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칼빈주의와 웨슬리주의의 구원론에 관해 다루며 서울 신대에서도 사용하는 책으로 알고 있다. 사 놓은지 오래되었지만 우선순위에서 밀려있었던 책을 바라보면서 그래도 예전에 사놓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웨슬리주의 입장에서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그리고 웨슬리주의에 대해서 비교 분석한 책이다. 저자는 교리적인 접근보다는 역사적인 접근에 치중했다고 말한다. 저자가 다루는 내용은 매우 중요한 내용들이다. 이 내용들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라는 매우 중요한 신학적 주제들이다. 웨슬리주의는 펠라기우스주의라는 오명과 비난을 받곤 한다. 알미니안주의의 폐해가 있기도 하지만 알미니우스가 주장한 내용이 말도 안되는 것은 아니다. 그 이후의 입장들이 극단적인 성향을 띈 점은 있지만 그것은 칼빈주의에 있어서도 동일하게 나타난 점이다. 이중예정과 신적 작정에 대한 칼빈주의의 해석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서 매우 심각한 신학적 곤경에 빠질 위험이 있다. 저자는 각 입장의 차이점들을 살펴보며 비교 분석해 준다. 그렇기에 이 책이 매우 재밌고 유익한 면이 있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가 웨슬리주의를 지지하기 때문에 전체적인 방향성은 그쪽에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후반부에는 웨슬리의 영향을 받는 신칼빈주의, 웨슬리안 칼빈주의, 칼빈주의적 웨슬리주의 등을 다룬다. 그리고 특별 예정 교리에 의해 야기된 신학적인 갈등이 어떤 것인지를 자세히 살펴준다. 저자가 결론으로 보여준 하나의 그림은 책을 읽으면서 나를 웃게 만들었다. 그것은 처음부터 생각했던 그림이었는데 저자의 결론에 동일한 형태의 그림이 제시되는 것을 보면서 괜히 읽은 것인가 라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남는 것이 많다. 온통 칼빈주의자들의 책을 읽은 나에게 웨슬리주의에 대한 좋은 이해를 더해 준 책이다. 그리고 나의 구원관에 있어서 웨슬리의 견해가 유사함을 또한 느끼게 해준 책이다. 이 책과 함께 웨슬리에 대한 다양한 책을 보고 있는데 많은 점에서 칼빈주의자들이 웨슬리를 오해하고 펠라기우스주의로 매도하는 것에 다소 서글픔을 느끼게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쪽을 극단으로 몰고가기 보다는 균형을 유지하면서 바라보았으면 하는 바램인데 계속해서 보는 책들 중 그런 책을 만나기란 쉽지가 않다.이 책을 보면서 들었던 궁금한 점은 칼빈주의의 '제한적 속죄' 부분을 다른 이들이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라는 점인데 나로서는 이 부분이 마치 '보편 구원론'을 접했을 때의 당황스러움과 비슷하다. 벤자민 워필드의 책 하나를 보고 있지만 다른 견해를 정직하게 다룬 것 같지 않아서 조금 씁쓸한 마음이 가득하다. 이 책도 그렇지만 한쪽을 강조하지 않은 책이란 어디 있겠는가! 다만 신학적 경향이 다르더라도 복음주의 안에서 두 입장이 공존 가능함을 살펴보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나로서는 사회적인 면에서는 신학적 정립이 잘 된 칼빈주의가 유익해 보이고 개인적인 측면에서는 웨슬리의 신학이 유익하게 다가온다. 부딛치는 신학적 부분은 오히려 바라보는 이들의 극단성에서 시작되는 면이 많아 보인다. 나의 어리석은 이해라고 바라보는 이도 있겠지만....'하나님의 주권적 사랑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도덕적으로 책임질 수 있는 존재를 창조하셨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는 하나님에 의하여 엄격하게 제한받는다. 하나님은 법칙을 만들고, 인간은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제한 안에서 진실로 자유롭다(p.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