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년 3월 13일 오후 2시
그 때부터 나는 민간인 용욱에서
공군 사관후보생 94기로 예비군인이 되었던 날이다.
날 기다려주던 여자라곤 오직 어머니밖에 없이 나는
바리깡 아래로 내 서글픈 머리칼을 떨어뜨려야만 했다.
24시간을 죄어오던 그 악몽같은 시간들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내 안에서 이전에는 발견하지 못했던 위기에 직면하던 나의 뜻밖의 강함이었다.
그러나 그 강함의 껍데기를 벗기고 나면
나에게 주어진 110여일간의 기본군사훈련을 버티어야 한다는 운명에 대한 순응이었다.
가입교기간이 끝나고 '개새끼'에서부터 시작된 밑바닥인생에서
내가 기다리던 것은 저 앙상한 플라타너스 잎새가 우리들 머리통만 해지기만 하면
'백만광촉' 다이아몬드를 달고서 자유의 몸, 해방의 몸이 되리라던 것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개새끼의 인생은,
사회생활을 박사로 지내던 동기나 정부종합청사에서 전도유망한 사무관을 하던 친구나
나처럼 별볼일없이 교단이 적성에 맞지 않은 것 같아 대학원에서 유예된 인생을 즐기는 한량에게도
평등한 것이었다.
훈련이 힘든 날이면 황동인간(황토빛 진흙에 온몸을 비벼서 구릿빛 얼굴과 몸을 한 우리들을 그렇게 불렀다)의 모습을 하고서 병동에 들어오면 세면세치도 못하고 취침의 방송이 나올 때, 그것도 서럽도록 밝은 달빛이 창가에 들면,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눈시울을 적시던 밤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 때 소리없이 동기 하나가 주전자에 물을 받아 플라타너스 나무 앞에 서면 우리 모두 물을 받는 그 플라타너스 잎새가 빨리 빨리 자라도록 얼마나 빌었던가?
룰라의 '날개잃은 천사'를 좋아했던 것은 순전히 사회와 가로 막힌 그곳에서의 기본군사훈련과정에서 유일하게 접할 수 있었던 사제 배급품 음악이었기 때문이었으리라...
'모기들의 저녁식사', '가스 체험', '권총 사격' ,'100킬로 행군','야간지속훈련', '마지막 기지구보', '임관식'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고 임관식 날 사령부 본관을 지나며 받은 준위 아저씨의 우렁찬 경례소리와 함께 나는 군대생활 속으로 빨려 들어갔지....
공군대학에서의 특기교육, 훈련단에서의 교관생활, 생전 처음 내 삶에서 얻은 자유와 더불어 나는 참 많은 여행과 참 많은 삶의 고민과 참 많은 사랑의 고민을 했었지....
그리고 나의 친한 벗의 죽음도 이때였군..
그의 죽음의 소식을 듣기도 전에 장교숙소에서 자면서 그가 찾아왔던 꿈...
나를 껴안고 "보고 싶었어, 정말..."
"이젠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군..."
"같이 갈래?"
난 물론 그를 뿌리치고 문을 힘차게 열었고
그런 내 몸 위로 무수한 빛이 쏟아졌지....
잠은 깨었고,
이른 새벽 나는 온 몸이 젖어 있었지...
숙소엔 룸메이트는 없었고
여명의 옅은 빛이 창을 뚫고 스며들고 있었지...
아픔은 아픔대로 나를 지나가고 기쁨은 기쁨대로 나를 지나갔지
그러는 동안 나는 성숙했지.
그 모든 일들이 나를 더욱 성숙시켰어..
물론 지금은 그 시절을 또 이렇게 추억도 하지만,
전방에서의 사고 소식을 접하고 나니 마음이 않좋아.
그래도 나에겐 이젠 아름다운 기억으로밖에 남지 않은 군대생활인데...
그들에겐 삶의 씻을 수 없는 비극이 되어버린 것이...
그 삶을 그들이 어떻게 수용해내어야 할 것인지가 남은 그들의 몫이겠지만
그들을 바라보는 사회의 아픈 마음은 변하지 않을거야.
잊혀지긴 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