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사는_2011.08.29
(민 11:4-9, 개역) 『[4] 이스라엘 중에 섞어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가로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5]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 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6]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 [7] 만나는 깟씨와 같고 모양은 진주와 같은 것이라 [8] 백성이 두루 다니며 그것을 거두어 맷돌에 갈기도 하며 절구에 찧기도 하고 가마에 삶기도 하여 과자를 만들었으니 그 맛이 기름 섞은 과자맛 같았더라 [9] 밤에 이슬이 진에 내릴 때에 만나도 같이 내렸더라』
출애굽 때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 섞여 나온 중다한 잡족들이 있었다. 하나님의 이적을 믿고 이스라엘 민족과 더불어 나온 그들. 분명 그들도 보라빛 미래를 꿈꾸며 출애굽의 진경험을 통과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무엇이던가.
처음 구원을 받을 때 세상이 새로워 보이기까지 한다. 마치 과거의 모든 실패와 잘못과 어그러진 것들은 다 묻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만 같다. 모든 것에서 새로운 비전과 보라빛 꿈을 꾼다. 그러나 현실은 또 어떠하던가. 신앙의 광야를 걷는다.
광야와 만나. 지루한 삶의 반복. 그 가운데 이스라엘 중 섞여 사는 잡족들이 탐욕을 품었다고 한다. 주요 이슈는 식탐이었던 것 같다. 애굽에서 먹었던 고기맛을 다시는 볼 수 없었다. 오직 만나뿐.
우리의 육체 속에 아직도 섞여 사는 중다한 잡족들이 있다. 그리고 이 잡족들은 너무나 자주 탐욕에 사로잡혀 우리를 시험한다. 우리를 피곤하게 한다. 육신적인 욕구불만들을 충동한다. 육신적인 부족함에 대해 불평하고 원망하고 낙망하게 만든다.
그리고 만나는 너무나 익숙하다. 밤마다 이슬과 함께 내려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배려는 너무나 익숙하고 고맙지가 않다. 익숙함이 주는 경솔함. 그러나 만나는 얼마나 유용한 은혜였던가. 날마다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상징이며, 갈아서 먹기도 하고, 찧어서 요리할 수도 있고, 가마에 삶아서 먹을 수도 있었다. 다양한 방법으로 조리하여 필요한 양식이 되어준 만나였다. 그러나 잡족들이 탐욕을 품을 때 만나는 박한 식물에 불과했다. 매일 주시는 은혜가 은혜답지 못했다. 너무 익숙했고, 너무 지루했고, 뻔한 것에 불과했다.
우리 안에 섞여 사는 육체의 소욕이 탐심을 일으킬 때마다 우리도 곤궁에 빠지곤 한다. 얻지 못했고, 가지지 못했던 모든 것에 대한 불평과 원망. 후회와 회의감. 그리고 이미 주어진 은혜에 대한 감사함이 없는 경멸과 무시. 하나님의 은혜의 유용함을 잊어버린다.