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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회심의 이야기 ㅣ 세계기독교고전 42
조나단 에드워즈 지음, 양낙홍 옮김 / CH북스(크리스천다이제스트) / 2002년 3월
평점 :
교회사의 많은 거장 가운데 조나단 에드워즈에 관한 비평은 매우 건전하고 긍정적이란 인상을 받아왔다. 지금까지 그의 업적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간접적으로 접하였으나 실상 그의 책을 읽어본 적은 별로 없었다. 기껏해야 '조나단 에드워즈처럼 살 수는 없을까'를 통해 그의 자서전과 일기, 결심문을 읽어본 것이 고작이었다. 이번에 읽은 이 '놀라운 회심 이야기'가 사실상 두번째에 해당한다.
보통 부흥이란 주제를 논하는데 본서가 많이 인용된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과연 그가 무엇을 어떻게 말했길래 이 책을 강조하나 조금은 반신반의하였다. 하지만 직접 읽으면서 참으로 귀한 책이란 것을 느꼈고 마음의 많은 위로마저 주었다.
에드워즈는 이 책에서 그가 사역한 노샘프턴 교회에 임한 성령의 부흥역사를 매우 객관적인 입장에서 그리고 조심스러운 자세로 겸손히 설명한다. 그것도 자세히 말이다. 그럼으로써 그는 그의 교회 가운데 있었던 성령의 역사가 거짓이 아님을 말하고 싶어하고 그가 본 부흥으로 말미암은 사람들의 인격적이고 심리적인 변화들에 예의주시하였음을 보여준다.
개인적으로 이 책이 부흥에 관한 건전한 시각을 갖고 있음은 인정한다. 그러나 에드워즈가 특별히 부흥에 관한 자신의 일반적인 견해를 크게 갖고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는 다만, 그가 경험한 부흥이 자연스럽게 온 것이었고 그래서 그것을 겸손하고 조심스러운 자세로 어느 극단에 치우치지 않으려하면서 객관적으로 서술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많은 이들이 에드워즈의 부흥을 가장 성경적이고 하나님 주권적인 부흥에 대한 묘사라고 추켜세우는 것인지 모른다.
한편, 부흥이 옴으로써 신자들에게 나타난 심리적인 변화를 잘 설명해주는 2장에서는 단지 부흥에 관한 것 이상으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에 나타날 수 있는 심리적인 고충과 갈등을 함께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예가 된다고 생각되었다. 사실, 이 부분에서 내 마음에 많은 위로가 되었다.
그리고 앞서 언급하였지만 그가 이 부흥에 관한 기록을 함에 있어 매우 객관적이고 한 극단에 치우치려하지 않았던 점에서도 매우 감사와 위로가 되었다.(에드워즈는 이 책 외에도 늘 양자간의 편견에 치우치는 것을 주의했던 것으로 안다.) 왜냐하면 내가 바라는 바가 바로 이러한 자세이기 때문이다.
소위 칼빈주의와 알마니안주의가 매우 대립적인 형태로 드러나고 있는데 이 점에 있어 나는 매우 신중한 자세를 취하고 싶다. 물론, 내가 아직 이러한 신학적 지식이 매우 부족하여 이렇게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칼빈주의자들도 또한, 찰스 피니나 요한 웨슬레도 사실상 구원받은 한 형제이다. 그들의 사상과 견해에 다소의 차이가 있을지라도 너무 편협한 자세로 비방을 하는 것은 교리적 지식의 완전함을 떠나 성경적인 연합원리에서 논쟁과 다툼, 분열을 야기하는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누가 스스로를 완전한 하나님의 지식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위대한 지성에 이를지라도 그가 인간의 영역 안에 있었던 한 그의 지식에는 흠이 있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견해와 다소 다르다고 너무 비난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것이라 본다. 다만, 다소의 문제가 있는 부분을 발견한다면 그에 대해 객관적인 문제의식을 제기하고 주의를 주는 것이 좋다고 본다. 그 다음 맞는 부분에 있어서는 또한, 인정을 하면서 한 형제로써의 의가 상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 싶다. 이 점에 있어서 조지 휘트필드는 웨슬리와의 관계를 잘 다루지 않았나 생각케 된다.
또한, 이렇게 사람의 지식에 흠이 있고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는 이러한 불완전한 자들을 통해서도 놀라운 복음전도와 부흥사역을 일으키시지 않으셨는가. 하나님께서도 그들의 취할 바를 취하셨는데 어찌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가 된 자들이 지나친 편견을 드러내려하는지 감히 안타까운 마음을 갖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