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지기_2011.09.14

(눅 12:42-43, 개역) 『[42] 주께서 가라사대 지혜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43]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본문의 청지기를 소개하는데 인용된 수식어는 ‘지헤’와 ‘진실함’이다. 모든 청지기가 지혜롭고 진실되지는 않다. 만약, 그러했다면 그러한 수식은 별 가치가 없었을 것이고 굳이 인용되지 않았으리라. 이 두 미덕은 본문에 언급된 청지기의 장점이었다.

우리는 청지기로 불려진다. 하나님의 모든 소유와 일하심에 청지기처럼 맡음을 입어 일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미덕 역시 지혜로움과 진실함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모든 달란트를 다루고 활용함에 있어 지혜로와야 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물질, 재능, 조건을 때를 따라 적절히 분배해서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의 이기심이나 인간적인 만족을 위해 쓰는 것을 삼가야 한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쓰임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절제’를 배워야 한다. 자신을 삼가는 것이야 말로 가장 지혜로울 수 있는 첫번재 조건이다. 또한, 우리의 ‘허영심’을 다스려야 한다. 겉치레는 낭비를 유도한다. 그것은 지혜가 아니다. 소탈함을 배우는 자가 지혜롭다.

우리는 적극성을 지녀야 한다. ‘절제’하려는 것에서, ‘소탈함’을 따르려는 것에서 적극성이 요구된다. 우리가 보다 성실히 소박하고자 할 때 우리는 만족을 주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경험할 것이다.

예전에 어느 형제님이 생각난다. 동물병원 원장님이면서 결혼하지 오래지 않은 청년 회장님이셨다. 그분은 낡은 그레이스 승합차를 몰고 형제, 자매님을 태우고 경주에서 포항까지 다니셨다. 그의 그레이스는 너무 낡아 기어변속이나 주행 중에도 딸그락 거리는 소음이 차 밑바닥에서 들리곤 했다. 그런 차가 그에게도 만족을 줄리 없었다. 그러나 그는 여유로움 보다 절제를 선택했고 소탈함을 유지했다. 그리고 그것이 지혜로움이란 것이 증명되었다. 한 날 그의 승합차는 최신 스타렉스로 탈바꿈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가 기뻐하며 하는 얘길 지금도 기억한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서 진짜 돈 하나다ㅗ 안 들고 차 바꿨다.’라고. 어떤 계기였는지는 지금도 모른다. 어떤 특판이나 행사당첨인지 정부지원인지. 암튼, 오래 기다린 그는 당시 2000만언이 훌쩍 넘는 최신 승합차를 그냥 바꿀 수 있었다. 그는 자기 차를 바꾸는데 그에게 맡겨진 물질을 허비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유혹의 때 절제했고, 허영심을 극복했으며 최종 지혜로운 청지기가 되었다.

두 번째 미덕은 진실함이다. 이 사실은 두 말 할 것이 없다. 우리는 진실된 사람을 좋아한다. 우리는 진실한 사람에게 호감을 느낀다. 특히, 주인이 자신의 소유물 전반을 맡기는데 그가 진실되지 않다면 주인은 오래지 않아 그를 더 이상 고용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어떤 잘못을 하는 것보다 오히려 진실되지 못함으로 해서 더 큰 곤욕을 치른다. 누구나 잘못은 있다. 누구나 허물은 있다. 누구나 때때로 부정을 저지른다. 주님은 완전하고 엄격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진실하라고 하셨다. 우리는 정직해야 된다. 내 안에 거짓이 있다면 거짓이 있노라고 말슴드리면 된다. 내가 청지기로써 부정을 행했다면 자백하고 돌이키면 된다. 진실함이란 그런 것이다. 지나치게 높은 기준으로 바꿔놓고 자신을 학대하지 말자.

한편, 청지기의 임무는 소유를 지키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때를 따라 나눠줘야 한다. 주인은 구두쇠가 아니다. 주인은 헤프게 쓰는 것은 질색이지만 그렇다고 인색한 것도 아니다.

(잠 11:24, 개역)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이것이 주인의 철학이다. 주인은 다만 시기적절하게 사용하길 원한다. 그것이 지혜로운 청지기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나눠줘야 할 때를 분별할 줄 아는 통찰력이다. 우리는 남에게 진 신세나 은혜에 대해 갚으려고 하는가. 그것도 나눔의 한 종류일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조화로운 청지기가 받을 상급은 복이다. 그에게 수고한 대가를 줄 것을 하나님은 약속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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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실수_2011.09.14

(삼상 18:26-27, 개역) 『[26] 사울의 신하들이 이 말로 다윗에게 고하매 다윗이 왕의 사위 되는 것을 좋게 여기므로 만기가 되지 못하여서 [27] 다윗이 일어나서 그 종자와 함께 가서 블레셋 사람 이백 명을 죽이고 그 양피를 가져다가 수대로 왕께 드려 왕의 사위가 되고자 하니 사울이 그 딸 미갈을 다윗에게 아내로 주었더라』

사울왕은 다윗의 승승장구함에 크게 경계심을 느끼고 그를 죽이려고 했다. 그러나 뚜렷한 명분이 없던 그는 그를 자신의 사위로 삼되 이를 위해 블레셋 사람의 양피 일백을 요구하고자 했다. 그의 의도는 블레셋 손에 다윗을 죽이고자 함이었다.

처음 사울은 딸 메랍을 다윗에게 주고자 했지만 다윗이 왕의 사위가 되는 것을 쉽게 생각하지 않고 지체하였고, 그 시기에 맞물려 메랍은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다. 사울의 의도가 수포로 돌아갈 그때 사울은 새로운 기회를 얻었다. 딸 미갈이 다윗을 사랑하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기회가 온 사울은 다시 미갈을 아내로 주겠다며 마수의 손을 뻗쳤다. 그때 다윗은 역시 왕의 사위가 되는 일이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며 과분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사울의 집념은 계속되었고, 신하들을 통해 감언이설로 다윗을 유혹하기 시작했다. 왕도 다윗을 기뻐하고, 모든 신하도 다윗을 사랑하며… 왕의 사위가 되는 것은 가한 것이다. 다만, 블레셋 양피 일백만 있으면 충분하다.

그러므로 그 말이 다윗에게 좋게 들렸다. 다윗이 왕의 사위가 되는 것을 좋게 여겼다고 했다. 그러므로 다윗은 블레셋 양피 일백을 취하여 사울왕에게 바치고 왕의 사위가 되었다. 사울의 의도와 계획대로 마수의 걸이에 걸려든 것이다.

미갈의 남편이 된 다윗은 왕궁에 거하며 잦은 사울왕의 투기와 암묵적인 위협, 살해의 위험에 노출되었다. 결국 왕궁에서 도망쳐야만 했던 다윗은 아내 미갈을 잃어버렸으며, 미갈은 발디의 아내가 되어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겼다. 오랜 훗날 다윗이 재기하여 미갈을 재차 취하여 왔을 때 언약궤와 더불어 춤추는 다윗왕을 비웃은 미갈은 이후 평생 잉태를 할 수 없었다.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다윗은 그의 생애 속에서 여러 번의 실수와 실패, 징계와 고난을 경험했다. 그의 유능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종종 예기치 않은 어리석음을 범하며 자신을 곤란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러한 사실을 주목해보면 그 시사하는 바가 다방면에서 크다 할 것이다. 물론, 다윗은 위대한 선지자며, 신앙의 위인이다. 그러나 그의 면면을 볼 때 적잖이 실망스러운 모습들을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다. 다윗은 뛰어나고 유능한 영웅 같으면서도 동시에 의외다 싶은 실수와 잘못들을 범했다. 그럼에도 그가 많은 징계와 고난 가운데도 하나님 앞에 정직하고자 했음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었다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떤 신앙과 자세를 가져야 할지를 보여주는 좋은 일례인 동시에 다윗은 우리 신앙인의 휴머니즘을 너무나 정확히 보여준다.

다윗이 정말 빈틈없이 완벽하고 훌륭했다면 그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 여김을 받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처럼 받아들여질 것이고, 누구나 다윗 정도는 돼야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것으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다윗이 의외로 너무나 허술한 순간이 많았다는 것을 볼 때마다 오히려 우리는 의구심마저 품게 되는 것이다. 물론, 다윗도 훌륭했지만 이런 허점과 잘못이 있는데도 하나님께서 인정을 하시다니.

다윗의 성공적인 아름다움 못지 않게 그의 실수와 실패가 보여주는 동질감과 휴머니즘은 우리의 가장 큰 위로와 은혜일 것이다. 분명, 다윗이 좀 더 지혜롭게 통찰하고 일관되게 행동했다면 사울의 제안 뒤에 숨은 계략을 오래지 않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감언이설에 속아 미갈을 취하고 왕의 사위가 되었던 것이다. 거기에는 분명 자신이 이뤄낸 성과와 명성에 대한 주변의 찬사와 더불어 왕의 사위가 된다는 자부심도 한 몫 했을 것이다. 과연, 누가 이런 최선의 상황에서 보다 높은 지위로 올라가는 기회를 거부하겠는가!

다윗의 실수를 통해 나의 수많은 그릇된 오판과 충분히 신중하지 못하고 통찰하지 못하는 그릇된 실수들을 되돌아보게 된다. 나의 거짓과 위선. 정직하지 못한 많은 순간들. 그러므로 나의 거짓된 경건들. 그러나 다윗처럼 하나님 앞에서 다시 무릎 꿇고 정직해져야만 한다. 그것만이 곤란 중에 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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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 사는_2011.08.29

(민 11:4-9, 개역) 『[4] 이스라엘 중에 섞어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가로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5]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 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6]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 [7] 만나는 깟씨와 같고 모양은 진주와 같은 것이라 [8] 백성이 두루 다니며 그것을 거두어 맷돌에 갈기도 하며 절구에 찧기도 하고 가마에 삶기도 하여 과자를 만들었으니 그 맛이 기름 섞은 과자맛 같았더라 [9] 밤에 이슬이 진에 내릴 때에 만나도 같이 내렸더라』

출애굽 때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 섞여 나온 중다한 잡족들이 있었다. 하나님의 이적을 믿고 이스라엘 민족과 더불어 나온 그들. 분명 그들도 보라빛 미래를 꿈꾸며 출애굽의 진경험을 통과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무엇이던가.

처음 구원을 받을 때 세상이 새로워 보이기까지 한다. 마치 과거의 모든 실패와 잘못과 어그러진 것들은 다 묻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만 같다. 모든 것에서 새로운 비전과 보라빛 꿈을 꾼다. 그러나 현실은 또 어떠하던가. 신앙의 광야를 걷는다.

광야와 만나. 지루한 삶의 반복. 그 가운데 이스라엘 중 섞여 사는 잡족들이 탐욕을 품었다고 한다. 주요 이슈는 식탐이었던 것 같다. 애굽에서 먹었던 고기맛을 다시는 볼 수 없었다. 오직 만나뿐.

우리의 육체 속에 아직도 섞여 사는 중다한 잡족들이 있다. 그리고 이 잡족들은 너무나 자주 탐욕에 사로잡혀 우리를 시험한다. 우리를 피곤하게 한다. 육신적인 욕구불만들을 충동한다. 육신적인 부족함에 대해 불평하고 원망하고 낙망하게 만든다.

그리고 만나는 너무나 익숙하다. 밤마다 이슬과 함께 내려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배려는 너무나 익숙하고 고맙지가 않다. 익숙함이 주는 경솔함. 그러나 만나는 얼마나 유용한 은혜였던가. 날마다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상징이며, 갈아서 먹기도 하고, 찧어서 요리할 수도 있고, 가마에 삶아서 먹을 수도 있었다. 다양한 방법으로 조리하여 필요한 양식이 되어준 만나였다. 그러나 잡족들이 탐욕을 품을 때 만나는 박한 식물에 불과했다. 매일 주시는 은혜가 은혜답지 못했다. 너무 익숙했고, 너무 지루했고, 뻔한 것에 불과했다.

우리 안에 섞여 사는 육체의 소욕이 탐심을 일으킬 때마다 우리도 곤궁에 빠지곤 한다. 얻지 못했고, 가지지 못했던 모든 것에 대한 불평과 원망. 후회와 회의감. 그리고 이미 주어진 은혜에 대한 감사함이 없는 경멸과 무시. 하나님의 은혜의 유용함을 잊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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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덫에 몰려드는 쥐새끼들_2011.08.28

(수 10:4, 개역) 『내게로 올라와 나를 도우라 우리가 기브온을 치자 이는 기브온이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으로 더불어 화친하였음이니라 하매』

가나안 정복에 대한 전쟁기록은 표면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정복전쟁이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가나안 정복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가나안 다섯 왕과 싸움에서 대승을 거두는 이스라엘의 전쟁기록을 통해 분명히 하나님께서 전쟁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이제 그 상황 속으로 go! Go!

우선 이 전쟁의 발단은 이스라엘의 전술적 선제공격이 아니라 가나안 다섯 왕들의 선제공격으로부터 시작된다. 강한 성읍 기브온이 이스라엘에 화친했다는 소식에 격분한 예루살렘 왕 아도니세덱은 주변의 왕들을 불러들여 동맹군을 결성한다. 그의 선동문은 이와 같았다.

‘내게로 올라와 나를 도우라! 우리가 기브온을 치자!’

결과적으로 이 외침이 그들이 총괄적으로 멸망하는 동기가 되었음은 이채롭다. 기브온을 치기 위해 그들이 결탁하겠다는 선동이 그들을 파멸로 이끌어갔다. 계시록에는 역사의 마지막 전쟁을 묘사하며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계 16:16, 개역) 『세 영이 히브리 음으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

하나님은 예루살렘 왕의 영웅심과 호걸정신을 빌미로 멸망 받아야 할 왕들을 기브온으로 불러 올리셨다. 기억하자. 가나안 족속들은 파멸되어야 할 자들이었다. 그들은 저주받은 자들이라고 했다. 지금 하나님은 우상과 윤리와 도덕의 패괴에 빠진 가나안 족속을 진멸하기 위해 의지를 불태우고 계시다는 사실을 말이다.

쥐를 잡기 위해 치즈 한 조각을 트랩에 올려놓는다. 우글우글 쥐들이 몰려든다. 그러므로 기브온은 치즈 한 조각에 불과했다. 그 치즈에 흥분된 가나안 왕들이 쥐새끼들처럼 몰려든다. 한 번에 소탕하자!

(수 10:11, 개역)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서 도망하여 벧호론의 비탈에서 내려갈 때에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큰 덩이 우박을 아세가에 이르기까지 내리우시매 그들이 죽었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칼에 죽은 자보다 우박에 죽은 자가 더욱 많았더라』

이스라엘의 칼날은 큰 의미가 없어 보인다. 객관적으로 이건 이스라엘 군대의 굴욕이다. 군대보다 우박! 우박이 가나안 군대를 섬멸했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 이 전쟁은 이스라엘의 전쟁이 아니며, 하나님의 전쟁이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했다고도 했다. 지금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표지 삼아 자신이 가나안 족속들과 싸우고 있는 것이다. 그들을 진멸하기 위해 의지를 불태우신다.

가나안 군대들이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스라엘 군대가 다 쫓아가서 섬멸하기에는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어려움이 뒤따랐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박이 필요했다. 이 우박은 그냥 하늘에서 떨어진 우박이 아니다. 하나님이 가나안 군인들을 정조준해서 던져서 때려 맞춘 우박이다. 그럼에도 이스라엘 군대에게는 시야확보가 필요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태양이 중천에 머물도록 하셨다. 이왕에 개시된 전쟁을 더 이상 끌 필요가 없이 일망타진 하고자 했다.

(수 10:12, 개역) 『여호와께서 아모리 사람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붙이시던 날에 여호수아가 여호와께 고하되 이스라엘 목전에서 가로되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할지어다 하매』

우리는 무엇인가 일을 벌리게 되면 그 일이 끝마쳐질 때까지 중도에 멈추지 못하는 경험을 한다. 밤이 깊어가지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한 시간 안에는 끝날 것 같아 그러면서 밤을 샌다. 하나님도 그러하셨나보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싸우신다. 또한,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해 싸우신다. 여호와는 용사라고 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쟁기에 숟가락 하나만 올려 놓고 승전가를 부를 뿐이다. 내가 싸운다고 생각해선 오산이다. 여호와께서 싸워주신다. 단, 그것이 하나님의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러므로 하나님이 없는 무모한 전쟁을 일삼지 말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목적이 아닌 나의 영광과 이기심을 위한 목적에서 전쟁을 하려고 하면 안 된다. 그럴 때는 하나님께서 우박을 던지시지 않는다. 우리는 주의해야 한다. 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며 전쟁을 하려는 것을 말이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전쟁일 때 그것은 승리를 확신할 수 있고, 우리는 숟가락을 올려놓고 함께 승전가를 부를 기회를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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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간 13바퀴_2011.08.14

(수 6:3-5, 개역) 『[3] 너희 모든 군사는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4]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행할 것이요 제칠일에는 성을 일곱 번 돌며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5] 제사장들이 양각나팔을 길게 울려 불어서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 하시매』


이미 앞에서 여리고성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방법론에 대해 묵상해보았다. 거기서 좀 덧붙여 여리고성이 무너지기까지 성을 도는데 있어 요구된 두 가지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여리고성은 하루 한 바퀴씩 6일 동안, 칠일째 7바퀴를 몰아서 돌아 총 7일간 13바퀴를 돌아야 했다. 그것은 단순히 성을 7일 동안 돌았다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음을 알게 한다. 7 일 뿐만 아니라 13바퀴도 채워져야 했다. 더불어 13바퀴만 도는 것으로 충분한 것도 아니었다. 7일이 소요되어야 했다. 이것은 여리고성이 무너지는데 필요한 두 가지의 충분조건이었다. 전도서에는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전 9:11, 개역)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보니 빠른 경주자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유력자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라고 식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명철자라고 재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기능자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 이는 시기와 우연이 이 모든 자에게 임함이라

시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연도 필요하다. 그 시기에 그것이 맞닥뜨려지는 것. 세상의 모든 일이 이와 같은 순리에 절묘하게 부합된다. 행운도 불행도 그러하다.

우리는 종종 기막힌 사연을 듣는다. 대학생들이 봉사활동을 나간 그날 폭우가 쏟아졌고, 하필 그날 지금껏 없던 산사태가 일어났으며, 그 산 아래 봉사단은 숙소를 정하고 쉬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봉사를 하러 간 그 시기에 폭우를 만났고, 산사태를 만났고, 그 산 아래 숙박함으로 생명을 잃었다. 그들의 봉사활동은 선한 목적과 동기에서 나아간 것이지만 그들은 실상 죽음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시기의 문제 때문에 심각할 정도로 시험을 당한다. 더디다는 사실만큼 우리를 공포스럽게 하는 것도 드물다. 우리는 기다리는 것에 너무나 익숙치 못하고 길들여있지 못하다. 자주 그런 경험을 했다. 누군가를 기다릴 때. 기다리다 기다리다 자리를 떠서 돌아다닐 그 때. 그 사람이 약속한 장소에 나타난다. 그러므로 빗겨나간다. 시간은 더 소요되고 지체된다. 참다 참다 이제 더 이상은 못 참겠다고 틀어버린 그 찰나, 목적했던 상황은 성취된다. 어쩜 시기와 우연은 그토록 우리를 빗겨 지나가고 또, 어처구니 없이 맞닥뜨려지는 것인지.

여리고성을 돌 때, 7 일째, 그 어떤 징조도 없었다. 13바퀴가 채워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만약, 그들이 6일만에 13바퀴를 다 돌았을지라도 여리고성은 견고히 서 있었을 것이다. 모든 것에서 시기와 우연이 결합된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시기와 우연이 있다. 이 두 가지는 함께 만족되어야 한다.

무엇인가를 위해 오래 기도하고 참고 기다리고 있는가? 한 가지 더 생각하자. 단지 오래 기다린 것만이 만족을 위한 충분조건일까? 아니다. 아직 13바퀴가 채워지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아직 7 일이 채워지지 않았을 것이다. 기억해야만 한다. 우리에게는 시기도 필요하지만 우연도 필요하다는 것을.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소망하는 바를 성취하는데 꼭 필요한 아이템이 있다면 그것은 인내이며, 포기하지 않는 것이며, 겸손한 것이다. 인내는 모든 성취의 밑거름이다. 포기는 모든 것을 불가능으로 만들어버리는 독초이다. 겸손은 인내의 뿌리이다. 겸손할 수 없다면 그 누구도 기다리지 않는다. 객기를 부리고 만다.

당신은 7일을 채워야 한다. 그 뿐만이 아니다. 당신은 13바퀴를 돌아야만 한다. 그것이 고달픈가. 그것이 너무 지독한 조건이라 생각하는가. 그러나 그 열매는 달다. 단 한 명의 희생자도 없이. 생명을 담보로 한 치열한 사투가 없이 그 견고한 성을 손아귀에 넣었다. 우리의 사투는 인내하고 기다릴 줄 모르는 불평불만의 자아와의 사투이다. 우리의 싸움은 사실 그것일 뿐이다. 우리의 싸움은 포기하는데 익숙한 나약한 자아와의 사투이다. 겸손할 줄 모르고, 들레고 따지고 들고, 객기를 부리는 하찮은 자아와의 사투이다. 그것을 극복할 때 가장 견고한 성을 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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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2011-08-31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인내가 부족한 저에게 감사한묵상입니다. 잘 보고 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