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력적인 부정_2011.07.07.

(레위기11: 41-47) 땅에 기어 다니는 모든 기는 것은 가증한즉 먹지 못할찌니 곧 땅에 기어다니는 모든 기는 것 중에 배로 밀어 다니는 것이나 네 발로 걷는 것이나 여러 발을 가진 것이라 너희가 먹지 말찌니 이는 가증함이니라 너희는 기는바 기어다니는 것을 인하여 자기로 가증하게 되게 말며 또한 그것을 인하여 스스로 더럽혀 부정하게 되게 말라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바 기어다니는 것으로 인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이는 짐승과 새와 물에서 움직이는 모든 생물과 땅에 기는 모든 기어다니는 것에 대한 규례니 부정하고 정한 것과 먹을 생물과 먹지 못할 생물을 분별한 것이니라


언뜻 이 말씀이 던지는 메시지를 가장 잘 요약한 신약의 구절이 있다면 아마 그것은 이 구절이 아닐까 싶다.

(골3:2) 오직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땅을 기는 모든 것들을 부정하다고 하신다. 이것들의 특징은 땅에서부터 떨어질 수 있는 가능성이 없다는 사실이다. 뛰어오르지도 못하고, 날지도 못한다. 오직 항상 그저 땅에만 부비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소망이 없다.

심지어 어떤 것들, 뱀은 배로 밀고 다닌다. 땅과 아주 밀착해서 살아가는 것이다. 어떤 것은 몸을 부비지는 않는다. 네 발 또는 여러 발로 걷는다. 그러나 그 발이 항상 땅에만 붙어서 생존한다. 발이 많을수록 땅과 접하는 것도 많다. 그러므로 그 모든 것은 하나님께 부정한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진다. 사람은 두 발로 걷는다. 날지 못한다. 사람의 소망도 땅에 있다. 다리가 불편하면 몸을 땅에 부비며 살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사람도 부정하다. 그러나 거듭날 때 부활의 소망이 있으므로 그는 정하다.

하나님은 구별되라고 말씀하신다. 이 규례 자체가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을 분별한 것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사람도 분별하신다. 여전히 땅의 소망만 있는 자연인과 부활의 소망이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말이다. 우리는 분별된 삶이 요구된다.

땅에 밀착되어 땅만 의지하고 살아가는 삶의 방식에서 분별되어야 한다. 허영, 육신적 만족, 명예, 세속적 지위, 물질만능주의, 좋은 차, 현란한 옷, 자기만족 그 모든 것들은 땅을 기는 것들이다. 그것을 만지려는 삶이 부정하다. 하나님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신다. 하늘을 바라보자. 육적인 것에 너무 부비며 살려고 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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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머물 곳

(마가복음2:21-22)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생베 조각과 새 포도주를 들어 실례를 말씀하신다. 누군가 생베가 낡아 그것을 기우고자 한다면 새 생베 조각으로 기워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새 생베 조각이 오히려 낡은 생베 조각을 잡아당겨 그 해어짐을 심하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또, 새 포도주는 새 가죽 부대에 넣지 낡은 가죽부대에 넣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새 포도주가 낡은 가죽 부대를 터뜨려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교훈은 우리에게 어떤 가치가 있을까?

거듭난 성도는 비유하자면 새 생베 조각이며, 새 포도주이다. 우리는 자연인으로 태어났다. 죄와 허물로 멀어져 있는 자연인. 그러므로 우리는 낡은 세상과 낡은 가죽부대에 뒤엉켜 살아왔다. 그러나 거듭남과 동시에 우리는 새 생명을 얻었다. 우리 육체는 여전히 후패해져가나 우리 속사람은 날로 새롭다. 그러므로 우리는 새 생베 조각이자 새 포도주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구별될 것을 말씀하신다. 새 생베 조각과 낡은 생베 조각이 어울릴 수 없다. 새 포도주가 낡은 가죽부대에 담길 수 없다. 그것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며, 그 조합은 오히려 서로에게 부자연스럽다.

거듭났는가. 그렇다면 새 가죽부대에 담겨져야 한다. 그리스도와 그의 몸 된 교회 안에 담겨지고 더 이상 낡아가는 세상에 담겨지면 안 된다. 거듭난 무리 안에 담겨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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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변명_2011.07.06.

(레 10:19-20, 개역) 『[19] 아론이 모세에게 이르되 오늘 그들이 그 속죄제와 번제를 여호와께 드렸어도 이런 일이 내게 임하였거늘 오늘 내가 속죄 제육을 먹었더면 여호와께서 어찌 선히 여기셨으리요 [20] 모세가 그 말을 듣고 좋게 여겼더라

회중을 위해 속죄제사로 드린 예물의 고기를 성소에서 먹어야 했다. 그러나 나답과 아비후의 그릇된 제사가 그들의 죽음을 초래했다. 그리고 아론은 제물의 고기를 먹지 않고 다 태워버렸다. 그럼으로 모세는 아론에게 분을 내며 어째서 제물의 고기를 먹지 않고 태워버렸느냐고 따졌다. 그러자 아론은 제물로 드려 제사를 지내는 와중에도 그릇된 불을 드림으로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거늘 그 제물의 고기를 먹는 것이 과연 선하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러므로 모세는 아론의 근신하는 마음과 하나님 경외하는 마음을 알고 오히려 좋게 여겼다.

FM이 있다. 무엇은 어떻게 하고, 어떤 것은 또 어떻게 해야 되고... 그러나 흔히 FM적인 것은 융통성이 없다 라고도 한다. 그러나 신앙인 규례들은 융통성보다 규례적인 것을 더 소중히 여길 때도 있다. 그럼에도 오늘 이 아론의 변명 속에서 우리는 더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우리는 구약의 관점이 제시하는 율법적 구속은 없다. 그러나 엄연히 그리스도의 율법이 있다. 또, 사실상 여전히 우리에게 구약의 율법은 우리 삶의 윤리에서 유효한 것이다. 더불어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 일반적이고 관례적인 규례와 신앙의 규칙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아론의 경우처럼 먹어야 될 제물을 먹지 않는 문제에 있어서 그것이 비록 일반적인 규례를 벗어난 것일지라도 그 의도와 목적이 하나님을 경외함이었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사실 모든 신앙적 규례와 가르침의 궁극적인 목적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전적으로 그리스도인이 해서는 안 될 극단적인 문제가 아니라 한다면. 예를 들어, 살인이나 간음과 같은 것이 아니라한다면 우리는 좀 더 융통성 있게 대처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단지 표면적인 규례를 어긴 것으로 보인다고 해서 무조건 잘못된 것이라 할 수만은 없다. 때를 따라서는 그 의도와 목적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달리 적용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런 사례를 이해하고 관용할 수 있다면 상대방의 믿음을 판단하는 우를 적게 범할 수 있고 또, 누군가는 불필요한 죄책감을 피할 수도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의도와 목적, 동기의 문제이다. 하나님을 경외하자. 그러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먹는 자도 주를 위해 먹고,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해 먹지 않는다면 그 어느 것도 문제될 것이 없다. 하나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기 때문에 감사함으로 받으면 속된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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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 your summer_2011.07.03.


(레 8:7-9, 개역) 『[7] 아론에게 속옷을 입히며 띠를 띠우고 겉옷을 입히며 에봇을 더하고 에봇의 기묘하게 짠 띠를 띠워서 에봇을 몸에 매고 [8] 흉패를 붙이고 흉패에 우림과 둠밈을 넣고 [9] 그 머리에 관을 씌우고 그 관 위 전면에 금패를 붙이니 곧 거룩한 관이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심과 같았더라』


일주일간의 제사장 위임식이 거행되었다. 사상 최초의 초대 대제사장직에는 레위지파 아론이 선임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거룩하게 구별되었으며, 기름부음을 받았다. 그 향기로운 기름이 아론의 수염을 타고 흘러내렸다. 거룩한 직분에 부르심을 받은 아름다운 아론.

그러나 그에게도 뼈아픈 실패와 아픔의 과거가 있었으니... 그는 모세가 시내산 위에 올라가 40주야를 머무는 동안 그 산 아래서 동요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송아지 우상을 각을 떠서 만들어준 장본인이었다. 모세는 아론의 그러한 무책임한 행동을 놓고 모든 백성들을 조롱거리가 되게 했다고 책망했다.

홍해를 지나 광야로 나온 그들.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애굽의 우상과 권세 아래에서 빠져나온 그들에게 첫 우상숭배의 치명적 오점을 남긴 그 중심에 아론의 비겁함과 무책임이 있었다. 그럼에도 오늘 이 거룩한 제사장 위임식의 날 아론은 가장 거룩한 기름을 부음 받으며 가장 거룩한 회막의 봉사에 쓰임 받기 위한 모든 자격을 갖췄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실패는 영원한 실패가 될 수 있는가. 현재의 초라함이 영원한 초라함이 될 수 있는가. 한 번 정죄는 영원한 정죄가 될 수 있는가. 아무것도 우리를 구속하지 못한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의 강권하심이 아니라면 말이다.

수많은 실패와 좌절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다시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나아갈 것인지가 더 중요하다. 하나님은 제 삼, 제 사 기회를 주신다. 지나치게 낙심하지 마라. 오히려 늘 허물을 덮으시고 풍성한 은혜를 다시 베풀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 그저 감사하며 기다리자.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 겸손하라고 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높이신다 말씀하셨다. 고난 중에 있을 때. 앞이 보이지 않는 침체와 실패와 패배 속을 거닐 때라 할지라도 기억하자.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 믿는 것. 겸손히 기다리는 것.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 묵상하는 것. 그것이 최선의 방책이며, 늘 언제나 하나님은 다시 내게 거룩한 기름을 부어주시기 위해 예비하신 그 날이 예정되어 있음을 말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주의 제자는 지나치게 낙심하지 않으며, 영원히 침체되어 있지 않으며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일곱 번 다시 일어나게 될 것이다. 겨울이 유독 지독하고 길어질지라도 그 겨울의 끝에는 봄이 오고, 다시 싹이 돋고, 소생하며 푸르름이 기지개를 편다. 우리의 겨울이 너무 길다고 하나님께 토로할 때 하나님은 변함없이 우리에게 말씀해주신다.

‘난 너의 여름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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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을 얻으시기 위해_2011.07. 
 
(출 14:17, 개역) 『내가 애굽 사람들의 마음을 강퍅케 할 것인즉 그들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갈 것이라 내가 바로와 그 모든 군대와 그 병거와 마병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리니

장자가 죽는 재앙으로 인해 바로는 겨우 그 마음을 항복했다. 그러나 그 역시도 잠시. 바로는 불타오르는 증오와 복수심을 갖고 그의 최정예 부대를 정렬시키고 이스라엘의 뒤를 쫓는다. 이제 아주 자신의 생명을 걸고 서라도 여호와와 맞짱 뜨기 위해서 말이다.

항복한 줄만 알았던 바로의 대반격에 이스라엘 민족은 심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그들에게는 전쟁할 수 있는 그 어떤 준비도 되어있지 않았다. 그들은 노예에서 이제 막 탈출하는 피난민에 불과했다. 최정예 부대가 쫓아오고 앞에는 바다. 그러므로 그들은 극도로 흥분했고 심히 두려워 부르짖었다. 한편, 민감해진 그들은 모세를 향해 막말을 하며 대들었다. 맹비난했다. 기껏 광야에서 우리를 죽게 만들려고 끌어낸 것이냐며. 차라리 애굽사람을 섬기는게 낫지 않았겠느냐며.

성난 그들에게 모세가 엄중히 말했다. 지금껏 본 이적으로 부족하냐고. 두려워도 말고, 들레지도 말고 불안과 공포를 잠재우고 그 사나운 입을 다물고 가만히 서서 다만 여호와께서 무엇을 어떻게 행하시는지 지켜 보라고 말이다. 싸우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용사되신 하나님께서 애굽의 군대를 어떻게 이기시는지 지켜보라고 말이다.

그리고...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구원의 문이 열렸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이었다 하더라고 솔직히 바다가 갈라질 것이라곤 상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익히 아무도 생각해보지 못한 상상해보지 못한 하나님만의 방법이었다. 이스라엘 민족은 입이 딱 벌어졌다.

또, 그리고 애굽의 성난 군대가 예상대로 바다까지 뒤쫓아왔다. 그리고 그 다음 갈라진 바다는 다시 합쳐졌으며 애굽의 모든 군대는 그 물 아래 수장되었다. 그럼으로써 이스라엘의 피비린내 나는 핍박자 바로는 운명을 달리했으며, 그들을 그토록 두렵게했던 최정예 부대는 칼 한 번 휘두르지 못한 채 바다 아래 묻혔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셨고 영광을 받으셨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하나님의 열심!

영광의 하나님!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삶의 모든 현상과 반응 속에서 나 자신의 안락과 평안, 나의 영광과 만족에 지나치게 집착하기 때문에 너무나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우리는 당장 내 뒤에 쫓아오는 바로의 군대를 바라보면서 으르렁거린다. 하나님을 원망한다. 우리는 실제로 하나님의 영광 따위는 크게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영광에 관심을 가진다. 그러므로 실패한다. 그러므로 원망한다. 그러므로 불평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영광에 관심이 있으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위해 일하실 뿐. 우리의 이기심으로 인해 우리는 얼마나 우리 삶의 모든 일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해야 됨에도 하나님을 무시하고 있는 것인지.

육신적으로 좋고 안락한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수단이라면 그 누구도 판단할 수 없다. 우리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모든 것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나의 만족인가. 나의 영광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영광인가.

직장, 결혼, 사회적 평판, 차, 경제력... 모든 소유.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에 부합되는 것인지를 고려하는 정직함. 그것이 우리를 닫혀진 홍해 앞에서도 들레지 않게 하는 비결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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