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시작 (1)

(막 1:1, 개역) 『[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마가복음은 시작과 동시에 복음의 출처와 기원에 대해 말해주고 있습니다. ‘복음의 시작’이라고 명명된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고 단정합니다. 이는 복음의 시작이 하나님의 아들로부터이며, 그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란 의미입니다.

이처럼 복음은 그 자체로 예수 그리스도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성육신과 더불어 복음의 실체는 시작되었고, 예수님의 대속적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복음은 완성되었으며, 성령의 사역을 통한 복음전도와 구원을 통해 복음은 확장되고 실제적인 복음의 활동과 능력이 완성되어 갑니다.

기독교인에게 복음이란 용어는 매우 기초적인 단어입니다. 그러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복음의 용례를 단순히 기독교적 교리와 신앙, 가치관을 수용하는 것으로 적용하는 경우를 봅니다. 그러나 마가복음 1장 1절은 단호히 이 복음의 참 의미가 무엇인지 정확히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복음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배제하고는 전혀 설명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실존과 그의 대속적 죽음이 아니고서는 실체 할 수 없는 그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의 시작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지식과 믿음이 동반되지 않고서는 복음을 이해하고 수용한 것이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최근 ‘복음으로 돌아가야 할 때’란 ccm이 많이 불려지고 있습니다. 제목처럼 복음적인 가사를 담고 있는데, 이 제목을 재해석해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로 이해, 믿는 믿음으로) 돌아가야 할 때’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복음(gospel)이란 단어의 의미를 단순히 ‘기독교적 가치관이나 신앙’ 내지 ‘구원의 말씀’ 정도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이 복음은 그 자체로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며, 그리스도의 궁국적 사역인 대속적 죽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믿고 받아들이는 것’으로 알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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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받으심

예수님은 가난하셨지만 예수님께 헌신한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태어나실 때부터 사람의 헌신을 받으셨습니다.

(마 2:11)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동방박사들은 유대인의 왕을 마땅한 겸손과 예물로 섬겼던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이 정성스럽게 준비한 예물을 생각해보면 그것은 소정의 감사 정도를 표현하는 것 그 이상이었습니다. 왕권을 상징하는 황금과 신성을 상징하는 유향, 고난을 상징하는 몰약까지 깊은 의미를 지닌 모두 귀하고 가치 있는 예물이었습니다.

(마 26:7)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또한, 예수님은 마리아의 헌신을 받으셨습니다. 향유 중에서도 가장 값진 향유 같습니다. 이 향유의 가치는 1년치 연봉에 준한 것이라 합니다. 이외에도 예수님을 섬긴 사례는 많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가난하셨지만 예수님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예수님은 그것을 받아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받으시는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창 14:17-20) 『[17]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을 파하고 돌아올 때에 소돔 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곡에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18]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19]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20]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롯을 구하고 돌아오던 아브람은 살렘 왕 멜기세덱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는 아브람을 축복해 주었고 아브람은 십일조를 멜기세덱에게 주었습니다. 자, 여기서 우리는 이 멜기세덱이란 인물에 주의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이 멜기세덱이 바로 예수님이었기 때문입니다. 살렘(평강) 왕 멜기세덱은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마중 나온 하나님의 제사장이었습니다.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대제사장이십니다.(히7:1-3참조) 다시 말해, 아브람이 만난 멜기세덱은 예수님을 상징하는 평범한 왕이 아니라 실제 예수님 그 자신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람은 실제 예수님께 십일조를 드렸던 것입니다. 이것이 십일조의 시초였습니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실로 큽니다. 우리는 십일조를 드립니다. 우리가 십일조를 드릴 때 예수님께서 실제 우리의 십일조를 받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정신을 잊으면 안 됩니다.

(말 2:9) 『너희가 내 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율법을 행할 때에 사람에게 편벽되이 하였으므로 나도 너희로 모든 백성 앞에 멸시와 천대를 당하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율법을 행함에도 불구하고 그 도는 잊어버렸고, 이 연유로 편벽되었다 합니다. 우리가 단순히 십일조를 하나의 의무적인 행위로만 생각하고 그 이상 아무런 의미도 부여하지 않은 채 습관적으로 드릴 뿐이라면 우리는 실제로 십일조의 정신과 참된 가치를 잊은 편벽됨에 처한 것입니다. 그것은 균형의 상실입니다. 우리는 십일조를 드릴 때 실제로 예수님께 드리고 있다는 것을 매번 되새겨야 합니다.

(마 14:16-18, 개역) 『[16] 예수께서 가라사대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17] 제자들이 가로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니이다 [18] 가라사대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이 있을 때, 굶주린 군중을 위해 먹을 것이 필요했습니다. 제자들은 식사를 위해 200데나리온이 필요하고, 그만큼의 많은 식량을 사와야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럴 필요가 없이 너희가 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심지어 제자들 조차 빵 한 조각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한 아이가 내놓은 빵 5조각과 물고기 2마리가 전부였습니다. 어른들은 먹을 것이 있어도 내놓지 않았지만 이 아이는 내놓았고, 예수님은 그 아이를 축복할 뿐 아니라 모든 군중을 위해 그것을 가져오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것도 아닌 아이의 것을, 그 헌신을 기념하고 군중을 위해 그 작은 것 조차 내게 가져오라고 말씀하신다면 명백한 소유권을 가지신 십일조에 대해서는 어떠하겠습니까! 십일조를 떼먹는 것은 도적질이라고 까지 하심을 생각할 때 분명 십일조를 놓고도 그것을 내게 가져 오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정당한 십일조를 드리지 않으면 사실상 그리스도를 모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병이어를 축사하셨듯 우리의 십일조도 축사하실 것입니다. 내가 복을 쌓을 곳이 없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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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의 분배와 그 소유

(딤전 1:13)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사도 바울은 최초 교회의 핍박자였습니다. 그 이유를 그는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소유에 대해 잘 모르면 하나님의 것을 분별하여 드릴 수 없습니다.

레위기 25장을 보면 희년과 토지에 대한 규례가 있습니다. 희년은 안식년이라 불리는 7년이 7번 반복된 그 다음해 곧, 50년째가 되는 해입니다. 이 희년이 되면 모든 기업(보통 땅)을 처음 상태로 원상복귀 시켜야 했습니다. 재산이 없어 노예가 된 사람은 풀어주고, 땅을 팔거나 산 사람은 원주인에게 돌려줘야 했습니다. 즉, 땅의 경우 최초 가나안 땅 분배를 했던 상태로 되돌아 가는 것입니다. 이로써 이스라엘은 각 지파의 기업을 유지할 수 있었고, 사회는 질서와 안정을 유지했습니다.

토지는 가장 중요한 기업이었습니다. 넓은 땅을 소유하면 많은 소출을 거두고 거부가 됩니다. 땅을 잃어버린 사람은 소작농(노예)이 되기도 합니다. 만약, 누군가 개인 파산으로 인해 땅을 팔아야 했다면 그 근족이 그 땅을 다시 사주도록 했습니다.(레25:25) 그것이 불가능할 때는 희년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토지에 대한 이런 규례가 단순히 지파의 기업을 유지하고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려는 목적만은 아니었습니다.

(레 25:23)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잠 22:28) 『네 선조의 세운 옛 지계석을 옮기지 말지니라』

궁극적인 목적은 토지의 소유주가 하나님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땅을 선민에게 분배해주고 그들로 하여금 생활의 터전을 삼을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그렇다고 그 소유권마저 그들에게 양도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땅의 소유는 영원히 하나님의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분배된 땅에 대한 권리를 남용해서 맘껏 사고 파는 것은 월권 행위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토지의 소산물을 하나님께 바쳐야 했습니다. 다른 의미에서 땅을 분배 받은 모든 지파는 사실상 하나님의 소작농이었던 것입니다.

(신 14:22) 『너는 마땅히 매년에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출 23:19) 『너의 토지에서 처음 익은 열매의 첫 것을 가져다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드릴지니라
(잠 3:9)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땅에 대한 소유 개념과 희년, 안식년에 대한 규례가 모두 흐려졌습니다. 자기 동족으로 노예를 삼고, 희년에 되어도 풀어주지 않았습니다. 땅을 맘대로 사고 팔고, 돌려주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소유에 대한 개념을 망각하고 하나님의 소유를 침범하였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은 우리에게 십일조와 헌물을 요구하십니다. 십일조는 모든 소득의 실제 소유권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공급하신 직장에서 청지기처럼 일합니다. 우리는 노예가 아니기에 소작농은 아니지만 소득의 원천이자 참 소유주가 하나님이심을 정립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를 인정하지 않을 때 곧, 십일조를 떼먹을 때 하나님은 도둑질이라 말씀하십니다.

(말 3:8)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한편, 여기서 도둑질이란 개념을 좀 더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보통 십일조라고 하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소득에서 1/10을 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맞는 말이지만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

만약, 자선단체에서 어느 기업가에게 가서 기부금을 요구했습니다. 이 돈 많은 기업가는 그것을 거절했습니다. 그럼 이 기업가는 도둑놈인가요? 그렇진 않습니다. 다만 인색할 뿐입니다. 반면, 이 기업가가 회계부서에 회사 공금을 은행에 보관해둘 임무를 맡겼습니다. 그런데 회계팀장이 그 공금을 횡령해서 사용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회계팀장은 도둑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이치를 적용해봅시다. 만약, 우리의 소득이 우리의 것이며, 우리가 하나님을 인정하는 행위로 십일조만큼을 떼서 드린다면 십일조는 하나의 기부금이나 헌금 정도로 이해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은 혹 떼먹더라도 결코 도둑질이라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내게 소유권을 준 소득에서 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의미에서 십일조를 떼먹는 것이 도둑질이 되기 위해서는 내 모든 소득도 하나님의 것이지만 무엇보다 십일조는 처음부터 내 소득이 된 적이 없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일조란 것은 그 자체로 처음부터 내 소유가 된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그건 처음부터 하나님의 것으로 인쳐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100만원을 버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내 월급은 100만원이라고 말해선 안 됩니다. 내 소득은 90만원이다라고 말해야 됩니다. 10만원은 처음부터 자신의 소득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자신의 소득이었다면 거기서 십일조를 드리는 행위는 헌금이며, 그것을 떼먹는 것을 도둑질이라고 해선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십일조는 은밀한 의미에서 헌금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권리를 인정하는 하나의 순종적 행위이며, 의무적인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100만원을 벌면 그것을 모두 하나님이 내게 주신 소득이라 생각하며, 그 소득을 주신 원천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행위로 1/10을 바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결코 십일조를 떼먹는 것은 인색하게 구는 것일 뿐이지 도둑질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것을 사람을 통해 하나님께 돌려지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과 같은 물리적은 실체로 존재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100만원을 벌 때 10만원을 받으러 오실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 안에 머무십니다. 우리를 통해 처음부터 하나님의 권리인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받으려는 것입니다. 마치, 기업가가 회계팀장에게 자신의 돈을 은행에 맡겨두라고 하는 것처럼. 그런데 그 십일조를 떼먹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엄연히 도둑질입니다.

(겔 45:10) 『너희는 공평한 저울과 공평한 에바와 공평한 밧을 쓸지니』

그럼 십일조는 어떻게 드려야 할까요? 월급에서 세금을 제외하고 십일조 계산을 해선 안 됩니다. 연봉이 내 소득입니다. 연봉이란 소득에서 세금을 제하고 받은 것일 뿐입니다. 연봉에서 십일조를 드려야 합니다. 또한, 기타의 모든 소득에서도 십일조를 해야 합니다. 차량유지비, 자기계발비 등 또는 어떤 물품을 공급받는 것에서도 할 수 있는 대로 십일조는 드려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공짜로 무엇을 얻는 것은 마냥 기쁜 것만은 아닙니다. 그래서 공짜를 바래서도 안 됩니다. 또, 할 수 있는 대로 십일조 외 헌물도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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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작은 충성

보이는 큰 행위보다 숨은 사소한 행위를 통해 그 사람의 참된 동기를 알 수 있습니다.

(눅16:10)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하다고 반드시 큰 것에도 불의한 것일까요? 일상의 현상을 관찰해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만약, 누군가 신문구독료를 떼먹는다 해서 그가 은행대출이자마저 떼먹는 것은 아닙니다. 한 가장이 아내를 폭행한다고 그가 밖에서도 폭행을 일삼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사업가가 자기 종업원의 임금은 착취하면서도 자선사업에 기부하는 경우를 봅니다.

이처럼 작은 것에 불의하다 해서 꼭 큰 것에 불의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 말씀은 틀린 것일까요? 이 말씀은 사람의 행동 속에 한 가지의 일관된 동기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는 큰 것에 정직하다 해서 그가 반드시 정직한 동기를 갖고 있는 것만은 아니란 것입니다.

신문구독료를 차일피일 미루는 것은 당장 자신의 신뢰에 타격을 입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소홀합니다. 그러나 은행대출이자를 미루면 그것은 눈덩이처럼 불어납니다. 그래서 그는 정직하게 갚아나갑니다. 아내를 폭행하지만 밖에서는 신사처럼 굽니다. 그가 정말 신사여서가 아닙니다. 자신의 평판을 위해서 그런 것일 뿐입니다. 다시 말해, 작은 것을 무시하면서 큰 것에 충성하는 이유는 종종 자기의 명성과 평판을 유지하려는 이기심 때문입니다. 사람의 이목에 신경을 쓰고, 자신을 보호하려는 그릇된 동기로부터 얼마든지 큰 것에는 충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작은 것에 정직할 때 진정으로 큰 것에도 정직할 수 있다는 의미이며, 작은 것에 불의하면서 큰 것에 충성되게 보이는 사람의 충성은 실상 참된 정직이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원리를 이해했다면 이를 우리의 헌금생활에 적용해봅시다.(무엇보다 이 말씀이 불의한 재물을 놓고 한 말씀임을 감안할 때 이 적용은 더욱 타당합니다.) 누군가 소속된 여러 봉사에서 헌신을 보여주면서 꾸준히 회비도 잘 냅니다. 청년회비, 교사회비, 구역회비 등등 그럼에도 십일조는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만약 그러하다면 우리는 이 말씀에 근거 그의 정기적인 회비 납부가 정말 정직한 동기(하나님을 섬김)에서 비롯된 것이라 단정할 수 있을까요? 회비는 드러나지고, 안 낸 사람은 다니면서 내라고까지 합니다. 그러나 십일조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십일조는 모든 헌금의 근본이며, 기초입니다. 십일조가 공개된다면 교회에는 십일조를 내는 사람들만 나오게 될 것입니다. 누군가 회비는 정기적으로 내면서도 십일조를 거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섬기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단지 형제자매들의 평판과 판단을 피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것이 이기심입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기를 섬기는 행위입니다.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 무지입니다.

종종 이런 사람들은 기타의 회비 내는 것으로 십일조 내지 않는 잘못을 어느 정도 무마시키려 듭니다. 그것은 옳은 일일까요?

어떤 선한 삶을 살던 불신자가 죽어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그는 자신의 선행을 들어가며 그것을 참고해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대답은 ‘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하였느냐?’ 그것만을 말하라고 하실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기타의 회비보다 십일조를 어떻게 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모든 회비는 성경이 말하는 연보라는 개념 안에 포함된 것이지만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친히 단도직입적으로 짚어서 요구하신 헌금입니다.(은밀히 말하면 헌금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순종의 표시입니다. 십일조는 다른 그 어떤 헌금보다 우선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모든 헌금의 본질입니다. 그럼에도 십일조를 외면하고 기타의 회비 내는 것으로 거짓 위안을 삼는 사람의 동기가 참으로 헌신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실상 이는 바리새인의 life style입니다. 죄는 고백하지 않으면서 예배적 행위를 위안 삼아 이를 기억해달라고 호소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돋보이는 예배적 행위가 있었지 사랑과 경외는 없었습니다.(그들은 경외한다고 착각했지만.) 그들의 섬김의 동기는 사람들로부터 명성과 섬김을 받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람은 두려워했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진 않았습니다.

드러나지 않는 작은 것에 참된 동기와 정직함으로 행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는 큰 것에는 정직하게 보일 때 사람들은 그를 정직하다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불의하다고 하십니다. 그 숨은 동기의 거짓과 위선을 알기 때문입니다. 드러나는 큰 일은 얼마든지 자신의 평판과 명성을 위한 이기적인 발로에서 거짓된 정직으로 행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참된 정직은 지극히 작은 것에서부터 큰 것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일관된 동기에 뿌리를 둔 것입니다. 그럴 때 예수님은 그의 드러나는 정직을 참된 정직이라고 인정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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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개의 통장 - 평범한 사람이 목돈을 만드는 가장 빠른 시스템 4개의 통장 1
고경호 지음 / 다산북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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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머릿말에도 밝히듯 어떤 성공적인 재테크방법이나 투자를 위한 공식을 알려주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재테크 책이 아니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4개의 통장을 운용해 돈을 지키는 방법과 투자를 하기에 앞서 종잣돈을 모으는 방법을 말한다. 

 결론적으로 이 책 말하는 첫 번째는 '투자 하기 전에 먼저 돈을 지키라'란 것이다. 그럼, 이를 위한 방법은 무엇일까? 바로, 4개의 통장 시스템을 활용해보란 것이다.  

 4개의 통장이란, '급여통장' '소비통장' '예비통장' '투자통장' 이다.  

 하나의 통장에서 일괄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분류별로 통장을 만들어 각각의 통장이 분류대로 스스로 관리, 확인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능숙한 통장관리자에게도 더 많은 팁을 줄 것이고, 자금관리에 어디서 부터 어떻게 접근해야할지 막막한 대부분의 셀러리맨에게 매우 유익한 독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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