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젼드는 없다._2012.09.09
(Subject: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59.)
(대하 24:25, 개역) 『요아스가 크게 상하매 적군이 버리고 간 후에 그 신복들이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들의 피로 인하여 모반하여 그 침상에서 쳐 죽인지라 다윗 성에 장사하였으나 열왕의 묘실에는 장사하지 아니하였더라』
성경 속에는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친 인물들이 많이 있다. 반면, 육체로 시작했다가 성령으로 마친 대표적인 인물이 있다면 그는 바로 바울일 것이다. 한편, 요아스왕은 성령으로 시작했으나 마지막은 육체로 마친 왕이었다. 그의 시작과 끝이 너무나 대조적이어서 그의 영성의 그래프를 보자면, 마치 사울왕의 축소판 같이 생각되어질 정도다.
여호야다는 제사장이었다. 그는 아달랴의 우상숭배와 폭정 속에서 죽임을 당하는 왕자들에게서 요아스 왕자를 살려낸다.(물론, 그의 아내가 살렸음.) 요아스왕자는 너무 어렸기에 여호야다는 당분간 왕자를 잘 숨겨두고 기회를 엿보았다. 수년간 아달랴의 우상숭배와 폭정이 지속되었다. 그러나 요아스 왕자가 7세가 될 때, 여호야다는 반역을 시도하고 성공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수년간 이어진 아달랴의 폭정은 막을 내리고, 바알의 전당도 무너지고. 바알의 제사장들도 죽임을 당한다.
요아스 왕자는 7세의 나이에 왕으로 등극한다. 특히, 제사장 여호야다의 충성스러운 신앙의 교육과 조언을 바탕으로 요아스 왕자는 선정을 펼친다. 우상숭배로 무너지고, 빼앗긴 성전을 중건하기 위해 재촉하기도 한다. 소위 헌금함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성전재건을 위한 돈을 담는 궤를 만들어 많은 백성들이 성전을 중수하기 위한 헌금에 동참하게 되기도 한다. 그래서 성전은 이전의 모습대로 견고케 세워진다.
훗날 여호야다 제사장이 130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자. 백성들은 그를 다윗 성 열왕의 묘실에 장사지냈다. 놀라운 일이다. 왕들의 묘실에 제사장이 들어갔다는 말이다. 그만크 여호야다 제사장의 역할은 엄청난 것이었다. 요아스 왕자를 보호하고, 아달랴의 폭정을 종식시키고. 신앙 위에 세워진 국가를 재건하면서 요아스 왕이 신앙중심과 선정을 베풀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그는 진정으로 위대한 멘토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왕들이 들어가는 묘실에 여호야다 제사장도 들어갈 수 있었다.
반면, 여호야다의 죽음 이후 스승을 잃은 요아스는 신앙의 내리막으로 치닫기 시작한다. 걸출한 신앙의 멘토였던 여호야다가 죽자. 기회를 엿보던 무리들이 요아스 왕을 유혹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요아스 왕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우상숭배자로 전락해버리고 만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보내어 요아스를 회유하지만 듣지 않았다.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가 와서 경고하였음에도 오히려 요하스는 은혜를 잊고, 스가랴를 처형해버린다.
그러므로 일 년 후 아람의 적은 군대가 침공하여 남유다의 큰 군대를 정벌하는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 전쟁에서 크게 패배하고, 부상을 입은 요아스왕은 결국 신복들의 배신의 칼에 죽임을 당한다. 그리고 백성들은 그 요아스 왕을 다윗 성의 묘실에 들이지 않게 된다.
그리스도인에게 신앙은 마라톤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그 순간부터 죽는 그 날까지가 그리스도인의 신분으로서 계수되는 삶을 살게 되기 때문이다. 어떤 운동선수들은 그의 선수생활 몇 년을. 위대한 성적을 남기고 은퇴하게 되면 평생을 ‘Legend’로 불리며, 존경을 받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어떤 큰 업적을 남기고, 수년 동안 훌륭한 성과를 남겼다 한들 그가 레젼드가 되는 건 아니다. 신앙은 죽는 그 날까지 모르는 것이다. 심지어. 죽어서 백보좌 심판대 앞에 서 봐야 알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평생을 위대한 설교자로 살았던 조지 휫필드도 그의 생전에는 수없는 반대세력의 모함과 방해에 괴롭힘을 당했으며, 교리적인 이해관계의 차이로 인해 웨슬리의 비난도 받아야만 했다. 그는 결코 평탄한 삶을 살 수 없는 부흥사였다. 그 역시 말했다. ‘내가 누구였는지는 심판날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렇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것은 살아 있는 동안 다 평가될 수 없다. 우리 모두는 그 날 진실을 알게 될 것이다.
신앙은 마라톤이다. 그리스도인이 진정으로 뜨거울 수도 있지만, 나중은 진정으로 차가워질 수도 있는 것이다. 또, 어떤 그리스도인은 그토록 차가웠지만 이제는 뜨거워지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여호야다와 요아스의 두 모습도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있다.
제사장이엇던 여호야다는 그의 생애의 시종을 충성스럽게 하나님 앞에서 살아갔다. 그러므로 그는 왕들만이 죽어서 들어갔던 다윗성의 묘실에 선례가 없는 대제사장의 신분으로 안치되었다. 그는 마라톤에서 승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유능한 여호야다의 가르침에 잘 땄던 요아스는 결국 멘토를 잃어버리고, 신앙의 깊은 것을 자신의 것으로 계승하지 못하고 신앙의 대열에서 이탈해버리고 말았다. 처음 성전을 중수하기 위한 열심을 보였던 그의 뜨거움과는 너무나 대조적으로 우상을 숭배하고,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배반하고 죽였다. 은혜도 양심도 져버린 악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 결과 그는 하나님께 버림을 받고, 죽음 이후 다윗성의 왕의 묘실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비극을 초래한 것이다.
성령으로 시작해서 육체로 마친다는 것이 신앙의 세계 안에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성경 속의 많은 인물들이 그러했고. 신앙의 세계에 속했던 수많은 역사 속 인물들 중에도 그러했다. 그러한 실패가 없더라면 매 세대마다 엄청난 그리스도인들이 교제에 모여 큰 무리를 이루고, 더 큰 일을 이뤘을 것이다.
참 두려운 일인 것 같다. 신앙의 연수가 10년이 되었든, 20년이 되었든. 그 이상이든을 막론하고. 오랜 시간을 믿음 안에 있던 그리스도인도 교회를 떠날 수 있다는 가능성과 위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누가 자신은 30년 동안 신앙에서 떨어져 본 적이 없었기에 앞으로도 결코 떨어질 일이 없노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렇게 늘 위기와 악의 위험이 도사리는 광야의 길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을 따라 살아가는 삶인가 보다.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그토록 중요한데. 왜 그렇게 온전히 따르는 삶을 살 수 없는 것인지. 나 역시 두려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