은 사례적인 검토를 거쳐서 이야기한다. 자신을 알고자했던 그 치열했던 노력이 자신의 심리를 깊이 이해하게 했고 그 깊은 내면에서 나오는 말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진단에서 많은 공감이 가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또 다른 위대한 정신을 드러내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지금 이 순간'에 깨어 있으면 우리가 과거에 자아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고 자아를 초월할 때에 비로소 온전한 삶을 살 수 있다고 한 것도 고려해야만 한다.

  심리치료는 현대생활의 관계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상당히 많은 도움이 될 것임을 인정한다. 그리고 자신을 들여다보는 디딤돌의 역할도 충분히 해내리라는 것도 인정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수많은 이론을 갖다붙여서 현실을 설명하는 것보다 자신의 마음을 직접 들여다보고 알아가는 체험이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주는 힘이 된다. 타인의 설명은 비록 한 순간의 이해와 해결을 가져올런지는 몰라도 결국은 나의 문제를 타인의 설명을 빌어서 넘기는 것에 불과하다는 단정을 감히 한다. 물론 그 타인의 말과 설명이 자신의 삶을 더욱 잘 이해시켜주고 자신 스스로를 바라보게 도움이 됨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타인의 설명으로서가아니라 자신 스스로의 체험으로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자신의 문제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자신을 이해하고 바로 보아서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학문을 넘어서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심리치료가 가진 한계는 두더지 뿅망치처럼 당장 올라온 두더지의 머리를 방망이로 두드림으로써 그 구멍의 문제는 해결할 수 있을지라도 또 다른 구멍에서 올라오는 두더지의 머리를 순간 순간 힘껏 두드려야 하는 문제가 생긴다는 점이다.

  작가의 책을 '사랑을 선택하는 기준'이라는 책부터 거의 다 보아왔다. 그의 삶과 공부가 나에게도 많은 가르침을 주고 있고 생각할 단서를 제공하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작가와 같은 자기보기를 제대로 해낸다면 성격과 인격의 안정성 속에서 타인과 더불어 사는 문제를 지혜롭게 해결할 수는 있을 것이라 공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삶은 단지 문제행동을 교정하는 것으로 의미가 한정지워지지는 않는다. 그녀가 말하듯이 삶의 성숙을 향한 방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심리학과 종교적 영역에 대한 인식의 가능성을 열어두었으리라고 생각한다. 비록 내 인식이야 작가의 능력에 한참 따라가지 못하지만 그래도 이 책을 덮으며 작가가 열어두었던 심리학의 한계 영역에(경계가 가물가물한) 눈길이 더 가는 것을 어찌할 수 없다.

  나는 나이고 너는 너이고 우리는 마음이 만들어낸 경계인가? 나 속의 마음의 문제를 해결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나는 나이자 너이고 우리다라고 말한다. 나와 너의 구별이 없고 나와 우리의 경계가 없다. 그러면 문제는 바로 나 속에 갖추어져 있는 그것을 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공감'은 이미 우리가 갖추고 있는 타인의 마음이다. 나 아닌 타인의 마음..그런데 원래부터 우리는 쭈욱 '공감'이었던 것이다. 아름다운 말 공감 그 자체였다고... 하나의 공감 속에 이미 천의 만의 공감이 다 갖추어져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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