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안에 있는 바리새인과 세리_2010.12.05

(눅 18:10-14, 개역)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우리는 이 말씀을 너무나 습관적으로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과 세리의 상황으로 거슬러 올라가 생각한다. 그러나 오늘날 바리새인은 없다. 심지어 이스라엘에 조차도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 현재 우리가 당면한 상황 속에서 이 바리새인과 세리를 찾아봐야 할 것이다.

표면적인 특징은 이러하다. 바리새인은 율법을 잘 지켰고, 의로운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진정으로 바람직한 삶을 살았다. 세리는 범법했으며, 사회적 지탄을 받았고 실제로 경건하지 못했다.  

이 두 사람의 기도는 다음의 특징이 있다. 바리새인은 떳떳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의로움을 재차 주지시켰다. 더불어 그는 세리와 같지 않는 것을 들어가며 자신을 구별시켰다. 반면, 세리는 전혀 내세울 것이 없었고, 오직 긍휼만을 구했다. 이에 하나님은 바리새인이 아닌 세리의 편을 들어줬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사실은 하나님은 분명 죄를 미워하시는 분이심이 분명하지만 모든 죄보다도 교만을 미워하신다는 사실이다. 바리새인은 흠이 없었다. 그는 얼마든지 하나님의 의로움을 받을 자격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교만했다. 그는 자신이 갖춘 경건을 자기 의로 삼아 세리와 구별시켜 드러냈다. 하나님은 그런 자신이 가진 경건과 능력으로 그 보다 못한 자와 구별시켜 자신을 의롭게 여기는 오만함에 질색했다. 왜냐하면 그 의로움조차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약 2:4, 개역) 『[4]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그러면 오늘날 바리새인은 누구일까? 우리는 바리새인을 교회 안에서 찾게 될 것이다. 교회 안에 어떤 이들은 바리새인과 같고, 어떤 이들은 세리와 같다.

교회 안에서 자기와 구별시켜 상대적으로 비교우위를 의식을 갖고 있는 이들이 있다.
‘나는 구원 받은 지 오래 됐지만 저 형제, 자매들은 아직 얼마 안 됐잖아.’
‘나는 구원 받은 가정에서 태어나서 부모님이 함께 신앙생활하시지만 저 형제, 자매님들은 홀 신앙일 뿐이잖아. 나와는 아무래도 격이 맞지 않아.’
‘나는 교회 안에서 어느 정도 중책을 맡아 봉사하지만 저 형제, 자매는 너무 미약해.’

반면, 세리와 같은 이들도 있다.
‘아무래도 난 아직 구원 받은 지 얼마 안 됐잖아. 나는 아직 미약해. 뭐라고 할 수 없는 처지지.’
‘저 형제, 자매님들은 부모님이 구원을 받으셨잖아. 난 혼자인데. 나와는 격이 다르지. 물러서야 할지 몰라.’

그러나 기억하자. 하나님은 상대적으로 비교우위의 생각을 가진 자들을 정죄한다는 것을. 바리새인은 의로다함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어째서 그러할까?

구원을 먼저 받은 것, 구원 받은 지 오래되고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한 것이 자신의 능력으로 된 것인가? 그것은 하나님이 준 것이다. 구원받은 부모와 구원받은 좋은 가정이 자신의 권세로 된 것인가?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것이다. 모두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가지고 자신의 부요함, 자신의 자랑, 자신의 상대적 비교우위로 삼아 남과 구별하는 것이 얼마나 오만방자한 것인가. 하나님은 자기 주제를 모르는 그런 바리새인을 싫어하신다.

신앙 안에서 우리는 언제나 동일한 선상에 서야 한다. 모두가 근본적으로는 정죄 받을 그저 죄인이었을 뿐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의인 되었고 또,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의 모든 좋은 조건과 여건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먼저 받고, 늦게 받고, 적게 받고, 많이 받은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좋은 조건을 갖춘 사람일수록 하나님께 감사하고, 겸손히 마음을 낮춰 적게 받은 이들에게도 동일한 낮아짐으로 다가서고 그들을 받아주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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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생각과 충돌하기_2010.11.29

비탈진 골목길에 주차된 차량이 미끄러지고 있었다. 옆에 지나가던 한 아이가 급히 그 차량에 올라타서 차를 안전하게 멈춰 세웠다. 자칫 큰 사고가 날 뻔한 상황에서 아이의 용기와 기지가 대형사고를 막을 뻔한 것이다. 그 아이는 일순간 스타덤에 올랐다. 비록, 아이가 차를 운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지만 그 상황에서는 용인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잘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럼, 사울의 다음 상황은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   


(삼상 13:8-14, 개역) 『[8] 사울이 사무엘의 정한 기한대로 이레를 기다리되 사무엘이 길갈로 오지 아니하매 백성이 사울에게서 흩어지는지라 [9] 사울이 가로되 번제와 화목제물을 이리로 가져오라 하여 번제를 드렸더니 [10] 번제 드리기를 필하자 사무엘이 온지라 사울이 나가 맞으며 문안하매 [11] 사무엘이 가로되 왕의 행한 것이 무엇이뇨 사울이 가로되 백성은 나에게서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 안에 오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으므로 [12] 이에 내가 이르기를 블레셋 사람은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늘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치 못하였다 하고 부득이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 [13]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영히 세우셨을 것이어늘 [14]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그 백성의 지도자를 삼으셨느니라 하고』

사울왕은 블레셋과의 전투 직전에 최고사령관으로 대치하고 있었다. 그는 지체하는 사무엘을 대신해 급박한 상황에서 번제를 드렸다. 그가 직면한 3대 급박한 상황이 설명되어진다. 첫째, 백성들은 사무엘의 더디옴으로 공황상태에 빠지고 있었다. 둘째, 사무엘은 정한 기간 안에 오지 않고 있었다. 셋째, 블레셋 사람들은 이미 믹마스 앞에 까지 몰려와 당장 전투가 벌어질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객관적으로 볼 때, 사울의 대처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위였다. 분초를 따지는 급박한 상황에서 최고사령관으로써 어떤 결단을 내려야 했다. 정작 문제의 원인은 사무엘이 이 다급한 상황에서 서둘러 오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사울왕을 버리셨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 최고사령관으로서 어떤 결단을 내려야할 사울왕의 입장에서는 사울보다 사무엘이 훨씬 잘못했다고 할 수 있다. 사무엘의 더디옴은 모두를 시험에 빠트린 원인이다.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우리는 사울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나도 그렇게 대처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무엇일까?

우리는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상황 및 개인적인 환경 가운데 종종 나의 생각과 나의 판단에 의지한다. 우리의 매우 잘못된 버릇이자 잘못된 습관 중의 하나는 종종 내 판단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내가 어떤 수를 쓰려고 한다는 사실이다. 사울이 그러했다.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모든 환경 위에 역사하시는 모든 것을 조정하시고 변화시키실 수 있는 절대적인 주권자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이다. 먹구름이 낀 날일지라도 비행기를 타고 그 구름 너머로 올라서면 찬란한 태양이 비취듯, 현실의 곤란을 바라보는 것을 넘어 그 이상의 믿음으로 바라봐야 할 상황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내 수단과 방법으로 현재의 상황과 상태를 모면해보려고 한다. 그것이 불신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은 그것이 못마땅 하신 것이다.

세상에서는 종종 예외적인 상황을 서로 이해하고, 용납해줄 수 있다. 그 용기와 기지를 발견한 아이를 칭송할 수 있듯이 말이다. 그러나 믿음의 세계는 다르다. 객관적으로 용인되고, 이해될 수 있는 것일지라도 내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에 부합된 것이 아닐 때는 그것이 아무리 정확하고 온전한 판단과 선택과 결정이라 할지라도 결과는 실패로 끝나고 만다. 그 상황을 잘못 이해하고, 잘못 판단해서가 아니다. 그것이 옳은 판단과 결정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생각과 다르다면 그것은 틀린 것이 되고 만다. 우리는 현상을 뛰어넘어 모든 것 가운데 역사하시고, 조정하시며 다스리시고 변화시키실 하나님을 바라봐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믿음이 필요하다. 또한, 기다림과 순종, 겸손이 요구된다.

언제나 모든 상황에서 결론은 이것임을 명심해야 겠다.

(사 55:8-9, 개역)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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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발현상과 아비가일식 통찰력

어느 고교야구선수가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그는 프로야구에 데뷔하고 싶었지만 어느 구단도 그를 선택하지 않았다.  고교시절 3할을 훨씬 넘는 타율을 갖춘 선수였음에도, 달리기가 느리고 수비가 약하다는 평가받았기 때문이다. 결국 그 선수는 지명타자로 프로에 데뷔하지 못하고 두산의 연습생으로 최저연봉을 받고 입단하게 된다. 현재 그 선수는 두산의 4번 타자 김현수이다. 기아의 조범현 감독은 김현수를 놓고 ‘한국프로야구의 모든 기록을 갈아치울 선수’라고 평했다. 

한 축구선수가 있었다. 왜소한 체격에 명문코스를 밟지 못한 선수였다. 그는 프로축구에 입문하고 싶었지만 그 역시 아무도 불러주지 않았다. 그는 대학축구로 방향을 바꿨다. 그리고 또 대학을 졸업할 때 그는 프로구단의 콜을 받지 못했다. 결국 그는 일본의 클럽팀 교토퍼플상가에 입단했다. 국내에서는 그 선수를 거의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히딩크는 무명의 박지성을 불러 들이며 말했다. ‘나는 그의 정신력에 반했다.’라고. 오늘날 박지성은 세계 최고의 축구리그이자 최고 클럽팀인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맨유의 중심선수이다.

이와 같이, 훌륭한 가능성과 잠재력을 갖고 있음에도 드러나는 적은 단점이 갖춰진 많은 장점을 가리는 현상을 나는 ‘나발현상’이라 이름 붙여본다.

(삼상 25:10-11, 개역) 『[10] 나발이 다윗의 사환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뇨 근일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11] 내가 어찌 내 떡과 물과 내 양털 깎는 자를 위하여 잡은 고기를 가져 어디로서인지 알지도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느냐 한지라』

나발은 부자였고, 소출이 많았다. 그리고 그것이 다윗과 그 일행들의 도움으로 가능하다는 것도 알았다. 또한, 나발은 이미 다윗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과거, 그의 명성, 그의 현재까지. 다윗이 그에게 긍휼을 구했을 때 나발은 차갑게 거절하며 말했다. ‘다윗? 그 녀석 예전에 사울왕 밑에 있다 기어나온 놈이잖아. 한때 잘 나갔지. 근데, 지금은 완전 나가리 됐잖아. 내가 왜 그런 녀석한테 아까운 내 소출을 줘야 돼?’라고. 결국 나발은 하나님이 쳐서 죽음을 자초했다. 왜? 나발은 다윗에게 긍휼을 베풀지 않았을까? 바로, 다윗의 현재에만 집착했다. 도망자 신세로 전락한 다윗의 초라함과 무능력에 주목했다. 그래서 다윗 정도 무시하는 건 하등의 문제도 아니라고 판단했다.

한편,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은 달랐다. 아비가일은 분노한 다윗을 그 길 위에서 대면하여 분노를 삭히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다윗이 아비가일의 총명함을 보고 아내로 삼고자 할 때 다윗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삼상 25:42, 개역) 『급히 일어나서 나귀를 타고 따르는 처녀 다섯과 함께 다윗의 사자들을 따라가서 다윗의 아내가 되니라

우리는 다윗이 위대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아비가일의 선택에 아무런 의구심을 품지 않는다. 그러나 아비가일이 다윗의 청혼을 받을 그 당시 다윗은 정말 위대했을까? 다윗이 그렇게 매력적인 상황이었을까? 오히려 정반대였다. 아비가일이 다윗의 청혼을 받았을 때 다윗은 한낱 파리 목숨에 불과한 도망자였다. 제 명에 죽을지도 모르는 남자, 심지어 왕의 칼이 쫓아다니는 남자와 결혼하고 싶은 여자는 그 누구인가? 만약, 아비가일이 나발의 눈으로 다윗을 봤다면 당장의 화를 모면하기 위해 다윗을 길에서 만나 중재했을지는 몰라도 다윗의 청혼은 거절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비가일은 왜 다윗의 청혼을 받아들였던 것일까? 

만약, 나발의 아내가 된 것이 아비가일의 자의적인 선택이 개입되었을 경우 그녀는 이미 자신의 오판을 뼈저리게 경험했을 것이다. 나발은 외적으로는 매우 좋은 배경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거부였다. 그러나 무자비하고 속이 좁은 사람이었다. 아비가일은 나발과 살면서 자신의 그릇된 판단과 결정을 후회하고 뉘우치며, 새로운 가치관을 갖게 되었는지 모른다. 반면, 나발의 아내가 된 것이 그의 부모님의 의지로 인한 것이었다면 그녀는 원래 총명한 여자였지만 그 부모님의 무지함으로 인해 무자비하고 속이 좁은 남자와 살게 된 것이다. 그것은 큰 고통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어떤 정황이 됐든 아비가일에게 있어서 나발과의 결혼생활은 후회와 괴로움이 가득한 생활이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결국 아비가일은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체득하고 있었다. 그것은 외적인 것이 아니며 잘 갖춰진 배경도 아니며 사람 그 자체란 것을 알았다. 비록, 현재의 다윗은 파리 목숨처럼 도망치는 도망자일 뿐이지만 다윗이 갖춘 어떤 장점을 관통해보고 있었다. 이처럼 드러나는 결정적인 단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단점 너머의 장점을 볼 수 있는 것. 또한, 단점을 관통하고 그 사람의 장점을 통찰해낼 수 있는 능력 나는 이것을 ‘아비가일식 통찰력’이라고 이름 붙여본다.

우리는 어떤 시각을 가지고 있을까? 장점보다는 단점에 주목하는 ‘나발현상’에 감염된 것은 아닌지. 그래서 장점에 대한 의미부여와 가치부여는 소홀히 하고 단점에 대한 가치부여만 잔뜩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면서 ‘다윗은 용맹하고 군대장관도 했고, 감수성도 풍부하고 훌륭한 시인이요 음악가이기도 하지만 지금은 칼에 쫓기는 도망자 신세일 뿐이지.’라고 말하면서 적은 단점이 많은 장점을 상쇄시킨 채 단점에 악센트를 주고 있진 않은가? 반면, ‘아비가일식 통찰력’처럼 ‘비록 지금은 도망자 신세에 불과하지만 다윗은 저 험한 상황 속에서도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의 사람이야. 그에게 얼마나 많은 장점들이 있어!’라며 장점에 악센트를 줄 것인가?

그리고 기억하자. 나발은 죽었지만 아비가일은 왕의 아내가 되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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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로 나아감

(막 1:12, 개역) 『[12]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우리는 여기서 사랑하는 아들이 직면하는 고난과 괴로움을 보게 됩니다. 어쩌면 이 구절은 문맥적으로 볼 때 알맞지 않게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바로 앞 절에 하나님은 예수님을 향해 내 사랑하는 아들이자 나의 기뻐하는 아들이라고 선포하신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말해 놓고 그 다음 주어진 대가는 바로 광야로 내몰려 고난을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분명, 이 고난은 환경적인 동기나 우연히 찾아온 불행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이 행하신 일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아이러니한 현상을 통해 우리는 바로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아들을 다루시는 하나의 독특한 방법을 엿보게 됩니다. 비록,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아들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대우를 받으며 호의호식하는 애송이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사역을 하기 위해 인간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사랑하는 아들이 행해야 할 일들을 위해 그를 연단하고 훈련시키고 사역에 알맞게 예비시키는 작업이 필요했습니다. 아담은 실패한 시험을 예수님은 통과해야 했습니다. 사역을 이루기 위한 분명한 자격을 얻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예수님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훈련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너무나도 고생을 많이 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가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의뢰케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섭리였다고 말합니다. 또한, 바울은 굶주림과 헐벗음, 배부름과 풍요까지 모든 것을 경험해가는 가운데 그 모든 외적 환경으로부터 더 이상 유념치 않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말했습니다. 바로, 이 모든 것들이 주님을 위해 헌신한, 사랑 받는 바울이 받은 대우였습니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바울은 전혀 사랑을 받지 못한 것 같습니다. 오히려, 미움을 산 것과 다름 없어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깊은 사랑과 은혜를 입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것이 광야로 나아감의 정의입니다.

사도 바울 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는 광야로 나아가게 됩니다. 구원을 받을 때 성령께서 임재하십니다. 회심한 사람은 기뻐 환희합니다. 그러나 그 환희가 마냥 계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각 사람에게 차이가 있지만 어느 시점에서 갑자기 광야로 내몰리기 시작합니다. 행복할 줄만 알았는데 예기치 않은 상처와 다툼, 반대와 갈등이 밀려옵니다. 종종 ‘아니, 구원을 받지 않았으면 이런 일도 겪지 않았을텐데… 전에는 이런 일은 없었다구!’라고 불평과 불신의 비명을 지릅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광야로 내몰리는 시기가 온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섭리이며,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는 아들에게 행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론이란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 한 가지를 잘 이해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 사랑하시는 아들을 온실 속의 화초처럼 다루길 전혀 원치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사랑할수록 그로 하여금 저 광야에서도 꽃을 피우고 향기를 토하는 강인한 일꾼, 생산력과 가치를 두루 갖춘 알곡으로 만드시길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윗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다윗이 얼마나 많은 시련의 날들을 보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결코 성경 그 어디에도 다윗을 향해 하나님의 싫어 버림을 받은 자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윗에게 주어진 영광스러운 호칭은 ‘내 마음에 합한 자’이었습니다. 기억합시다. 광야로 나간다는 것은 사랑 받지 않는 자들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는 것이란 사실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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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로서 나는 소리

(막 1:11, 개역)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신 후 성령의 임재와 하늘로부터 나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이로써 분명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의를 이루는 것’이 분명했음이 증거된 것입니다. 한편, 하늘의 소리는 그 자체로 예수님의 신성과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인증하는 분명한 근거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비적 세례와 선포를 하였고, 하나님은 친히 소리로 인정해주셨습니다. 이로써 인간이지 완전한 하나님의 아들, 신인(神人)으로써 예수님은 본격적인 사역을 실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편, 여기서 예수님을 증거하는 두 가지 소리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사람으로 나서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을 선포할 사명을 지닌 세례 요한. 그는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였습니다. 그는 인간이었고, 그는 인간이 머무르는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오심을 선포하였습니다. 또한, 그의 외침은 예비적 소리였습니다. 이에 반해, 하나님은 ‘하늘로서 소리’였습니다.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인간과 물질세계에 머무는 분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모든 만물은 하나님 안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소리는 하늘로서 나는 소리였지 지상 위에서 울리는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늘의 소리는 예비적 외침이 아닌 확정적 외침이었습니다. 그것은 신의 인정이었기 때문입니다. 친히 하나님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전혀 망설임이나 머뭇거림이 없는 명확하고 자신 있는 선포였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아들은 하나님의 기뻐하심과 사랑하심을 입는 아들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합니다. 사랑하고 기뻐하는 아들을 향해 ‘너는 내 아들이다’라고 선포하기를 어려워하고, 꺼릴 필요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열망과 말씀에 순종해 친히 인간의 모양으로 나아가 대속적 죽음까지 마다하지 않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은 그 아들이 얼마나 사랑스럽고 기뻤을까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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