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대언자 예수 그리스도.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요일2:1)

우리는 거듭난 이후에도 끝없이 육체와 세상으로부터 오는 죄와 싸움을 합니다. 싸움을 아무리 잘 해도 항상 이기기만 하는 것은 아니지요. 거듭난 이후에도 우리가 사사로운 죄를 범하게 될 때 우리에게 대언자가 계시다고 말씀하십니다. 대언자란 ‘변호사’입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 범죄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변호를 해주기 때문에 우리가 정죄 받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죄의 유혹에 넘어지는 자신으로 힘들어하고 정죄에 빠지기도 합니다. 정죄가 마귀가 주는 것이라고 알면서도 그리스도께서 대속하신 것을 믿으면서도 정작 이것을 잘 적용하지는 못하는 경우를 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의가 어떤 것인지 함께 생각해보면서 은혜를 나누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땅에 계실 때 간음하는 현장에서 잡혀와 벗은 몸으로 남자들에게 둘러싸인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치 아니하노니 다시 가서 죄를 짓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예수님께서 대속적 죽음으로 속죄를 이루기도 전인데 죄인을 받아주시고 정죄하지 않는 모습을 봅니다. 이는 앞으로 있을 대속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미 그리스도께서 대속을 이루시고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주신 현재는 어떨까요? 대속이 이뤄지기 전에도 정죄하지 않을 만큼 긍휼이 있으신 분이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받아들인 우리가 범죄했다고 진노하시며 정죄하실까요?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5:8)

우리가 죄인되었을 그때 이미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사랑을 확증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의를 받은 우리는 얼마나 긍휼히 여기고 사랑하시고, 용서해주실까요? ‘이중전가’란 내용을 설교 중 들으셨을 겁니다. 너무나 중요한 교리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대속의 죽음을 당하셨을 때 우리의 죄는 예수께 전가되었고, 예수님의 완전한 의 곧, 하나님 앞에 맘껏 나아갈 수 있는 의는 우리에게 전가해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덧입었기 때문에 그 어떤 죄의 권세도 우리에게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고, 정죄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죄의 권세가 영향력을 못 미친다는 건 전혀 죄를 짓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죄로부터 오는 모든 정죄와 심판과 고통이 전혀 우리에게 무능한 것으로 죽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죄를 범하면 즉시 예수님은 하나님께 이렇게 변호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십시오. 이미 제가 저 죄를 대신해 심판을 받고, 그 대가를 지불하고 남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들은 원래 부정한 자들이지만 저의 대속적 죽음으로 청산했고, 제가 원래 가진 완전한 의. 곧, 다시는 변질되지도 효력이 떨어지지도 않는 완전한 의를 저들에게 믿음으로 주었습니다. 비록, 믿고 나서 오늘 죄를 범했지만 이미 완전한 의를 가진 자들이니 정죄하지 마옵소서. 죄인에게 긍휼을 베푼 것처럼 저 의인들을 긍휼이 여기고, 사랑을 베풀어주소서.’

예, 그렇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부정한 상태에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의 신분은 완전한 의인이 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우리에게 완전한 의를 전가해주신 그리스도가 변호사로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위로입니까? 그러므로 하나님도 결코 우리의 죄에 대해서 정죄하지 않습니다. 다만, 항상 배웠듯 의인이 된 나와 하나님 관계 속에서 단순히 교제의 회복과 깊은 친교를 위한 이유만으로 철저한 회개와 후회와 반성이 필요한 것 뿐입니다. 이것을 잘 이해하면 정말 지나친 자책과 정죄는 마귀가 주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형제, 자매님들이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은 구원받은 그날의 과거적인 사건으로 제한하는 실수를 범합니다. 그러나 알아야 될 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은 바로 오늘 이 시간, 매 순간 유효하고 적용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만약에 평생을 사사로운 죄부터 큰 죄까지 범하다가 오늘 죽게 된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받아들이고 죽게 되었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러면 그 사람은 지금 죽는 이 순간까지의 모든 죄에 대해 대속해주시고, 의를 주신 예수님을 감사하며 죽을까요 아니면, 정죄가운데 죽을까요? 예, 답은 간단합니다. 감사하며 죽을 것입니다. 왜요? 평생의 죄에 대해 대속해주셨으니까요.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우리의 평생의 죄에 대해 대속해시고 대신해 의를 주셨습니다. 다만, 우리는 시기적으로 죽기 전에 빨리 그 완전한 의를 받아들인 그 차이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대속의 사건을 자신이 구원받았던 과거의 단편적 사건으로 제한해두는 과거지향적 사고 때문에 오늘도 유효한 그리스도의 대속과 완전한 의가 주는 자유와 해방을 누리지 못하고 정죄에 빠져 깊은 시름에 빠진 형제, 자매님들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조금 정리해서 사실 우리의 현재 상태를 보면 여전히 우리는 분명 의인이 아닌 것 같습니다.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롬8:10)

이 말씀처럼 몸의 부활이 있기 전까지 우리 몸은 여전히 죄의 결과로 사망에 머물고 있습니다. 죄성이 인박혀져 죽어있는 부정한 상태인 것이지요. 그러나 부활이 있는 그날 완전한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육체 가운데 주님을 섬기는 그날까지 죄인 같은 내 모습을 날마다 체험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은 우리를 죄인으로 보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현 상태는 죄성이지만, 우리의 현 신분은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받은 의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를 의인으로 보고 계십니다. 그래서 정죄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마귀가 주는 정죄에 빠지겠습니까?

그래서 로마서 7장에서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치 않고 죄는 범하는데 이것이 내 육체의 법(죄의 법)이 마음의 법(성령의 법)과 싸워 이겨서 죄 아래 사로잡아 가는 것이고, 그래서 나는 너무 곤고하다 말합니다. 그러나 바로 이어 8장에서 주는 참 결론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켜주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믿음으로 의를 받은 우리에게는 성령님이 들어오셨고, 이는 성령님의 법이 우리에게 적용되고 있는 것이며, 이 법이 우리 안에 내주한 이상 죄와 사망의 법에서는 이미 해방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 범죄란 것은 정죄와 지나친 자책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 깨어진 친교를 철저히 회복시키는 것에 대한 관점으로 시선을 옮겨야 되며, 수없이 실패를 반복하더라도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되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반복해서 죄를 짓는 자신을 볼 때 종종 이런 허무에 빠지기 쉽습니다. ‘난 정말 안 돼. 난 실패자야. 난 절대 거룩해질 수 없어.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잖아.’ 그러나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포기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요? 포기 안 해도 실수하는 마당에 포기해버리면 얼마나 더 큰 죄에 빠지게 될까요?

얼마 전 인터넷 뉴스에서 매우 감동적은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예순이 넘은 어느 할머니께서 운전면허를 취득하려고 시험을 치는데 필기시험을 무려 950번 째 만에 합격했다는 겁니다. 참 대단한 할머니죠. 그 포기하지 않는 정신이 참 놀랍고 귀감이 됩니다. 그런데 단지 그것만 귀감이될까요? 좀 더 생각해보면 우리는 950번 만에 합격했다는 그 결과만 보고, 놀랄 뿐이지 그 할머니가 949번째 까지는 떨어졌다는 사실은 간과한다는 것입니다. 그 할머니의 소원은 필기시험을 합격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목표를 위해 할머니는 949번이나 실패하는 쓰디쓴 경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사실이지요.

우리의 경건에 대한 연습과 노력도 이에 견주어 생각해보게 됩니다. 나는 안 된다구요? 난 실패자라구요? 949번 이나 실패해서 넘어지고 다시 도전해보셨나요? 몇 번이나 경건에 대해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 도전하고 포기하지 않기를 반복하셨나요? 예, 아마 우리는 이 할머니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노력한다면 하나님은 900번이 되기 한참 전에 우리를 경건의 연습에서 승리하는 삶으로 인도해주실 거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입은 우리를 사사로운 범죄를 했다고 그렇게 미워하고 정죄하고 심판하려 으르렁거리지 않으십니다. 물론, 죄를 용인하자는 말은 결코 아니며, 우리는 벧전1장 말씀처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명령을 목표로 부단한 경건의 연습을 해야 할 의무가 있음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다만, 이 죄성으로 죽은 육체가운데 머물면서 완전해진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닌 만큼 하나님도 우리의 약함을 너무나도 깊이 체휼하고 긍휼히 여기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포기 않고 또 경건을 위해 노력하고 회복하고 일어서는 것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만약, 전투가 있는데 여러분이 1개 사단을 맡은 사단장이라고 생각해봅시다. 1개 사단의 병력을 이끌고 1개 연대와 맞붙었을 때 날아오는 총알과 부상자와 사망자의 수가 있을 것이고, 1개 사단의 병력을 이끌고 1개 군단의 병력과 맞붙었을 때 총알과 부상자와 사망자의 수가 같을 수 있을까요? 분명, 군단과 붙었을 때 더 많은 피해가 있겠지요. 그럴 때 여러분은 사단장으로 이렇게 많은 병사가 부상과 죽음을 당했느냐고 함부로 책망을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함께 가슴 아파하며 긍휼을 베푸시겠습니까? 마치, 오늘날의 시대가 이와 같다 생각합니다. 지금 마귀가 쏘는 죄의 화살은 과거의 때보다 너무나 치열하고 섬세하고 많습니다. 우리 환경이 너무나 죄를 짓기에 좋은 조건들을 갖추고 있는 것이죠. 이 가운데 주님을 섬기는 우리들을 보시는 하나님은 어떨까요? 하나님은 더 많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실 것입니다. 얼마나 치열한 마귀의 화살 속에서 버텨내고, 부상을 당했다 다시 회복해 전장으로 나가고… 그런 가운데 부상당한 병사가 ‘나는 안 돼. 아무리 부상 안 당하려 해도 나가면 또 당하고 마는 걸. 나 그냥 이번에 치료하고 나면 다시는 전장에 안 나갈래.’ 이렇게 말한다면 어떨까요?
아마,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실 것 같습니다. ‘얘야, 그렇지 않다. 나는 니가 또 전장에 나가면 혹 또 부상당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렇지 않으면 나도 좋겠지만 또 그게 그렇게 쉽지 만은 않다는 건 나도 안다. 그러나 포기는 말아다오. 부상을 당하면 다시 치료하고 회복하면 되는 거란다. 지금 나의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단다. 나에겐 나를 위해 싸워줄 병사가 필요하단다. 너처럼 생각해버리면 누가 나를 위해 싸워주겠니? 그러니 다시 회복해서 나가서 나를 위해 싸워다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단다. 나는 다시 네가 회복해서 나를 위해 전장에 나가서 싸워서 내 일을 성취해주는 것이 필요한 거란다. 너는 내게 의인이란다. 그러니 부디 포기한다고 말하진 말아주렴.’

예, 우리에게 경건의 연습이란 너무나 치열하고, 너무나 낙심하고 좌절할 일이 많은 연습입니다. 그러나 이러하다 해서 포기한다면 이것이 더 큰 죄일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이미 의인입니다. 그러므로 지나친 자책과 좌절감으로 포기하는 것이 어울리는 게 아니라 무엇보다 다시 회복하고 포기 않고 다시 싸우려는 자세가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다윗의 이야기는 얼마나 큰 위로를 줍니까? 왜 하나님이 다윗의 범죄와 그럼에도 그가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라는 얘기를 들려주시는 걸까요? 바로 우리 자신들을 위해서 주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다윗이 실제 간음, 살인하고도 회복되고, 용서를 받고,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란 평가까지 받았다면, 사사로운 죄에 빠지는 우리는 얼마나 더 회복되기 쉽고, 긍휼과 용서를 입기 쉽고, 다시 회복하고 주의 일을 힘쓰기에 좋고, 합한 자로 최종 인정받기에 좋지 않겠느냐는 것이죠? 다윗보다 불리한 분 계십니까? 우리에게 주신 완전한 의에 감사와 찬양을 돌리고 포기하지 말고 넘어져도 또 일어나길 반복하면서 부단히 경건의 연습을 하고, 주님의 전쟁이 끝나는 날까지 전장으로 나아가 싸웠으면 합니다.

투표기간 : 2010-10-13~2010-11-03 (현재 투표인원 : 0명)

1.공감100%감사해요^0^
0% (1명)

2.안공감-.-
0% (0명)

3.글쎄용
0% (0명)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나를 소멸시키는 꿈.

솔로몬 왕의 재산과 지혜가 천하 열왕보다 큰지라 (왕상10:23)

열왕기상을 읽다보면 솔로몬이 누린 세상 최고의 영화에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무엇보다 그는 전방위적 성공을 누렸기 때문입니다. 그는 성도로써 신앙과 물질 양대산맥 모두 최고봉을 차지했습니다.

그는 최고의 성전과 왕궁을 건설했고, 최대의 성전 낙성식을 거행했고, 잠언 3000천을 쓰고, 만물을 논했습니다. 해상무역의 강자 두로왕이 건설을 지원해줬고, 해마다 금, 은, 보석, 동물, 향료등을 실어왔습니다. 그는 명성도 얻었습니다. 그의 지혜를 듣고자 왕들이 모여왔습니다. 그의 보좌에는 12사자형상으로 꾸몄는데 세상 어느 왕도 그런 것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솔직히 솔로몬은 지나치게 축복을 많이 받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왠지 쓸쓸함을 감출 수 없습니다. 왜일까요? 솔로몬의 그 모든 영육간의 부귀영화가 사실 고난 가운데 주를 섬긴 부왕 다윗으로 말미암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무엘에서 보는 다윗과 열왕기에서 만나는 솔로몬은 너무나 이질적입니다.

다윗은 정말 외로웠습니다. 그는 목동의 말째로 태어나 사무엘이 기름부음을 위해 집에 왔을 때혼자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뜻밖의 기름부음을 받았을 때는 쫓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왕위임식 까지 두 번째 기름부음을 받기까지 10여 년을 방랑했습니다. 그는 사울이 던지 단창을 2번 피했습니다. 아내 미갈을 잃었고, 사울을 피해 가드왕에게 갔다가 침을 흘리며 미친 척해야 했습니다. 내 생명과 사망은 한걸음 뿐이라며 서럽게 울었습니다. 왕이 된 이후에도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신발도 못 신고 도망쳤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고집불통 요압으로 고민하고, 그의 창에 압살롬이 죽었을 때는 성문루에서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오열했습니다. 많은 환난, 징계와 가슴을 저미는 슬픔과 고통을 감당한 그에게 주어진 호칭은 ‘내 마음에 합한 자’였습니다. 또, 충성한 결과 약속 받기를 그의 아들의 왕위를 패하지 않고, 성전도 지을 수 있게 해줄 것이라 했습니다.

솔로몬 사실 그의 출생은 불명예스러운 것이었습니다. 다윗에게는 좋은 부인들이 많았지만 솔로몬의 어머니는 원래 우리아란 장군의 아내였습니다. 또한, 그는 장남도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부왕의 은덕을 힘입고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다윗이 그토록 소망한 성전을 지었습니다. 그는 부왕의 감수성을 이어 받아 아가서를 썼습니다. 그는 아쉬움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의 길은 너무나 순탄했습니다. 그는 명예와 명성, 지혜와 지식, 부귀영화를 모두 소유했습니다. 그는 환난과 고난, 가슴 저미는 슬픔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만큼 영화를 누리는 가운데서도 은근히 율법을 범했습니다. 정략결혼으로 수많은 이방왕비를 맞아 밀로성을 건축해주었습니다. 왕은 말을 많이 두지 말라고 했거늘 병거와 마병이 13,400승이었습니다. 그의 마지막은 우상숭배였습니다. 하나님이 두 번 직접 경고하였음에도 불순종했습니다. 어쩌면 솔로몬의 이러한 배은망덕하고 비극적인 결말은 당연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다윗도 많은 실수와 죄를 범했지만 그가 영화로운 명칭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많은 고난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깨지는 것에 익숙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조금도 하나님 앞에서는 강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단의 한 마디에도 완전히 꺾여 부러졌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왕자였습니다. 가난해 본 적이 없고, 아쉬운 적이 없고, 다급할 일이 없고, 굴복할 일이 없었습니다. 자기의 자리가 아닌 왕위까지 굴러왔습니다. 부왕의 은덕으로 그의 위는 견고했고, 성전도 짓고, 똑똑하고, 명성과 명예를 얻고, 보석이 넘치고, 화려한 궁전에 살았습니다.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은은 귀하지도 않았다.’

은이 정말 귀하지 않은 것인가요? 이 모든 환경은 사실 솔로몬으로 하여금 교만해지지 않을 수 없는 모든 것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그는 지나치게 성공했습니다. 그렇게 단 한 번도 부러져보지 않았던 그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깨질 수 있었겠습니까? 다윗은 나단의 말 한 마디에 깨졌지만, 솔로몬은 하나님이 직접 두 번을 나타나서 책망하였음에도 깨질 수가 없었던 것이죠.

이러한 정황을 생각할 때 다윗의 일대기를 읽다가 솔로몬의 일대기로 넘어오면 왠지 모를 슬픔을 느끼게 됩니다. 달라도 어쩌면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그리고 돌아보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고난 중에 주를 섬기는 다윗보다 평안과 영육간의 명예영광을 누리는 솔로몬 같은 신앙생활을 동경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것이 나를 소멸시키는 꿈에 불과한 것을!

투표기간 : 2010-10-13~2010-11-03 (현재 투표인원 : 0명)

1.공감^0^
0% (1명)

2.안공감-.-
0% (0명)

3.글쎄용
0% (0명)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시냇가에 심은 나무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시1:3)

복 있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항상 싱그럽지 만은 않습니다. 신앙의 가을과 겨울도 지나지요.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는다는 말씀을 보면서 그렇다, 항상 과실을 맺는 것만은 아님을… 시절이 있습니다. 신앙의 봄이 있고, 여름이 있고, 그리고 가을과 겨울이 있습니다. 열매 없는 겨울의 시절도 있지만 다만, 그 입사귀가 마르지 않는 것임을…

그러나 악인은 그렇지 않고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바람에 나는 겨. 가벼운 겨는 잘 날아오르리라 생각합니다. 잠깐은 잘 날아오르고 잘 뜨겠지만 바람이 부는 것에 따라 갑자기 곤두박질쳐 추락해버릴 수 있겠죠. 그리고 자칫 잘못 추락하면 고인 썩은 물이나 시궁창에 빠질지도 모를 일이죠. 그래서 악인은 심판을 당하고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라고 말씀하십니다.

악인만 심판을 견디지 못할까요? 의인도 심판을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악인이라서 심판을 견디지 못한다기 보다 오히려 의인은 심판을 피해가는데 악인은 심판을 피해가지 못하고 중력처럼 빨려들어 갈수밖에 없음이 아닐까 생각해봤습니다. 그래서 심판에 들어갈 악인이 아니라 의인이 되어야 하겠지요.

우리 복 있는 선생님들 신앙의 가을과 겨울도 있지만 시절을 좇아 또 과실을 맺는 사람, 잎사귀가 마름이 없는 그런 은혜의 삶 되시길 바랍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상담인의 겸손_2010.08.07

이번 하계수양회는 내게 전혀 새로운 수양회였다. 여름성경학교 교사로 작년부터 참석했는데, 올해는 상담교사로 봉사를 했기 때문이다. 3학년 중심교회를 맡은 울산교회 부장단으로부터 상담준비를 요청받았지만 실제 상담을 할 수 있을 것인지는 상황에 따라 변수가 작용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수양관 두란노 2층에 도착해서 짐을 풀고 상담석을 살폈다. 서울에서 오신 상담교사 한 분이 와 있었다. 처음에는 상담전도인이 배정되어 있지 않다고 전해 들었다. 그러나 이내 이미 5분의 상담전도사님이 배정되어 있다고 했다. 그래서 나의 상담봉사는 불투명해졌다. 그러나 지영준 전도사님의 허락 하에 상담을 할 수 있었고, 나는 상담의 기회를 잃지 않으려고 7번째 상담석을 미리 준비해뒀다.

여러 상담을 했다. 인상적인 상담도 있었다. 많은 것을 느끼는 상담봉사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귀한 교훈을 얻었다. 김영훈 목사님께서 복음을 풀 때, 뒤에서 말씀을 들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전하시며 ‘주님가신 십자가의 길’이란 어린이들이 부른 찬양을 들려주셨다. 그 찬양이 참 애절하게 다가왔다. 피 흘리며 십자가에 달려 계신 그리스도가 내게 새로운 사색으로 다가왔다.

‘아,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저렇게 벌거벗겨져 수욕과 모욕을 당하고, 저렇게 비참하게 피 흘려 고난 받으셔서 구원을 완성하셨는데... 우리 구원을 위해 저렇게 고통과 슬픔을 다 담당하셨는데, 나는 고작 그리스도께서 이미 완성하시고, 그리스도께서 수고해서 이룬 복음을 단순히 입술의 말로 전하면서 오히려 명예와 영광을 얻고 있구나.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일이다. 나는 겸손해져야 한다. 구원을 이루신 예수님은 저렇게 모욕과 고통과 슬픔을 다 당해서 완성하셨는데, 나는 그걸 전하는 것만으로 영광을 얻고, 명예를 얻으려 한다면 그건 정말 꼴깝이구나. 예수님이 보실 때는 얼마나 건방지고, 어이가 없을까? 싶었다. 절대 상담 좀 할 줄 알고, 상담한다고 내 자랑이나 내 교만, 내 명예욕이 되어서는 안 되겠구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은혜의 부스러기_2010.7.

귀신들린 딸의 치료를 위해 가나안 여자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은 이 이방인 여인의 믿음을 드러내시고자 개에 빗대셨습니다. 그리고 자존심 굽힌 여인의 한 마디가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마 15:27)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군대에서 후임병을 전도할 때 이 말씀을 놓고 새벽 5시에 일어나 기도했던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 군대 와서 신앙의 바닥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나 서원을 꼭 갚고 싶습니다.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습니다. 주님! 바닥에 있는 저에게 은혜의 부스러기라도 주셔야 제가 여기서 살아나가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항상 하나님 은혜에 목말라합니다. 늘 우리 형편에 어려움과 고난, 징계와 시련이 머문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고민하는 바위 같은 문제를 해결해줄 은혜를 구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면 종종 ‘하나님의 은혜를 느낄 수 없어!’ ‘은혜가 내게서 떠났나봐!’라며 탄식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큰 것에만 있는 것은 아니지요.

사람이 죽을 가능성은 3000가지 정도 있다고 합니다. 오늘 이 시간까지 매일 3000번의 고비를 피해 살아왔습니다. 세상에 수만 종의 질병이 있습니다. 오늘도 안전하게 버스를 타고 학교와 교제를 다닙니다. 여전히 주일과 수요일은 말씀을 공급해주십니다. 좁고 불편한 상가임대가 아닌 넓은 교제장소를 이용합니다. 교제를 마치고 돌아갈 때 늘 한결같이 차량봉사를 해주시는 형제자매님이 계십니다. 편히 잠잘 방이 있고,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식탁이 있습니다. 성경을 갖고 다니며 읽을 수 있습니다. 기도할 수 있습니다. 교사모임에 참석합니다. 봉사를 합니다. 찬양을 듣습니다. 구원생일 축하문자를 받습니다. 휴대폰을 갖고 언제든 연락합니다.

이 모든 것! 은혜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은혜에 너무 익숙해져 버린 탓입니다. 생활의 사소함 속에도, 어려운 고난의 과정에도 늘 한결같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의 부스러기가 있습니다. 이방 여자가 구했던 그 작은 부스러기가 우리에게는 만나처럼 매일 내려오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 내 앞에 놓인 바위 같은 고민을 보지 말고, 소복히 내려앉은 하나님의 은혜를 찾아보는 건 어떨까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