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발현상과 아비가일식 통찰력

어느 고교야구선수가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그는 프로야구에 데뷔하고 싶었지만 어느 구단도 그를 선택하지 않았다.  고교시절 3할을 훨씬 넘는 타율을 갖춘 선수였음에도, 달리기가 느리고 수비가 약하다는 평가받았기 때문이다. 결국 그 선수는 지명타자로 프로에 데뷔하지 못하고 두산의 연습생으로 최저연봉을 받고 입단하게 된다. 현재 그 선수는 두산의 4번 타자 김현수이다. 기아의 조범현 감독은 김현수를 놓고 ‘한국프로야구의 모든 기록을 갈아치울 선수’라고 평했다. 

한 축구선수가 있었다. 왜소한 체격에 명문코스를 밟지 못한 선수였다. 그는 프로축구에 입문하고 싶었지만 그 역시 아무도 불러주지 않았다. 그는 대학축구로 방향을 바꿨다. 그리고 또 대학을 졸업할 때 그는 프로구단의 콜을 받지 못했다. 결국 그는 일본의 클럽팀 교토퍼플상가에 입단했다. 국내에서는 그 선수를 거의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히딩크는 무명의 박지성을 불러 들이며 말했다. ‘나는 그의 정신력에 반했다.’라고. 오늘날 박지성은 세계 최고의 축구리그이자 최고 클럽팀인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맨유의 중심선수이다.

이와 같이, 훌륭한 가능성과 잠재력을 갖고 있음에도 드러나는 적은 단점이 갖춰진 많은 장점을 가리는 현상을 나는 ‘나발현상’이라 이름 붙여본다.

(삼상 25:10-11, 개역) 『[10] 나발이 다윗의 사환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뇨 근일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11] 내가 어찌 내 떡과 물과 내 양털 깎는 자를 위하여 잡은 고기를 가져 어디로서인지 알지도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느냐 한지라』

나발은 부자였고, 소출이 많았다. 그리고 그것이 다윗과 그 일행들의 도움으로 가능하다는 것도 알았다. 또한, 나발은 이미 다윗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과거, 그의 명성, 그의 현재까지. 다윗이 그에게 긍휼을 구했을 때 나발은 차갑게 거절하며 말했다. ‘다윗? 그 녀석 예전에 사울왕 밑에 있다 기어나온 놈이잖아. 한때 잘 나갔지. 근데, 지금은 완전 나가리 됐잖아. 내가 왜 그런 녀석한테 아까운 내 소출을 줘야 돼?’라고. 결국 나발은 하나님이 쳐서 죽음을 자초했다. 왜? 나발은 다윗에게 긍휼을 베풀지 않았을까? 바로, 다윗의 현재에만 집착했다. 도망자 신세로 전락한 다윗의 초라함과 무능력에 주목했다. 그래서 다윗 정도 무시하는 건 하등의 문제도 아니라고 판단했다.

한편,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은 달랐다. 아비가일은 분노한 다윗을 그 길 위에서 대면하여 분노를 삭히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다윗이 아비가일의 총명함을 보고 아내로 삼고자 할 때 다윗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삼상 25:42, 개역) 『급히 일어나서 나귀를 타고 따르는 처녀 다섯과 함께 다윗의 사자들을 따라가서 다윗의 아내가 되니라

우리는 다윗이 위대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아비가일의 선택에 아무런 의구심을 품지 않는다. 그러나 아비가일이 다윗의 청혼을 받을 그 당시 다윗은 정말 위대했을까? 다윗이 그렇게 매력적인 상황이었을까? 오히려 정반대였다. 아비가일이 다윗의 청혼을 받았을 때 다윗은 한낱 파리 목숨에 불과한 도망자였다. 제 명에 죽을지도 모르는 남자, 심지어 왕의 칼이 쫓아다니는 남자와 결혼하고 싶은 여자는 그 누구인가? 만약, 아비가일이 나발의 눈으로 다윗을 봤다면 당장의 화를 모면하기 위해 다윗을 길에서 만나 중재했을지는 몰라도 다윗의 청혼은 거절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비가일은 왜 다윗의 청혼을 받아들였던 것일까? 

만약, 나발의 아내가 된 것이 아비가일의 자의적인 선택이 개입되었을 경우 그녀는 이미 자신의 오판을 뼈저리게 경험했을 것이다. 나발은 외적으로는 매우 좋은 배경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거부였다. 그러나 무자비하고 속이 좁은 사람이었다. 아비가일은 나발과 살면서 자신의 그릇된 판단과 결정을 후회하고 뉘우치며, 새로운 가치관을 갖게 되었는지 모른다. 반면, 나발의 아내가 된 것이 그의 부모님의 의지로 인한 것이었다면 그녀는 원래 총명한 여자였지만 그 부모님의 무지함으로 인해 무자비하고 속이 좁은 남자와 살게 된 것이다. 그것은 큰 고통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어떤 정황이 됐든 아비가일에게 있어서 나발과의 결혼생활은 후회와 괴로움이 가득한 생활이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결국 아비가일은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체득하고 있었다. 그것은 외적인 것이 아니며 잘 갖춰진 배경도 아니며 사람 그 자체란 것을 알았다. 비록, 현재의 다윗은 파리 목숨처럼 도망치는 도망자일 뿐이지만 다윗이 갖춘 어떤 장점을 관통해보고 있었다. 이처럼 드러나는 결정적인 단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단점 너머의 장점을 볼 수 있는 것. 또한, 단점을 관통하고 그 사람의 장점을 통찰해낼 수 있는 능력 나는 이것을 ‘아비가일식 통찰력’이라고 이름 붙여본다.

우리는 어떤 시각을 가지고 있을까? 장점보다는 단점에 주목하는 ‘나발현상’에 감염된 것은 아닌지. 그래서 장점에 대한 의미부여와 가치부여는 소홀히 하고 단점에 대한 가치부여만 잔뜩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면서 ‘다윗은 용맹하고 군대장관도 했고, 감수성도 풍부하고 훌륭한 시인이요 음악가이기도 하지만 지금은 칼에 쫓기는 도망자 신세일 뿐이지.’라고 말하면서 적은 단점이 많은 장점을 상쇄시킨 채 단점에 악센트를 주고 있진 않은가? 반면, ‘아비가일식 통찰력’처럼 ‘비록 지금은 도망자 신세에 불과하지만 다윗은 저 험한 상황 속에서도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의 사람이야. 그에게 얼마나 많은 장점들이 있어!’라며 장점에 악센트를 줄 것인가?

그리고 기억하자. 나발은 죽었지만 아비가일은 왕의 아내가 되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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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로 나아감

(막 1:12, 개역) 『[12]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우리는 여기서 사랑하는 아들이 직면하는 고난과 괴로움을 보게 됩니다. 어쩌면 이 구절은 문맥적으로 볼 때 알맞지 않게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바로 앞 절에 하나님은 예수님을 향해 내 사랑하는 아들이자 나의 기뻐하는 아들이라고 선포하신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말해 놓고 그 다음 주어진 대가는 바로 광야로 내몰려 고난을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분명, 이 고난은 환경적인 동기나 우연히 찾아온 불행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이 행하신 일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아이러니한 현상을 통해 우리는 바로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아들을 다루시는 하나의 독특한 방법을 엿보게 됩니다. 비록,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아들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대우를 받으며 호의호식하는 애송이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사역을 하기 위해 인간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사랑하는 아들이 행해야 할 일들을 위해 그를 연단하고 훈련시키고 사역에 알맞게 예비시키는 작업이 필요했습니다. 아담은 실패한 시험을 예수님은 통과해야 했습니다. 사역을 이루기 위한 분명한 자격을 얻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예수님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훈련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너무나도 고생을 많이 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가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의뢰케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섭리였다고 말합니다. 또한, 바울은 굶주림과 헐벗음, 배부름과 풍요까지 모든 것을 경험해가는 가운데 그 모든 외적 환경으로부터 더 이상 유념치 않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말했습니다. 바로, 이 모든 것들이 주님을 위해 헌신한, 사랑 받는 바울이 받은 대우였습니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바울은 전혀 사랑을 받지 못한 것 같습니다. 오히려, 미움을 산 것과 다름 없어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깊은 사랑과 은혜를 입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것이 광야로 나아감의 정의입니다.

사도 바울 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는 광야로 나아가게 됩니다. 구원을 받을 때 성령께서 임재하십니다. 회심한 사람은 기뻐 환희합니다. 그러나 그 환희가 마냥 계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각 사람에게 차이가 있지만 어느 시점에서 갑자기 광야로 내몰리기 시작합니다. 행복할 줄만 알았는데 예기치 않은 상처와 다툼, 반대와 갈등이 밀려옵니다. 종종 ‘아니, 구원을 받지 않았으면 이런 일도 겪지 않았을텐데… 전에는 이런 일은 없었다구!’라고 불평과 불신의 비명을 지릅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광야로 내몰리는 시기가 온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섭리이며,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는 아들에게 행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론이란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 한 가지를 잘 이해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 사랑하시는 아들을 온실 속의 화초처럼 다루길 전혀 원치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사랑할수록 그로 하여금 저 광야에서도 꽃을 피우고 향기를 토하는 강인한 일꾼, 생산력과 가치를 두루 갖춘 알곡으로 만드시길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윗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다윗이 얼마나 많은 시련의 날들을 보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결코 성경 그 어디에도 다윗을 향해 하나님의 싫어 버림을 받은 자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윗에게 주어진 영광스러운 호칭은 ‘내 마음에 합한 자’이었습니다. 기억합시다. 광야로 나간다는 것은 사랑 받지 않는 자들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는 것이란 사실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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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로서 나는 소리

(막 1:11, 개역)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신 후 성령의 임재와 하늘로부터 나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이로써 분명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의를 이루는 것’이 분명했음이 증거된 것입니다. 한편, 하늘의 소리는 그 자체로 예수님의 신성과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인증하는 분명한 근거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비적 세례와 선포를 하였고, 하나님은 친히 소리로 인정해주셨습니다. 이로써 인간이지 완전한 하나님의 아들, 신인(神人)으로써 예수님은 본격적인 사역을 실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편, 여기서 예수님을 증거하는 두 가지 소리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사람으로 나서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을 선포할 사명을 지닌 세례 요한. 그는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였습니다. 그는 인간이었고, 그는 인간이 머무르는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오심을 선포하였습니다. 또한, 그의 외침은 예비적 소리였습니다. 이에 반해, 하나님은 ‘하늘로서 소리’였습니다.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인간과 물질세계에 머무는 분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모든 만물은 하나님 안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소리는 하늘로서 나는 소리였지 지상 위에서 울리는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늘의 소리는 예비적 외침이 아닌 확정적 외침이었습니다. 그것은 신의 인정이었기 때문입니다. 친히 하나님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전혀 망설임이나 머뭇거림이 없는 명확하고 자신 있는 선포였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아들은 하나님의 기뻐하심과 사랑하심을 입는 아들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합니다. 사랑하고 기뻐하는 아들을 향해 ‘너는 내 아들이다’라고 선포하기를 어려워하고, 꺼릴 필요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열망과 말씀에 순종해 친히 인간의 모양으로 나아가 대속적 죽음까지 마다하지 않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은 그 아들이 얼마나 사랑스럽고 기뻤을까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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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이름 요나단_2010.11.15

(삼상 23:16, 개역)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일어나 수풀에 들어가서 다윗에게 이르러 그로 하나님을 힘있게 의지하게 하였는데

다윗을 향한 사울의 살기가 극에 달할 무렵 요나단은 다윗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나섰고, 다윗의 훌륭한 지원자가 되어주었다. 요나단이란 인물을 유심히 보면 그 역시 매우 위대한 군인이었고, 인격과 덕을 골고루 갖춘 인격자였다. 다윗이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요나단은 왕의 아들로써 미래를 보장받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 용맹스런 장군은 블레셋 진영을 관통하고 들어가 전투를 벌이는 용맹함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에게서 돋보이는 아름다운 덕목은 겸손이자 성령 충만한 신앙, 다윗왕을 존재케 한 조력자였다는 점일 것이다.

골리앗이 거만을 떨고 있을 때, 요나단조차 전혀 용맹을 발휘하지 못한 채 자신의 무기력을 발견할 뿐이었다. 모든 것이 불가능해보일 그때, 혜성처럼 나타난 다윗은 그 거구를 넘어뜨렸다. 요나단은 저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함께하는 다윗에게 단번에 매료되고 말았다. 요나단은 자신의 왕자란 지위와 명예, 왕의 후계자란 모든 자존심과 기득권을 다 내버리고 다윗의 지원자요, 추종자로 자처했다.

다윗이 사울의 칼 앞에 섰을 때, 요나단은 더욱 다윗을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그로 하여금 좌절하지 않도록 도왔다. 그것이 요나단의 인격과 덕이며, 그가 지닌 성령 충만한 신앙의 단면이었다. 잃어버린 10년을 지나 다윗은 위대한 왕으로 세워졌고, 그는 이스라엘 역사와 성경의 중요한 주인공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원래 그 자리는 요나단의 자리가 되어야 했던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나단은 자신의 모든 지위는 내려놓았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원하신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요나단은 침착한 인격자였고,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고 그 안에 굴복할 줄 아는 위대한 신앙인이었다. 다윗을 있게 한 가장 중요한 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바로 요나단일 것이다. 요나단이 아니었다면 다윗은 이미 그 고난의 초창기에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하나님은 요나단의 겸손과 충만한 신앙을 통해 다윗을 세우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계획대로 이뤄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요나단을 기억하고 있는 걸까? 이 아름다운 청년 요나단의 마지막을 보자. 그는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아버지 사울왕과 더불어 전사하고 만다. 그것도 패배와 함께 치욕적인 죽임을 당했다. 자신의 기득권과 왕권을 포기하고 다윗을 조력했던 요나단 그러나 자신은 정작 할례 받지 못한 블레셋의 칼날에 초라하고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그의 모습은 마치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니’라고 외쳤던 세례 요한의 외침을 연상시킨다.

잊혀진 이름 요나단. 그러나 그의 덕과 아름다운 신앙은 저 하늘의 흐트러지지 않는 빛을 내뿜는 별들처럼 반짝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생각게 된다. 다윗이 얻은 귀한 보석 요나단. 좌절하고 낙심될 때 정말 하나님을 힘있게 의지하게 독려해주는 그 누군가가 얼마나 필요한가. 나는 다른 누군가에게 요나단이 되고 있는지 또 나에게는 요나단이 곁에 있는 것인지 생각게 된다. 저 아름다운 사람 요나단이 그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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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개나 벼룩_2010.11.14

(삼상 24:14) 『이스라엘 왕이 누구를 따라 나왔으며 누구를 쫓나이까 죽은 개나 벼룩을 쫓음이니이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늘 그랬지만, 항상 다윗의 일대기는 내게 너무나 많은 것을 보여주며 많은 것을 알게 해준다. 다윗은 언제나 친근하게 느껴진다. 다윗은 너무나 우리 신앙의 리얼리티즘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다윗을 사랑하는지 모른다. 그가 비록 간음죄를 지었음에도 우리는 그를 미워하지 않는다.

다윗은 10년 동안 왕의 칼을 피해 도망 다녔던 유랑자였다. 그러나 그가 처음부터 유랑자였던 건 아니다. 다윗은 종종 이렇게 소개된다. ‘그는 목동이자 시인(또는 음악가), 군인(군대장관), 왕이었다.’라고 말이다. 어쩌면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 다양한 경험이 위대한 다윗왕을 만든 것이 아니겠는가.

아버지 다윗과 아들 솔로몬이 달라도 너무나 다른 신앙의 결과를 남긴 것을 생각해볼 때, 우리는 다윗과 솔로몬이 너무나도 다른 삶을 살았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다윗은 너무나도 많이 부러져본 사람이다. 그는 조금도 하나님 앞에 강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솔로몬은 단 한 번도 부러져본 적이 없었다. 그는 서자이면서도 왕의 지위까지 받았다. 부와 명예, 지식까지 부족함이 없었다. 다윗은 선지자 나단의 한 마디에 꼬꾸라졌지만,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직접 두 번을 나타났을 때도 부러지지 않았다. 그들이 살아온 삶의 반응이다.

다윗, 목동의 말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 역시 목동이었고, 사무엘이 찾아올 때만 해도 그에게 그 어떠한 비전도 없었다. 사무엘의 기름부음은 급격한 전환점의 신호탄이었다. 일개 목동의 말째 아들에게 기름부음이 있었다.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는 신의 선택을 받았고, 왕의 후계자로 지목되었다. 파란이었다. 그러나 이로 말미암아 그는 얘기치 않은 인생의 파란만장한 파도 속으로 나아가야 했다. 마치,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께서 광야로 나아가셨던 것처럼 말이다.

‘다윗은 만만이요 사울은 천천이니’ 골리앗을 거꾸러뜨린 다윗은 일개 영웅으로 급부상했다. 그는 즉각 군대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이때부터 불편한 사울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목동이 기름부음을 받았고, 그는 군대장관이 되었다. 또한, 그는 왕의 사위가 되었다. 사울왕의 딸 미갈은 다윗을 사랑했다. 목동이 군대장관을 넘어 왕의 사위가 되었다. 파란이었다. 다윗은 근본적으로 누릴 수 없는 명예와 지위를 얻었다.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었다.

그러나 왕의 머리 위에 올라서는 그 무엇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 왕관이 아니라면 말이다. 사울이 던진 두 개의 창을 피했던 다윗은 아내 미갈의 도움으로 도망친다. 바로, 다윗의 급속한 성공가도가 일시에 꺾인 시기였다. 상상할 수 없는 참혹함이 찾아오고 있었다. 이전의 모든 성공은 잊어버려야 할 만큼 ‘다윗의 잃어버린 10년’이 온 것이다. ‘도피’라고 하면 몸서리 쳐질 만큼 지겨운 겨울이 찾아온 것이었다. 그리고 또 다시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었다. ‘이야, 참 다윗. 목동으로 나서 군대장관에 왕의 사위까지 아주 그냥 쌩쌩 잘 나가더만 이거 완전 왕의 눈에 나가지고 이젠 도망자 신세가 됐어. 참, 사람 일 어찌 될지 모르는 거야. 쯧쯧’

그러나 이 잃어버린 10년 속에서도 유독 다윗의 위대함을 드러내보여 주는 장면이 사울왕을 두 번씩이나 살려주는 모습이었지 않나 생각한다. 다윗의 추종자들이 사울을 죽일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했을 때, 그는 왕의 옷깃을 베고 심히 괴로워했다. 떠나가는 사울의 뒤에서 비명처럼 소리 질렀다. ‘왕을 해하려 한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을 왕은 어찌하여 들으시나이까!’ 다윗은 사울을 조금도 해칠 수 없었다. 바로, 사울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나발을 쳐 죽이려 분노했던 다윗이건만 저 철천지원쑤처럼 10년을 추적하며 죽이려는 사울에게는 조금도 어깨를 펼 수 없었다. 오직 하나, 그가 기름 부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굴욕의 다윗, 그 견고한 중심의 위대함이 드러난다.

10년 이란 세월을 칼을 피해 유랑방란 한다는 것은 얼마나 지긋지긋한 고통일까? 누가 그런 극심한 스트레스를 이겨낼 수 있을까? 만약, 나라면 1년 만이라도 그렇게 도망쳐야 할 신세가 된다면 사울을 죽일 기회가 왔을 때 두 번 생각할 것 없이 그를 찔러 죽였을지 모르겠다.

다윗이 사울을 향해 그 억울함을 호소하며 또한, 이렇게 소리쳤다.
‘하나님의 이스라엘 왕이 지금 누구를 쫓아다니고 있는 겁니까! 한낱 죽은 개와 벼룩을 쫓다니요!’
아, 다윗! 이미 기름부음을 받은 자, 위대한 군인이자 민족적 영웅, 왕의 사위. 그가 죽은 개와 벼룩이라니! 그러나 이 비명이야 말로 다윗의 진심이었다. 이것은 진실이었다. 3000년 전 그날 다윗의 모습이었다.

비전 없이 양을 치던 꾀죄죄한 꼬마 목동이 기름 부음을 받고,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군대장관 되었다. 왕의 딸의 사랑을 받으며 왕의 사위까지 신분상승을 했다. 상상할 수 없는 성공가도를 달리던 다윗이건만 이제는 더 이상 그 화려했던 추억과 승리는 죽은 개처럼 ‘과거란 무덤’에 묻혔다. 뛰어봤지 벼룩이라던, 막아둔 뚜껑에 치이다 더 이상 뛰지 않는 벼룩처럼 칼을 피해 여기저기 뛰어다닐 뿐 더 이상 안락한 삶도 생명도 보장되지 않는 도망자신세. 그의 지원자였던 아내 미갈과도 헤어졌다. 훗날 미갈을 되찾았을 때, 이 모든 어둠을 지나 왕이 된 기쁨으로 춤추던 날 미갈은 다윗을 비웃고 있었다. 그렇게 소원해질 수가...

다윗은 진심을 말했다. 이제 나는 정말 죽은 개나 벼룩일 뿐이라고. 내가 정말 기름 부음을 받았었는지, 내가 정말 골리앗을 쓰러뜨렸었는지, 내가 정말 군대장관이였었는지, 내가 정말 왕의 사위였었는지, 내가 정말 미갈의 사랑을 받았던 것이었는지... 잃어버린 10년을 지나면서 기억조차 할 수 없다라고. 누가 나를 향해 개나 벼룩이라고 조롱할지라도 나 역시 내가 내가 아니며, 할 말이 없다라고.

그리고 그 후 또, 다윗은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이는 비록 반복되는 것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겨울이 유난히 길고, 매서울지라도 봄은 다시 오는 것이며, 나를 죽이지 않는 것은 바로 나를 강하게 하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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