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욕의 순종<07. 9. 5>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마16:23)

그리스도께서 직접 말씀하신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얘기를 듣고 베드로는 용감하게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 말하였다. 그런 베드로에게 주님께서 얘기하신다.

‘지금 네 뒤에는 사단이 와있다. 베드로 너를 미혹시켰구나. 나를 넘어지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베드로야 니가 지금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느냐? 그것이 사단이다.’

순종하기 힘들어 하는 내 앞에 주님이 말씀하신다. 
 

‘너는 지금 누구의 일을 생각하고 있느냐? 너의 그 조그만 머리에서 나온 알량하고 고집 쎈 생각과 지식을 좀 내려놓으면 안 되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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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의 진실_2006. 10. 23

 

순종은 그리스도를 향한 참된 사랑의 실천이고 표현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섬기고, 사랑하길 원하며, 그리스도와 더불어 행하길 원하면서 순종하지 않을 때는 그가 그리스도를 섬기는 그 안에 있지 않음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순종은 우리에게 두 가지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하나는 그다지 어렵지 않은 형태로 우리가 만족할 수 있는 모양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생각지 않았던, 예상하지 않았고 원치 않던 모양이다. 당연히 우리가 원했던 모양의 모습의 순종이 다가온다면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원치 않는 모양으로 순종이 나아왔을 때 우리는 적잖히 당황하게 된다. 그제야 참된 순종의 비결, 순종의 진실이 드러나게 된다.

원치 않는 모양의 순종을 만났을 때 순종을 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 그 결정 속에는 참된 그리스도를 섬김과 자아의 부인, 희생, 자기 뜻의 포기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순종이야 말로 참된 믿음의 증거가 될 수 있다.

우리가 순종하지 않을 때 우리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과 믿음의 척도가 드러나게 된다. 그 한계를 바라보게 된다.

그러므로 순종은 하나님과 교회 앞에서 가장 빛나는 덕목이다. 그것은 다른 모든 것을 많은 부분에서 대변해준다. 그것은 자아에 속한 사람에게서 얻을 수 있는 열매가 아니다. 그것은 믿음의 표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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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하는 믿음_2006. 7. 11

 

지난 6월부터 네비게이션을 사용하다보니 길을 지도하는 가운데 내 생각과 다른 길을 제시하는 경우가 가끔씩 발생하곤 했다. 그래서 모르는 길을 가면서도 가끔은 이게 제대로 가는 것일까 의구심이 나는 것이다. 그런데 어김없이 네비게이션은 목적하는 곳을 안내해줄 수 있었다. 내가 생각한 길이 아닌 것 같아도 가다보면 목적지로 향하는 중심도로로 나를 이끌어주었다. 그러면서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다.

네비게이션은 전국의 도로를 알고 있고 필요한 안전운전의 정보도 제공해줄 수 있다. 다시 말해 네비게이션은 내 생각과 내 기준보다 높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의 얄팍한 지식, 내 생각과 기준으로 네비게이션을 오해하고 정죄하고 판단하고 의구심을 던지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칫하면 제대로 안내받을 수 있는 길을 내 생각으로 인해 비켜가고 돌아갈 수 있다.

마치 이는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우리의 모습 속에도 종종 발견된다. 성경말씀이 가르치는 바에 교회 가운데서 교제해주는 바에 있어 우리는 더러 내 생각과 기준에 맞지 않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그래서 선택의 문제 앞에서 종종 고민케 되기도 한다.

특히, 우리가 영적으로 밝은 상태에 있을 때나 개인적으로 영적인 결과와 열매들을 얻고 있을 때에도 우리의 생각과 기준에는 종종 불순한 것이 섞여있다. 한때 영적으로 밝은 상태에 있을 때나 내게 열매가 있을 때 내가 생각하는 것이 옳다고 신뢰할 때가 있었다. 다시 말해 내 생각을 신뢰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꼭 그런 것이 아님을 훗날 알게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성경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에서 보면 베드로가 고넬료와 교제하기 전까지 그리고 그가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하고 돌아온 후 다른 사도들의 비방을 받았을 때를 보면 그들이 구원을 받고 영적으로 강건하며 복음을 힘있게 전하는 성령의 충만 가운데서도 이방인에게는 구원이 없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여전히 유대인의 하나님만을 고집하는 고정관념에 놓여있었다. 또한, 여호수아는 가나안을 정벌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직접적인 인도하심에 있었지만 기브온 거민이 거짓 사신의 모습으로 약조를 맺기 위해 왔을 때는 하나님께 의뢰치 않고 스스로 결정을 함으로써 우를 범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내 생각과 기준에 맞지 않더라도 순종하는 믿음을 가질 때 우리에게 유익이 있다. 어그러짐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고칠 것이다. 그것이 믿음이다. 그것이 순종하는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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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대언자 예수 그리스도.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요일2:1)

우리는 거듭난 이후에도 끝없이 육체와 세상으로부터 오는 죄와 싸움을 합니다. 싸움을 아무리 잘 해도 항상 이기기만 하는 것은 아니지요. 거듭난 이후에도 우리가 사사로운 죄를 범하게 될 때 우리에게 대언자가 계시다고 말씀하십니다. 대언자란 ‘변호사’입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 범죄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변호를 해주기 때문에 우리가 정죄 받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죄의 유혹에 넘어지는 자신으로 힘들어하고 정죄에 빠지기도 합니다. 정죄가 마귀가 주는 것이라고 알면서도 그리스도께서 대속하신 것을 믿으면서도 정작 이것을 잘 적용하지는 못하는 경우를 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의가 어떤 것인지 함께 생각해보면서 은혜를 나누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땅에 계실 때 간음하는 현장에서 잡혀와 벗은 몸으로 남자들에게 둘러싸인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치 아니하노니 다시 가서 죄를 짓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예수님께서 대속적 죽음으로 속죄를 이루기도 전인데 죄인을 받아주시고 정죄하지 않는 모습을 봅니다. 이는 앞으로 있을 대속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미 그리스도께서 대속을 이루시고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주신 현재는 어떨까요? 대속이 이뤄지기 전에도 정죄하지 않을 만큼 긍휼이 있으신 분이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받아들인 우리가 범죄했다고 진노하시며 정죄하실까요?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5:8)

우리가 죄인되었을 그때 이미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사랑을 확증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의를 받은 우리는 얼마나 긍휼히 여기고 사랑하시고, 용서해주실까요? ‘이중전가’란 내용을 설교 중 들으셨을 겁니다. 너무나 중요한 교리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대속의 죽음을 당하셨을 때 우리의 죄는 예수께 전가되었고, 예수님의 완전한 의 곧, 하나님 앞에 맘껏 나아갈 수 있는 의는 우리에게 전가해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덧입었기 때문에 그 어떤 죄의 권세도 우리에게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고, 정죄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죄의 권세가 영향력을 못 미친다는 건 전혀 죄를 짓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죄로부터 오는 모든 정죄와 심판과 고통이 전혀 우리에게 무능한 것으로 죽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죄를 범하면 즉시 예수님은 하나님께 이렇게 변호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십시오. 이미 제가 저 죄를 대신해 심판을 받고, 그 대가를 지불하고 남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들은 원래 부정한 자들이지만 저의 대속적 죽음으로 청산했고, 제가 원래 가진 완전한 의. 곧, 다시는 변질되지도 효력이 떨어지지도 않는 완전한 의를 저들에게 믿음으로 주었습니다. 비록, 믿고 나서 오늘 죄를 범했지만 이미 완전한 의를 가진 자들이니 정죄하지 마옵소서. 죄인에게 긍휼을 베푼 것처럼 저 의인들을 긍휼이 여기고, 사랑을 베풀어주소서.’

예, 그렇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부정한 상태에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의 신분은 완전한 의인이 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우리에게 완전한 의를 전가해주신 그리스도가 변호사로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위로입니까? 그러므로 하나님도 결코 우리의 죄에 대해서 정죄하지 않습니다. 다만, 항상 배웠듯 의인이 된 나와 하나님 관계 속에서 단순히 교제의 회복과 깊은 친교를 위한 이유만으로 철저한 회개와 후회와 반성이 필요한 것 뿐입니다. 이것을 잘 이해하면 정말 지나친 자책과 정죄는 마귀가 주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형제, 자매님들이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은 구원받은 그날의 과거적인 사건으로 제한하는 실수를 범합니다. 그러나 알아야 될 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은 바로 오늘 이 시간, 매 순간 유효하고 적용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만약에 평생을 사사로운 죄부터 큰 죄까지 범하다가 오늘 죽게 된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받아들이고 죽게 되었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러면 그 사람은 지금 죽는 이 순간까지의 모든 죄에 대해 대속해주시고, 의를 주신 예수님을 감사하며 죽을까요 아니면, 정죄가운데 죽을까요? 예, 답은 간단합니다. 감사하며 죽을 것입니다. 왜요? 평생의 죄에 대해 대속해주셨으니까요.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우리의 평생의 죄에 대해 대속해시고 대신해 의를 주셨습니다. 다만, 우리는 시기적으로 죽기 전에 빨리 그 완전한 의를 받아들인 그 차이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대속의 사건을 자신이 구원받았던 과거의 단편적 사건으로 제한해두는 과거지향적 사고 때문에 오늘도 유효한 그리스도의 대속과 완전한 의가 주는 자유와 해방을 누리지 못하고 정죄에 빠져 깊은 시름에 빠진 형제, 자매님들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조금 정리해서 사실 우리의 현재 상태를 보면 여전히 우리는 분명 의인이 아닌 것 같습니다.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롬8:10)

이 말씀처럼 몸의 부활이 있기 전까지 우리 몸은 여전히 죄의 결과로 사망에 머물고 있습니다. 죄성이 인박혀져 죽어있는 부정한 상태인 것이지요. 그러나 부활이 있는 그날 완전한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육체 가운데 주님을 섬기는 그날까지 죄인 같은 내 모습을 날마다 체험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은 우리를 죄인으로 보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현 상태는 죄성이지만, 우리의 현 신분은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받은 의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를 의인으로 보고 계십니다. 그래서 정죄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마귀가 주는 정죄에 빠지겠습니까?

그래서 로마서 7장에서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치 않고 죄는 범하는데 이것이 내 육체의 법(죄의 법)이 마음의 법(성령의 법)과 싸워 이겨서 죄 아래 사로잡아 가는 것이고, 그래서 나는 너무 곤고하다 말합니다. 그러나 바로 이어 8장에서 주는 참 결론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켜주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믿음으로 의를 받은 우리에게는 성령님이 들어오셨고, 이는 성령님의 법이 우리에게 적용되고 있는 것이며, 이 법이 우리 안에 내주한 이상 죄와 사망의 법에서는 이미 해방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 범죄란 것은 정죄와 지나친 자책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 깨어진 친교를 철저히 회복시키는 것에 대한 관점으로 시선을 옮겨야 되며, 수없이 실패를 반복하더라도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되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반복해서 죄를 짓는 자신을 볼 때 종종 이런 허무에 빠지기 쉽습니다. ‘난 정말 안 돼. 난 실패자야. 난 절대 거룩해질 수 없어.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잖아.’ 그러나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포기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요? 포기 안 해도 실수하는 마당에 포기해버리면 얼마나 더 큰 죄에 빠지게 될까요?

얼마 전 인터넷 뉴스에서 매우 감동적은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예순이 넘은 어느 할머니께서 운전면허를 취득하려고 시험을 치는데 필기시험을 무려 950번 째 만에 합격했다는 겁니다. 참 대단한 할머니죠. 그 포기하지 않는 정신이 참 놀랍고 귀감이 됩니다. 그런데 단지 그것만 귀감이될까요? 좀 더 생각해보면 우리는 950번 만에 합격했다는 그 결과만 보고, 놀랄 뿐이지 그 할머니가 949번째 까지는 떨어졌다는 사실은 간과한다는 것입니다. 그 할머니의 소원은 필기시험을 합격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목표를 위해 할머니는 949번이나 실패하는 쓰디쓴 경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사실이지요.

우리의 경건에 대한 연습과 노력도 이에 견주어 생각해보게 됩니다. 나는 안 된다구요? 난 실패자라구요? 949번 이나 실패해서 넘어지고 다시 도전해보셨나요? 몇 번이나 경건에 대해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 도전하고 포기하지 않기를 반복하셨나요? 예, 아마 우리는 이 할머니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노력한다면 하나님은 900번이 되기 한참 전에 우리를 경건의 연습에서 승리하는 삶으로 인도해주실 거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입은 우리를 사사로운 범죄를 했다고 그렇게 미워하고 정죄하고 심판하려 으르렁거리지 않으십니다. 물론, 죄를 용인하자는 말은 결코 아니며, 우리는 벧전1장 말씀처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명령을 목표로 부단한 경건의 연습을 해야 할 의무가 있음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다만, 이 죄성으로 죽은 육체가운데 머물면서 완전해진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닌 만큼 하나님도 우리의 약함을 너무나도 깊이 체휼하고 긍휼히 여기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포기 않고 또 경건을 위해 노력하고 회복하고 일어서는 것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만약, 전투가 있는데 여러분이 1개 사단을 맡은 사단장이라고 생각해봅시다. 1개 사단의 병력을 이끌고 1개 연대와 맞붙었을 때 날아오는 총알과 부상자와 사망자의 수가 있을 것이고, 1개 사단의 병력을 이끌고 1개 군단의 병력과 맞붙었을 때 총알과 부상자와 사망자의 수가 같을 수 있을까요? 분명, 군단과 붙었을 때 더 많은 피해가 있겠지요. 그럴 때 여러분은 사단장으로 이렇게 많은 병사가 부상과 죽음을 당했느냐고 함부로 책망을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함께 가슴 아파하며 긍휼을 베푸시겠습니까? 마치, 오늘날의 시대가 이와 같다 생각합니다. 지금 마귀가 쏘는 죄의 화살은 과거의 때보다 너무나 치열하고 섬세하고 많습니다. 우리 환경이 너무나 죄를 짓기에 좋은 조건들을 갖추고 있는 것이죠. 이 가운데 주님을 섬기는 우리들을 보시는 하나님은 어떨까요? 하나님은 더 많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실 것입니다. 얼마나 치열한 마귀의 화살 속에서 버텨내고, 부상을 당했다 다시 회복해 전장으로 나가고… 그런 가운데 부상당한 병사가 ‘나는 안 돼. 아무리 부상 안 당하려 해도 나가면 또 당하고 마는 걸. 나 그냥 이번에 치료하고 나면 다시는 전장에 안 나갈래.’ 이렇게 말한다면 어떨까요?
아마,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실 것 같습니다. ‘얘야, 그렇지 않다. 나는 니가 또 전장에 나가면 혹 또 부상당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렇지 않으면 나도 좋겠지만 또 그게 그렇게 쉽지 만은 않다는 건 나도 안다. 그러나 포기는 말아다오. 부상을 당하면 다시 치료하고 회복하면 되는 거란다. 지금 나의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단다. 나에겐 나를 위해 싸워줄 병사가 필요하단다. 너처럼 생각해버리면 누가 나를 위해 싸워주겠니? 그러니 다시 회복해서 나가서 나를 위해 싸워다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단다. 나는 다시 네가 회복해서 나를 위해 전장에 나가서 싸워서 내 일을 성취해주는 것이 필요한 거란다. 너는 내게 의인이란다. 그러니 부디 포기한다고 말하진 말아주렴.’

예, 우리에게 경건의 연습이란 너무나 치열하고, 너무나 낙심하고 좌절할 일이 많은 연습입니다. 그러나 이러하다 해서 포기한다면 이것이 더 큰 죄일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이미 의인입니다. 그러므로 지나친 자책과 좌절감으로 포기하는 것이 어울리는 게 아니라 무엇보다 다시 회복하고 포기 않고 다시 싸우려는 자세가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다윗의 이야기는 얼마나 큰 위로를 줍니까? 왜 하나님이 다윗의 범죄와 그럼에도 그가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라는 얘기를 들려주시는 걸까요? 바로 우리 자신들을 위해서 주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다윗이 실제 간음, 살인하고도 회복되고, 용서를 받고,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란 평가까지 받았다면, 사사로운 죄에 빠지는 우리는 얼마나 더 회복되기 쉽고, 긍휼과 용서를 입기 쉽고, 다시 회복하고 주의 일을 힘쓰기에 좋고, 합한 자로 최종 인정받기에 좋지 않겠느냐는 것이죠? 다윗보다 불리한 분 계십니까? 우리에게 주신 완전한 의에 감사와 찬양을 돌리고 포기하지 말고 넘어져도 또 일어나길 반복하면서 부단히 경건의 연습을 하고, 주님의 전쟁이 끝나는 날까지 전장으로 나아가 싸웠으면 합니다.

투표기간 : 2010-10-13~2010-11-03 (현재 투표인원 : 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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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소멸시키는 꿈.

솔로몬 왕의 재산과 지혜가 천하 열왕보다 큰지라 (왕상10:23)

열왕기상을 읽다보면 솔로몬이 누린 세상 최고의 영화에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무엇보다 그는 전방위적 성공을 누렸기 때문입니다. 그는 성도로써 신앙과 물질 양대산맥 모두 최고봉을 차지했습니다.

그는 최고의 성전과 왕궁을 건설했고, 최대의 성전 낙성식을 거행했고, 잠언 3000천을 쓰고, 만물을 논했습니다. 해상무역의 강자 두로왕이 건설을 지원해줬고, 해마다 금, 은, 보석, 동물, 향료등을 실어왔습니다. 그는 명성도 얻었습니다. 그의 지혜를 듣고자 왕들이 모여왔습니다. 그의 보좌에는 12사자형상으로 꾸몄는데 세상 어느 왕도 그런 것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솔직히 솔로몬은 지나치게 축복을 많이 받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왠지 쓸쓸함을 감출 수 없습니다. 왜일까요? 솔로몬의 그 모든 영육간의 부귀영화가 사실 고난 가운데 주를 섬긴 부왕 다윗으로 말미암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무엘에서 보는 다윗과 열왕기에서 만나는 솔로몬은 너무나 이질적입니다.

다윗은 정말 외로웠습니다. 그는 목동의 말째로 태어나 사무엘이 기름부음을 위해 집에 왔을 때혼자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뜻밖의 기름부음을 받았을 때는 쫓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왕위임식 까지 두 번째 기름부음을 받기까지 10여 년을 방랑했습니다. 그는 사울이 던지 단창을 2번 피했습니다. 아내 미갈을 잃었고, 사울을 피해 가드왕에게 갔다가 침을 흘리며 미친 척해야 했습니다. 내 생명과 사망은 한걸음 뿐이라며 서럽게 울었습니다. 왕이 된 이후에도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신발도 못 신고 도망쳤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고집불통 요압으로 고민하고, 그의 창에 압살롬이 죽었을 때는 성문루에서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오열했습니다. 많은 환난, 징계와 가슴을 저미는 슬픔과 고통을 감당한 그에게 주어진 호칭은 ‘내 마음에 합한 자’였습니다. 또, 충성한 결과 약속 받기를 그의 아들의 왕위를 패하지 않고, 성전도 지을 수 있게 해줄 것이라 했습니다.

솔로몬 사실 그의 출생은 불명예스러운 것이었습니다. 다윗에게는 좋은 부인들이 많았지만 솔로몬의 어머니는 원래 우리아란 장군의 아내였습니다. 또한, 그는 장남도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부왕의 은덕을 힘입고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다윗이 그토록 소망한 성전을 지었습니다. 그는 부왕의 감수성을 이어 받아 아가서를 썼습니다. 그는 아쉬움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의 길은 너무나 순탄했습니다. 그는 명예와 명성, 지혜와 지식, 부귀영화를 모두 소유했습니다. 그는 환난과 고난, 가슴 저미는 슬픔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만큼 영화를 누리는 가운데서도 은근히 율법을 범했습니다. 정략결혼으로 수많은 이방왕비를 맞아 밀로성을 건축해주었습니다. 왕은 말을 많이 두지 말라고 했거늘 병거와 마병이 13,400승이었습니다. 그의 마지막은 우상숭배였습니다. 하나님이 두 번 직접 경고하였음에도 불순종했습니다. 어쩌면 솔로몬의 이러한 배은망덕하고 비극적인 결말은 당연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다윗도 많은 실수와 죄를 범했지만 그가 영화로운 명칭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많은 고난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깨지는 것에 익숙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조금도 하나님 앞에서는 강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단의 한 마디에도 완전히 꺾여 부러졌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왕자였습니다. 가난해 본 적이 없고, 아쉬운 적이 없고, 다급할 일이 없고, 굴복할 일이 없었습니다. 자기의 자리가 아닌 왕위까지 굴러왔습니다. 부왕의 은덕으로 그의 위는 견고했고, 성전도 짓고, 똑똑하고, 명성과 명예를 얻고, 보석이 넘치고, 화려한 궁전에 살았습니다.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은은 귀하지도 않았다.’

은이 정말 귀하지 않은 것인가요? 이 모든 환경은 사실 솔로몬으로 하여금 교만해지지 않을 수 없는 모든 것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그는 지나치게 성공했습니다. 그렇게 단 한 번도 부러져보지 않았던 그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깨질 수 있었겠습니까? 다윗은 나단의 말 한 마디에 깨졌지만, 솔로몬은 하나님이 직접 두 번을 나타나서 책망하였음에도 깨질 수가 없었던 것이죠.

이러한 정황을 생각할 때 다윗의 일대기를 읽다가 솔로몬의 일대기로 넘어오면 왠지 모를 슬픔을 느끼게 됩니다. 달라도 어쩌면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그리고 돌아보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고난 중에 주를 섬기는 다윗보다 평안과 영육간의 명예영광을 누리는 솔로몬 같은 신앙생활을 동경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것이 나를 소멸시키는 꿈에 불과한 것을!

투표기간 : 2010-10-13~2010-11-03 (현재 투표인원 : 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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