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관의 장애
(말 3:7, 개역)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열조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이 본문에서 저는 ‘너희 열조의 날로부터’란 구절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이 구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이 오랜 세월에 걸쳐 그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 선민으로써 합당한 예배와 섬김을 잃어버린 상태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 민족의 두 가지 상태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는 그들이 하나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않았다는 것. 즉,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섬기는 삶에서 떠나 있다는 것이며, 또 하나는 그들의 그런 외도와 불성실이 단기적인 현상이 아니라 ‘너희 열조의 날로부터’라는 표현으로부터 오랫동안 자행된 고질병. 하나의 습관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한 세대에 걸쳐서만 하나님의 규례를 벗어나 제 맘대로 살아간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관례이자 하나의 전통처럼 자리잡은 불순종이며, 불신앙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들의 그런 불신앙이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지난 오랜 세월 동안 반복되어 유전된 하나의 전통이자 습관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렘 22:21, 개역) 『네가 평안할 때에 내가 네게 말하였으나 네 말이 나는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나니 네가 어려서부터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함이 네 습관이라』
여기서도 역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불순종은 습관의 문제라고 지적하고 계십니다. 그들은 예배와 순종의 삶에서 불순종으로 나아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려서부터 불순종의 종이 되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부모와 그 할아버지와 그 열조부터 그것이 답습되어 왔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의 불순종된 삶의 궁극적인 동인 중에는 ‘습관’의 문제를 결코 배제시킬 수 없습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하고, 순종하지 못하는 결정적인 단서 하나를 찾게 됩니다. 바로 그것은 습관의 문제입니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처음 구원을 받고, 신앙의 삶에 참여하면서부터 가장 먼저 직면하는 문제는 술을 끊는 문제입니다. 결코 쉽게 이기지 못하는 욕망과 다툴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 사람의 습관이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게임중독자, 흡연자, 낚시광 등 특별한 취미에 길들여져 있던 사람들 역시 처음 신앙의 삶에 동참하는데 여러 모양으로 시련을 경험합니다. 모두다 습관이 결정적인 마찰을 일으킵니다.
이스라엘 민족들 역시 동일한 갈등을 경험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김과 예배하는 올바른 삶의 방식에 대해 열조로부터 제대로 교육받고, 훈련 받지 못했습니다. 결과 그들은 어릴 적부터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청종하는 습관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럼으로 그들은 그 습관을 좀처럼 잘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되물림 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십일조에 있어서도 이러한 현상은 곧잘 접목됩니다. 좀처럼 십일조에 있어서 개선이 되지 않는 이유 중에 하나는 바로 습관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마땅히 배워야 할 신앙의 초기 시점에 십일조에 대한 올바른 습관을 양육하지 못했습니다. 십일조에 대한 말씀은 많이 듣고, 배워왔지만 실제적으로 그것을 순종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배우지 못했습니다. 결과 십일조를 해야 한다는 의무감은 느끼고 인식하지만 동시에 습관을 두지 못함으로 인해 끝내 행위의 순종에서는 결렬되는 일종의 장애를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제가 ‘장애’라고 표현한 것에 주목해보십시오. 이 말이 ‘불구’란 의미는 아닙니다. 인터넷 연결이 잘 되지 않으면 우리는 ‘통신장애’란 말을 사용합니다. 여기서 쓰인 ‘장애’란 표현과 같은 의미입니다. 장비에 불구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이유로 장애를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십일조를 해야 함을 알고, 하고 싶긴 한데 왠지 모르게 실천하지 못하고 주저하고 머뭇거리는 자신을 발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장애’입니다. 온전한 십일조 행위에 대한 순종의 행위가 그들에게 습관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처음 컴퓨터를 배운 사람은 타자를 치는데 장애를 느낍니다. 타이핑을 잘 하고 싶은데 독수리 타법을 벗어나질 못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이 그 초기 장애를 꾸준한 반복을 통해 극복한다면 그는 타이핑에 능숙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초기 장애의 상태에서 반복되는 꾸준한 타이핑을 하지 않거나 할 기회가 부족하게 되면 그는 처음 컴퓨터를 만진 때로부터 꽤 몇 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독수리타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에 머물러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여전히 장애를 느끼는 것입니다.
십일조에 있어서도 이러한 원리가 적용됩니다. 십일조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배우는 시점과 그것을 행할 수 있는 기회와 때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꾸준한 순종의 행위를 통해 습관시키지 않으면 그 사람은 십일조에 있어 계속되는 장애의 상태에 길들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고전8:7) 그러나 이 지식은 사람마다 가지지 못하여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습관이 잘못될 때 그것은 습관의 문제로 그치지 않고 다른 병리적인 현상을 동반하게 됩니다. 이를 고린도전서 8장 7절에서는 이와 같이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 신앙의 잘못된 습관을 가진 사람들이 결과적으로 어떤 잘못된 문제를 야기시키는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모든 식물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으로 부정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것이 우상의 신전에 바쳐진 것이라면 굳이 그 사실을 알고도 먹는다는 것은 거리끼는 것입니다. 같은 상의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함께 참예하고 동참한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런 점에서 바울은 우상의 재물은 알고서는 먹지 말 것을 권하였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 안에는 일부 사람들이 우상의 재물인줄 알면서도 여전히 과거의 습관을 따라 거리낌 없이 우상의 재물을 먹음으로 해서 다른 형제자매님들의 마음에 걸림을 주었습니다. 더불어 자신들 스스로도 그 우상의 재물을 여전히 고집하는 습관으로 인해 그 양심이 약하고 더러워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재물 자체에는 어떤 더러운 것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충분히 음식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상의 상에 올라간 이상 굳이 그것을 알고 그 거리끼는 양심으로 먹을 필요는 전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탐에 빠진 사람들은 우상의 재물에 대한 양심의 부정함을 느끼면서도 그들은 양심을 호소를 무시하고 그 우상의 재물을 탐했던 것입니다. 이로 인해 그들의 양심은 무뎌지기 시작했습니다. 처음과 달리 차츰 그들은 익숙하게 별 다른 거리낌 없이 우상의 재물을 형제자매님들이 보는데도 불구하고 먹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 양심이 약학 더러워졌기 때문입니다.
습관적으로 성경읽기를 게을리하는 사람을 보십시오. 처음엔 그것에 대한 각별한 가책을 느낍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어느새 별 거리낌 없이 성경을 읽지 않는 생활에 익숙해져 있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모처럼 시간이 나도 성경을 읽어야 겠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TV를 켜거나, 신문이나 잡지를 읽거나, 인터넷이나 십자수 기타 취미로 여가를 사용해버립니다. 십일조에 대한 불순종의 습관을 가진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습관이 그들에게 익숙해져 있습니다. 이미 그 양심이 약하고 더러워진 결과입니다. 양심이 약하고 더러워졌다는 것은 다른 의미에서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사망의 법과 성령의 법이 싸우는 것을 말하면서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만큼 자아와의 싸움이 치열함으로 인해 선을 온전히 행하기에 전력할 수 없는 무기력을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를 위해 살려고 해도 그러한 싸움으로 무력감을 느낄진대 하물며 그 양심이 약하고 더러워진 그리스도인은 얼만큼 선을 행하기에 무능력함을 느끼겠습니까? 잘 보십시오. 십일조의 순종하는 습관이 갖춰지지 않은 사람들이 대체로 얼마나 비의욕적이고 영적인 일에 무기력한지를. 그들은 교회 안에 참예하지만 언제나 무엇인가 모르는 무기력과 나약함에 길들여져 있음을. 사실상 그는 결코 도덕적이거나 윤리적인 사람이 못됩니다. 비양심적이고 비도덕적이며, 비윤리적인 성향의 사람입니다. 비록 그가 그렇게 보이지 않을지라도 말입니다. 자칫 그것이 지나친 표현이고, 아닌 것같이 생각될지 몰라도 만약, 정기적으로 갚아야 할 당신의 돈을 갚아주지 않으면서 자신은 버젓이 구두와 옷, 파리바게트와 카페를 이용하고 살아가는 모습을 본다면 도둑놈이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 사람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고 있는데, 그가 양심적이고 도덕적인 사람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의미에서 그 사람은 파렴치 범입니다. 어떻게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주를 섬긴다며 봉사하고, 찬양을 부를 수 있을까요? 그것은 주를 섬김에서가 아니라 자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자기 양심의 가책을 덜어보고 무마시켜보기 위한 다른 방편을 활용하는 것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