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전명:BIG FISH PROJECT_2012.09.21

(Subject: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62.)

 

( 1:3, 개역)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

 

성경에서 발견하는 선지자 가운데 가장 고집 세고, 모진 마음을 가진 선지자가 있다라면 나는 주저 없이 요나를 뽑을 것이다. 쉽게 말해, 요나는 못된 선지자’(?)’였다. 하나님과 논쟁을 벌이는 요나의 객기는 여타의 선지자들이 보여준 하나님에 대한 태도와는 정반대이다. 선지자이지만 전혀 다른 DNA를 가졌다고 할까? 한편으론, 꽤나 용감하고 하룻 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코믹한 선지자일 수도 있다. 또한, 요나의 그러한 모습은 매력적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요나 같은 그리스도인을 보게 해주는 거울이기에.

 

요나서는 4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참 절묘하게도 1-2장과 3-4장이 같은 상황의 출발점에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요나의 상반된 모습을 정확히 보여주고 있다. 마치, 인생극장처럼.(그래 결정했어!)

그와 동시에 공통의 요소도 있는데, 요나의 회개와 니느웨의 회개가 비교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대개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났을 때, 겸비했다. 두려워 떨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 요나님은 보란 듯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의 목적지는 다시스였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니느웨는 동편에 위치한 곳으로 육로로 이동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청개구리 요나는 지중해 욥바항에서 배를 타고 서쪽 다시스로 항로를 이용했다. , 하나님께서 가라신 방향과 정반대의 그것도 끝으로 가려고 했다. 아주 작정하고, 하나님 명령을 무시하려고 했던 것이다.(이렇게 작심하고 하나님 명령에 청개구리로 행동하는 선지자를 봤는가.)

 

하늘에서 내려다 보실 때 요나의 기막힌 도주가 꽤나 흥미로우셨을 것 같다. ‘어허, 고 놈 꽤나 알차게 튀기 시작하는구나 아주’. 그리고 지중해를 흔드셨다. 요나와 함께 배를 탄 모든 사람들이 요나 덕분에 고래밥이 될 위기에 처했다. 그래도 요나는 안하무인이었다. 배 밑층으로 내려가 잠을 청했다. 그것도 깊이 잠들었다고 했다. 불순종이라든지 자기 때문에 모두가 위기에 처했다든지 그런 것은 안중에 없었다. 요나의 모진성품을 엿볼 수 있다. 그냥 마음 편히 잠만 잤다. 그의 목표는 오직 하나님 명령을 거부하는 것. ‘니느웨? 난 결사반대!’ 거의 뭐, 하나님이 이기나 내가 이기나 겨뤄보자식 같다. 그리고 친히 하나님은 겨뤄주신다.

 

제비뽑기에서 요나가 색출, 검거되었다. 짧은 청문회에서 요나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나로 말하자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요!. 일종의 선지자라 할 수 있죠...’-_-;;

요나는 자신을 바다에 던지라고 주문했다. 결연한 요나. ‘내가 죽을지언정 하나님 명령을 따르진 않으리!’

 

요나의 결연한 의지. 불굴의 의지는 좀처럼 꺾이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께도 방법은 있었다. 미리 준비해 두신 숨은 병기. 일명 ‘BIG FISH PROJECT’-‘초특급 대작, 뱃속에서 회개하리라 주연 요나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3일만에 눈물 쏙 빼고, 하나님께 항복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의 기도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

 

그리스도인들도 요나 같을 수 있다. 하나님의 낯을 피해 도망가기에 바쁘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에 힘겨워 불순종의 길로 튀기 시작한다. 그리고 어쩜 그렇게. 때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가 분명히 있다. 룰루랄라. 이건 필연이야. 그렇게 배를 타고 나간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치 않고 불순종하게 될 때, 우리는 종종 우리의 그릇된 결정이 처음에는 옳은 것인냥 술술 풀리는 것처럼 보여질 수 있다. 요나가 다시스로 가기로 맘먹고 욥바항에 내려갔을 때, 마침 다시스행 배가 요나님, 타시옵소서. 기다리고 있었나이다.’라고 반겨주었던 것처럼. 그러나 결코 그것이 요나의 선택을 옹호해주는 것도, 인정해주는 현상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물고기 뱃속으로 들어가는 입구였다.

 

물고기 뱃속이 어디였던가. 요나는 그곳을 스올이라고 표현했다. , 죽음과 지옥의 고통 같은 장소였다. 다시 말해, 우리의 불순종, 우리의 고집, 오만, 모진성품. 그 모든 것들이 버려지게 될 만큼 고통스러운 징계와 연단, 고난과 훈련을 받게 되는 장소 바로 그곳이다. 우리의 불순종은 우리를 바로 그런 연단의 처소로 이끌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욥바항에서 다시스행 배를 만났다고 기뻐 날 뛸 것이 아니다. 그 배 입구로 들어서면 물고기 뱃 속이 나오기 때문에. 그러나 또, 기뻐할 수 있다. 하나님도 이겨 먹으려는 못된 자아가 모진 성품이 드디어 항복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에.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불꽃 같은 눈 아래 있다. 그 다스리심과 통치하심 그 아래에 있다. ‘뛰어봐야 벼룩이란 속담이야 말로 하나님 앞에 선 그리스도인을 두고 하는 말이다. 누구에게나 요나 같은 마음이 있다. 그 언젠가, 때때로 우리는 요나 같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스올의 뱃속을 경험해야 했다. 그 외로움, 그 고통, 그 눈물, 그 좌절감. 그 시련. 하나님 앞에서 겸비할 수 없었던 그 하나의 모진 마음과 교만과 이기심과 도전정신과 어리석음 때문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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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의 그리스도인_2012.09.17

(Subject: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61.)

 

(대하 33:13, 개역) 『기도한고로 하나님이 그 기도를 받으시며 그 간구를 들으시사 저로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다시 왕위에 거하게 하시매 므낫세가 그제야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신 줄을 알았더라』

 

므낫세왕은 위대한 개혁가 히스기야왕의 아들이었다. 히스기야왕은 다윗 이후 가장 적극적으로 이스라엘의 신앙회복운동을 일으킨 왕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 그의 아들 므낫세왕은 신앙의 실패자로 등장한다. 므낫세는 위대한 아버지만큼이나 위대한 불신자로 지독한 우상숭배와 종교혼합주의에 빠져 하나님 앞에서 구부러진 삶을 살아간다. 그 결국 하나님은 앗수르 왕을 보내 므낫세를 사로잡아 바벨론으로 끌고 가버린다. 분명, 그것은 징계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므낫세는 죽임을 당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바벨론으로 끌려간 이후부터 므낫세는 하나님께 구하기 시작했다. 지독한 불신자에게 그 환난의 시간이 하나님을 부르게 되는 기회가 되었던 것이다. 비록 악했지만, 므낫세에게는 돌이킬 수 있는 일말의 양심이 있었다. 아무도 그 지독한 우상숭배자 므낫세가 바벨론으로 끌려가 거기서부터 하나님을 찾게 될 거라고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므낫세는 그것을 성공시켰다.

 

므낫세는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 환난을 당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부르짖고, 회개하게 된다. 스스로를 겸비시켰다. 이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가 누그러들고, 하나님은 놀랍게도 므낫세로 하여금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왕위를 회복하게 해주셨다. 그 악한 왕이, 신앙의 실패자요. 쇠사슬에 결박되어 끌려간 자가 다시 왕위를 회복하다니. 놀라운 일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

 

바로 그 일련의 과정들 속에서 바로 므낫세는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참 이상한 부분이기도 하다. 므낫세의 아버지는 위대한 개혁가 히스기야 왕이 아닌가. 그런 위대한 신앙의 아버지 밑에서 자라 므낫세왕이 왜 하나님을 몰랐던 것일까?

 

히스기야왕에게도 불찰은 있었다. 그는 말년에 병들었고, 시험에 빠졌으며 그 시험에서 실패했다. 하나님이 히스기야의 심중을 아시고자 바벨론 사신들을 보냈고 거기서 히스기야는 실패했다. 히스기야는 말년에 교만에 빠져 있었고, 그런 교만한 자신으로부터 돌이키지 못했다. 분명, 그러한 내막은 성장기에 있었던 므낫세의 신앙관과 종교관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크다.

 

, 어떤 그리스도인이 그 청년의 시기를 주 앞에서 온전한 열심으로 충성스럽게 살았더라도 그의 마라톤에서 뒤쳐지기 시작하여 중년과 장년에 이르러서, 신앙에 실패하기 시작한다면 사춘기와 청년기를 겪게되는 그 아들에게는 신앙의 온전한 것을 보여주지 못하게 되는 법이다.

 

아마도 히스기야왕의 우울한 말년의 신앙은 므낫세로 하여금 하나님을 잘 섬겼다는 아버지의 초라한 말년을 보면서 여호와 신앙에 대한 회의감 내지 불신을 가졌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적 방향을 명백히 정립하지 못한 므낫세는 각종 우상을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어느 우상이 진짜인지 마치 찾아내기라도 하듯이 각종 우상을 혼합하여 섬겼다. 그러나 그 결과는 불보듯 뻔했다. 철저한 실패. 심지어 자신의 왕권을 잃어버리고 종으로 끌려갔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아버지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자신이 잘못된 결정과 신앙을 선택한 것이었다면 돌이키게 해달라고. 다시 회복시켜 달라고. 그리고 하나님은 정말 응답해주셨다.

 

그제야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신 줄을 알았더라.’ 이것은 므낫세의 참된 체험이었다. 지독한 우상숭배자에서 여호와 신앙으로 회귀하는데 있어서 므낫세의 체험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우상이 진짜인 것인양 맹목적으로 쫓던 때와는 달리 그는 실제 삶 가운데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렇다. 히스기야왕의 아들로 자랄 때에도 분명 신앙에 대한 교육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 그것이 자신의 것이 되지 못했다. 지식은 배울 수 있었지만,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은 경험해볼 수 없었다. 그것은 므낫세에게 불가능한 종교였다. 신앙이 지극히 개인적인 체험이자 영역이란 것을 므낫세는 경험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므낫세는 여호와 신앙에 대해서는 회의감을 가졌다.

 

하나님을 체험한다는 것이 그리스도인에게도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것은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 답게 만드는 것이다. 말씀을 듣고 배우며, 교제하는 가운데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어느 정도의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지식과 교리를 익히게 된다. 가장 중요한 몇 가지의 진리와 신앙관에 대한 공통적인 이해를 공유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 지식은 신앙을 가지는 가장 중요한 근본이자, 신앙을 지키게 하는 첫째 방패이다. 그러나 그것이 완전한 것은 아니다. 지식에 준하는 경험이야 말로 가장 강력한 능력이 된다. 그것이 참으로 신앙의 저력과 힘으로 자리잡는 실제의 근육들이다.

 

신앙은 단지 배워서만 익혀지는 것이 아니다. 신앙은 오직 경험을 통해서 익혀지는 것이다. 나아가 경험은 보다 깊고, 보다 높은 신앙의 지식에도 이르게 도와주는 밑거름이 된다. 므낫세왕의 지극히 개인적인 하나님 체험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되었던 그 참 고백처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을 경험하고, 체험하는 일은 가장 중요한 과제이며, 숙명이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다워지기 위한 좋은 보약은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경험해보는 것.’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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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그리스도인에 대한 반성_2012.09.11

(Subject: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60.)

 

(딤후 3:2, 개역)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말세의 인간군상에 대한 한 표현이다. 그것은 이미 바울의 시대부터 그러했다. 그들조차 말세를 살아가는 세대였기에. 그렇다면 구별된 그리스도인은 과연 세상 사람보다 거룩해진걸까?

 

그리스도인이 교회를 출석하고, 술과 담배를 피하고, 단란주점을 피하고. 세상 사람들과 어울려 죄짓는 장소에 가지 않았다고 해서 거룩하게 된 걸까? 그것이 거룩의 충분조건일까? 그러면 평생을 골방에서 구도자로 산다면 그는 그리스도인보다 더 거룩하겠다.

 

그리스도인도 여전히 죄성이 남아 있다는, 자기 능력 밖의 미제의 문제로 인해 불량한 양심으로 살아가면서도 천국에 간다고 기뻐한다.

그토록 고난을 받고, 자기를 부인하고, 구도의 삶을 살았던 부처도 지옥에 갔는데 말이다.

 

왜 완전한 하나님의 은혜가 부족한 그리스도인에게 오면, 그토록 부당한 은혜로 되곤 하는지.

가식, 교만미움시기, 질투, 허영, 자기애. 그 모든 구부러진 양심의 잡음.

천국의 소망으로 만족하는 동시에, 자기를 사랑하면서 살아간다.

용서받은 그리스도인의 이기심.

 

양의 탈을 쓴 이리처럼 천국의 문을 기뻐하면서 주를 찬양한다.

보다 선량한 사람도 지옥으로 가고 있는데 모든 영광과 특권을 다 누리며, 배부르고 만족하다.

위해 피 흘려주신 어눌한 예수님 덕분에. 그 귀한 피가 그토록 부족한 피처럼 여겨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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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젼드는 없다._2012.09.09

(Subject: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59.)

 

(대하 24:25, 개역) 『요아스가 크게 상하매 적군이 버리고 간 후에 그 신복들이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들의 피로 인하여 모반하여 그 침상에서 쳐 죽인지라 다윗 성에 장사하였으나 열왕의 묘실에는 장사하지 아니하였더라』

 

성경 속에는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친 인물들이 많이 있다. 반면, 육체로 시작했다가 성령으로 마친 대표적인 인물이 있다면 그는 바로 바울일 것이다. 한편, 요아스왕은 성령으로 시작했으나 마지막은 육체로 마친 왕이었다. 그의 시작과 끝이 너무나 대조적이어서 그의 영성의 그래프를 보자면, 마치 사울왕의 축소판 같이 생각되어질 정도다.

 

여호야다는 제사장이었다. 그는 아달랴의 우상숭배와 폭정 속에서 죽임을 당하는 왕자들에게서 요아스 왕자를 살려낸다.(물론, 그의 아내가 살렸음.) 요아스왕자는 너무 어렸기에 여호야다는 당분간 왕자를 잘 숨겨두고 기회를 엿보았다. 수년간 아달랴의 우상숭배와 폭정이 지속되었다. 그러나 요아스 왕자가 7세가 될 때, 여호야다는 반역을 시도하고 성공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수년간 이어진 아달랴의 폭정은 막을 내리고, 바알의 전당도 무너지고. 바알의 제사장들도 죽임을 당한다.

 

요아스 왕자는 7세의 나이에 왕으로 등극한다. 특히, 제사장 여호야다의 충성스러운 신앙의 교육과 조언을 바탕으로 요아스 왕자는 선정을 펼친다. 우상숭배로 무너지고, 빼앗긴 성전을 중건하기 위해 재촉하기도 한다. 소위 헌금함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성전재건을 위한 돈을 담는 궤를 만들어 많은 백성들이 성전을 중수하기 위한 헌금에 동참하게 되기도 한다. 그래서 성전은 이전의 모습대로 견고케 세워진다.

 

훗날 여호야다 제사장이 130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자. 백성들은 그를 다윗 성 열왕의 묘실에 장사지냈다. 놀라운 일이다. 왕들의 묘실에 제사장이 들어갔다는 말이다. 그만크 여호야다 제사장의 역할은 엄청난 것이었다. 요아스 왕자를 보호하고, 아달랴의 폭정을 종식시키고. 신앙 위에 세워진 국가를 재건하면서 요아스 왕이 신앙중심과 선정을 베풀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그는 진정으로 위대한 멘토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왕들이 들어가는 묘실에 여호야다 제사장도 들어갈 수 있었다.

 

반면, 여호야다의 죽음 이후 스승을 잃은 요아스는 신앙의 내리막으로 치닫기 시작한다. 걸출한 신앙의 멘토였던 여호야다가 죽자. 기회를 엿보던 무리들이 요아스 왕을 유혹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요아스 왕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우상숭배자로 전락해버리고 만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보내어 요아스를 회유하지만 듣지 않았다.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가 와서 경고하였음에도 오히려 요하스는 은혜를 잊고, 스가랴를 처형해버린다.

 

그러므로 일 년 후 아람의 적은 군대가 침공하여 남유다의 큰 군대를 정벌하는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 전쟁에서 크게 패배하고, 부상을 입은 요아스왕은 결국 신복들의 배신의 칼에 죽임을 당한다. 그리고 백성들은 그 요아스 왕을 다윗 성의 묘실에 들이지 않게 된다.

 

그리스도인에게 신앙은 마라톤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그 순간부터 죽는 그 날까지가 그리스도인의 신분으로서 계수되는 삶을 살게 되기 때문이다. 어떤 운동선수들은 그의 선수생활 몇 년을. 위대한 성적을 남기고 은퇴하게 되면 평생을 ‘Legend’로 불리며, 존경을 받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어떤 큰 업적을 남기고, 수년 동안 훌륭한 성과를 남겼다 한들 그가 레젼드가 되는 건 아니다. 신앙은 죽는 그 날까지 모르는 것이다. 심지어. 죽어서 백보좌 심판대 앞에 서 봐야 알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평생을 위대한 설교자로 살았던 조지 휫필드도 그의 생전에는 수없는 반대세력의 모함과 방해에 괴롭힘을 당했으며, 교리적인 이해관계의 차이로 인해 웨슬리의 비난도 받아야만 했다. 그는 결코 평탄한 삶을 살 수 없는 부흥사였다. 그 역시 말했다. ‘내가 누구였는지는 심판날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렇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것은 살아 있는 동안 다 평가될 수 없다. 우리 모두는 그 날 진실을 알게 될 것이다.

 

신앙은 마라톤이다. 그리스도인이 진정으로 뜨거울 수도 있지만, 나중은 진정으로 차가워질 수도 있는 것이다. , 어떤 그리스도인은 그토록 차가웠지만 이제는 뜨거워지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여호야다와 요아스의 두 모습도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있다.

 

제사장이엇던 여호야다는 그의 생애의 시종을 충성스럽게 하나님 앞에서 살아갔다. 그러므로 그는 왕들만이 죽어서 들어갔던 다윗성의 묘실에 선례가 없는 대제사장의 신분으로 안치되었다. 그는 마라톤에서 승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유능한 여호야다의 가르침에 잘 땄던 요아스는 결국 멘토를 잃어버리고, 신앙의 깊은 것을 자신의 것으로 계승하지 못하고 신앙의 대열에서 이탈해버리고 말았다. 처음 성전을 중수하기 위한 열심을 보였던 그의 뜨거움과는 너무나 대조적으로 우상을 숭배하고,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배반하고 죽였다. 은혜도 양심도 져버린 악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 결과 그는 하나님께 버림을 받고, 죽음 이후 다윗성의 왕의 묘실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비극을 초래한 것이다.

 

성령으로 시작해서 육체로 마친다는 것이 신앙의 세계 안에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성경 속의 많은 인물들이 그러했고. 신앙의 세계에 속했던 수많은 역사 속 인물들 중에도 그러했다. 그러한 실패가 없더라면 매 세대마다 엄청난 그리스도인들이 교제에 모여 큰 무리를 이루고, 더 큰 일을 이뤘을 것이다.

 

참 두려운 일인 것 같다.  신앙의 연수가 10년이 되었든, 20년이 되었든. 그 이상이든을 막론하고.  오랜 시간을 믿음 안에 있던 그리스도인도 교회를 떠날 수 있다는 가능성과 위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누가 자신은 30년 동안 신앙에서 떨어져 본 적이 없었기에 앞으로도 결코 떨어질 일이 없노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렇게 늘 위기와 악의 위험이 도사리는 광야의 길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을 따라 살아가는 삶인가 보다.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그토록 중요한데. 왜 그렇게 온전히 따르는 삶을 살 수 없는 것인지. 나 역시 두려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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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지만 그리 쉽지만은 않다_2012.09.05

(Subject: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58.)

 

(대하 16:7, 개역) 『때에 선견자 하나니가 유다 왕 아사에게 나아와서 이르되 왕이 아람 왕을 의지하고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지 아니한고로 아람 왕의 군대가 왕의 손에서 벗어났나이다』

 

남유다의 세 번째 왕, 아사는 유능하고 정직한 왕이었다. 그는 이방의 신당을 제거하고, 하나님께로 백성들을 인도하며 율법을 준행했다. 그는 성읍들을 건축하였고, 나라는 평안했다.

 

한번은 구스의 군대가 쳐들어와서 곤란 중에 처했지만,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승리하게 된다.

여호와여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는 주밖에 도와줄 이가 없사오니 우리를 도우소서

그것이 아사왕의 기도였다. 아사왕은 다른 어떤 것도 의지만한 것이 있노라고 구하지 않았다.

오직 하나님께 의지했다. 그래서 승리할 수 있었다.

 

세상에는 강자와 약자가 존재한다. 약자들은 강자를 피하기 위해 갖은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려고 한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곤충이나 할 것 없이 세상의 모든 약자들이 강자 앞에서 비굴해진다. 자기 능력밖에 있는 다른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강자의 위협에서 타격을 받지 않고, 생존하기 위해 발버둥친다.

그럴 때 아사왕은 하나님만 의지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일까? 그것이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은 늘 우리의 편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피난처라고 익히 배워왔기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하나님 의지하기의 진리를 통달하고 있다. 그것처럼 우리에게 익숙한 교훈도 없다. 그러나 실상은 오히려 하나님 의지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도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공공장소든 어떤 건물이든 소화기와 소화전이 비치되어 있다. 불이 났을 때 그것을 활용해 초기진압을 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고, 얼마든지 필요할 때 누구든지 사용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방화가 일어나거나, 화재가 일어나는 매일의 수많은 장소에서 소화기는 제 기능대로 쓰임 받지 못한다는 것도 사실이다. 알지만 정작 사용되지 못할 때가 더 많다.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이 그리스도인 우리에게는 가장 익숙한 교훈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만 의지한다는 것처럼 어색하고, 허전한 것도 없는 것 같다. 가령, 우리가 어떤 목적과 필요를 달성하기 위해 준비한다고 할 때, 우리는 관계되는 형제, 자매나 세상 사람의 지위와 능력, 인맥을 이용해서라도 도움을 받고 싶어 한다. 그것은 세상에서도 가장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수단과 방법이다. 더불어 그리스도인에게도 그것은 일반적인 방법이다.

 

아사왕은 전쟁에 직면했다. 객관적으로 볼 때, 그는 동맹국 정도의 군대협조를 요청해야 했다. 냉정히 말해 그건 상식이다. 객관적인 전력상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면, 항복을 하든지. 그래서 속국이되어 조공을 바치든지. 아니면 동맹을 결성해 군대의 도움을 받든지 둘 중 하나다. 싸워봐야 거의 질 것이 뻔한 전쟁을 누가 하려고 할까? 그러나 아사왕은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강자와 약자 사이에서 도울 분은 주님밖에 없다라고 호소하면서 하나님께서 책임져야만 할 것을 종용했다. , 지혜로운 방법이 아니던가.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참 의미가 아닌가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이 참 어려운 일인 것이. 아사왕도 나중에는 하나님을 전혀 의지하지 않게 되었다. 하나님의 도움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하나님만 의지한다는 것은 믿음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며 정상적인 관계의 형성이 돈독하지 못하다면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한다는 것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보여지는 실존에 의지하는 근본적인 속성, 성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보이지 않는 것을 도대체 어떻게 의지하느냔 말이다.

 

말년에 발에 중병이 들었을 때도 아사왕은 기어이 하나님을 찾지 않았다. 처음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불신앙적인 삶으로 그의 인생 종지부를 찍었다.

 

늘 범사에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진리 앞에 너무나 익숙한 우리는 어떨까. 우리가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서 의지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라고 탄원하고 있을까?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형성할 수 있는 수많은 인맥과 현실적인 수단과 방법들을 동원하기 위해 뛰쳐나간다. 사람들을 만나고, 기회들을 엿본다. 더러는 기도만 할 것이 아니라 액션을 취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물론, 그 말이 틀린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항상 신앙이라는 것에는 뭔가 묘한 불찰이 있는 것 같다. 분명, 틀린 말이 아닌데 너무나도 자주 틀리게 적용해버리고 마는 우리의 불찰들이 숨어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사람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고, 현실적인 수단과 방법의 도움을 얼마든지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전적으로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았다는 한 가지의 정직한 동기.

 

하나님께 더 많이 탄원하자. 그러면 하나님께서 현실의 수단과 방법들을 동원해주신다. 내가 아닌 하나님께서 동원해주신다는 것이다. 그것은 종종 예기치 않은 때와 방법들을 통해 주어질 때가 많다. 그러나 기도만 할 것이 아니라 액션해야 된다는 이유로 내가 뭔가를 기획하고 만들어 내려고 하면서, 그때부터는 불찰이 야기되는 법이다.

 

먼저 할 일은 내 의지를 놓는 일이다. 하나님께 강한 자와 약한 나 사이에서 무엇인가를 부디 해줄 것을 그저 요청하고, 기다리는 일이다.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바로 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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