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련의 부족

습관의 문제로부터 연계되어 같은 선상에서 다룰 수 있는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훈련의 부족’이란 개념입니다. 신약성경 14권을 기록한 바울의 삶을 그의 서신을 통해 바라볼 때 우리는 바울이 얼마나 철저히 훈련 받은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우리가 바울과 같은 삶을 살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는 바울과 같은 훈련을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 8절에 보면 바울은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하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로 느꼈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정말 심령으로 죽음에 이르기까지 고통을 당한 바울의 훈련이었습니다. 빌립보서 4장 12절에는 풍부에 처할 줄도 알고 비천함에 처할 줄도 알아 자신은 풍부와 비천함을 막론하고 모든 상황에서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진술합니다. 그것이 바울의 훈련이었습니다. 그는 지극히 높은 곳과 지극히 천한 곳까지 그 수위를 가리지 않고 훈련을 받았습니다. 아니, 훈련을 당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실상 혹사를 당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 믿음의 선배이자 동시에 도무지 우리로써는 흉내 낼 수 없는 신앙의 절대 경지에 이른 위인입니다.

단순한 예로 우리는 생활의 조금만 불편이 있고, 물질의 어려움에 봉착해도 믿음의 시험을 당하거나 좌절하거나 원망하거나 심지어 실족까지 합니다. 그 사람이 집을 잃어버린 것도 아닙니다. 단지 생활비의 문제가 있을 때도 그런 현상이 나타난다는 겁니다. 이에 대한 바울의 답변이 그런 것입니다. 나는 빈곤에 처할 줄도 안다고. 나는 풍족함도 누려봤지만 빈곤에 처하는 법도 배워서 이제 부하든지 빈곤하든지 그 어떤 외적인 환경이 내 믿음이나 내 신앙 내 상태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바로 그것이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는 바울의 고백이 가진 근본적 의미일 것입니다. 이런 차이가 바로 ‘훈련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행 24:25-26, 개역) 『[25]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시방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 [26] 동시에 또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 고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더라』

바울이 고소를 당해 지방수도였던 가이사랴의 관내 옥에 갇혀 있었을 때였습니다. 벨릭스 각하는 바울과 대질심문을 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익히 벨릭스란 사람이 매우 탐욕적이고 부도덕하며 파렴치한 인간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특별히 벨릭스 앞에서 설교하길 ‘의와 절제와 장차 올 심판’을 주제로 설교하였던 것입니다. 그 설교는 적중했습니다. 벨릭스는 실제로 그 설교를 들으면서 양심의 두려움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벨릭스란 사람의 이중적 태도였습니다. 본문에서 분명히 벨릭스는 두려움을 호소하는 동시에 뇌물을 기대하는 부정축재의 욕망에 사로잡히고 있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순수하지 못했고, 정직하지 못했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났을까요?

바로 그것은 이 벨릭스란 사람이 이날까지 평생을 살아오면서 탐욕에 연단된 마음으로 살아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사실적으로 도덕적이지 못했습니다. 그는 윤리적이지 못했고, 성결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런 훈련을 받은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는 탐욕과 방탕과 부도덕과 비윤리적인 방식으로 훈련되어진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럼으로 대 사도인 바울의 그 장엄한 ‘의와 절제와 장차 올 심판’에 대한 강론을 들으면서도 그의 마음은 완전히 KO되지 않았습니다. 두려움은 느꼈지만 그는 길들여진대로, 그의 습관대로, 그의 훈련되어진 방식대로 동시에 뇌물을 기대하는 탐욕주의자였습니다.

십일조에 있어서도 그 습관이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불순종에 길들여졌다는 의미이며, 이는 궁극적으로 훈련 받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그 사람은 십일조의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는 벨릭스처럼 양심의 호소를 자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떨쳐버릴 수 없는 이기심과 탐욕, 변명에 훈련 되어진 자아로 말미암아 이중적 태도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벨릭스는 말했습니다. ‘시방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그는 양심의 가책과 두려움을 느낄 때 심한 불편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는 바울의 얼굴과 강론을 듣기 싫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를 다시 부를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가장 근본적인 양심에 호소하는 그 어떤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을 단순히 싫어해서 무시하고 묻어버리기엔 그 내포된 바가 너무나 중대함도 느꼈던 것입니다. 그것이 자신의 영원과 운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문제임을 인식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만, 지금 당장은 그 짓눌러오는 양심의 통증을 떨쳐버리고 싶었습니다. 숨을 쉬고 싶었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가 길들여진 방식대로, 그가 훈련된 방식대로 탐욕과 이기심에 치밀어 올라오는 자신을 부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구절을 심리학적으로 공감해서 이해하려고 시도해볼 때 벨릭스가 심한 내적갈등을 겪음과 더불어 내적장애를 호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심적인 상태는 바로 하나님 말씀 앞에서 우리가 그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지 못할 때 겪는 우리의 내적갈등 및 슬픔과도 굉장히 흡사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말씀 앞에 심한 갈등과 가책을 느낍니다. 그래서 말씀 앞에서 피하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그 말씀 앞에서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으며, 그래서 다시 말씀 앞에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일조의 온전치 못한 행위에 있어서도 습관의 문제와 더불어 이것은 훈련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하나의 동인이 되고 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세례 받으신 예수님

(막 1:9, 개역)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세례 요한이 예수님의 사역을 예비하며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고 있던 어느 날 친히 예수님께서 요단강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요한에게 친히 세례를 베풀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이에 세례 요한은 적잖이 당황했습니다. 그것은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일까요?
히브리서 7장7절에서는 예수님께 복 빌어줌을 받은 아브라함을 묘사하길 이와 같이 묘사하였습니다. ‘폐일언하고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 빎을 받느니라.’ 한자성어에도 ‘장유유서’라고 해서 어른과 아이 사이에 질서가 있다고 합니다. 상식적으로 볼 때, 요한이 예수님께 세례를 베푼다는 것은 납득이 되질 않았습니다.
특히, 요한은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라고 했습니다. 몸을 구부려 예수님의 샌들도 풀어줄 자존감조차 없을 정도라고 이미 선포하였는데, 어찌 감히 예수님께 세례까지 베풀 수 있겠습니까? 덧붙여, 요한의 세례는 죄인들을 준비시키는 ‘회개의 세례’였습니다. 그런데, 죄 없는 예수님께 세례를 베푼다는 것도 가당치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정황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친히 자원하셔서 요한에게 세례를 베풀 것을 요구하셨다는 점입니다. 성령의 세례를 베풀 자격이 있는 예수님께서 어째서 요한의 세례를 받으신 것인지 사뭇 궁금해집니다. 마치, 7성급 스윗트 룸에 숙박할 자격이 있는 대기업 총수가 축축한 뒷골목의 여인숙으로 향하는 것과 비슷한 모습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의 세례를 받음에는 그 나름의 깊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예수님은 비록 하나님의 아들이란 신분을 갖고 계셨지만 그가 인간의 모습이 되심은 그 자체로 그가 이미 낮은 자리에 처하였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특권을 버리셨습니다. 세례 요한 앞에 서 있는 예수님은 그 자체로 완전한 인간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이미 인간의 위치까지 낮아지셨고, 그는 모든 인간의 문제를 함께 짊어져야 했습니다. 전혀 죄가 없었지만 모든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에 그도 그들의 죄를 맡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회개의 세례를 베푸는 요한에게 자신의 세례도 맡기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또한, 세례는 죽음과 부활의 예표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세례 받으심은 우리 죄로 인해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을 예표로 보여준 것이 아닌가 합니다. 한편으로 이는 대속적 사역에 대한 암시이기도 할 것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심과 함께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머리 위에 임재하심을 보았고, 하늘로부터 들리는 신적 음성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세례식이 예수님의 메시야적 행보의 시작을 알리는 기점이 되었다는 것과 하나님의 아들로써 선포되는 신적 인증이 뒤따랐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은 그 자체로 매우 의미 있는 일이었으며,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고 하신 말씀을 증명한 셈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습관의 장애

(말 3:7, 개역)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열조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이 본문에서 저는 ‘너희 열조의 날로부터’란 구절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이 구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이 오랜 세월에 걸쳐 그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 선민으로써 합당한 예배와 섬김을 잃어버린 상태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 민족의 두 가지 상태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는 그들이 하나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않았다는 것. 즉,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섬기는 삶에서 떠나 있다는 것이며, 또 하나는 그들의 그런 외도와 불성실이 단기적인 현상이 아니라 ‘너희 열조의 날로부터’라는 표현으로부터 오랫동안 자행된 고질병. 하나의 습관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한 세대에 걸쳐서만 하나님의 규례를 벗어나 제 맘대로 살아간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관례이자 하나의 전통처럼 자리잡은 불순종이며, 불신앙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들의 그런 불신앙이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지난 오랜 세월 동안 반복되어 유전된 하나의 전통이자 습관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렘 22:21, 개역) 『네가 평안할 때에 내가 네게 말하였으나 네 말이 나는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나니 네가 어려서부터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함이 네 습관이라』

여기서도 역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불순종은 습관의 문제라고 지적하고 계십니다. 그들은 예배와 순종의 삶에서 불순종으로 나아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려서부터 불순종의 종이 되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부모와 그 할아버지와 그 열조부터 그것이 답습되어 왔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의 불순종된 삶의 궁극적인 동인 중에는 ‘습관’의 문제를 결코 배제시킬 수 없습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하고, 순종하지 못하는 결정적인 단서 하나를 찾게 됩니다. 바로 그것은 습관의 문제입니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처음 구원을 받고, 신앙의 삶에 참여하면서부터 가장 먼저 직면하는 문제는 술을 끊는 문제입니다. 결코 쉽게 이기지 못하는 욕망과 다툴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 사람의 습관이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게임중독자, 흡연자, 낚시광 등 특별한 취미에 길들여져 있던 사람들 역시 처음 신앙의 삶에 동참하는데 여러 모양으로 시련을 경험합니다. 모두다 습관이 결정적인 마찰을 일으킵니다.

이스라엘 민족들 역시 동일한 갈등을 경험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김과 예배하는 올바른 삶의 방식에 대해 열조로부터 제대로 교육받고, 훈련 받지 못했습니다. 결과 그들은 어릴 적부터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청종하는 습관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럼으로 그들은 그 습관을 좀처럼 잘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되물림 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십일조에 있어서도 이러한 현상은 곧잘 접목됩니다. 좀처럼 십일조에 있어서 개선이 되지 않는 이유 중에 하나는 바로 습관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마땅히 배워야 할 신앙의 초기 시점에 십일조에 대한 올바른 습관을 양육하지 못했습니다. 십일조에 대한 말씀은 많이 듣고, 배워왔지만 실제적으로 그것을 순종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배우지 못했습니다. 결과 십일조를 해야 한다는 의무감은 느끼고 인식하지만 동시에 습관을 두지 못함으로 인해 끝내 행위의 순종에서는 결렬되는 일종의 장애를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제가 ‘장애’라고 표현한 것에 주목해보십시오. 이 말이 ‘불구’란 의미는 아닙니다. 인터넷 연결이 잘 되지 않으면 우리는 ‘통신장애’란 말을 사용합니다. 여기서 쓰인 ‘장애’란 표현과 같은 의미입니다. 장비에 불구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이유로 장애를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십일조를 해야 함을 알고, 하고 싶긴 한데 왠지 모르게 실천하지 못하고 주저하고 머뭇거리는 자신을 발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장애’입니다. 온전한 십일조 행위에 대한 순종의 행위가 그들에게 습관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처음 컴퓨터를 배운 사람은 타자를 치는데 장애를 느낍니다. 타이핑을 잘 하고 싶은데 독수리 타법을 벗어나질 못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이 그 초기 장애를 꾸준한 반복을 통해 극복한다면 그는 타이핑에 능숙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초기 장애의 상태에서 반복되는 꾸준한 타이핑을 하지 않거나 할 기회가 부족하게 되면 그는 처음 컴퓨터를 만진 때로부터 꽤 몇 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독수리타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에 머물러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여전히 장애를 느끼는 것입니다.

십일조에 있어서도 이러한 원리가 적용됩니다. 십일조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배우는 시점과 그것을 행할 수 있는 기회와 때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꾸준한 순종의 행위를 통해 습관시키지 않으면 그 사람은 십일조에 있어 계속되는 장애의 상태에 길들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고전8:7) 그러나 이 지식은 사람마다 가지지 못하여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습관이 잘못될 때 그것은 습관의 문제로 그치지 않고 다른 병리적인 현상을 동반하게 됩니다. 이를 고린도전서 8장 7절에서는 이와 같이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 신앙의 잘못된 습관을 가진 사람들이 결과적으로 어떤 잘못된 문제를 야기시키는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모든 식물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으로 부정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것이 우상의 신전에 바쳐진 것이라면 굳이 그 사실을 알고도 먹는다는 것은 거리끼는 것입니다. 같은 상의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함께 참예하고 동참한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런 점에서 바울은 우상의 재물은 알고서는 먹지 말 것을 권하였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 안에는 일부 사람들이 우상의 재물인줄 알면서도 여전히 과거의 습관을 따라 거리낌 없이 우상의 재물을 먹음으로 해서 다른 형제자매님들의 마음에 걸림을 주었습니다. 더불어 자신들 스스로도 그 우상의 재물을 여전히 고집하는 습관으로 인해 그 양심이 약하고 더러워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재물 자체에는 어떤 더러운 것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충분히 음식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상의 상에 올라간 이상 굳이 그것을 알고 그 거리끼는 양심으로 먹을 필요는 전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탐에 빠진 사람들은 우상의 재물에 대한 양심의 부정함을 느끼면서도 그들은 양심을 호소를 무시하고 그 우상의 재물을 탐했던 것입니다. 이로 인해 그들의 양심은 무뎌지기 시작했습니다. 처음과 달리 차츰 그들은 익숙하게 별 다른 거리낌 없이 우상의 재물을 형제자매님들이 보는데도 불구하고 먹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 양심이 약학 더러워졌기 때문입니다.

습관적으로 성경읽기를 게을리하는 사람을 보십시오. 처음엔 그것에 대한 각별한 가책을 느낍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어느새 별 거리낌 없이 성경을 읽지 않는 생활에 익숙해져 있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모처럼 시간이 나도 성경을 읽어야 겠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TV를 켜거나, 신문이나 잡지를 읽거나, 인터넷이나 십자수 기타 취미로 여가를 사용해버립니다. 십일조에 대한 불순종의 습관을 가진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습관이 그들에게 익숙해져 있습니다. 이미 그 양심이 약하고 더러워진 결과입니다. 양심이 약하고 더러워졌다는 것은 다른 의미에서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사망의 법과 성령의 법이 싸우는 것을 말하면서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만큼 자아와의 싸움이 치열함으로 인해 선을 온전히 행하기에 전력할 수 없는 무기력을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를 위해 살려고 해도 그러한 싸움으로 무력감을 느낄진대 하물며 그 양심이 약하고 더러워진 그리스도인은 얼만큼 선을 행하기에 무능력함을 느끼겠습니까? 잘 보십시오. 십일조의 순종하는 습관이 갖춰지지 않은 사람들이 대체로 얼마나 비의욕적이고 영적인 일에 무기력한지를. 그들은 교회 안에 참예하지만 언제나 무엇인가 모르는 무기력과 나약함에 길들여져 있음을. 사실상 그는 결코 도덕적이거나 윤리적인 사람이 못됩니다. 비양심적이고 비도덕적이며, 비윤리적인 성향의 사람입니다. 비록 그가 그렇게 보이지 않을지라도 말입니다. 자칫 그것이 지나친 표현이고, 아닌 것같이 생각될지 몰라도 만약, 정기적으로 갚아야 할 당신의 돈을 갚아주지 않으면서 자신은 버젓이 구두와 옷, 파리바게트와 카페를 이용하고 살아가는 모습을 본다면 도둑놈이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 사람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고 있는데, 그가 양심적이고 도덕적인 사람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의미에서 그 사람은 파렴치 범입니다. 어떻게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주를 섬긴다며 봉사하고, 찬양을 부를 수 있을까요? 그것은 주를 섬김에서가 아니라 자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자기 양심의 가책을 덜어보고 무마시켜보기 위한 다른 방편을 활용하는 것일 뿐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내츄럴 요한

(막 1:6, 개역) 『요한은 약대털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세례 요한의 별을 지어보자면 아마 ‘내츄럴 요한’이라고 해도 될 것입니다. 이 짧은 구절은 요한의 외모를 알기 쉽게 설명해줌과 동시에 여기서 요한의 인상착의만 이해하고 넘어가는 것만으로는 부족함을 일으켜 우리를 붙잡아두는 매우 이상 야릇하면서도 무서운 구절입니다.^^

이 구절을 놓고 전에 서도석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이 떠오릅니다. ‘이 성경 구절은 단순히 세례 요한이 심플한 삶을 살았다. 내츄럴하게 살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다른 어떤 특별한 의미를 가진 것이 아닙니다.’ (정확히 옮겼는지 모르겠지만…ㅎ) 그래서 저도 이 구절을 그냥 넘어갈 뻔했습니다. 그런데 딱 한 가지만 덧붙여보고 싶었습니다.

(눅 1:17, 개역)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천사 가브리엘이 세례 요한의 아버지 대제사장 사가랴에게 나타나 일러준 말입니다. 세례 요한에 대해 묘사하길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을 가진 자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와전된 것인지, 서기관들은 메시야가 오기 전 엘리야가 먼저 올 것이라고 공공연히 말했습니다. (실제로 그들이 엘리야의 재림을 기대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막 9:11, 개역) 『이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그런데 이 엘리야의 모습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한 구절이 있습니다.

(왕하 1:8, 개역) 『저희가 대답하되 그는 털이 많은 사람인데 허리에 가죽 띠를 띠었더이다 왕이 가로되 그는 디셉 사람 엘리야로다』

당시 사람들이 허리에 가죽 띠를 많이 착용했을 것 같긴 한데, 털이 많다는 점은 엘리야가 지닌 특징 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더불어 왠지 모르게 세례 요한의 이미지와도 친숙한 느낌이 드는 건 단순한 우연일까요?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을 갖고 메시야의 앞에 온 세례 요한은 그 내츄럴한 모습마저도 어쩌면 엘리야와 친숙했을지 모르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마음의 문제

(고후 8:12, 개역)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하시리라』

고린도후서 8장 자체가 마케도니아 교회의 후한 연보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교회의 연보를 격려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이 말을 덧붙였습니다. 할 마음이 있다면 그 있는 만큼이라도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이 있겠지만 만약,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이 없다면 그 이유는 할 마음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렇다고 인정하시나요? 이 말씀을 적용해 보면 우리는 또 다른 의미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을 적용해 보고 싶은 어떤 사람의 변명을 들려드리겠습니다. 할 마음이 없었다는 책망에 대한 이 사람의 변명은 이런 것입니다. ‘아뇨, 전 할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저도 정말 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막상 내자니 금액이 적어 모양새가 나지 않아 못했을 뿐이예요.’ 어떻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바울의 이 말씀은 이러한 사람을 포함해서 하신 말씀이란 사실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변명하는 사람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유가 되었든 할 마음이 있었다면 그 마음이 있는 대로 하나님은 받으시는 것이 있으실 것입니다. 마음이 없는 것을 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누군가 전혀 물질의 참여가 없었다면 그는 사실상 참으로 하고자 하는 마음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라구요.

이 교훈은 우리가 평소에 얼마나 얕은 의지로 우리의 부족한 행위에 대해 많은 변명을 하게 되는지 일깨워줍니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에 익숙합니다. ‘아냐, 나도 정말 하고 싶었어.’, ‘나도 진심이었다구 다만…’ 그러나 이런 표현은 모두 정말 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하지 못했다는 것의 반증입니다. 오히려 이것은 해야 한다는 의무감내지 필요성은 충분히 인식했지만 실제적으로 그것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는 턱없이 부족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에 불과합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빠지는 모순이며, 우리가 취하는 자기기만의 실체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 마음에는 일종의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마음의 문제는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더 큰 문제들도 발견됩니다.

(마 13:15, 개역)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 함이라 하였느니라』

이사야는 회개치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진 문제를 적나라하게 꼬집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께 대하여 완악했습니다. 그 마음의 결과 그들은 모든 인식할 수 있는 감각기관에 마비가 초래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고침을 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고침을 받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인식하고 순종해야 함을 깨닫는 것에 있어서 모든 방법과 수단을 닫아버렸습니다. 완악한 마음의 문제가 있습니다. 누군가는 십일조에 있어서 고침 받는 것조차 두려워합니다. 그들의 고민은 이와 같은 것입니다.
‘내가 만약, 십일조를 하기 시작하면 당장 이번 달부터 내 씀씀이는 타격을 받게 될 거야. 그렇지 않고서는 적금을 깨버려야 돼. 그건 최소한 연간 200만원의 적금을 줄이는 결과를 낳는 거지. 안 그래도 얼마 모으지도 못하는데. 또한, 십일조 하는 만큼의 금액을 보완하려면 난 택시를 타거나, 파리바게트를 이용하거나, 카페에 가는 건 아예 포기해야 될 거야. 아니, 그렇게까지 각박해지는 생활은 정말 참기 힘든 일이야. 난 그 정도로 믿음이 견고하진 않다구. 정말 주님을 섬기긴 힘든 일이군. 나도 주님을 섬기고 싶지만, 나도 십일조를 하고는 싶지만 그것을 하기엔 너무 힘든 희생이 요구되고 있어. 난 도무지 자신이 없군. 안돼. 십일조 말씀을 들을 때마다 괴롭긴 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다구.’

그는 분명 괴로움을 느끼지만 궁극적으로 바뀌지 않는 진리가 있다면 이것입니다.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고침을 받을까 두렵구나. 난 고난이 싫어. 난 그것을 감당할 수 없어.’

(학 1:4, 개역) 『이 전이 황무하였거늘 너희가 이 때에 판벽한 집에 거하는 것이 가하냐』

하나님의 성전을 재건하는 일은 재쳐 두고 각자 자기들의 집만 멋지게 지어서 사는 것을 보고 학개가 그들의 양심에 호소하는 한 마디입니다. 판벽한 집이란 벽을 쳐서 두른 집이란 의미로 곧, 잘 지어진 좋은 집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담이 무너지고, 돌이 깨지고, 거미가 줄을 치고, 시랑이 들어가 잠을 자고 똥을 누고 있는데, 그들은 아랑곳 않고 자기들만 시랑과 동물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담을 쳐놓고 좋은 집을 지어서 안식하고 있었습니다. 학개의 마음은 이런 것입니다.
‘정말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이라는 당신들의 양심이란 말입니까! 저 하나님의 전 안에 비바람이 몰아치고, 거미가 줄을 치고, 시랑과 늑대가 자기 처소인양 짓밟고 들락거리며 울부짖습니다. 벌레들이 지성소까지 들어가고, 황량한 모래먼지와 낙엽과 쓰레기들이 저 거룩한 지성소까지 수북하게 싸였습니다. 저기가 바로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나님의 집이 저 모양이거들 하나님의 백성이란 당신들이 높이 쌓고 튼튼히 채워 견고한 망대처럼 집을 두르고 아름답고 멋진 집을 지어 기쁘다고 안식하고 있으니 그것이 당신들의 양심이었단 말입니까! 이를 위해 당신들이 페르시아에서 이곳까지 되돌아온 것이었단 말입니까! 차라리 당신들조차 황무한 집에 있는 것이 낫겠습니다! 하나님의 집은 저 비바람에 휩쓸려 가거늘’

네, 실로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소유의 재물인 십일조함은 황무하기 그지 없는데 우리의 적금통장은 판벽된 집이 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것이 우리의 양심이란 말입니까?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행위의 실상입니까?

이제 마지막 마음을 보여드리겠습니다.

(행 5:3-4, 개역) 『[3]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4]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여기서 언급되는 마음의 문제는 ‘사단의 마음’입니다. 아나니야는 고의적으로 땅값 얼마를 감췄습니다. 이런 고의적인 속임과 거짓말. 위선적인 아나니야의 태도에 대해 베드로는 이 문제의 동인이 무엇인지 이와 같이 밝힌 것입니다. 그것은 사단의 마음이며 그러므로 그것은 성령을 속이려는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단의 별명이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압니다. 요한계시록 12장에서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에게 경고하시면서 네 아버지는 마귀이며, 거짓의 아비라고 천명했습니다. 베드로가 여기서 아나니야에게 말하는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했다’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입니다. 속이고 거짓말하는 거짓의 아비 마귀가 네 마음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마저 속이려 했고, 속일 수 있다고 착각해버렸습니다. 불가능한 속임수에 도전했습니다. 마귀에게 속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 각자의 십일조에 대해서 그 얼마를 감추려 할 때, 그 마음은 사단의 마음일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호소하시는 성령님을 속였던 것입니다. 어째서입니까? 성령님은 결코 그런 마음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성령님은 정직한 십일조를 호소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을 속였습니다. 사단의 마음 거짓의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그 얼마를 또는 그 전부를 감춰버렸습니다. 그 사람이 성령충만을 받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원리입니다. 성령을 근심시키고, 소멸시키는 사람입니다. 실상 그는 성령님을 배제하고 사단의 지배 아래에 속고 속이는 위선에 취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비참한 상태를 감지하지 못합니다. 행함이 없이 그저 도를 들으면 되고, 찬양 부르면 되고, 봉사하면 되고, 십일조 말씀 할 때 잠시 괴로워해주면 되고, 하나님의 집은 황량하면 되고, 나는 판벽한 집이 있으면 되고… 그렇게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