폰부스
 

스튜는 공중전화부스 안에 있다_2011.10.04

영화를 아주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오늘 영화 한 편을 소개하고 싶다.


폰부스꽤 오래된 영화인데 나는 한참 뒤에야 이 영화를 봤다. 그런데 이 영화가 매우 성경적인 교훈을 담고 있음을 알고, 지금껏 소장하고 있다. 허영과 교만이 가득한 연예홍보업자 스튜가 폰부스에 갇혀 회개하기 까지의 과정을 그린 이 영화는, 회개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교훈을 가르쳐준다. 그리고 얻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메시지를 생각해보고 싶다.


자신의 교만과 위선, 기만과 허영에 대해 회개할 것을 요구받는 주인공 스튜는 자기만의 논리로 자신의 무죄를 변론하려하지만 숨어서 그를 겨누고 있는 암살범은 모든 사람 앞에서 스튜의 거짓을 폭로함으로 자백할 것을 요구한다. 영화의 말미에 가서 스튜는 자신의 파렴치함을 사람들과 매스컴 앞에서 진정으로 회개하며 자백하고, 눈물을 흘린다. 이 영화의 클라이막스이자 가장 감동적인 장면이다. 스튜역의 콜린 파렐의 연기도 정말 탁월하다.


스튜는 말한다. 나는 이용가치 있는 사람만 상대했고, 우쭐대는 맛에 살았고 비싼 옷과 시계로 자신을 과대포장하면서 열등감을 감춰왔다고. , 거짓을 매스컴에 팔아먹으며 속고 속이는게 자신의 생활이었다고. 이 시계도 가짜고 자신도 가짜일 뿐이라고. 자신의 참모습을 알면 실망하게 될 거라고.


처음의 그와 달라진 것은 그가 자신을 깨닫고 인정했으며, 있는 그대로 고백했다는 것이다. , 그가 정직해졌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무엇일까? 겸손, 사랑. 그렇다. 그러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면 나는 그것을 정직이라고 말한다.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정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나는 수없이 느끼고 느낀다.


우리는 늘 부족하고 온전치 못하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면서도 너무나 부정하다.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경건하지 못하고 정직하지 못할 때가 너무나 많다. 우리가 매일 자백하게 되는 회개의 목록들은 모두 우리가 그리스도인다운 정직함으로 살지 못함으로 인해 일어난 잘못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정직을 요구하신다. 우리의 정직함을 보길 원하신다. 우리의 그릇됨에 따지기에 앞서 하나님은 우리가 연약하고 그릇되게 행할 수밖에 없는 것을 아시므로 우선 우리가 정직하게 자신을 낮추고 자백하며, 정직한 양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허물과 잘못을 슬퍼하고 자백하길 원하신다.


왜 다윗이 아름다운가. 다윗이 온전한 사람이기에 하나님 마음에 합한 것이 아니었다. 그도 너무나 많은 순간 그릇되이 행했다. 그러나 다윗에게는 하나님 앞에서 슬퍼할 줄 아는 정직함이 있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는 조금도 강할 수 없었다. 그의 고난이 만들어준 겸손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다윗의 수없는 시행착오와 허물과 심지어 간음과 살인에도 불구하고 그를 사랑하시고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까지 칭찬해주셨다.


폰부스에서 흐느끼는 스튜를 볼 때마다 나는 이 정직함에 대해 깊이 사색하게 된다. 그는 왜 부스에 갇혔던 것일까? 그것은 그가 정직하지 못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허영과 거짓말로 스스로 기만하고 자신을 자랑하며 살아왔지만 그런 거짓된 모습에 눈멀어 자신의 실체를 정직하게 보지 못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정말 이 영화가 내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그것은 나 역시 정직하지 못할 때, 언젠가 내가 저 부스에 갇힐지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울부짖는 스튜의 모습을 보며 나는 되뇌곤 한다. ‘저 부스 안의 스튜는 바로 나구나! 저 부스 안에 들어가기 전 하나님 앞에서 자백하고 정직해져야겠다.’


정직은 그리스도인의 최대 덕목 중 하나이다. 스튜는 공중전화부스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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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누구냐_2011.10.02

어릴 적 종종 TV에서 볼 수 있었던 영화가 ‘삼손과 들릴라’였다. 삼손은 성경의 유명한 인물이자 사사로서 한 시대를 이끈 영웅이었다. 그의 독특한 힘과 에너지, 여성편력과 드라마틱한 영웅담은 충분히 재미있는 스토리를 엮어낸다.

그러나 나는 사사기를 읽을 때, 그리고 삼손을 만날 때마다 그가 지닌 독특한 개성과 그 라이프 스타일에 의구심을 품게 되곤 한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주관이겠지만 적어도 내게 있어 삼손은 어떤 측면에서 돌연변이 같이 비춰진다. 솔직히 이러한 표현이 너무 과격하다는 생각마저도 든다. 그럼에도 어찌하였든 삼손이란 인물은 결코 내가 알던 성경의 모든 인물과는 전혀 차별화된 인물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는 정상적인 궤도에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자, 그럼 이제부터 내 변론을 들어보라.

삼손은 성경 사사기에서 만날 수 있는 성경위인이다. 사사기에는 총 12명의 사사들이 기록되어 있으며 그 중 일부는 거의 그 행적이 묘사되지 않고 이름만 등재되다시피 되어있다. 반면, 기드온이나 입다, 삼손과 같이 그 주요 행적이 소개되는 사사들도 있다. 벌써 여기서부터 삼손은 다른 사사들과는 차별화된다. 사사들 가운데 유일하게 삼손은 그 탄생의 비화부터 소개된다. 특별히 그 탄생비화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삼손이 나면서부터 나실인의 신분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이다. 마치, 세례 요한이나 사무엘처럼 삼손도 태어나면서부터 나실인으로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이었다. 그러나 또, 아이러니하게도 세례 요한이나 사무엘과는 전혀 다르게 삼손은 조금도 나실인답게 살아가지 않았다. 사사기의 삼손에 대한 기록을 다 훑어봐도 그가 나실인의 신분으로써 자신의 위치와 자격에 걸맞게 행동하며 살았다는 사실을 쉽게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그는 전혀 나실인 답지 않게 삶을 살았다. 그것이 바로 내가 말하는 독특한 라이프 스타일이자 돌연변이적인 면모의 첫 부분이다.

삼손의 기록을 읽어보면 삼손이 딤나의 블레셋 여인을 사랑하므로 딤나로 내려가던 길의 도중에 어린 사자를 만났다고 했다. 삼손은 여호와의 신에 크게 감동되어 그 사자를 찢어 죽인다. 얼마 후 삼손이 다시 딤나로 내려갈 때 그는 그 어린 사자의 주검에 벌떼와 꿀이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낼름 먹고는 자신의 부모님께도 그 꿀을 드린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바로 삼손이 나실인이란 사실이다. 나실인은 원칙적으로 주검을 가까이해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사자의 주검에 고인 꿀을 취하는 삼손의 태도에는 조금도 나실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발견되지 않는다. 그는 조금도 꺼리낌 없이 사자의 주검에서 꿀을 취해 먹었다. 그리고 심지어 그것을 부모님께까지 드렸다. 그러므로 삼손은 자신은 물론 자신의 부모님 마저도 부정케 했다. 그러나 그가 그것을 회개했다거나 그릇된 행동에 대한 죄책감을 느꼈음을 암시하는 요소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러므로 나면서부터 나실인으로 바쳐졌지만 조금도 나실인답지 않게 살아갔다고 말하는 것이다.

또한, 삼손은 여성편력이 심했다. 딤나의 여인을 사랑했고, 훗날엔 자신을 파멸로 인도한 들릴라를 깊이 연애했다. 심지어 그는 이방인만을 사랑한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는 블레셋 여인들에게 특별한 이성적 호감을 느꼈고, 욕망을 이루기 위해 이방인인 여자를 부모님께 승낙을 구할 정도로 적극적이기까지 했다. 역시 그가 나실인다운 양심과 정체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이미 이 사실들자체가 놀랍지 않은가.

삼손의 모습은 말한다. 나는 비록 나실인으로 태어났지만 나는 내가 나실인이란 사실을 신중하게 인식하고 있지 않으며, 내게 나실인이란 정체성은 매우 희미하다고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더 의아하게 하는 것은 이와 같은 구절이다.

(삿 13:24-25, 개역) 『[24] 여인이 아들을 낳으매 이름을 삼손이라 하니라 아이가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더니 [25]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마하네단에서 여호와의 신이 비로소 그에게 감동하시니라

(삿 14:6, 개역) 『삼손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어 손에 아무 것도 없어도 그 사자를 염소 새끼를 찢음 같이 찢었으나 그는 그 행한 일을 부모에게도 고하지 아니하였고』

기드온은 큰 용사였고, 입다도 걸출한 장군이었지만 사사기를 통틀어 여호와의 신에 감동되었다고 묘사된 사사는 삼손이 유일하다. 이방여인을 사랑하고, 전혀 나실인답지 않게 살아가는 여성 편력가가 여호와의 신에 감동되었다고 말한다. 그것이 삼손에게 어울리는가.

더불어 여기서 또 하나의 예외적인 궤도를 발견하게 된다. 정말 삼손은 모든 것에서 새로운 변이들을 발견시켜주는 독보적인 캐릭터다. 삼손에게 묘사된 감동은 지극히 돌발적이고 일시적이며, 비규칙적이고 산발적이었다. 쉽게 말해 삼손이 경험한 신적 감동은 즉흥적이고 충동적인 것이었다. 또한, 그러한 감동은 삼손이 특별한 육체적인 에너지와 스테미너를 발휘하는 모습으로 실현되었다.

다시 말해, 이는 나실인 사무엘이 성령의 감동 속에서 위대한 설교와 회중을 이끄는 리더십으로 실현되었던 것과 반대이다. 나실인 세례 요한이 제자들을 양성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모습으로 감동되었던 것과 반대이다. 삼손이 경험한 신적 감동은 오직 육체적인 스테미너를 발휘하는 동시에 끊임없이 블레셋 민족을 쳐죽이는 용사로써 실현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감동은 매우 충동적이고 일시적인 동시에 산발적이기까지 해서 삼손의 대부분의 일상들은 그냥 육적인 충동과 기질을 따라 행동하는 것에 별다른 감흥과 변화를 주지는 못했다. 이 모든 것 속에서 바로 우리는 사사 삼손이자 나실인 삼손이 성경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성경위인의 돌연변이적인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사사기 13~16장 까지의 삼손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혼란에 빠지는 느낌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독특한 인물에 대해 종잡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나는 삼손을 볼 때마다 이렇게 묻는 것이다. ‘너는 누구냐?’


나는 이 삼손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 것인지 정말 궁금하다. 아직도 그것을 다 알 수가 없다.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을 이해하는데 전혀 접근해가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분명 몇몇의 구절을 통해 삼손이라는 이 독특한 캐릭터로부터 교훈을 받을 수 있는 단서들은 찾을 수가 있다.

(삿 14:4, 개역) 『이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관할한고로 삼손이 틈을 타서 블레셋 사람을 치려 함이었으나 그 부모는 이 일이 여호와께로서 나온 것인 줄은 알지 못하였더라

덩치만 컸지 블레셋 여인과 결혼하려고 떼를 쓰는 철없는 망나니 삼손을 뜯어 말리는 부모님의 모습. 그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이치이다. 그러나 의미심장한 것은 삼손의 그릇된 의도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블레셋을 치고자 하시는 어떤 계획과 목적을 부합시키고 계셨다는 사실이다. 분명, 삼손은 그릇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삼손의 그릇된 인격과 그릇된 면면 속에서도 자신의 섭리를 이루고자 하시는 적용점을 두고 있으셨다. 놀랍지 않은가. 어찌 우리의 모든 일에 하나님의 개입하지 않음이 있을 것인가. 상상할 수 없다. 잠언에는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히 하셨다고까지 말씀하신다.

여기서 잠깐 삼손의 라이프 스타일을 요약해보고 싶다. 삼손은 비록 나실인의 신분으로 태어났지만 그에게 나실인이란 정체성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오히려 그는 육신적인 인물로서 특별한 신앙심을 보유하고 있지도 않았으며, 육신적이고 정욕적이며 여성편력까지 갖고 있어서 이방여인을 사랑하고 결혼하고자 했다. 그럼에도 그는 사사로 부르심을 입었고, 산발적으로 즉흥적인 신적 감동과 감화를 받았는데 그러한 감동은 일시적일 뿐만 아니라 전혀 영적인 에너지로 발휘된 것이 아니라 블레셋 사람을 떼로 죽이고, 사나운 짐승을 맨손으로 잡는 등의 괴력이나 유체적인 에너지로 발휘하는 것으로만 실현되었다. 그는 불완전했을 뿐만 아니라 정상적인 궤도에서 볼 때 전혀 다른 궤도를 도는 돌연변이적인 존재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분명 그를 사사로 부르셨고, 그 나름의 독특한 인격과 기질과 성향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섭리를 이뤄가시는 도구로 적절히 활용하셨다.

한편, 훗날 들릴라를 사랑한 삼손은 자기 힘의 근원이 머리에서 나온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머리털이 밀리우고 힘을 잃고 만다. 결과 두 눈은 빠지고 맷돌을 돌리며 조롱거리가 된다. 분명, 하나님은 불완전한 삼손을 사용하실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그릇된 삼손을 두둔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란 것을 알아야 한다. 삼손은 자신의 잘못에 대해 분명 응분의 대가를 지불할 수 밖에 없었다. 민수기는 이렇게 말한다.

(민 14:18, 개역)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가 많아 죄악과 과실을 사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사하지 아니하고 아비의 죄악을 자식에게 갚아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다 실현하시는 분이시다. 삼손은 하나님의 긍휼로 사사로 부름을 입고, 필요에 따라 능력을 발휘해 블레셋을 쳤지만 그 그릇됨에 대해서는 보응을 받아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삼손은 죽음. 죄로 인해 조롱거리가 된 삼손은 회개한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님의 힘을 구하고 블레셋 사람 수천명을 죽이고 자신도 죽게 된다. 그는 회개함으로써 마지막 하나님 앞에 다시 재기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자신도 함께 죽음으로써 그는 분명 용서와 긍휼을 얻긴 했지만 결코 명예로운 죽음이 되지는 못했다. 의미심장한 구절은 오히려 이것이다.

(삿 16:22, 개역) 『그의 머리털이 밀리운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

머리털은 잘라도 다시 자라게 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힘의 원천이 머리의 머리털에 묘사하신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삼손은 자기 힘의 근원을 까발림으로써 그 힘을 잃어버리는 수모와 곤란에 처했다. 그러나 다시 머리털이 자라는 것처럼 삼손은 회개함으로써 다시 그 힘의 근원을 되찾아 마지막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힘의 근원을 머리털에 묘사한 것 자체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클 것이다. 나실인 삼손에게 힘의 근원은 영원히 궤멸되는 것이 아니었다. 비록 그가 회개했음으로 마지막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었음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 또한, 그의 머리털이 다시 자랄 수 있었다는 사실로부터 시사하는 바는 더욱 클 것이다. 그의 머리털이 다시 회복될 수 없는 것이었다면 그의 회개도 무용했는지 모른다. 역사의 마지막에 성령께서 승천하시면 지상에 있는 성경책도 회개하는 시도도 무용하다.

하나님은 머리털이 다시 자란다는 엄연한 사실과 그것이 힘의 근원이었다는 것을 통해 삼손이 다시 회개할 때 재기할 수 있음을 암시하고 계신다고 나는 믿는다. 이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비록 나실인은 아니지만 그리스도인이다. 우리도 종종 돌연변이 삼손처럼 살아간다. 때로는 성령 안에서 봉사하고, 기도하며 찬양한다. 주의 일에 힘쓴다. 그라나 종종 생활의 많은 부분에서 우리는 전혀 그리스도인답지 못한 라이프 스타일과 패턴에 젖어있기도 하다. 우리는 삼손처럼 머리털이 밀리우고 성령의 능력과 힘을 잃어버린 것처럼 무기력하고 패배하고 침체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머리털이 다시 자라듯 다시 성령의 회복과 능력을 회복하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는 즉흥적이다. 많은 순간 육체적으로 살면서 충동적이고 즉흥적이다. 그러면서 또, 성령 안에서 즉흥적이고 충동적일 때도 있다. 어쩌면 저 삼손은 여전히 죄성을 지닌 그리스도인의 이중적인 삶의 모습과 어떤 의미에서 돌연변이적인 그리스도인의 독특한 궤도의 실물 모형은 아닌지 모르겠다.

나는 아직도 삼손을 다 모르겠다. 그를 통해 무엇을 교훈받고 무엇을 정말 깨닫게 될 것인지 아직은 모르겠다. 분명 그는 내게 있어 만나면 만날 때마다 다 이해할 수 없는 매우 독특한 캐릭터이며, 왠지 내 뒷통수를 한 대 치면서 새로운 이해력과 시각의 문을 열어줄 어떤 비장한 의미를 감추고 있는 판도라의 상자처럼 느껴진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도 삼손에게 묻는다. ‘너는 누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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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지기_2011.09.14

(눅 12:42-43, 개역) 『[42] 주께서 가라사대 지혜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43]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본문의 청지기를 소개하는데 인용된 수식어는 ‘지헤’와 ‘진실함’이다. 모든 청지기가 지혜롭고 진실되지는 않다. 만약, 그러했다면 그러한 수식은 별 가치가 없었을 것이고 굳이 인용되지 않았으리라. 이 두 미덕은 본문에 언급된 청지기의 장점이었다.

우리는 청지기로 불려진다. 하나님의 모든 소유와 일하심에 청지기처럼 맡음을 입어 일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미덕 역시 지혜로움과 진실함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모든 달란트를 다루고 활용함에 있어 지혜로와야 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물질, 재능, 조건을 때를 따라 적절히 분배해서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의 이기심이나 인간적인 만족을 위해 쓰는 것을 삼가야 한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쓰임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절제’를 배워야 한다. 자신을 삼가는 것이야 말로 가장 지혜로울 수 있는 첫번재 조건이다. 또한, 우리의 ‘허영심’을 다스려야 한다. 겉치레는 낭비를 유도한다. 그것은 지혜가 아니다. 소탈함을 배우는 자가 지혜롭다.

우리는 적극성을 지녀야 한다. ‘절제’하려는 것에서, ‘소탈함’을 따르려는 것에서 적극성이 요구된다. 우리가 보다 성실히 소박하고자 할 때 우리는 만족을 주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경험할 것이다.

예전에 어느 형제님이 생각난다. 동물병원 원장님이면서 결혼하지 오래지 않은 청년 회장님이셨다. 그분은 낡은 그레이스 승합차를 몰고 형제, 자매님을 태우고 경주에서 포항까지 다니셨다. 그의 그레이스는 너무 낡아 기어변속이나 주행 중에도 딸그락 거리는 소음이 차 밑바닥에서 들리곤 했다. 그런 차가 그에게도 만족을 줄리 없었다. 그러나 그는 여유로움 보다 절제를 선택했고 소탈함을 유지했다. 그리고 그것이 지혜로움이란 것이 증명되었다. 한 날 그의 승합차는 최신 스타렉스로 탈바꿈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가 기뻐하며 하는 얘길 지금도 기억한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서 진짜 돈 하나다ㅗ 안 들고 차 바꿨다.’라고. 어떤 계기였는지는 지금도 모른다. 어떤 특판이나 행사당첨인지 정부지원인지. 암튼, 오래 기다린 그는 당시 2000만언이 훌쩍 넘는 최신 승합차를 그냥 바꿀 수 있었다. 그는 자기 차를 바꾸는데 그에게 맡겨진 물질을 허비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유혹의 때 절제했고, 허영심을 극복했으며 최종 지혜로운 청지기가 되었다.

두 번째 미덕은 진실함이다. 이 사실은 두 말 할 것이 없다. 우리는 진실된 사람을 좋아한다. 우리는 진실한 사람에게 호감을 느낀다. 특히, 주인이 자신의 소유물 전반을 맡기는데 그가 진실되지 않다면 주인은 오래지 않아 그를 더 이상 고용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어떤 잘못을 하는 것보다 오히려 진실되지 못함으로 해서 더 큰 곤욕을 치른다. 누구나 잘못은 있다. 누구나 허물은 있다. 누구나 때때로 부정을 저지른다. 주님은 완전하고 엄격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진실하라고 하셨다. 우리는 정직해야 된다. 내 안에 거짓이 있다면 거짓이 있노라고 말슴드리면 된다. 내가 청지기로써 부정을 행했다면 자백하고 돌이키면 된다. 진실함이란 그런 것이다. 지나치게 높은 기준으로 바꿔놓고 자신을 학대하지 말자.

한편, 청지기의 임무는 소유를 지키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때를 따라 나눠줘야 한다. 주인은 구두쇠가 아니다. 주인은 헤프게 쓰는 것은 질색이지만 그렇다고 인색한 것도 아니다.

(잠 11:24, 개역)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이것이 주인의 철학이다. 주인은 다만 시기적절하게 사용하길 원한다. 그것이 지혜로운 청지기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나눠줘야 할 때를 분별할 줄 아는 통찰력이다. 우리는 남에게 진 신세나 은혜에 대해 갚으려고 하는가. 그것도 나눔의 한 종류일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조화로운 청지기가 받을 상급은 복이다. 그에게 수고한 대가를 줄 것을 하나님은 약속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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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실수_2011.09.14

(삼상 18:26-27, 개역) 『[26] 사울의 신하들이 이 말로 다윗에게 고하매 다윗이 왕의 사위 되는 것을 좋게 여기므로 만기가 되지 못하여서 [27] 다윗이 일어나서 그 종자와 함께 가서 블레셋 사람 이백 명을 죽이고 그 양피를 가져다가 수대로 왕께 드려 왕의 사위가 되고자 하니 사울이 그 딸 미갈을 다윗에게 아내로 주었더라』

사울왕은 다윗의 승승장구함에 크게 경계심을 느끼고 그를 죽이려고 했다. 그러나 뚜렷한 명분이 없던 그는 그를 자신의 사위로 삼되 이를 위해 블레셋 사람의 양피 일백을 요구하고자 했다. 그의 의도는 블레셋 손에 다윗을 죽이고자 함이었다.

처음 사울은 딸 메랍을 다윗에게 주고자 했지만 다윗이 왕의 사위가 되는 것을 쉽게 생각하지 않고 지체하였고, 그 시기에 맞물려 메랍은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다. 사울의 의도가 수포로 돌아갈 그때 사울은 새로운 기회를 얻었다. 딸 미갈이 다윗을 사랑하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기회가 온 사울은 다시 미갈을 아내로 주겠다며 마수의 손을 뻗쳤다. 그때 다윗은 역시 왕의 사위가 되는 일이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며 과분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사울의 집념은 계속되었고, 신하들을 통해 감언이설로 다윗을 유혹하기 시작했다. 왕도 다윗을 기뻐하고, 모든 신하도 다윗을 사랑하며… 왕의 사위가 되는 것은 가한 것이다. 다만, 블레셋 양피 일백만 있으면 충분하다.

그러므로 그 말이 다윗에게 좋게 들렸다. 다윗이 왕의 사위가 되는 것을 좋게 여겼다고 했다. 그러므로 다윗은 블레셋 양피 일백을 취하여 사울왕에게 바치고 왕의 사위가 되었다. 사울의 의도와 계획대로 마수의 걸이에 걸려든 것이다.

미갈의 남편이 된 다윗은 왕궁에 거하며 잦은 사울왕의 투기와 암묵적인 위협, 살해의 위험에 노출되었다. 결국 왕궁에서 도망쳐야만 했던 다윗은 아내 미갈을 잃어버렸으며, 미갈은 발디의 아내가 되어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겼다. 오랜 훗날 다윗이 재기하여 미갈을 재차 취하여 왔을 때 언약궤와 더불어 춤추는 다윗왕을 비웃은 미갈은 이후 평생 잉태를 할 수 없었다.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다윗은 그의 생애 속에서 여러 번의 실수와 실패, 징계와 고난을 경험했다. 그의 유능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종종 예기치 않은 어리석음을 범하며 자신을 곤란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러한 사실을 주목해보면 그 시사하는 바가 다방면에서 크다 할 것이다. 물론, 다윗은 위대한 선지자며, 신앙의 위인이다. 그러나 그의 면면을 볼 때 적잖이 실망스러운 모습들을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다. 다윗은 뛰어나고 유능한 영웅 같으면서도 동시에 의외다 싶은 실수와 잘못들을 범했다. 그럼에도 그가 많은 징계와 고난 가운데도 하나님 앞에 정직하고자 했음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었다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떤 신앙과 자세를 가져야 할지를 보여주는 좋은 일례인 동시에 다윗은 우리 신앙인의 휴머니즘을 너무나 정확히 보여준다.

다윗이 정말 빈틈없이 완벽하고 훌륭했다면 그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 여김을 받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처럼 받아들여질 것이고, 누구나 다윗 정도는 돼야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것으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다윗이 의외로 너무나 허술한 순간이 많았다는 것을 볼 때마다 오히려 우리는 의구심마저 품게 되는 것이다. 물론, 다윗도 훌륭했지만 이런 허점과 잘못이 있는데도 하나님께서 인정을 하시다니.

다윗의 성공적인 아름다움 못지 않게 그의 실수와 실패가 보여주는 동질감과 휴머니즘은 우리의 가장 큰 위로와 은혜일 것이다. 분명, 다윗이 좀 더 지혜롭게 통찰하고 일관되게 행동했다면 사울의 제안 뒤에 숨은 계략을 오래지 않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감언이설에 속아 미갈을 취하고 왕의 사위가 되었던 것이다. 거기에는 분명 자신이 이뤄낸 성과와 명성에 대한 주변의 찬사와 더불어 왕의 사위가 된다는 자부심도 한 몫 했을 것이다. 과연, 누가 이런 최선의 상황에서 보다 높은 지위로 올라가는 기회를 거부하겠는가!

다윗의 실수를 통해 나의 수많은 그릇된 오판과 충분히 신중하지 못하고 통찰하지 못하는 그릇된 실수들을 되돌아보게 된다. 나의 거짓과 위선. 정직하지 못한 많은 순간들. 그러므로 나의 거짓된 경건들. 그러나 다윗처럼 하나님 앞에서 다시 무릎 꿇고 정직해져야만 한다. 그것만이 곤란 중에 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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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 사는_2011.08.29

(민 11:4-9, 개역) 『[4] 이스라엘 중에 섞어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가로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5]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 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6]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 [7] 만나는 깟씨와 같고 모양은 진주와 같은 것이라 [8] 백성이 두루 다니며 그것을 거두어 맷돌에 갈기도 하며 절구에 찧기도 하고 가마에 삶기도 하여 과자를 만들었으니 그 맛이 기름 섞은 과자맛 같았더라 [9] 밤에 이슬이 진에 내릴 때에 만나도 같이 내렸더라』

출애굽 때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 섞여 나온 중다한 잡족들이 있었다. 하나님의 이적을 믿고 이스라엘 민족과 더불어 나온 그들. 분명 그들도 보라빛 미래를 꿈꾸며 출애굽의 진경험을 통과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무엇이던가.

처음 구원을 받을 때 세상이 새로워 보이기까지 한다. 마치 과거의 모든 실패와 잘못과 어그러진 것들은 다 묻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만 같다. 모든 것에서 새로운 비전과 보라빛 꿈을 꾼다. 그러나 현실은 또 어떠하던가. 신앙의 광야를 걷는다.

광야와 만나. 지루한 삶의 반복. 그 가운데 이스라엘 중 섞여 사는 잡족들이 탐욕을 품었다고 한다. 주요 이슈는 식탐이었던 것 같다. 애굽에서 먹었던 고기맛을 다시는 볼 수 없었다. 오직 만나뿐.

우리의 육체 속에 아직도 섞여 사는 중다한 잡족들이 있다. 그리고 이 잡족들은 너무나 자주 탐욕에 사로잡혀 우리를 시험한다. 우리를 피곤하게 한다. 육신적인 욕구불만들을 충동한다. 육신적인 부족함에 대해 불평하고 원망하고 낙망하게 만든다.

그리고 만나는 너무나 익숙하다. 밤마다 이슬과 함께 내려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배려는 너무나 익숙하고 고맙지가 않다. 익숙함이 주는 경솔함. 그러나 만나는 얼마나 유용한 은혜였던가. 날마다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상징이며, 갈아서 먹기도 하고, 찧어서 요리할 수도 있고, 가마에 삶아서 먹을 수도 있었다. 다양한 방법으로 조리하여 필요한 양식이 되어준 만나였다. 그러나 잡족들이 탐욕을 품을 때 만나는 박한 식물에 불과했다. 매일 주시는 은혜가 은혜답지 못했다. 너무 익숙했고, 너무 지루했고, 뻔한 것에 불과했다.

우리 안에 섞여 사는 육체의 소욕이 탐심을 일으킬 때마다 우리도 곤궁에 빠지곤 한다. 얻지 못했고, 가지지 못했던 모든 것에 대한 불평과 원망. 후회와 회의감. 그리고 이미 주어진 은혜에 대한 감사함이 없는 경멸과 무시. 하나님의 은혜의 유용함을 잊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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