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로 나아감

(막 1:12, 개역) 『[12]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우리는 여기서 사랑하는 아들이 직면하는 고난과 괴로움을 보게 됩니다. 어쩌면 이 구절은 문맥적으로 볼 때 알맞지 않게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바로 앞 절에 하나님은 예수님을 향해 내 사랑하는 아들이자 나의 기뻐하는 아들이라고 선포하신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말해 놓고 그 다음 주어진 대가는 바로 광야로 내몰려 고난을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분명, 이 고난은 환경적인 동기나 우연히 찾아온 불행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이 행하신 일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아이러니한 현상을 통해 우리는 바로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아들을 다루시는 하나의 독특한 방법을 엿보게 됩니다. 비록,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아들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대우를 받으며 호의호식하는 애송이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사역을 하기 위해 인간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사랑하는 아들이 행해야 할 일들을 위해 그를 연단하고 훈련시키고 사역에 알맞게 예비시키는 작업이 필요했습니다. 아담은 실패한 시험을 예수님은 통과해야 했습니다. 사역을 이루기 위한 분명한 자격을 얻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예수님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훈련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너무나도 고생을 많이 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가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의뢰케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섭리였다고 말합니다. 또한, 바울은 굶주림과 헐벗음, 배부름과 풍요까지 모든 것을 경험해가는 가운데 그 모든 외적 환경으로부터 더 이상 유념치 않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말했습니다. 바로, 이 모든 것들이 주님을 위해 헌신한, 사랑 받는 바울이 받은 대우였습니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바울은 전혀 사랑을 받지 못한 것 같습니다. 오히려, 미움을 산 것과 다름 없어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깊은 사랑과 은혜를 입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것이 광야로 나아감의 정의입니다.

사도 바울 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는 광야로 나아가게 됩니다. 구원을 받을 때 성령께서 임재하십니다. 회심한 사람은 기뻐 환희합니다. 그러나 그 환희가 마냥 계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각 사람에게 차이가 있지만 어느 시점에서 갑자기 광야로 내몰리기 시작합니다. 행복할 줄만 알았는데 예기치 않은 상처와 다툼, 반대와 갈등이 밀려옵니다. 종종 ‘아니, 구원을 받지 않았으면 이런 일도 겪지 않았을텐데… 전에는 이런 일은 없었다구!’라고 불평과 불신의 비명을 지릅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광야로 내몰리는 시기가 온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섭리이며,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는 아들에게 행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론이란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 한 가지를 잘 이해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 사랑하시는 아들을 온실 속의 화초처럼 다루길 전혀 원치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사랑할수록 그로 하여금 저 광야에서도 꽃을 피우고 향기를 토하는 강인한 일꾼, 생산력과 가치를 두루 갖춘 알곡으로 만드시길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윗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다윗이 얼마나 많은 시련의 날들을 보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결코 성경 그 어디에도 다윗을 향해 하나님의 싫어 버림을 받은 자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윗에게 주어진 영광스러운 호칭은 ‘내 마음에 합한 자’이었습니다. 기억합시다. 광야로 나간다는 것은 사랑 받지 않는 자들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는 것이란 사실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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