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엡 1:17-1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1;17-19 지혜와 계시의 정신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시는 이유와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이 가져다주는 변화와 결과는 무엇인가.
첫째 가장 중요한 목적은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이다. 내 생명의 은인이 있는데 그의 직업과 재산, 그의 성경과 사회적 관계를 알찌라도 그 은인된 사람을 그 자체로 모른다면, 그와 인격적 관계가 없다면...
우리가 기독교의 많은 교리와 진리를 배우고 그것에 익숙할지라도 정작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다면 우리는 실제적인 진리들을 적용하고, 그 가치를 이해하기 어려워진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먼저 알아야 된다. 하나님을 알 때 기독교 진리의 모든 기초가 되는 원리도 이해하며 적용하고 다양한 진리들을 엮고, 응용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에게는 그 어떤 기독교 진리와 가르침 윤리가 통용되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의 청년들에게 성결된 삶을 가르쳐보라. 아무도 그렇게 하지 못할 것이다.
심지어 성도 안에서도 하나님을 잘 모를 때 성경적 가치관과 진리가 무시되는 것을 발견케 될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성경에 담배 피우지 말란 말씀이라도 있나요?”
그것이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다. 즉, 성경을 모르는 것이다. 지혜와 계시의 정신이 비춰질 때 성경으로 돌아간다. 성경에 착념한다. 하나님을 알고 깊이 있게 이해해 간다. 이렇게 하나님을 알게 될 때 우리 마음의 눈이 밝아진다. 분별력과 통찰력을 얻는다. 영적인 일은 영으로라야 분별한다는 말씀처럼 신령한 이해력이 강화된다.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 기업의 영광의 풍성의 그 무엇을 살펴보는 능력이 있다. 즉,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과 그 계획과 깊이를 더욱 넓고 깊게 아는 것이며 더욱 진리 가운데 행하게 되는 것이며 삼가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깊이 알수록 자연히 그 법 아래 순종, 구속되는 삶에 가까워진다. 교통법규, 신호를 알수록 설 때와 갈 때를 아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아갈 수록 온전한 성도가 되어 간다.
처음 교제도 잘 안 나오던 사람이 교제만큼은 자리잡게 된다. 봉사하지 않던 이들이 봉사하게 된다.
한편, 마음의 눈을 밝힌다는 것을 좀더 깊이 생각해보자. 하나님은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시고 마음의 눈을 밝히신다. 이를 두 가지로 재설명하며 이와 같다.
하나, 하나님이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시는 이유는 마음의 눈을 밝히시기 위해서다.
둘, 마음과 눈이 밝아지기 위해서는 필히 하나님게로부터 오는 지혜와 계시의 정신이 필요하다.
종합해서 하나님은 어떤 이유 즉, 소망과 영광의 풍성 등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와 능력을 더 깊이 이해하게 하기위해서 우리의 마음 눈을 밝혀주시길 원하는데 이는 지혜와 게시의 정신으로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다른 의미에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이 부족할 수록 마음의 눈은 어두워지며 하나님의 부요를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 안에서 보다 높은 분별력이 부족하다는 의미는 마음 눈이 어둡다는 것이다. 누구는 영화롤 보고, 맛집을 다니는데 자주 시간을 쓰지만 누구는 그 시간을 아까워한다. 왜? 지헤와 계시의 정신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이나 세상의 것을 사랑치 말라고 했다.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없는 것이라 했다. 앞서의 표현을 빌리면 세상을 지배하는 유행과 오락이 친밀할수록 지혜와 계시의 정신이 부족한 것이다. 또 다른 의미에서 윤리와 도덕적 기준이 낮은 것이다. 성경의 윤리와 도덕이란 것은 세상의 기준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된다. 심지어 성경 말씀은 벧전1장에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고룩하라’고 말씀한다. 솔직히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그럼에도 그렇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보라. 물론, 영화를 보는 것을 무조건 죄로 여기는 건 아니다. 절제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도 오락이 필요하다. 다만, 순수한 오락이 필요한 것이다. 순수한 오락이란 지나치지 않고, 너무 흥분되지 않고, 마음을 배앗기지 않는 절제된 적당한 오락을 말한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마음의 눈’이란 표현을 생각해보자. 마음에 눈이 있는가? 그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예, 그렇습니다.’이다. 마음엔 입도 있고, 행위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마음의 입이 읽고 내려간다. 불쾌할 때 마음의 입이 불평한다. 종종 형제, 자매님을 평가하고 저주하는 말도 마음의 입이 내뱉는다. 매우 독특하다 마음이 말한다는 것은. 우리 마음은 행위도 있다. 의지의 출처가 마음에 있다. 행동이 나오기 전 주로 마음의 의지가 먼저 행위를 조장한다. 마음의 의지는 감정의 동기부여와 지원도 받는다. 그러면 생각은 실제 행동을 위한 수단과 방법을 고안하는데 나아간다.
그러므로 마음의 눈을 밝히신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우리가 부르심의 소망, 영광의 풍성, 능력의 크심을 알길 원한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의 의지에 동인을 제공하는 지혜와 게시의 정신이라는 수단을 사용해서 우리의 마음 눈을 밝히도록 인도하신다. 마음의 눈이 밝아지면 마음 안에 있는 1차적인 의지는 작동하며, 눈을 뜨게 한다. 그 눈은 처음 하나님이 목적하신 소망과 영광의 풍성, 능력의 크심을 발견하는 일을 시작하고 이루게 한다. 이로써 우리는 마음의 눈이 밝아져야할 필요성과 당위성까지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마태복음 6장에는 눈은 등불이며 눈이 밝으면 온 몸이 밝고, 눈이 어두우면 온 몸이 어둡다고 하셨다. 즉, 눈이 밝으면 구별해서 행동하게 된다. 눈이 밝을수록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이라는 물리적 존재의 특성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활용하고 작용하셔서 진리로 이끄시는지 탐구해보라. 더불어 마귀 역시 이것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이러한 방법으로 우리를 범죄에 빠지게 하는지도. 마귀는 정욕과 탐욕의 정신을 계시해준다. 우리 마음 눈은 흐려진다. 하나님을 인식하는데 둔감해진다. 정욕적이고, 세상적인 즐거움과 유혹에 민감해진다. 우리의 감정과 마음의 의지가 정욕에 굴복된다. 자주 이방인 친구를 만나고 영화를 보고, 맛집을 다닌다. 2-3달에 한 번은 신작 영화를 본다. 유흥을 위해 종종 돈을 쓰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을 읽는 훈련은 부족하고, 읽어도 맛이 없다. 헌금과 같은 신앙의 기본적인 의무를 수행하데는 한계를 느낀다. 마음의 눈이 어두우므로 온 몸이 어둡게 된 것이다. 구별된 행위가 적은 것이다. 순종하는 삶이 적은 것이다.
그러므로 눈이 어두운 그리스도인은 눈이 밝은 그리스도인을 헤아리지 못하지만 눈이 밝은 그리스도인은 어두운 그리스도인의 정체를 감찰한다. 어째서? 영적인 일은 영으로라야 분별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좀 어두운 그리스도인도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을 몇 마디 말로 금방 구분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비그리스도인은 그의 정체가 드러난 것을 모를테지만.
또, 마음의 눈은 그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다라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이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알게한다. 그 능력은 영적 능력이기도 한데, 영적 분별력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의 눈을 밝히자.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달라고 기도하고, 죄를 자백하고 버리기를 쉼없이 연습하고 실천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