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비밀

(행13:50-52) 『[50]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성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케 하여 그 지경에서 쫓아내니 [51] 두 사람이 저희를 향하여 발에 티끌을 떨어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 [52]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선교여행엔 많은 어려움이 따랐습니다. 훼방과 핍박을 받았습니다. 매도 맞고 감옥에도 들어가고 쫓겨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의 사역은 멈추지도 지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의 비밀은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기쁨과 성령충만’이었습니다.

종종 어떤 이들은 지쳐서 그저 터벅터벅 걷듯 신앙생활을 하곤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라도 신앙을 유지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옆에서 누가 밀어버리면 그대로 넘어지고 맙니다. 신앙의 능력과 힘, 신앙의 영속성을 위해서는 누구나 반복되는 기쁨과 성령충만을 체험해야 합니다. 그랬을 때 우리 사역에 능력과 열매가 나타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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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수 없는 그대_2011.2.6

(요 14:8-9, 개역) 『[8]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9]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요한복음 1장 46절에서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을 증거하며 그는 모세의 율법과 여러 선지자의 글에 예언된 메시야임을 밝혔다. 빌립은 예수님을 메시야로서 추종했다. 그러나 그의 또 다른 고민이 여기 14장에 이르러 드러난다. 메시야는 보았지만 하나님 아버지도 볼 수만 있으면 정말 만족스럽겠다는 것이다. 그때 예수님의 말씀이 그의 망상을 일깨운다. ‘나를 보았으면 아버지를 본 것이다.’

예수님과 오래 함께 했다고 해서 예수님을 아는 것은 아니다. 빌립뿐만 아니라 도마도 그러했다. 바로 앞에 예수님께서 천국의 처소를 예비하러 갈 것을 말하면서 그 길을 너희도 알 것이라고 말하자 도마는 이내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모르는데 우리가 그 길을 어떻게 알겠느냐고 반문했다. 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바로 그 길은 바로 나라고 하신다. 결국 도마도 예수님을 몰랐던 것이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이라며 아쉬워하신다. 그런데 빌립이 또 생뚱맞게 이와 같은 질문을 연달아 던진 것이다. 예수님은 못내 아쉬웠을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예수님을 알고 있을까? 하나님의 아들, 세상의 창조자,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분 등등 예수님에 대해 듣고 배운 것은 많은지 모른다. 그러나 아직도 정말 자기 영혼의 구원자로써 예수님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정말 그 분의 보혈의 공로와 대속의 사실을 성령 안에서 믿고 예수님과 연합한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알고, 믿을 때 우리는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하며 또 하나의 작은 예수가 될 것이다.

(요 14:12, 개역)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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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7-1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1;17-19 지혜와 계시의 정신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시는 이유와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이 가져다주는 변화와 결과는 무엇인가.

첫째 가장 중요한 목적은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이다. 내 생명의 은인이 있는데 그의 직업과 재산, 그의 성경과 사회적 관계를 알찌라도 그 은인된 사람을 그 자체로 모른다면, 그와 인격적 관계가 없다면...

우리가 기독교의 많은 교리와 진리를 배우고 그것에 익숙할지라도 정작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다면 우리는 실제적인 진리들을 적용하고, 그 가치를 이해하기 어려워진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먼저 알아야 된다. 하나님을 알 때 기독교 진리의 모든 기초가 되는 원리도 이해하며 적용하고 다양한 진리들을 엮고, 응용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에게는 그 어떤 기독교 진리와 가르침 윤리가 통용되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의 청년들에게 성결된 삶을 가르쳐보라. 아무도 그렇게 하지 못할 것이다.

심지어 성도 안에서도 하나님을 잘 모를 때 성경적 가치관과 진리가 무시되는 것을 발견케 될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성경에 담배 피우지 말란 말씀이라도 있나요?

그것이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다. , 성경을 모르는 것이다. 지혜와 계시의 정신이 비춰질 때 성경으로 돌아간다. 성경에 착념한다. 하나님을 알고 깊이 있게 이해해 간다. 이렇게 하나님을 알게 될 때 우리 마음의 눈이 밝아진다. 분별력과 통찰력을 얻는다. 영적인 일은 영으로라야 분별한다는 말씀처럼 신령한 이해력이 강화된다.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 기업의 영광의 풍성의 그 무엇을 살펴보는 능력이 있다. ,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과 그 계획과 깊이를 더욱 넓고 깊게 아는 것이며 더욱 진리 가운데 행하게 되는 것이며 삼가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깊이 알수록 자연히 그 법 아래 순종, 구속되는 삶에 가까워진다. 교통법규, 신호를 알수록 설 때와 갈 때를 아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아갈 수록 온전한 성도가 되어 간다.

처음 교제도 잘 안 나오던 사람이 교제만큼은 자리잡게 된다. 봉사하지 않던 이들이 봉사하게 된다.

한편, 마음의 눈을 밝힌다는 것을 좀더 깊이 생각해보자. 하나님은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시고 마음의 눈을 밝히신다. 이를 두 가지로 재설명하며 이와 같다.

하나, 하나님이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시는 이유는 마음의 눈을 밝히시기 위해서다.

, 마음과 눈이 밝아지기 위해서는 필히 하나님게로부터 오는 지혜와 계시의 정신이 필요하다.

종합해서 하나님은 어떤 이유 즉, 소망과 영광의 풍성 등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와 능력을 더 깊이 이해하게 하기위해서 우리의 마음 눈을 밝혀주시길 원하는데 이는 지혜와 게시의 정신으로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다른 의미에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이 부족할 수록 마음의 눈은 어두워지며 하나님의 부요를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 안에서 보다 높은 분별력이 부족하다는 의미는 마음 눈이 어둡다는 것이다. 누구는 영화롤 보고, 맛집을 다니는데 자주 시간을 쓰지만 누구는 그 시간을 아까워한다. ? 지헤와 계시의 정신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이나 세상의 것을 사랑치 말라고 했다.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없는 것이라 했다. 앞서의 표현을 빌리면 세상을 지배하는 유행과 오락이 친밀할수록 지혜와 계시의 정신이 부족한 것이다. 또 다른 의미에서 윤리와 도덕적 기준이 낮은 것이다. 성경의 윤리와 도덕이란 것은 세상의 기준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된다. 심지어 성경 말씀은 벧전1장에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고룩하라’고 말씀한다. 솔직히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그럼에도 그렇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보라. 물론, 영화를 보는 것을 무조건 죄로 여기는 건 아니다. 절제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도 오락이 필요하다. 다만, 순수한 오락이 필요한 것이다. 순수한 오락이란 지나치지 않고, 너무 흥분되지 않고, 마음을 배앗기지 않는 절제된 적당한 오락을 말한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마음의 눈’이란 표현을 생각해보자. 마음에 눈이 있는가? 그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예, 그렇습니다.’이다. 마음엔 입도 있고, 행위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마음의 입이 읽고 내려간다. 불쾌할 때 마음의 입이 불평한다. 종종 형제, 자매님을 평가하고 저주하는 말도 마음의 입이 내뱉는다. 매우 독특하다 마음이 말한다는 것은. 우리 마음은 행위도 있다. 의지의 출처가 마음에 있다. 행동이 나오기 전 주로 마음의 의지가 먼저 행위를 조장한다. 마음의 의지는 감정의 동기부여와 지원도 받는다. 그러면 생각은 실제 행동을 위한 수단과 방법을 고안하는데 나아간다.

그러므로 마음의 눈을 밝히신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우리가 부르심의 소망, 영광의 풍성, 능력의 크심을 알길 원한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의 의지에 동인을 제공하는 지혜와 게시의 정신이라는 수단을 사용해서 우리의 마음 눈을 밝히도록 인도하신다. 마음의 눈이 밝아지면 마음 안에 있는 1차적인 의지는 작동하며, 눈을 뜨게 한다. 그 눈은 처음 하나님이 목적하신 소망과 영광의 풍성, 능력의 크심을 발견하는 일을 시작하고 이루게 한다. 이로써 우리는 마음의 눈이 밝아져야할 필요성과 당위성까지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마태복음 6장에는 눈은 등불이며 눈이 밝으면 온 몸이 밝고, 눈이 어두우면 온 몸이 어둡다고 하셨다. , 눈이 밝으면 구별해서 행동하게 된다. 눈이 밝을수록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이라는 물리적 존재의 특성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활용하고 작용하셔서 진리로 이끄시는지 탐구해보라. 더불어 마귀 역시 이것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이러한 방법으로 우리를 범죄에 빠지게 하는지도. 마귀는 정욕과 탐욕의 정신을 계시해준다. 우리 마음 눈은 흐려진다. 하나님을 인식하는데 둔감해진다. 정욕적이고, 세상적인 즐거움과 유혹에 민감해진다. 우리의 감정과 마음의 의지가 정욕에 굴복된다. 자주 이방인 친구를 만나고 영화를 보고, 맛집을 다닌다. 2-3달에 한 번은 신작 영화를 본다. 유흥을 위해 종종 돈을 쓰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을 읽는 훈련은 부족하고, 읽어도 맛이 없다. 헌금과 같은 신앙의 기본적인 의무를 수행하데는 한계를 느낀다. 마음의 눈이 어두우므로 온 몸이 어둡게 된 것이다. 구별된 행위가 적은 것이다. 순종하는 삶이 적은 것이다.

그러므로 눈이 어두운 그리스도인은 눈이 밝은 그리스도인을 헤아리지 못하지만 눈이 밝은 그리스도인은 어두운 그리스도인의 정체를 감찰한다. 어째서? 영적인 일은 영으로라야 분별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좀 어두운 그리스도인도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을 몇 마디 말로 금방 구분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비그리스도인은 그의 정체가 드러난 것을 모를테지만.

, 마음의 눈은 그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다라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이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알게한다. 그 능력은 영적 능력이기도 한데, 영적 분별력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의 눈을 밝히자.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달라고 기도하고, 죄를 자백하고 버리기를 쉼없이 연습하고 실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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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의 겨자씨 믿음.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 할 것이 없으리라’ (마17:20)

겨자씨는 매우 작은 씨앗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언뜻 이 말씀을 듣고 보면 우리에게 아주 적은 믿음 하나만 있어도 우리가 믿음의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겠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겨자씨만큼의 믿음은 무엇일까요?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심히 근심하더라’(마17:23)

곧 이어지는 말씀에서 믿음 없이 심히 근심했다는 제자들을 보게 됩니다. 심히 근심케 한 이유는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바로 ‘죽임을 당하고’ 그 한마디 때문이었습니다. 분명 예수님은 죽임을 당하겠지만 결국 다시 살아날 것이란 부활의 희망을 얘기했습니다. 부활, 그들이 듣기만 들었지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부활에 대해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있는데 그들에게는 오직 ‘죽임을 당하고’ 그 한 마디만 크게 들렸던 것입니다.

복음서에서 병신과 이방인들은 믿음의 치료를 받으며 칭찬을 받지만 제자들은 항상 주님과 동행하면서도 믿음이 적다는 책망을 받는 아이러니한 모습을 봅니다.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때로는 이방인들 보다 더 두려워하고, 안절부절 못하고 믿지 못하는 모습을 가르쳐주는 건 아닌지 생각해봅니다. 우리도 종종 고난 뒤에 영광이 있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후에 주실 영광보다는 당장 겪을 고난이란 말만 크게 들리고, 고난을 두려워하고 피하려는 약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더 강조되는 것은 ‘살아나리라’란 소망의 말씀이겠지요.

겨자씨만한 믿음. 겨자씨는 매우 작은 씨앗이지만 심어서 나무가 되면 심히 커서 새들이 깃들인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겨자씨 믿음은 단지 적은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다는 말씀이기보다 심었을 때 크게 자라날 수 있는 가능성이 담겨있는 믿음. 그것을 말씀하신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처음엔 작은 믿음이지만 그 안에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믿고, 기다리고, 인내하고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큰 잠재력을 가진 믿음 말이죠.

교사의 봉사를 하면서도 우리의 부족함과 약함을 생각할 때 너무나 두렵고 망설여질 때가 많지만 우리 마음에 심어두어야 할 믿음이 이 겨자씨 믿음이 아닌가 생각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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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이기심

(창 29:31) 『여호와께서 레아에게 총이 없음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무자하였더라』

라헬은 언니 레아보다 아름다웠고, 다방면에서 훨씬 뛰어났다. 그러므로 야곱은 라헬을 더 사랑했다. 차별받는 레아에게 이는 늘 마음 한 켠에 있는 무거운 슬픔이었다. 레아도 남편의 우선적인 사랑을 받고 싶었다.

하나님은 레아에게 총이 없음을 보시고(덜 사랑받음) 레아의 태를 먼저 열어 주셨다. 레아는 평생 6명의 자식을 낳았다. 그러나 라헬은 레아가 6명의 자녀를 생산하는 동안 단 한 명의 자녀도 생산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라헬은 고통스러워했고, 레아를 질투하기도 했고, 야곱에게 떼를 쓰기도 했다. 
 

이 내용은 우리에게도 많은 것을 생각게 한다. 어느 부분에 있어 우리는 레아 같기도 하고, 라헬 같기도 하다. 그러나 누가 레아이며, 누가 라헬인지 골라보고 싶진 않다. 우리는 누구나 우선적으로 사랑받고 싶다.

오히려 다만, 라헬을 생각해보고 싶다. 라헬은 결과적으로 요셉을 출산하면서 상대적으로 많은 자녀를 생산한 레아보다 퀄리티 면에서 승리한 것 같다.(물론, 레아의 아들 유다로부터 예수님은 나셨다.) 그러나 그 전까지는 적잖히 고통 받았다. 그러나 그것이 레아만큼 이었을까? 사실 라헬의 결핍은 그것 하나였다. 그러나 레아는 어떠했나?

하나님은 레아의 태를 먼저 여시고 그녀에게 많은 자녀를 주심으로써 상대적으로 동생 라헬에게서 느끼는 자격지심을 위로해주셨다. 어떤 면에서는 라헬과의 불균형에 있어 밸런스를 맞춰주시는 것 같다. 아무튼...

모든 것이 다 완전한 것만이 미덕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라헬은 적어도 언니 레아에게 지나치게 이기적이었다. 라헬은 레아의 슬픔을 헤아려줄 줄 알아야 했다. 질투해선 안 된다. 언제든지 더 많이 누리고, 더 많이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면서 보다 나은 것만을 차지하려는 일련의 이기심을 절제해야 한다. 오히려 잘 갖춘 사람일수록 결핍을 경험해보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많은 것을 누리는 라헬에게는 무자함을 통해 결핍을 경험하게 하시면서 동시에 부족한 레아를 향해서는 한 가지라도 동생보다 낫게 하심으로써 그녀를 위로하고, 배려해주고 계시지 않은가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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