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이름 요나단_2010.11.15

(삼상 23:16, 개역)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일어나 수풀에 들어가서 다윗에게 이르러 그로 하나님을 힘있게 의지하게 하였는데

다윗을 향한 사울의 살기가 극에 달할 무렵 요나단은 다윗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나섰고, 다윗의 훌륭한 지원자가 되어주었다. 요나단이란 인물을 유심히 보면 그 역시 매우 위대한 군인이었고, 인격과 덕을 골고루 갖춘 인격자였다. 다윗이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요나단은 왕의 아들로써 미래를 보장받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 용맹스런 장군은 블레셋 진영을 관통하고 들어가 전투를 벌이는 용맹함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에게서 돋보이는 아름다운 덕목은 겸손이자 성령 충만한 신앙, 다윗왕을 존재케 한 조력자였다는 점일 것이다.

골리앗이 거만을 떨고 있을 때, 요나단조차 전혀 용맹을 발휘하지 못한 채 자신의 무기력을 발견할 뿐이었다. 모든 것이 불가능해보일 그때, 혜성처럼 나타난 다윗은 그 거구를 넘어뜨렸다. 요나단은 저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함께하는 다윗에게 단번에 매료되고 말았다. 요나단은 자신의 왕자란 지위와 명예, 왕의 후계자란 모든 자존심과 기득권을 다 내버리고 다윗의 지원자요, 추종자로 자처했다.

다윗이 사울의 칼 앞에 섰을 때, 요나단은 더욱 다윗을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그로 하여금 좌절하지 않도록 도왔다. 그것이 요나단의 인격과 덕이며, 그가 지닌 성령 충만한 신앙의 단면이었다. 잃어버린 10년을 지나 다윗은 위대한 왕으로 세워졌고, 그는 이스라엘 역사와 성경의 중요한 주인공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원래 그 자리는 요나단의 자리가 되어야 했던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나단은 자신의 모든 지위는 내려놓았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원하신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요나단은 침착한 인격자였고,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고 그 안에 굴복할 줄 아는 위대한 신앙인이었다. 다윗을 있게 한 가장 중요한 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바로 요나단일 것이다. 요나단이 아니었다면 다윗은 이미 그 고난의 초창기에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하나님은 요나단의 겸손과 충만한 신앙을 통해 다윗을 세우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계획대로 이뤄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요나단을 기억하고 있는 걸까? 이 아름다운 청년 요나단의 마지막을 보자. 그는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아버지 사울왕과 더불어 전사하고 만다. 그것도 패배와 함께 치욕적인 죽임을 당했다. 자신의 기득권과 왕권을 포기하고 다윗을 조력했던 요나단 그러나 자신은 정작 할례 받지 못한 블레셋의 칼날에 초라하고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그의 모습은 마치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니’라고 외쳤던 세례 요한의 외침을 연상시킨다.

잊혀진 이름 요나단. 그러나 그의 덕과 아름다운 신앙은 저 하늘의 흐트러지지 않는 빛을 내뿜는 별들처럼 반짝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생각게 된다. 다윗이 얻은 귀한 보석 요나단. 좌절하고 낙심될 때 정말 하나님을 힘있게 의지하게 독려해주는 그 누군가가 얼마나 필요한가. 나는 다른 누군가에게 요나단이 되고 있는지 또 나에게는 요나단이 곁에 있는 것인지 생각게 된다. 저 아름다운 사람 요나단이 그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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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개나 벼룩_2010.11.14

(삼상 24:14) 『이스라엘 왕이 누구를 따라 나왔으며 누구를 쫓나이까 죽은 개나 벼룩을 쫓음이니이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늘 그랬지만, 항상 다윗의 일대기는 내게 너무나 많은 것을 보여주며 많은 것을 알게 해준다. 다윗은 언제나 친근하게 느껴진다. 다윗은 너무나 우리 신앙의 리얼리티즘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다윗을 사랑하는지 모른다. 그가 비록 간음죄를 지었음에도 우리는 그를 미워하지 않는다.

다윗은 10년 동안 왕의 칼을 피해 도망 다녔던 유랑자였다. 그러나 그가 처음부터 유랑자였던 건 아니다. 다윗은 종종 이렇게 소개된다. ‘그는 목동이자 시인(또는 음악가), 군인(군대장관), 왕이었다.’라고 말이다. 어쩌면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 다양한 경험이 위대한 다윗왕을 만든 것이 아니겠는가.

아버지 다윗과 아들 솔로몬이 달라도 너무나 다른 신앙의 결과를 남긴 것을 생각해볼 때, 우리는 다윗과 솔로몬이 너무나도 다른 삶을 살았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다윗은 너무나도 많이 부러져본 사람이다. 그는 조금도 하나님 앞에 강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솔로몬은 단 한 번도 부러져본 적이 없었다. 그는 서자이면서도 왕의 지위까지 받았다. 부와 명예, 지식까지 부족함이 없었다. 다윗은 선지자 나단의 한 마디에 꼬꾸라졌지만,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직접 두 번을 나타났을 때도 부러지지 않았다. 그들이 살아온 삶의 반응이다.

다윗, 목동의 말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 역시 목동이었고, 사무엘이 찾아올 때만 해도 그에게 그 어떠한 비전도 없었다. 사무엘의 기름부음은 급격한 전환점의 신호탄이었다. 일개 목동의 말째 아들에게 기름부음이 있었다.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는 신의 선택을 받았고, 왕의 후계자로 지목되었다. 파란이었다. 그러나 이로 말미암아 그는 얘기치 않은 인생의 파란만장한 파도 속으로 나아가야 했다. 마치,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께서 광야로 나아가셨던 것처럼 말이다.

‘다윗은 만만이요 사울은 천천이니’ 골리앗을 거꾸러뜨린 다윗은 일개 영웅으로 급부상했다. 그는 즉각 군대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이때부터 불편한 사울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목동이 기름부음을 받았고, 그는 군대장관이 되었다. 또한, 그는 왕의 사위가 되었다. 사울왕의 딸 미갈은 다윗을 사랑했다. 목동이 군대장관을 넘어 왕의 사위가 되었다. 파란이었다. 다윗은 근본적으로 누릴 수 없는 명예와 지위를 얻었다.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었다.

그러나 왕의 머리 위에 올라서는 그 무엇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 왕관이 아니라면 말이다. 사울이 던진 두 개의 창을 피했던 다윗은 아내 미갈의 도움으로 도망친다. 바로, 다윗의 급속한 성공가도가 일시에 꺾인 시기였다. 상상할 수 없는 참혹함이 찾아오고 있었다. 이전의 모든 성공은 잊어버려야 할 만큼 ‘다윗의 잃어버린 10년’이 온 것이다. ‘도피’라고 하면 몸서리 쳐질 만큼 지겨운 겨울이 찾아온 것이었다. 그리고 또 다시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었다. ‘이야, 참 다윗. 목동으로 나서 군대장관에 왕의 사위까지 아주 그냥 쌩쌩 잘 나가더만 이거 완전 왕의 눈에 나가지고 이젠 도망자 신세가 됐어. 참, 사람 일 어찌 될지 모르는 거야. 쯧쯧’

그러나 이 잃어버린 10년 속에서도 유독 다윗의 위대함을 드러내보여 주는 장면이 사울왕을 두 번씩이나 살려주는 모습이었지 않나 생각한다. 다윗의 추종자들이 사울을 죽일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했을 때, 그는 왕의 옷깃을 베고 심히 괴로워했다. 떠나가는 사울의 뒤에서 비명처럼 소리 질렀다. ‘왕을 해하려 한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을 왕은 어찌하여 들으시나이까!’ 다윗은 사울을 조금도 해칠 수 없었다. 바로, 사울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나발을 쳐 죽이려 분노했던 다윗이건만 저 철천지원쑤처럼 10년을 추적하며 죽이려는 사울에게는 조금도 어깨를 펼 수 없었다. 오직 하나, 그가 기름 부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굴욕의 다윗, 그 견고한 중심의 위대함이 드러난다.

10년 이란 세월을 칼을 피해 유랑방란 한다는 것은 얼마나 지긋지긋한 고통일까? 누가 그런 극심한 스트레스를 이겨낼 수 있을까? 만약, 나라면 1년 만이라도 그렇게 도망쳐야 할 신세가 된다면 사울을 죽일 기회가 왔을 때 두 번 생각할 것 없이 그를 찔러 죽였을지 모르겠다.

다윗이 사울을 향해 그 억울함을 호소하며 또한, 이렇게 소리쳤다.
‘하나님의 이스라엘 왕이 지금 누구를 쫓아다니고 있는 겁니까! 한낱 죽은 개와 벼룩을 쫓다니요!’
아, 다윗! 이미 기름부음을 받은 자, 위대한 군인이자 민족적 영웅, 왕의 사위. 그가 죽은 개와 벼룩이라니! 그러나 이 비명이야 말로 다윗의 진심이었다. 이것은 진실이었다. 3000년 전 그날 다윗의 모습이었다.

비전 없이 양을 치던 꾀죄죄한 꼬마 목동이 기름 부음을 받고,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군대장관 되었다. 왕의 딸의 사랑을 받으며 왕의 사위까지 신분상승을 했다. 상상할 수 없는 성공가도를 달리던 다윗이건만 이제는 더 이상 그 화려했던 추억과 승리는 죽은 개처럼 ‘과거란 무덤’에 묻혔다. 뛰어봤지 벼룩이라던, 막아둔 뚜껑에 치이다 더 이상 뛰지 않는 벼룩처럼 칼을 피해 여기저기 뛰어다닐 뿐 더 이상 안락한 삶도 생명도 보장되지 않는 도망자신세. 그의 지원자였던 아내 미갈과도 헤어졌다. 훗날 미갈을 되찾았을 때, 이 모든 어둠을 지나 왕이 된 기쁨으로 춤추던 날 미갈은 다윗을 비웃고 있었다. 그렇게 소원해질 수가...

다윗은 진심을 말했다. 이제 나는 정말 죽은 개나 벼룩일 뿐이라고. 내가 정말 기름 부음을 받았었는지, 내가 정말 골리앗을 쓰러뜨렸었는지, 내가 정말 군대장관이였었는지, 내가 정말 왕의 사위였었는지, 내가 정말 미갈의 사랑을 받았던 것이었는지... 잃어버린 10년을 지나면서 기억조차 할 수 없다라고. 누가 나를 향해 개나 벼룩이라고 조롱할지라도 나 역시 내가 내가 아니며, 할 말이 없다라고.

그리고 그 후 또, 다윗은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이는 비록 반복되는 것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겨울이 유난히 길고, 매서울지라도 봄은 다시 오는 것이며, 나를 죽이지 않는 것은 바로 나를 강하게 하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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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의 부족

습관의 문제로부터 연계되어 같은 선상에서 다룰 수 있는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훈련의 부족’이란 개념입니다. 신약성경 14권을 기록한 바울의 삶을 그의 서신을 통해 바라볼 때 우리는 바울이 얼마나 철저히 훈련 받은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우리가 바울과 같은 삶을 살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는 바울과 같은 훈련을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 8절에 보면 바울은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하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로 느꼈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정말 심령으로 죽음에 이르기까지 고통을 당한 바울의 훈련이었습니다. 빌립보서 4장 12절에는 풍부에 처할 줄도 알고 비천함에 처할 줄도 알아 자신은 풍부와 비천함을 막론하고 모든 상황에서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진술합니다. 그것이 바울의 훈련이었습니다. 그는 지극히 높은 곳과 지극히 천한 곳까지 그 수위를 가리지 않고 훈련을 받았습니다. 아니, 훈련을 당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실상 혹사를 당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 믿음의 선배이자 동시에 도무지 우리로써는 흉내 낼 수 없는 신앙의 절대 경지에 이른 위인입니다.

단순한 예로 우리는 생활의 조금만 불편이 있고, 물질의 어려움에 봉착해도 믿음의 시험을 당하거나 좌절하거나 원망하거나 심지어 실족까지 합니다. 그 사람이 집을 잃어버린 것도 아닙니다. 단지 생활비의 문제가 있을 때도 그런 현상이 나타난다는 겁니다. 이에 대한 바울의 답변이 그런 것입니다. 나는 빈곤에 처할 줄도 안다고. 나는 풍족함도 누려봤지만 빈곤에 처하는 법도 배워서 이제 부하든지 빈곤하든지 그 어떤 외적인 환경이 내 믿음이나 내 신앙 내 상태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바로 그것이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는 바울의 고백이 가진 근본적 의미일 것입니다. 이런 차이가 바로 ‘훈련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행 24:25-26, 개역) 『[25]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시방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 [26] 동시에 또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 고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더라』

바울이 고소를 당해 지방수도였던 가이사랴의 관내 옥에 갇혀 있었을 때였습니다. 벨릭스 각하는 바울과 대질심문을 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익히 벨릭스란 사람이 매우 탐욕적이고 부도덕하며 파렴치한 인간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특별히 벨릭스 앞에서 설교하길 ‘의와 절제와 장차 올 심판’을 주제로 설교하였던 것입니다. 그 설교는 적중했습니다. 벨릭스는 실제로 그 설교를 들으면서 양심의 두려움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벨릭스란 사람의 이중적 태도였습니다. 본문에서 분명히 벨릭스는 두려움을 호소하는 동시에 뇌물을 기대하는 부정축재의 욕망에 사로잡히고 있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순수하지 못했고, 정직하지 못했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났을까요?

바로 그것은 이 벨릭스란 사람이 이날까지 평생을 살아오면서 탐욕에 연단된 마음으로 살아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사실적으로 도덕적이지 못했습니다. 그는 윤리적이지 못했고, 성결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런 훈련을 받은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는 탐욕과 방탕과 부도덕과 비윤리적인 방식으로 훈련되어진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럼으로 대 사도인 바울의 그 장엄한 ‘의와 절제와 장차 올 심판’에 대한 강론을 들으면서도 그의 마음은 완전히 KO되지 않았습니다. 두려움은 느꼈지만 그는 길들여진대로, 그의 습관대로, 그의 훈련되어진 방식대로 동시에 뇌물을 기대하는 탐욕주의자였습니다.

십일조에 있어서도 그 습관이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불순종에 길들여졌다는 의미이며, 이는 궁극적으로 훈련 받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그 사람은 십일조의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는 벨릭스처럼 양심의 호소를 자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떨쳐버릴 수 없는 이기심과 탐욕, 변명에 훈련 되어진 자아로 말미암아 이중적 태도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벨릭스는 말했습니다. ‘시방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그는 양심의 가책과 두려움을 느낄 때 심한 불편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는 바울의 얼굴과 강론을 듣기 싫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를 다시 부를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가장 근본적인 양심에 호소하는 그 어떤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을 단순히 싫어해서 무시하고 묻어버리기엔 그 내포된 바가 너무나 중대함도 느꼈던 것입니다. 그것이 자신의 영원과 운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문제임을 인식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만, 지금 당장은 그 짓눌러오는 양심의 통증을 떨쳐버리고 싶었습니다. 숨을 쉬고 싶었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가 길들여진 방식대로, 그가 훈련된 방식대로 탐욕과 이기심에 치밀어 올라오는 자신을 부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구절을 심리학적으로 공감해서 이해하려고 시도해볼 때 벨릭스가 심한 내적갈등을 겪음과 더불어 내적장애를 호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심적인 상태는 바로 하나님 말씀 앞에서 우리가 그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지 못할 때 겪는 우리의 내적갈등 및 슬픔과도 굉장히 흡사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말씀 앞에 심한 갈등과 가책을 느낍니다. 그래서 말씀 앞에서 피하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그 말씀 앞에서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으며, 그래서 다시 말씀 앞에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일조의 온전치 못한 행위에 있어서도 습관의 문제와 더불어 이것은 훈련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하나의 동인이 되고 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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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 받으신 예수님

(막 1:9, 개역)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세례 요한이 예수님의 사역을 예비하며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고 있던 어느 날 친히 예수님께서 요단강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요한에게 친히 세례를 베풀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이에 세례 요한은 적잖이 당황했습니다. 그것은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일까요?
히브리서 7장7절에서는 예수님께 복 빌어줌을 받은 아브라함을 묘사하길 이와 같이 묘사하였습니다. ‘폐일언하고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 빎을 받느니라.’ 한자성어에도 ‘장유유서’라고 해서 어른과 아이 사이에 질서가 있다고 합니다. 상식적으로 볼 때, 요한이 예수님께 세례를 베푼다는 것은 납득이 되질 않았습니다.
특히, 요한은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라고 했습니다. 몸을 구부려 예수님의 샌들도 풀어줄 자존감조차 없을 정도라고 이미 선포하였는데, 어찌 감히 예수님께 세례까지 베풀 수 있겠습니까? 덧붙여, 요한의 세례는 죄인들을 준비시키는 ‘회개의 세례’였습니다. 그런데, 죄 없는 예수님께 세례를 베푼다는 것도 가당치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정황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친히 자원하셔서 요한에게 세례를 베풀 것을 요구하셨다는 점입니다. 성령의 세례를 베풀 자격이 있는 예수님께서 어째서 요한의 세례를 받으신 것인지 사뭇 궁금해집니다. 마치, 7성급 스윗트 룸에 숙박할 자격이 있는 대기업 총수가 축축한 뒷골목의 여인숙으로 향하는 것과 비슷한 모습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의 세례를 받음에는 그 나름의 깊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예수님은 비록 하나님의 아들이란 신분을 갖고 계셨지만 그가 인간의 모습이 되심은 그 자체로 그가 이미 낮은 자리에 처하였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특권을 버리셨습니다. 세례 요한 앞에 서 있는 예수님은 그 자체로 완전한 인간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이미 인간의 위치까지 낮아지셨고, 그는 모든 인간의 문제를 함께 짊어져야 했습니다. 전혀 죄가 없었지만 모든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에 그도 그들의 죄를 맡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회개의 세례를 베푸는 요한에게 자신의 세례도 맡기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또한, 세례는 죽음과 부활의 예표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세례 받으심은 우리 죄로 인해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을 예표로 보여준 것이 아닌가 합니다. 한편으로 이는 대속적 사역에 대한 암시이기도 할 것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심과 함께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머리 위에 임재하심을 보았고, 하늘로부터 들리는 신적 음성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세례식이 예수님의 메시야적 행보의 시작을 알리는 기점이 되었다는 것과 하나님의 아들로써 선포되는 신적 인증이 뒤따랐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은 그 자체로 매우 의미 있는 일이었으며,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고 하신 말씀을 증명한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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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관의 장애

(말 3:7, 개역)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열조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이 본문에서 저는 ‘너희 열조의 날로부터’란 구절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이 구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이 오랜 세월에 걸쳐 그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 선민으로써 합당한 예배와 섬김을 잃어버린 상태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 민족의 두 가지 상태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는 그들이 하나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않았다는 것. 즉,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섬기는 삶에서 떠나 있다는 것이며, 또 하나는 그들의 그런 외도와 불성실이 단기적인 현상이 아니라 ‘너희 열조의 날로부터’라는 표현으로부터 오랫동안 자행된 고질병. 하나의 습관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한 세대에 걸쳐서만 하나님의 규례를 벗어나 제 맘대로 살아간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관례이자 하나의 전통처럼 자리잡은 불순종이며, 불신앙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들의 그런 불신앙이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지난 오랜 세월 동안 반복되어 유전된 하나의 전통이자 습관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렘 22:21, 개역) 『네가 평안할 때에 내가 네게 말하였으나 네 말이 나는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나니 네가 어려서부터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함이 네 습관이라』

여기서도 역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불순종은 습관의 문제라고 지적하고 계십니다. 그들은 예배와 순종의 삶에서 불순종으로 나아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려서부터 불순종의 종이 되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부모와 그 할아버지와 그 열조부터 그것이 답습되어 왔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의 불순종된 삶의 궁극적인 동인 중에는 ‘습관’의 문제를 결코 배제시킬 수 없습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하고, 순종하지 못하는 결정적인 단서 하나를 찾게 됩니다. 바로 그것은 습관의 문제입니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처음 구원을 받고, 신앙의 삶에 참여하면서부터 가장 먼저 직면하는 문제는 술을 끊는 문제입니다. 결코 쉽게 이기지 못하는 욕망과 다툴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 사람의 습관이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게임중독자, 흡연자, 낚시광 등 특별한 취미에 길들여져 있던 사람들 역시 처음 신앙의 삶에 동참하는데 여러 모양으로 시련을 경험합니다. 모두다 습관이 결정적인 마찰을 일으킵니다.

이스라엘 민족들 역시 동일한 갈등을 경험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김과 예배하는 올바른 삶의 방식에 대해 열조로부터 제대로 교육받고, 훈련 받지 못했습니다. 결과 그들은 어릴 적부터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청종하는 습관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럼으로 그들은 그 습관을 좀처럼 잘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되물림 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십일조에 있어서도 이러한 현상은 곧잘 접목됩니다. 좀처럼 십일조에 있어서 개선이 되지 않는 이유 중에 하나는 바로 습관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마땅히 배워야 할 신앙의 초기 시점에 십일조에 대한 올바른 습관을 양육하지 못했습니다. 십일조에 대한 말씀은 많이 듣고, 배워왔지만 실제적으로 그것을 순종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배우지 못했습니다. 결과 십일조를 해야 한다는 의무감은 느끼고 인식하지만 동시에 습관을 두지 못함으로 인해 끝내 행위의 순종에서는 결렬되는 일종의 장애를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제가 ‘장애’라고 표현한 것에 주목해보십시오. 이 말이 ‘불구’란 의미는 아닙니다. 인터넷 연결이 잘 되지 않으면 우리는 ‘통신장애’란 말을 사용합니다. 여기서 쓰인 ‘장애’란 표현과 같은 의미입니다. 장비에 불구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이유로 장애를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십일조를 해야 함을 알고, 하고 싶긴 한데 왠지 모르게 실천하지 못하고 주저하고 머뭇거리는 자신을 발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장애’입니다. 온전한 십일조 행위에 대한 순종의 행위가 그들에게 습관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처음 컴퓨터를 배운 사람은 타자를 치는데 장애를 느낍니다. 타이핑을 잘 하고 싶은데 독수리 타법을 벗어나질 못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이 그 초기 장애를 꾸준한 반복을 통해 극복한다면 그는 타이핑에 능숙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초기 장애의 상태에서 반복되는 꾸준한 타이핑을 하지 않거나 할 기회가 부족하게 되면 그는 처음 컴퓨터를 만진 때로부터 꽤 몇 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독수리타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에 머물러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여전히 장애를 느끼는 것입니다.

십일조에 있어서도 이러한 원리가 적용됩니다. 십일조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배우는 시점과 그것을 행할 수 있는 기회와 때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꾸준한 순종의 행위를 통해 습관시키지 않으면 그 사람은 십일조에 있어 계속되는 장애의 상태에 길들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고전8:7) 그러나 이 지식은 사람마다 가지지 못하여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습관이 잘못될 때 그것은 습관의 문제로 그치지 않고 다른 병리적인 현상을 동반하게 됩니다. 이를 고린도전서 8장 7절에서는 이와 같이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 신앙의 잘못된 습관을 가진 사람들이 결과적으로 어떤 잘못된 문제를 야기시키는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모든 식물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으로 부정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것이 우상의 신전에 바쳐진 것이라면 굳이 그 사실을 알고도 먹는다는 것은 거리끼는 것입니다. 같은 상의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함께 참예하고 동참한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런 점에서 바울은 우상의 재물은 알고서는 먹지 말 것을 권하였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 안에는 일부 사람들이 우상의 재물인줄 알면서도 여전히 과거의 습관을 따라 거리낌 없이 우상의 재물을 먹음으로 해서 다른 형제자매님들의 마음에 걸림을 주었습니다. 더불어 자신들 스스로도 그 우상의 재물을 여전히 고집하는 습관으로 인해 그 양심이 약하고 더러워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재물 자체에는 어떤 더러운 것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충분히 음식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상의 상에 올라간 이상 굳이 그것을 알고 그 거리끼는 양심으로 먹을 필요는 전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탐에 빠진 사람들은 우상의 재물에 대한 양심의 부정함을 느끼면서도 그들은 양심을 호소를 무시하고 그 우상의 재물을 탐했던 것입니다. 이로 인해 그들의 양심은 무뎌지기 시작했습니다. 처음과 달리 차츰 그들은 익숙하게 별 다른 거리낌 없이 우상의 재물을 형제자매님들이 보는데도 불구하고 먹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 양심이 약학 더러워졌기 때문입니다.

습관적으로 성경읽기를 게을리하는 사람을 보십시오. 처음엔 그것에 대한 각별한 가책을 느낍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어느새 별 거리낌 없이 성경을 읽지 않는 생활에 익숙해져 있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모처럼 시간이 나도 성경을 읽어야 겠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TV를 켜거나, 신문이나 잡지를 읽거나, 인터넷이나 십자수 기타 취미로 여가를 사용해버립니다. 십일조에 대한 불순종의 습관을 가진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습관이 그들에게 익숙해져 있습니다. 이미 그 양심이 약하고 더러워진 결과입니다. 양심이 약하고 더러워졌다는 것은 다른 의미에서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사망의 법과 성령의 법이 싸우는 것을 말하면서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만큼 자아와의 싸움이 치열함으로 인해 선을 온전히 행하기에 전력할 수 없는 무기력을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를 위해 살려고 해도 그러한 싸움으로 무력감을 느낄진대 하물며 그 양심이 약하고 더러워진 그리스도인은 얼만큼 선을 행하기에 무능력함을 느끼겠습니까? 잘 보십시오. 십일조의 순종하는 습관이 갖춰지지 않은 사람들이 대체로 얼마나 비의욕적이고 영적인 일에 무기력한지를. 그들은 교회 안에 참예하지만 언제나 무엇인가 모르는 무기력과 나약함에 길들여져 있음을. 사실상 그는 결코 도덕적이거나 윤리적인 사람이 못됩니다. 비양심적이고 비도덕적이며, 비윤리적인 성향의 사람입니다. 비록 그가 그렇게 보이지 않을지라도 말입니다. 자칫 그것이 지나친 표현이고, 아닌 것같이 생각될지 몰라도 만약, 정기적으로 갚아야 할 당신의 돈을 갚아주지 않으면서 자신은 버젓이 구두와 옷, 파리바게트와 카페를 이용하고 살아가는 모습을 본다면 도둑놈이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 사람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고 있는데, 그가 양심적이고 도덕적인 사람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의미에서 그 사람은 파렴치 범입니다. 어떻게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주를 섬긴다며 봉사하고, 찬양을 부를 수 있을까요? 그것은 주를 섬김에서가 아니라 자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자기 양심의 가책을 덜어보고 무마시켜보기 위한 다른 방편을 활용하는 것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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