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 받으신 예수님

(막 1:9, 개역)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세례 요한이 예수님의 사역을 예비하며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고 있던 어느 날 친히 예수님께서 요단강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요한에게 친히 세례를 베풀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이에 세례 요한은 적잖이 당황했습니다. 그것은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일까요?
히브리서 7장7절에서는 예수님께 복 빌어줌을 받은 아브라함을 묘사하길 이와 같이 묘사하였습니다. ‘폐일언하고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 빎을 받느니라.’ 한자성어에도 ‘장유유서’라고 해서 어른과 아이 사이에 질서가 있다고 합니다. 상식적으로 볼 때, 요한이 예수님께 세례를 베푼다는 것은 납득이 되질 않았습니다.
특히, 요한은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라고 했습니다. 몸을 구부려 예수님의 샌들도 풀어줄 자존감조차 없을 정도라고 이미 선포하였는데, 어찌 감히 예수님께 세례까지 베풀 수 있겠습니까? 덧붙여, 요한의 세례는 죄인들을 준비시키는 ‘회개의 세례’였습니다. 그런데, 죄 없는 예수님께 세례를 베푼다는 것도 가당치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정황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친히 자원하셔서 요한에게 세례를 베풀 것을 요구하셨다는 점입니다. 성령의 세례를 베풀 자격이 있는 예수님께서 어째서 요한의 세례를 받으신 것인지 사뭇 궁금해집니다. 마치, 7성급 스윗트 룸에 숙박할 자격이 있는 대기업 총수가 축축한 뒷골목의 여인숙으로 향하는 것과 비슷한 모습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의 세례를 받음에는 그 나름의 깊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예수님은 비록 하나님의 아들이란 신분을 갖고 계셨지만 그가 인간의 모습이 되심은 그 자체로 그가 이미 낮은 자리에 처하였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특권을 버리셨습니다. 세례 요한 앞에 서 있는 예수님은 그 자체로 완전한 인간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이미 인간의 위치까지 낮아지셨고, 그는 모든 인간의 문제를 함께 짊어져야 했습니다. 전혀 죄가 없었지만 모든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에 그도 그들의 죄를 맡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회개의 세례를 베푸는 요한에게 자신의 세례도 맡기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또한, 세례는 죽음과 부활의 예표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세례 받으심은 우리 죄로 인해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을 예표로 보여준 것이 아닌가 합니다. 한편으로 이는 대속적 사역에 대한 암시이기도 할 것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심과 함께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머리 위에 임재하심을 보았고, 하늘로부터 들리는 신적 음성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세례식이 예수님의 메시야적 행보의 시작을 알리는 기점이 되었다는 것과 하나님의 아들로써 선포되는 신적 인증이 뒤따랐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은 그 자체로 매우 의미 있는 일이었으며,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고 하신 말씀을 증명한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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