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시험에 빠지다_2011.07.07


(마태복음14:25-32)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 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지르거늘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대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익히 바다 위를 걷는다는 얘기를 들었는가. 새벽 3시 불빛이라곤 보이지 않는 어둠과 적막함. 오직 유유히 빛나는 달빛이 잔잔한 바다 위를 반짝이게 하고 있다. 누구든지 스산한 공포와 작은 인기척에도 민감해지는 시간이다. 그리고 바다 위. 어둠과 반짝임이 만나는 경계선 위로 무엇인가 다가온다. 유령이다! 예수를 닮은 유령님! 모두 고성을 지르며 기겁할 때 역시 우리의 베드로는 가장 용감했다. 유령에게 말을 걸었다.

‘정말 주님이시면 나로 하여금 주님처럼 바다 위로 걷게 해보십시옹! 저를 바다 위로 걷게 하실 수 있다면 당신은 유령이 아니라 참으로 주님이 맞습니당!’

그리고 바다 위를 걷던 베드로 엉뚱하게 바람을 보고 공포에 사로잡혀 바다에 빠져들어갔다. 예수님보다 바람이 더 무서웠나?

비록 베드로가 물에서 건짐 받았지만 베드로의 시도는 아무래도 무모한 감이 없지 않다. 그것이 정말 예수님을 확인하는 가장 최선의 방법이었을까? 예수님을 증명하기 위한 그의 방법은 오히려 자기 스스로를 시험에 빠트리는 방법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들다간 오히려 자기 자신이 시험에 빠지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 않는다고 하셨다.

한편, 베드로의 무모한 검증은 사실 우리가 흔히 범하는 오류이기도 하다.

‘하나님, 이번 한 번만 좀 도와주세요. 그럼 신앙생활 더 잘 할께요.’
그러므로 원하는 도움을 얻지 못하면 그에게서 신앙생활을 잘 해야 할 의무는 사라진다.

‘하나님께서 정말 저를 사랑하신다면 이 고난과 어려움에서 건져주세요.’
그러므로 어려움이 지속되면 그에게서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다.

일상에서 아내들도 베드로와 같은 시험을 자초한다. ‘여보, 나 사랑해? 그럼 오늘 저녁에 올 때 파리바게트에서 케잌 사와! 기다릴께~ㅎ’ 남편이 업무가 바빠 늦었다. 못 사왔다. 미안하다고 한다.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고. 그래도 아내는 서운하다. ‘아무리 그래도. 정말 날 사랑한다면 그 시간 못 냈겠어? 그래, 사랑이 식었다 이거지…’ 그러므로 아내들은 시험에 빠진다.

우리는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 나의 정체성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고 인정받기 위해 이처럼 무모한 검증을 시도한다. 내가 요구하는 방법에 하나님이 부합되게 응답하실 때 우리는 마치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응답 받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그러한 애교를 종종 용납하실 수도 있다. 마치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물 위로 걷게 하신 것처럼. 그러나 또 다른 류의 문제가 개입된다. 문제는 우리 자신이다. 문제는 베드로였다. 예수님만 바라보지 않았다.

그러나 주님은 빠져가는 베드로의 손을 붙잡으신다. 그리고 말씀하신다.
‘왜, 내가 주님이라고 말할 때 의심하였느냐! 처음 말할 때 믿었더면 스스로 시험을 초래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에게도 말씀하신다.
‘왜, 널 향한 변함없는 나의 사랑에 의구심을 품고, 확신하지 못하느냐. 언제나 널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그렇게 낙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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