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감수성과 설득의 논리

아이들을 말씀으로 양육하려는 교사의 본래 목적과 취지를 잘 이뤄가기 위해 교사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자질을 저는 두 가지로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예전에도 가정교제를 하면서 언급한 바 있지만 가장 첫 번째는 ‘영적 감수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언제나 ‘성경의 이야기’가 정말 그냥 이야기. 즉, 하나의 사가(saga)-무용담으로 전달될까 두렵습니다. 보편적으로 교사들은 설교와 교제를 통해 자신이 배운 바에 준해 앵무새처럼 그것을 객관적으로 전달하는 것에 더 익숙한 모습을 보입니다.

풀어서 설명 드리면, 우리는 가르치기 전에 먼저 배우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배움을 통해 하나님과 성경에 대한 하나의 보편적인 기준을 갖고 있습니다. 나름의 차이는 조금씩 있지만 대부분은 거의 어느 범주에 맞아 떨어지는 일관된 학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아이들에게도 성경을 가르칩니다. 그런데 교회가 인정하는 보편적 진리를 객관적으로 잘 전달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그것을 스스로가 묵상하고 관찰해봄으로써 얻은 감동과 깨달음이 부족하게 되면 그 가르침은 앵무새처럼 답습하는 하나의 ‘무미건조한 설명’에 그칠 뿐입니다. 교사가 할 일은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진리를 전달함과 동시에 ‘혼’을 불어넣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것을 하지 못하는 교사는 사실상 교사의 본분을 다하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교사들의 분반을 유심히 들어보면 아직은 이런 ‘혼’을 불어주는 부분이 부족하지 않나 싶습니다. 우리가 보다 나은 아이들의 영적성숙과 사고의 변화를 이끌어주기 위해서는 영적 감수성이 개발된 교사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우리는 객관적으로 전달하는 것 못지 않게 가슴으로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 교사들은 ‘설득의 논리’를 갖춰야 합니다. 사람은 이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각 사람은 자기만의 사고의 논리를 갖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의견이든 그냥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논리에 준하는 것을 걸러서 수용합니다. 아이들 역시 자기 사고의 능력 안에서 그런 방식으로 수용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교사들은 아이들의 수준에 맞게 설명해줄 수 있어야 하며, 그것을 개발시켜 나가야 됩니다. 또한, 충분한 설득의 논리로써 진리를 설명함으로써 수긍할 수 있게 해줘야 됩니다. 아무리 뜨거운 가슴과 혼으로 말할지라도 그것이 합리적인 논리를 갖지 못한 것이 되면, 납득할 수 없게 되고 의구심을 품게 됩니다. 그러면 그것은 수용되지 못하며, 설득력을 잃습니다. 설득력을 잃는다는 것은 변화의 동기를 주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유능한 교사는 누가 들어도 보편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충분한 ‘설득의 논리’와 더불어 이에 혼을 넣은 ‘영적 감수성’을 겸해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교수법을 지닌 교사가 되고자 기도하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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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하나의 질문_2011.2.14

(마 27:20-22, 개역) 『[20]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를 권하여 바라바를 달라 하게 하고 예수를 멸하자 하게 하였더니 [21] 총독이 대답하여 가로되 둘 중에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바라바로소이다 [22]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그리스도라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저희가 다 가로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노무현 前 대통령의 생가를 방문해보면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다. 살아생전에 많은 반대를 받은 그이지만 분명 그 뒤에 그를 응원하고 지지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생가에 가면 그의 생전 모습을 볼 수 있는 사진과 어록들을 볼 수 있다. 추모관에는 그가 사용한 등산지팡이, 자전거, 의자와 펜 등이 전시되어 있다. 그의 정신을 볼 수 있다. 그의 추종자들을 볼 수 있다. 그의 묘비로 향하는 길바닥에 많은 이들이 남긴 그리움의 글귀들이 새겨져 있다. 정말 그는 일개 나라의 국가원수로써 업적을 남겼고, 많은 이들의 그리움과 동경과 추모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인간적으로 그는 정말 성공한 사람이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그를 기억하고, 사랑해주고 바라보고 있으니까 말이다. 인간적으로 그가 너무나 부러울 정도였다.

그러나 우리는 이내 묻게 된다. 지금 현재 그는 어디에 있는가. 그의 영혼은 저 음부 밑에서 신음하고 있다. 그 사실이 우리를 일깨운다.

노무현 대통령이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민주주의를 위해 정의와 정직의 소신을 위해 살아온 삶에 대해 단 한마디의 위로와 언급도 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하나님의 질문은 오직 단 하나이다. ‘너는 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하였느냐?’

위대한 업적, 많은 사람의 사랑과 동경, 존경스러운 위치 그 모든 것이 무의미해지는 순간은 바로 주님 앞에 서는 그 날이다. 하나님의 질문은 오직 하나이기 때문이다.

빌라도는 어떠했는가? 그는 십자가 처형을 허락하고 말았다. 우리는 어떠한가?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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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불순종

사울왕이 하나님의 버림을 받기 전 결정적인 2가지의 사건이 있습니다.

첫째는 블레셋과 대치하였을 때, 이레를 기다리라고 한 사무엘의 명을 거역하고, 제사장의 권한인 제사 업무를 자기가 해버린 경우입니다. 사울의 변명에서 3대 급박한 요소를 발견합니다.
1. 사무엘이 지체함. 2.백성이 흩어짐. 3.블레셋이 믹마스에 모임.
종합해서 볼 때, 이는 사울이 당면한 첫 번째 시험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one out 됩니다.

둘째는 사무엘을 통해 하나님께서 아말렉의 모든 소유를 진멸하라고 하신 것을 거역한 것입니다. 실제적으로 이는 사울이 직면한 두 번째 시험이자 3out이었습니다.
사울은 좋은 가축은 제사용으로 살려두었고, 아각왕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러고도 기념비를 세우고, 사무엘이 나왔을 때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행하였나이다’라고 자랑했습니다.

‘나는 실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여 여호와께서 보내신 길로 가서 아말렉 왕 아각을 끌어 왔고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였으나 다만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취하였나이다’(삼상15:20-21)

사울의 치열한 변명과 자기 주관대로 행하는 무지를 보게 됩니다. 특별히, 사울의 변명 속에서 나타나는 ‘다만’이라는 한 마디가 우리를 돌아보게 합니다.

우리가 순종하지 않을 때 ‘다만’이라고 말할 수 있는, 매우 합리적인 명분을 갖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울처럼 우리는 신앙의 어떤 의무와 교회 안에서의 어떤 요구를 받습니다. 온전히 순종할 때도 있지만, 때로는 내 주관대로 해석해서 해놓고 내 의무를 다 했다고 고집을 부리기도 합니다. 또한, ‘다만’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자는 지극히 선하고 아름다운 목적을 위해 다만, 좀 살려둔 것일 뿐입니다. 진멸이야 다 했지요. 보십시오. 마냥 죽이기만 다 죽이면 제사는 어떻게 지내겠습니까? 융통성도 좀 있어야죠’
이처럼 나 자신도 하나님께 제사드린다는 그럴듯한 표면적 명분을 내세워, ‘다만’이라고 상황에 부여되지 않은 명분을 끌어들여 아름다운 불순종을 하고 있진 않은지 반성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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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빌2:19-20)

빌립보서는 사도행전의 로마여행기간 로마에 투옥된 바울이 그를 위해 헌금을 모아온 빌립보 교인들에게 감사와 애정, 권면을 전하는 서신서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디모데를 파송하며 이와 같이 얘기했습니다. 디모데의 성도로써의 참된 가치가 표현된 한 마디가 아닌가 합니다. ‘너희(빌립보)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디모데밖에) 없음이라’ 바울의 많은 동역자 가운데 배교하고 떠나고, 그는 참 외로운 사역을 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이 디모데는 얼마나 그의 큰 위로였을까요? 마치 바울의 심정과 같이 교회를 돌아보고 결과를 얘기해주고 살펴줄 사람이 이 디모데였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어떠한가요?

저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 (빌2:30)

빌립보 성도들의 헌금과 요청을 받아 로마의 바울에게 면회를 와서 접대한 에바브로디도. 그는 병들었고, 빌립보 성도들이 그 소식을 듣고 걱정하는 것만으로도 부담스러워한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을 그를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 일을 위해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 돌보기 보다 바울 나를 섬기려는 빌립보 너희 정성의 부족이 있을까 그걸 마저 채우려 한다고. 얼마나 큰 수고와 희생을 했는지 짐작이 되지요. 귀한 사람입니다. 나는 그런 삶을 조금도 살아보지 못하는데, 이요한 목사님 말씀처럼 가이오 근처도 못 가놓고…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4:19)

바울은 나를 위해 물질과 정성을 희생하는 빌립보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다시금 모든 것을 풍성히 채워주실 것이라고 축원해주고 있습니다. 네, 우리 선생님들 우리도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의 수고를 생각해보고 더 채우실 것을 기대해보면서 교회학교를 섬기는 일에 내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생각해보실 수 있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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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고동락 하시나요?

어려움도 즐거움도 함께 하는 것을 동고동락이라고 합니다. 공동체에서 특히 강조되는 이 의미는 결속력을 대변해주는 것이기도 하지요. 매일 기도와 함께 성경을 읽다 보면 잠깐 잠깐 질문과 생각들을 하면서 말씀의 흐름과 성경구절이 담고 있는 무언의 메시지를 살펴보게 됩니다.

(대상 15:29, 개역) 『여호와의 언약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어다보다가 다윗 왕의 춤추며 뛰노는 것을 보고 심중에 업신여겼더라

오늘 익숙한 이 말씀에서 눈을 멈추고 잠시 질문을 던졌습니다.
‘근데, 도대체 왜 미갈은 다윗을 비웃은거지?’

처음 다윗이 사울의 군대장관으로 재직할 때 미갈은 다윗을 사모했습니다. 그것을 알아챈 사울왕은 다윗을 올무에 걸리게 하고자 미갈을 아내로 주기로 했습니다. 다윗은 그것을 좋게 여겨(실수^^) 블레셋 사람 양피 100을 받치고 미갈을 아내로 얻지요.
다윗이 사울의 위협을 받을 때 미갈은 다윗을 창밖으로 도망 보내고 거짓 우상을 침대에 놓아주는 등 다윗의 처로써 사랑을 다합니다. 그런 미갈이 오랜 유랑과 시련의 골짜기를 건너 이제 왕이 된 다윗, 언약궤를 옮기며 기뻐 춤추는 다윗을 보고는 비웃었던 것이죠.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문득 떠오르더군요. 미갈이 다윗을 창밖으로 내려보냈던 그 날 미갈은 다윗과 함께 가지 않았다는 것을. 미갈은 궁에 남아 있다 훗날 발디란 사람과 재혼합니다. 그로부터 오랜 유랑의 시기를 거친 다윗과는 생이별을 하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부부였지만 오래 떨어져 서로 다른 환경을 살아온 두 사람. 미갈이 어찌 다윗의 수난과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동되는 그 마음을 헤아려 줄 수 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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