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합주회 조나단 에드워즈 클래식 5
조나단 에드워즈 지음, 황혁기.정성욱 옮김 / 부흥과개혁사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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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서는 초교파적으로 성도들이 함께 연합하여 기도하는 것의 필요성과 중요성에 대한 성경적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에드워즈는 스가랴 8장과 다니엘 및 요한계시록을 통해 나타는 천년왕국과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근거로 하나님의 말씀과 교회의 권위가 무시되고 있는 사회의 암울함에 반하여 교회가 함께 기도함으로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간구해야 된다는 것이다.

 처음 앞부분을 읽으면서는 에드워즈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의 놀라운 임재가 일종의 부흥으로 간주되었으나 차츰 그것이 '천년왕국'을 가리키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면서 어째서 에드워즈는 이 천년왕국의 임재를 두고 특별한 연합기도의 필요성을 주창했는지 의아함을 가지게 했다.

 에드워즈는 천년왕국이 일종의 부흥의 한 형태로 이 지상에 이뤄질 하나님의 현현을 기대한 것인지 아니면 천년왕국의 지상성취를 그대로 보면서 그것이 우리의 기도 가운데 영향을 받을 그 어떤 부흥으로 이해한 것인지 정확한 판단이 서질 않았다.

 아무튼, 이러한 부분을 건너 뛰고라도 교회가 하나의 연합된 기도를 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굉장히 의미있는 일임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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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H,G 2009-12-03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대주의적 관점에서 천년왕국설은 총 3가지 학설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전천년설, 후천년설, 무천년설이 이것이다. 전천년설은 천년왕국 이전에 그리스도의 재림과 성도의 휴거가 있다는 것이고, 후천년설은 천년왕국 이후에 재림과 휴거가 있다는 것이다. 무천년설은 천년왕국이란 상징적인 의미이지 실현되는 것이 아니란 것이다. 이러한 과점에서 볼 때 조나단 에드워즈는 후천년설을 믿었던 것 같다. 그러나 현대를 살아가는 크리스챤으로써 천년왕국은 전천년설이 더 비중이 있다고 생각된다.
 
 전출처 : kwangma > 웨슬리주의는 칼빈주의와 어떻게 다른가?
칼빈주의와 웨슬레신학
밀드레드 와인쿱 / 생명의말씀사 / 199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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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칼빈주의와 웨슬리주의의 구원론에 관해 다루며 서울 신대에서도 사용하는 책으로 알고 있다. 사 놓은지 오래되었지만 우선순위에서 밀려있었던 책을 바라보면서 그래도 예전에 사놓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웨슬리주의 입장에서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그리고 웨슬리주의에 대해서 비교 분석한 책이다. 저자는 교리적인 접근보다는 역사적인 접근에 치중했다고 말한다. 저자가 다루는 내용은 매우 중요한 내용들이다. 이 내용들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라는 매우 중요한 신학적 주제들이다.
웨슬리주의는 펠라기우스주의라는 오명과 비난을 받곤 한다. 알미니안주의의 폐해가 있기도 하지만 알미니우스가 주장한 내용이 말도 안되는 것은 아니다. 그 이후의 입장들이 극단적인 성향을 띈 점은 있지만 그것은 칼빈주의에 있어서도 동일하게 나타난 점이다. 이중예정과 신적 작정에 대한 칼빈주의의 해석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서 매우 심각한 신학적 곤경에 빠질 위험이 있다. 저자는 각 입장의 차이점들을 살펴보며 비교 분석해 준다. 그렇기에 이 책이 매우 재밌고 유익한 면이 있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가 웨슬리주의를 지지하기 때문에 전체적인 방향성은 그쪽에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후반부에는 웨슬리의 영향을 받는 신칼빈주의, 웨슬리안 칼빈주의, 칼빈주의적 웨슬리주의 등을 다룬다. 그리고 특별 예정 교리에 의해 야기된 신학적인 갈등이 어떤 것인지를 자세히 살펴준다.

저자가 결론으로 보여준 하나의 그림은 책을 읽으면서 나를 웃게 만들었다. 그것은 처음부터 생각했던 그림이었는데 저자의 결론에 동일한 형태의 그림이 제시되는 것을 보면서 괜히 읽은 것인가 라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남는 것이 많다. 온통 칼빈주의자들의 책을 읽은 나에게 웨슬리주의에 대한 좋은 이해를 더해 준 책이다. 그리고 나의 구원관에 있어서 웨슬리의 견해가 유사함을 또한 느끼게 해준 책이다. 이 책과 함께 웨슬리에 대한 다양한 책을 보고 있는데 많은 점에서 칼빈주의자들이 웨슬리를 오해하고 펠라기우스주의로 매도하는 것에 다소 서글픔을 느끼게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쪽을 극단으로 몰고가기 보다는 균형을 유지하면서 바라보았으면 하는 바램인데 계속해서 보는 책들 중 그런 책을 만나기란 쉽지가 않다.

이 책을 보면서 들었던 궁금한 점은 칼빈주의의 '제한적 속죄' 부분을 다른 이들이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라는 점인데 나로서는 이 부분이 마치 '보편 구원론'을 접했을 때의 당황스러움과 비슷하다. 벤자민 워필드의 책 하나를 보고 있지만 다른 견해를 정직하게 다룬 것 같지 않아서 조금 씁쓸한 마음이 가득하다. 이 책도 그렇지만 한쪽을 강조하지 않은 책이란 어디 있겠는가! 다만 신학적 경향이 다르더라도 복음주의 안에서 두 입장이 공존 가능함을 살펴보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나로서는 사회적인 면에서는 신학적 정립이 잘 된 칼빈주의가 유익해 보이고 개인적인 측면에서는 웨슬리의 신학이 유익하게 다가온다. 부딛치는 신학적 부분은 오히려 바라보는 이들의 극단성에서 시작되는 면이 많아 보인다. 나의 어리석은 이해라고 바라보는 이도 있겠지만....

'하나님의 주권적 사랑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도덕적으로 책임질 수 있는 존재를 창조하셨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는 하나님에 의하여 엄격하게 제한받는다. 하나님은 법칙을 만들고, 인간은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제한 안에서 진실로 자유롭다(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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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회심의 이야기 세계기독교고전 42
조나단 에드워즈 지음, 양낙홍 옮김 / CH북스(크리스천다이제스트)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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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사의 많은 거장 가운데 조나단 에드워즈에 관한 비평은 매우 건전하고 긍정적이란 인상을 받아왔다. 지금까지 그의 업적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간접적으로 접하였으나 실상 그의 책을 읽어본 적은 별로 없었다. 기껏해야 '조나단 에드워즈처럼 살 수는 없을까'를 통해 그의 자서전과 일기, 결심문을 읽어본 것이 고작이었다. 이번에 읽은 이 '놀라운 회심 이야기'가 사실상 두번째에 해당한다.

 

 보통 부흥이란 주제를 논하는데 본서가 많이 인용된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과연 그가 무엇을 어떻게 말했길래 이 책을 강조하나 조금은 반신반의하였다. 하지만 직접 읽으면서 참으로 귀한 책이란 것을 느꼈고 마음의 많은 위로마저 주었다.

 

 에드워즈는 이 책에서 그가 사역한 노샘프턴 교회에 임한 성령의 부흥역사를 매우 객관적인 입장에서 그리고 조심스러운 자세로 겸손히 설명한다. 그것도 자세히 말이다. 그럼으로써 그는 그의 교회 가운데 있었던 성령의 역사가 거짓이 아님을 말하고 싶어하고 그가 본 부흥으로 말미암은 사람들의 인격적이고 심리적인 변화들에 예의주시하였음을 보여준다.

 

 개인적으로 이 책이 부흥에 관한 건전한 시각을 갖고 있음은 인정한다. 그러나 에드워즈가 특별히 부흥에 관한 자신의 일반적인 견해를 크게 갖고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는 다만, 그가 경험한 부흥이 자연스럽게 온 것이었고 그래서 그것을 겸손하고 조심스러운 자세로 어느 극단에 치우치지 않으려하면서 객관적으로 서술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많은 이들이 에드워즈의 부흥을 가장 성경적이고 하나님 주권적인 부흥에 대한 묘사라고 추켜세우는 것인지 모른다.

 

 한편, 부흥이 옴으로써 신자들에게 나타난 심리적인 변화를 잘 설명해주는 2장에서는 단지 부흥에 관한 것 이상으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에 나타날 수 있는 심리적인 고충과 갈등을 함께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예가 된다고 생각되었다. 사실, 이 부분에서 내 마음에 많은 위로가 되었다.

 

 그리고 앞서 언급하였지만 그가 이 부흥에 관한 기록을 함에 있어 매우 객관적이고 한 극단에 치우치려하지 않았던 점에서도 매우 감사와 위로가 되었다.(에드워즈는 이 책 외에도 늘 양자간의 편견에 치우치는 것을 주의했던 것으로 안다.)  왜냐하면 내가 바라는 바가 바로 이러한 자세이기 때문이다. 

 

  소위 칼빈주의와 알마니안주의가 매우 대립적인 형태로 드러나고 있는데 이 점에 있어 나는 매우 신중한 자세를 취하고 싶다. 물론, 내가 아직 이러한 신학적 지식이 매우 부족하여 이렇게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칼빈주의자들도 또한, 찰스 피니나 요한 웨슬레도 사실상 구원받은 한 형제이다. 그들의 사상과 견해에 다소의 차이가 있을지라도 너무 편협한 자세로 비방을 하는 것은 교리적 지식의 완전함을 떠나 성경적인 연합원리에서 논쟁과 다툼, 분열을 야기하는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누가 스스로를 완전한 하나님의 지식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위대한 지성에 이를지라도 그가 인간의 영역 안에  있었던 한 그의 지식에는 흠이 있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견해와 다소 다르다고 너무 비난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것이라 본다. 다만, 다소의 문제가 있는 부분을 발견한다면 그에 대해 객관적인 문제의식을 제기하고 주의를 주는 것이 좋다고 본다. 그 다음 맞는 부분에 있어서는 또한, 인정을 하면서 한 형제로써의 의가 상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 싶다. 이 점에 있어서 조지 휘트필드는 웨슬리와의 관계를 잘 다루지 않았나 생각케 된다.

 

 또한, 이렇게 사람의 지식에 흠이 있고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는 이러한 불완전한 자들을 통해서도 놀라운 복음전도와 부흥사역을 일으키시지 않으셨는가. 하나님께서도 그들의 취할 바를 취하셨는데 어찌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가 된 자들이 지나친 편견을 드러내려하는지 감히 안타까운 마음을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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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가 되려면
오스왈드 스미스 지음 / 생명의말씀사 / 199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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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의 사명이 영혼을 구원하는 일임을 생각할 때 선교의 의미는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역 중 하나이다. 본 서는 이러한 선교의 사명이 교회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역설한다.

 무엇보다 오스왈드 스미스 목사님의 대중적이면서도 열심있고 역동적인 문장으로 서술되어 있다. 전 세계의 복음화를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바탕을 자신이 어떻게 선교의 비전과 소망을 행해왔는지 말한다. 그리고 선교하지 않는 교회가 얼마나 고여있는 물과 같고 침체될 수밖에 없는지 말해주고 있다. 그는 자신의 교회와 지역사회를 위한 복음전도보다도 선교에 더 많은 헌신과 노력을 해야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선교를 중요시 여기지 않는 한 우리는 매우 이기적인 기독교인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한편, 이 책이 후반부로 가면서 그는 실제적인 선교사역에 있어서의 어려움이 무엇인지 그리고 전 세대의 헌신적인 선교사들의 자세와 비전이 무엇이었는지를 보여주면서 선교의 열심을 재차 강조한다. 선교에 대한 보다 뚜렷한 비전과 중심을 잡는데 도움이 될 책이다.

 다만, 아쉬움이 있다면 원제가 'The Challenge Of  Mission'인데 역서는 왜 '선교사가 되려면'이란 어리둥절한 제목을 붙였는지 알 수 없다. 마치, 선교사가 되려는 사람들의 지침서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이 책은 선교사 지망생들에게 주는 말씀이 아니다. 모든 신자들로 하여금 선교의 소명에 대한 지각과 도전을 주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역서의 제목에 대해 매우 부당하게 생각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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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후, 당신의 미래
오마타 간타 지음, 김지효 옮김 / 명진출판사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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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년 연속 일본 고납세자로 이름을 올린 사미토 히토리씨의 제자가 쓴 그의 경영노하우. 구체적인 경영지침서보다 일본 사회가 흘러가는 방향을 읽고 진단한 책. 히토리씨는 시대가 영웅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대를 앞서 읽는 사람이 시대를 잘 타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일본 경제를 바라보며 일본정부의 정책이 사실상 일본 경제를 후퇴시키고 있음을 지적한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앞으로의 경제는 공급의 과잉소모로 인해 보다 세밀화되고 다양해져야만 하며 대기업이나 대량생산이 큰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그는 중국의 제조업 급부상으로 앞으로는 물품이 다방면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만큼 단지 많이 잘 만드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보다 세분화된 고객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만이 살길이다. 그리고 대형 유행의 개념이 사라질 것이라 말하다. 또 부동산의 하락이 계속되고 자기 집을 소유하는 것이 더 비효율적이 될 거라 말한다. 한편, 기업은 실력이 있는 사원 채용에도 어려움을 겪는데 규모 유지에 드는 비용과 신규 채용으로 드는 비용이 수익성에 실효가 줄기 때문이란다. 그럼으로써 앞으로의 시대는 개인 브랜드 시대가 더 두드러지게 된다. 실력 못지 않게 인품이 갖춰지고 자기의 뜻하는 바를 읽고 그에 열정을 갖고 도전하는 사람에게 미래가 있다는 것이다. 또 인구고령화로 노인의 희소성은 더욱 떨어져 노인도 생산력이 있고 인격적으로 여러 사람의 인정을 받아야 제대로 대우를 받는 사회가 될 거라고 말하고 있다. 한편, 가족관계에서도 어른이라고 무조건 대우받는 가족이 아닌 사회적으로 인간적으로 존경받는 인물이 되어야 가족 안에서도 존중받게 된다. 왜냐하면 여성의 경제적 독립성이 강해지고 각 개인의 사회활동이 넓어진 만큼 사회 안에서 각자 자기의 가치를 인정 받지 못하면 가족의 개념을 떠나 살 수 있는 사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히토리씨는 일인 경영자의 개념이 앞으로는 중요해지며 열정을 갖고 매진하고 자기에게 필요한 공부를 하는 사람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 책은 지극히 일본 사회 지향적이지만 한국이 일본의 전철을 밟는다는 점을 감안할 때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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