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련의 부족

습관의 문제로부터 연계되어 같은 선상에서 다룰 수 있는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훈련의 부족’이란 개념입니다. 신약성경 14권을 기록한 바울의 삶을 그의 서신을 통해 바라볼 때 우리는 바울이 얼마나 철저히 훈련 받은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우리가 바울과 같은 삶을 살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는 바울과 같은 훈련을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 8절에 보면 바울은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하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로 느꼈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정말 심령으로 죽음에 이르기까지 고통을 당한 바울의 훈련이었습니다. 빌립보서 4장 12절에는 풍부에 처할 줄도 알고 비천함에 처할 줄도 알아 자신은 풍부와 비천함을 막론하고 모든 상황에서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진술합니다. 그것이 바울의 훈련이었습니다. 그는 지극히 높은 곳과 지극히 천한 곳까지 그 수위를 가리지 않고 훈련을 받았습니다. 아니, 훈련을 당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실상 혹사를 당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 믿음의 선배이자 동시에 도무지 우리로써는 흉내 낼 수 없는 신앙의 절대 경지에 이른 위인입니다.

단순한 예로 우리는 생활의 조금만 불편이 있고, 물질의 어려움에 봉착해도 믿음의 시험을 당하거나 좌절하거나 원망하거나 심지어 실족까지 합니다. 그 사람이 집을 잃어버린 것도 아닙니다. 단지 생활비의 문제가 있을 때도 그런 현상이 나타난다는 겁니다. 이에 대한 바울의 답변이 그런 것입니다. 나는 빈곤에 처할 줄도 안다고. 나는 풍족함도 누려봤지만 빈곤에 처하는 법도 배워서 이제 부하든지 빈곤하든지 그 어떤 외적인 환경이 내 믿음이나 내 신앙 내 상태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바로 그것이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는 바울의 고백이 가진 근본적 의미일 것입니다. 이런 차이가 바로 ‘훈련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행 24:25-26, 개역) 『[25]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시방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 [26] 동시에 또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 고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더라』

바울이 고소를 당해 지방수도였던 가이사랴의 관내 옥에 갇혀 있었을 때였습니다. 벨릭스 각하는 바울과 대질심문을 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익히 벨릭스란 사람이 매우 탐욕적이고 부도덕하며 파렴치한 인간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특별히 벨릭스 앞에서 설교하길 ‘의와 절제와 장차 올 심판’을 주제로 설교하였던 것입니다. 그 설교는 적중했습니다. 벨릭스는 실제로 그 설교를 들으면서 양심의 두려움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벨릭스란 사람의 이중적 태도였습니다. 본문에서 분명히 벨릭스는 두려움을 호소하는 동시에 뇌물을 기대하는 부정축재의 욕망에 사로잡히고 있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순수하지 못했고, 정직하지 못했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났을까요?

바로 그것은 이 벨릭스란 사람이 이날까지 평생을 살아오면서 탐욕에 연단된 마음으로 살아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사실적으로 도덕적이지 못했습니다. 그는 윤리적이지 못했고, 성결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런 훈련을 받은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는 탐욕과 방탕과 부도덕과 비윤리적인 방식으로 훈련되어진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럼으로 대 사도인 바울의 그 장엄한 ‘의와 절제와 장차 올 심판’에 대한 강론을 들으면서도 그의 마음은 완전히 KO되지 않았습니다. 두려움은 느꼈지만 그는 길들여진대로, 그의 습관대로, 그의 훈련되어진 방식대로 동시에 뇌물을 기대하는 탐욕주의자였습니다.

십일조에 있어서도 그 습관이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불순종에 길들여졌다는 의미이며, 이는 궁극적으로 훈련 받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그 사람은 십일조의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는 벨릭스처럼 양심의 호소를 자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떨쳐버릴 수 없는 이기심과 탐욕, 변명에 훈련 되어진 자아로 말미암아 이중적 태도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벨릭스는 말했습니다. ‘시방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그는 양심의 가책과 두려움을 느낄 때 심한 불편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는 바울의 얼굴과 강론을 듣기 싫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를 다시 부를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가장 근본적인 양심에 호소하는 그 어떤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을 단순히 싫어해서 무시하고 묻어버리기엔 그 내포된 바가 너무나 중대함도 느꼈던 것입니다. 그것이 자신의 영원과 운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문제임을 인식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만, 지금 당장은 그 짓눌러오는 양심의 통증을 떨쳐버리고 싶었습니다. 숨을 쉬고 싶었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가 길들여진 방식대로, 그가 훈련된 방식대로 탐욕과 이기심에 치밀어 올라오는 자신을 부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구절을 심리학적으로 공감해서 이해하려고 시도해볼 때 벨릭스가 심한 내적갈등을 겪음과 더불어 내적장애를 호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심적인 상태는 바로 하나님 말씀 앞에서 우리가 그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지 못할 때 겪는 우리의 내적갈등 및 슬픔과도 굉장히 흡사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말씀 앞에 심한 갈등과 가책을 느낍니다. 그래서 말씀 앞에서 피하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그 말씀 앞에서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으며, 그래서 다시 말씀 앞에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일조의 온전치 못한 행위에 있어서도 습관의 문제와 더불어 이것은 훈련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하나의 동인이 되고 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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