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중한 손해_2011.07.07

(막5:12-17) 이에 간구하여 가로되 우리를 돼지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하소서 하니
허락하신대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하거늘 치던 자들이 도망하여 읍내와 촌에 고하니 사람들이 그 어떻게 된 것을 보러 와서 예수께 이르러 그 귀신 들렸던 자 곧 군대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더라 이에 귀신 들렸던 자의 당한 것과 돼지의 일을 본 자들이 저에게 고하매 저희가 예수께 그 지경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거라사 지방에는 매우 지독한 귀신들린 사람이 있었다. 그는 귀신에 들린 채 일정한 거주지가 없이 무덤 사이에서 살고 있을 정도였다. 그가 그 마을에서 끼치는 부정적인 영향력은 결코 만만치 않은 것이었기에 사람들은 그를 잡아다 여러 번 쇠고랑과 쇠사슬로 결박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귀신의 능력을 힘입어 발작을 일으키면 그 쇠고랑과 쇠사슬을 끊을 정도로 괴력을 발휘하곤 했다. 그리고 그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왜 그토록 괴력을 발휘할 수 있었는지 드러났다. 예수님께서 그 귀신들로 하여금 돼지 떼에 들어가게 허락했을 때 무려 2,000마리가 넘는 돼지 떼가 바다에 내리달아 몰살했다.

이 사건은 굉장한 이슈를 불러일으켰다. 충분히 이해할만한 상황이다. 그 무시무시한 귀신들린 사람은 제 정신을 차린 온전한 사람으로 되돌아와 예수님 앞에 앉아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나아와 일련의 사건 정황을 듣고, 확인했다. 산허리를 가득 메웠던 수천 마리의 돼지 떼는 보이지 않았다. 텅 비다시피한 목장이 보였다. 사람들의 눈은 휘둥그래졌다. 쇠고랑을 끊을 만큼의 괴력을 발휘하던 그 귀신들린 사람을 보면서 혀를 내두를 때 못지 않을 만큼 현재 벌어진 상황에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을 영접하여야만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 현실은 정반대로 흘러버린다.

그들에게 있어 귀신들린 사람이 제정신이 되었다는 것은 큰 의미가 없었다. 그것은 그들의 어떤 이익에 부합되는 것이 못 되었다. 예수님이 귀신들린 그 사람을 고치셨다는 것도 그들의 이익에 부합되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은 막대한 손해를 보았다. 그들의 소망은 2,000마리의 돼지들이었다. 그것은 그들의 실제적인 부와 소득의 지표이면서 그들의 권력과 명예와 자부심을 보장해주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현재 그들은 그 모든 소망을 잃어버릴 처지에 놓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들이 예수님께 손해배상청구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좀 더 의미이게 살펴볼 때 그들이 예수님을 돌려보냄으로 인해 그들이 더 큰 손해를 자초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은 물질적인 타격을 입었다. 돼지 한 마리를 30만원으로 계산해 볼 때 무려 6,000만원의 금전적인 손해를 입었다. 부수적인 가치를 환산하면 그 금액은 더 커질 것이다. 그들은 그 막중한 금전적 손해에 충격을 받고, 예수님을 돌려보냈다. 그러므로 그들의 영적소망도 호수에 빠진 돼지들처럼 되어버렸다. 그들은 영적인 막중한 손해를 연이어 초래한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잃어버렸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엄청한 손해를 자초한 것이다.

우리가 물질적인 손해로 인해 영적인 손해까지 초래할 수 있는 무지함에 빠져 있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잃을 수 있다. 그 거라사인의 지방에서 돼지 떼를 키우던 부자들은 한 순간에 그들의 영적, 육신적 소망을 모두 잃었다. 그것은 실로 막중한 손해가 아닐 수 없었다.

이 교훈은 분명 우리를 권면한다. 우리는 정말 우리의 금전적인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예수님을 영접할 준비가 되어있는 것일까? 우리의 믿음 역시 금전적인 손해가 영적인 손해로까지 이어지지 않을 수 있을까? 사업의 실패, 직장의 실패, 기타의 모든 육적인 요건들을 잃는 것으로 인해 오늘날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믿음의 시험과 실족을 경험하는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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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시험에 빠지다_2011.07.07


(마태복음14:25-32)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 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지르거늘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대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익히 바다 위를 걷는다는 얘기를 들었는가. 새벽 3시 불빛이라곤 보이지 않는 어둠과 적막함. 오직 유유히 빛나는 달빛이 잔잔한 바다 위를 반짝이게 하고 있다. 누구든지 스산한 공포와 작은 인기척에도 민감해지는 시간이다. 그리고 바다 위. 어둠과 반짝임이 만나는 경계선 위로 무엇인가 다가온다. 유령이다! 예수를 닮은 유령님! 모두 고성을 지르며 기겁할 때 역시 우리의 베드로는 가장 용감했다. 유령에게 말을 걸었다.

‘정말 주님이시면 나로 하여금 주님처럼 바다 위로 걷게 해보십시옹! 저를 바다 위로 걷게 하실 수 있다면 당신은 유령이 아니라 참으로 주님이 맞습니당!’

그리고 바다 위를 걷던 베드로 엉뚱하게 바람을 보고 공포에 사로잡혀 바다에 빠져들어갔다. 예수님보다 바람이 더 무서웠나?

비록 베드로가 물에서 건짐 받았지만 베드로의 시도는 아무래도 무모한 감이 없지 않다. 그것이 정말 예수님을 확인하는 가장 최선의 방법이었을까? 예수님을 증명하기 위한 그의 방법은 오히려 자기 스스로를 시험에 빠트리는 방법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들다간 오히려 자기 자신이 시험에 빠지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 않는다고 하셨다.

한편, 베드로의 무모한 검증은 사실 우리가 흔히 범하는 오류이기도 하다.

‘하나님, 이번 한 번만 좀 도와주세요. 그럼 신앙생활 더 잘 할께요.’
그러므로 원하는 도움을 얻지 못하면 그에게서 신앙생활을 잘 해야 할 의무는 사라진다.

‘하나님께서 정말 저를 사랑하신다면 이 고난과 어려움에서 건져주세요.’
그러므로 어려움이 지속되면 그에게서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다.

일상에서 아내들도 베드로와 같은 시험을 자초한다. ‘여보, 나 사랑해? 그럼 오늘 저녁에 올 때 파리바게트에서 케잌 사와! 기다릴께~ㅎ’ 남편이 업무가 바빠 늦었다. 못 사왔다. 미안하다고 한다.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고. 그래도 아내는 서운하다. ‘아무리 그래도. 정말 날 사랑한다면 그 시간 못 냈겠어? 그래, 사랑이 식었다 이거지…’ 그러므로 아내들은 시험에 빠진다.

우리는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 나의 정체성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고 인정받기 위해 이처럼 무모한 검증을 시도한다. 내가 요구하는 방법에 하나님이 부합되게 응답하실 때 우리는 마치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응답 받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그러한 애교를 종종 용납하실 수도 있다. 마치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물 위로 걷게 하신 것처럼. 그러나 또 다른 류의 문제가 개입된다. 문제는 우리 자신이다. 문제는 베드로였다. 예수님만 바라보지 않았다.

그러나 주님은 빠져가는 베드로의 손을 붙잡으신다. 그리고 말씀하신다.
‘왜, 내가 주님이라고 말할 때 의심하였느냐! 처음 말할 때 믿었더면 스스로 시험을 초래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에게도 말씀하신다.
‘왜, 널 향한 변함없는 나의 사랑에 의구심을 품고, 확신하지 못하느냐. 언제나 널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그렇게 낙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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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력적인 부정_2011.07.07.

(레위기11: 41-47) 땅에 기어 다니는 모든 기는 것은 가증한즉 먹지 못할찌니 곧 땅에 기어다니는 모든 기는 것 중에 배로 밀어 다니는 것이나 네 발로 걷는 것이나 여러 발을 가진 것이라 너희가 먹지 말찌니 이는 가증함이니라 너희는 기는바 기어다니는 것을 인하여 자기로 가증하게 되게 말며 또한 그것을 인하여 스스로 더럽혀 부정하게 되게 말라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바 기어다니는 것으로 인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이는 짐승과 새와 물에서 움직이는 모든 생물과 땅에 기는 모든 기어다니는 것에 대한 규례니 부정하고 정한 것과 먹을 생물과 먹지 못할 생물을 분별한 것이니라


언뜻 이 말씀이 던지는 메시지를 가장 잘 요약한 신약의 구절이 있다면 아마 그것은 이 구절이 아닐까 싶다.

(골3:2) 오직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땅을 기는 모든 것들을 부정하다고 하신다. 이것들의 특징은 땅에서부터 떨어질 수 있는 가능성이 없다는 사실이다. 뛰어오르지도 못하고, 날지도 못한다. 오직 항상 그저 땅에만 부비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소망이 없다.

심지어 어떤 것들, 뱀은 배로 밀고 다닌다. 땅과 아주 밀착해서 살아가는 것이다. 어떤 것은 몸을 부비지는 않는다. 네 발 또는 여러 발로 걷는다. 그러나 그 발이 항상 땅에만 붙어서 생존한다. 발이 많을수록 땅과 접하는 것도 많다. 그러므로 그 모든 것은 하나님께 부정한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진다. 사람은 두 발로 걷는다. 날지 못한다. 사람의 소망도 땅에 있다. 다리가 불편하면 몸을 땅에 부비며 살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사람도 부정하다. 그러나 거듭날 때 부활의 소망이 있으므로 그는 정하다.

하나님은 구별되라고 말씀하신다. 이 규례 자체가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을 분별한 것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사람도 분별하신다. 여전히 땅의 소망만 있는 자연인과 부활의 소망이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말이다. 우리는 분별된 삶이 요구된다.

땅에 밀착되어 땅만 의지하고 살아가는 삶의 방식에서 분별되어야 한다. 허영, 육신적 만족, 명예, 세속적 지위, 물질만능주의, 좋은 차, 현란한 옷, 자기만족 그 모든 것들은 땅을 기는 것들이다. 그것을 만지려는 삶이 부정하다. 하나님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신다. 하늘을 바라보자. 육적인 것에 너무 부비며 살려고 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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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머물 곳

(마가복음2:21-22)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생베 조각과 새 포도주를 들어 실례를 말씀하신다. 누군가 생베가 낡아 그것을 기우고자 한다면 새 생베 조각으로 기워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새 생베 조각이 오히려 낡은 생베 조각을 잡아당겨 그 해어짐을 심하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또, 새 포도주는 새 가죽 부대에 넣지 낡은 가죽부대에 넣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새 포도주가 낡은 가죽 부대를 터뜨려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교훈은 우리에게 어떤 가치가 있을까?

거듭난 성도는 비유하자면 새 생베 조각이며, 새 포도주이다. 우리는 자연인으로 태어났다. 죄와 허물로 멀어져 있는 자연인. 그러므로 우리는 낡은 세상과 낡은 가죽부대에 뒤엉켜 살아왔다. 그러나 거듭남과 동시에 우리는 새 생명을 얻었다. 우리 육체는 여전히 후패해져가나 우리 속사람은 날로 새롭다. 그러므로 우리는 새 생베 조각이자 새 포도주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구별될 것을 말씀하신다. 새 생베 조각과 낡은 생베 조각이 어울릴 수 없다. 새 포도주가 낡은 가죽부대에 담길 수 없다. 그것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며, 그 조합은 오히려 서로에게 부자연스럽다.

거듭났는가. 그렇다면 새 가죽부대에 담겨져야 한다. 그리스도와 그의 몸 된 교회 안에 담겨지고 더 이상 낡아가는 세상에 담겨지면 안 된다. 거듭난 무리 안에 담겨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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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변명_2011.07.06.

(레 10:19-20, 개역) 『[19] 아론이 모세에게 이르되 오늘 그들이 그 속죄제와 번제를 여호와께 드렸어도 이런 일이 내게 임하였거늘 오늘 내가 속죄 제육을 먹었더면 여호와께서 어찌 선히 여기셨으리요 [20] 모세가 그 말을 듣고 좋게 여겼더라

회중을 위해 속죄제사로 드린 예물의 고기를 성소에서 먹어야 했다. 그러나 나답과 아비후의 그릇된 제사가 그들의 죽음을 초래했다. 그리고 아론은 제물의 고기를 먹지 않고 다 태워버렸다. 그럼으로 모세는 아론에게 분을 내며 어째서 제물의 고기를 먹지 않고 태워버렸느냐고 따졌다. 그러자 아론은 제물로 드려 제사를 지내는 와중에도 그릇된 불을 드림으로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거늘 그 제물의 고기를 먹는 것이 과연 선하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러므로 모세는 아론의 근신하는 마음과 하나님 경외하는 마음을 알고 오히려 좋게 여겼다.

FM이 있다. 무엇은 어떻게 하고, 어떤 것은 또 어떻게 해야 되고... 그러나 흔히 FM적인 것은 융통성이 없다 라고도 한다. 그러나 신앙인 규례들은 융통성보다 규례적인 것을 더 소중히 여길 때도 있다. 그럼에도 오늘 이 아론의 변명 속에서 우리는 더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우리는 구약의 관점이 제시하는 율법적 구속은 없다. 그러나 엄연히 그리스도의 율법이 있다. 또, 사실상 여전히 우리에게 구약의 율법은 우리 삶의 윤리에서 유효한 것이다. 더불어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 일반적이고 관례적인 규례와 신앙의 규칙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아론의 경우처럼 먹어야 될 제물을 먹지 않는 문제에 있어서 그것이 비록 일반적인 규례를 벗어난 것일지라도 그 의도와 목적이 하나님을 경외함이었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사실 모든 신앙적 규례와 가르침의 궁극적인 목적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전적으로 그리스도인이 해서는 안 될 극단적인 문제가 아니라 한다면. 예를 들어, 살인이나 간음과 같은 것이 아니라한다면 우리는 좀 더 융통성 있게 대처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단지 표면적인 규례를 어긴 것으로 보인다고 해서 무조건 잘못된 것이라 할 수만은 없다. 때를 따라서는 그 의도와 목적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달리 적용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런 사례를 이해하고 관용할 수 있다면 상대방의 믿음을 판단하는 우를 적게 범할 수 있고 또, 누군가는 불필요한 죄책감을 피할 수도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의도와 목적, 동기의 문제이다. 하나님을 경외하자. 그러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먹는 자도 주를 위해 먹고,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해 먹지 않는다면 그 어느 것도 문제될 것이 없다. 하나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기 때문에 감사함으로 받으면 속된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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